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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봉에서의 악마와의 투쟁 - 마이클 케네디
필자: Michael Kennedy
출처: Climbing 誌, No. 150, 1995
철컥! 카힐트나 빙하 위 1000 피트 높이에 있는 포탈리지 옆에 매어 달려 있는 크램폰의 뒤꿈치 잠금 장치가 (heel-bail) 플라스틱 화(靴)에 탁 부딪치면서 나는 이 단순한 소리. 이 소리는 우리가 매일 해야만 하는 수십 가지의 기계적인 동작들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크램폰을 신는 이 평범한 행위가 하나의 이상한 상징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왜냐 하면 그것이, 가정과 안락을 제쳐놓고, 저 위의 현기증 나는 얼음 박힌 암벽의 미로를 해내고야 말겠다는 나의 지속적인 의욕의 신호를 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로 그 첫날이 끝날 때 발을 내딛는 어려움에 대해 등반가들이 자주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마운트 헌터의 노스 버트리스 상의 루트인 이 Wall of Shadows에서 어떤 것을 예상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얼어붙은 손가락들에 피가 다시 조금 돌 때의 토할 것 같은 통증, 불량한 앵커들, 불가피한 눈사태 경사 지대, 어디에선가 갑자기 끓어오르는 듯한 폭풍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어디서 비박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여러 날 동안 하루 16 시간씩 활동함에서 오는 생기 잃은 몸의 무감각함. 그저 생존을 위해 제 살을 깍아 먹듯, 너무 작은 칼로리로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오랫동안의 힘들고 지겨운 일.
아마도 그것이 문제였다. 지난 20 여 년간 등반하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말라빠진 먹을 것 몇 조각을 건져내느라고 확보 지점 바위 턱에서 쭈그린 자세로 수백 시간을 보냈고, 음식이 떨어지기 전에 구름이 걷히기를 바라면서, 냄새나는 작은 비박에서 (bivouacs) 떨면서 수십 번의 밤과 낮을 보냈으며, 차라리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 -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 있었기를 바라면서 찬바람 몰아치는 베이스 캠프에서 괴로워하며 말할 수 없이 많은 주일을 보내곤 했다. 대체로 너무 거대한 등반인 경우가 많았고, 혹은 그런 등반을 하기에는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던가 또는 체력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의 불편함, 위험, 그리고 좌절 그 자체보다는, 고난도 알파인 등반과 변함없이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고통스럽고 모순적인 감정에 관해 나는 더 걱정을 했다. 어려운 피치 선등 시의 속이 뒤틀리는 듯한 (gut-churning) 두려움과 무념 무상의 맑고 고요함. 거기에 있어야 하는 당위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드러나 있지 않은 위험들을 찾기 위해 자신의 감각 기관들의 작동을 억제하면서, 그 루트에 전념해야 하고, 지상과의 모든 관계를 내던지고, 순간에 몰입해야 하는 그러한 필요성. 그 무엇보다도, 불안스런 꿈 없는 밤들을 나는 두려워했다.
허공에서 나의 다른 발을 흔들면서, 나는 교활한 자각에 도달했다: 내가 크램폰 하나를 떨어뜨리면 우리는 내려 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 탈출 적기가 아님을 알았다. 지면과 너무 가까이 있었고 - 이 루트를 한지 겨우 하루 지났다 - 다시 등반해서 올라오기가 너무 쉬웠을 것이다. 후퇴가 참으로 무언가 획기적인 일이 (epic) 될만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상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이번 모험에서의 파트너인 그렉 차일드가, 모든 고산 등반가들이 많이 생각도 하고 의논도 하는 약간 음울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관해 가벼운 언급을 하긴 했지만, 그는 이번 프로젝트에 관한 열성이 대단하게 보였다. 헌터의 높은 곳에 있는 크랙의 희소함에 관해 약간 걱정하는 표현을 하며, 자신의 등반 철학을 그렉은 이렇게 요약했다: “내 생각에는 무언가가 우리를 막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가야하고, 그렇게 될 경우에는 다시 내려 올 수밖에 없다.”이러한 극기적인 생각이 그에게는 잘 맞았다 1986년, 그렉과 그의 두 동료들이 가셔브품 4봉의 재등을 할 때 거의 26,000 피트에서 장비 없