"한양은 우리 태상왕이 창건한 땅이고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이니 오래 비워 두고 거주하지 않으면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가 아니다. 명년 겨울에는 내가 마땅히 옮겨갈 터이니
응당 궁실을 수즙(修葺)하게 해야 할 것이다."
태종 방원은 종묘사직을 환도(還都)의 명분으로 삼았다.거기에는 아버지 이성계에 대한 효에 무게 중심도 실렸다.
태종이 즉위한 직후 부왕 태조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 태조는 한양으로의 환도 여부를 물었다.
태종으로부터 한양 환도를 다짐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돌아온 뒤 신료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한양으로의 환도를 반대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개경과 한양을 주나라의 고사에 따라 양경제로 하자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태종도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잠시 주춤거렸다.
"송도는 왕씨의 예 도읍지로서 그대로 머물 수가 없는 곳인데 지금 왕이 여기에 도읍을 다시 정하게 되면
시조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태상왕인 이성계의 강경한 입장이 전해졌다.
이에 따라 태종은 이듬해인 태종 5년에 한양으로 옮겨갈 것을 의정부에 통보하고 궁실의 수리를 위해 '궁궐수보도감'을 세웠다. 종이 이와 같이 한양으로의 재천도를 결정하였으나 그의 측근 재상인 하륜은 무악으로의 천도를
다시 청하였다. 태종은 풍수지리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최측근 재상인 하륜의 제의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최종으로 결정하기 위해 태종 4년(1404) 10월, 태종은 하륜 조준 남재 권근 등과 지관들을
데리고 무악을 살펴본 뒤 한양으로 들어갔다. 이때 하륜은 줄기차게 한양 재천도를 주장했고 궁궐도
지금의 연세대 인근 모악산 아래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논란이 끝없이 이어지자
태종은 개경과 현재의 북악산 아래, 그리고 하륜이 내세우는 모악산 아래 등 3가지 안을 놓고서 동전점을 친다.
태종실록 4년 10월 6일조에는 동전점으로 환도를 결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한 뒤에, 조상의 혼백을 모신 묘당(廟堂)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꿇어앉아,
이천우에게 명하여 밥상 위에 동전을 던지게 하니, 새로 정한 서울은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 이에 임금이 한양으로 서울을
천도하기를 결정하고, 땅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향교동(鄕校洞) 동쪽 가에
이궁(離宮, 태자궁)을 짓도록 명하고 ㆍㆍㆍ”
태종은 동전을 던지는 ‘척전(擲錢)’이라는 방법으로 천도를 결정한 것은 아마도 이는 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무리하게 밀어붙이기 보다는 명분과 정당성을 내세우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자주 등장하는 인물 이천우은 원계의 둘째 아들이다.
종묘에 모신 영령의 뜻이 한양에 있다며 한양으로의 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다.
옛날 중국의 장수들이 전투에 나가기 앞서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봤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동전점은 역사가 오랜 점술이다.
소설 <역사소설 태종 방원>은 그때 모습을 그리고 있다.
태종 이방원 일행은 하산하기 시작했다. 임금 곁에 바짝 붙은 하륜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좋은 명당은 송도의 강안전(康安殿) 같은 곳이나 무악은 송도의 수창궁과 같습니다.”
강안전 터처럼 빼어난 길지는 아니나 버금가는 명당이라는 뜻이다.
산을 내려온 임금 일행은 사천(沙川)가에 자리를 마련하고 또 다시 토론이 벌어졌다.
의견을 개진하라는 왕명에 따라 소신을 말하였으나 불같은 질책이 떨어지니 모두가 하나같이 입이 얼어붙었다.
“왜 들 말이 없는가? 무악과 한양 어느 곳이 좋은가? 어서들 말하라”
호종한 신하들을 다그쳤지만 어느 누구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내가 송도에 있을 때 여러 번 가뭄과 수재의 이변이 있었으므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더니
정승 조준 이하 대신들이 한양으로 환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한양 또한 변고가 많았으므로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무악과 한양 어느 곳이 좋은가?”
군주란 신하들의 얘기를 들으려 할 때는 귀를 열어놓고 들어야 하는데 과거의 일을 들춰내며 질책하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경들이 아무 소리 안하니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이제 종묘에 들어가 송도와 한양과 무악을 고(告)하고
그 길흉을 점쳐 길한 데 따라 도읍을 정하겠다. 도읍을 정한 뒤에는 비록 재변(災變)이 있더라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점으로 결판 짓겠다는 말이다. 종묘로 이동한 태종 이방원이 제학(提學) 김첨에게 물었다.
“무슨 물건으로 점을 칠 것인가?
“종묘 안에서 척전(擲錢)할 수 없으니 시초(蓍草)로 점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척전이란 동전을 던져 점을 치는 것으로서 일명 척괘(擲卦)라 하는 돈점이다.
조상을 모시는 신성한 종묘에서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돈점을 칠 수 없다는 얘기다.
돈점은 한꺼번에 동전 셋을 던져 1개가 뒷면이 나오고 2개가 앞면이 나오면 단(單)이라 하여
작대기 하나 모양으로 표시하고 2개가 뒷면이 나오고 1개가 앞면이 나오면 탁(?)이라 하여
작대기 두개를 나란히 놓은 모양으로 표시하고 3개가 모두 뒷면이 나오면 중(重)이라 하여
○로 표시하고 3개가 모두 앞면이 나오면 순(純)이라 하여 ×로 표시하는데
세 번 던져서 하나의 괘(卦)를 만들어 길흉(吉凶)을 판단하였다.
“시초(蓍草)가 있으면 좋으련만 척전은 요사이 세상에서 하지 않는 것이므로 길흉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느냐?”
개경을 떠나올 때 시초점을 칠 것이라 예상했으면 점 도구를 준비해 왔겠지만 전혀 뜻밖이라
제학 김첨도 난감했다.
시초점이란 중국 주나라 때부터 전래되어 내려 온 점술로서 빳빳한 톱풀나무가지 50개를 준비하여
죽통에 넣고 흔들어서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 남은 49개를 두 손으로 모아 잡고 오른손과 왼손 양쪽으로 나눈다.
여기에서 오른쪽에 남은 숫자를 헤아려 음양으로 점괘를 본다. 톱풀나무가지 구하기가 어려우면
댓가지를 대체 이용하다 현재는 쌀알을 사용한다.
“점괘(占卦)의 글은 의심나는 것이 많으므로 정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알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 척전이 속된 일이라 하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중국에서도 사용했었다. 고려 태조가 도읍을 정할 때 무슨 물건으로 하였는가?”
뒷말을 없애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듯이다. 정승 조준이 답했다.
“역시 척전을 썼습니다.”
“그랬다면 지금도 척전이 좋겠다.”
조금 격에 떨어지기는 하지만 돈점으로 결정이 났다. 태종 이방원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종묘에 예를 올렸다.
조상께 예를 올린 태종 이방원은 완산군 이천우, 좌정승 조준, 대사헌 김희선, 지신사 박석명, 사간 조휴를
거느리고 묘당(廟堂)으로 들어갔다.
묘당에 향을 올리고 꿇어 앉아 이천우에게 돈을 던지라 명했다.
이성계 형 원계의 둘째 아들인 이천우이다.
이천우의 손끝에서 모든 것이 결정 나는 순간이었다. 좌우를 살피며 호흡을 가다듬은 이천우가 돈을 집어 들었다.
국가의 중대사가 자신의 손끝에서 결정 난다 하니 이천우 역시 긴장된 모습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천우의 손끝에 모아졌다. 이천우의 손을 떠난 동전이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임금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동전의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착지한 동전이 때그르 구르다 멈췄다.
한숨과 환호가 엇갈렸다. 이천우의 동전 던지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아홉 번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한숨과 환호가 이어졌다.
결과는 한양이 2길(吉) 1흉(凶)이었고 송도와 무악은 각각 2흉(凶) 1길(吉)이었다.
한양으로 결판이 난 것이다.
“한양으로 결정이 났다.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종묘를 능멸하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의 한양 선언이다.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을 선택한 임금은 환도를 차질 없이 수행하라 명하고 종묘를 빠져나와 어가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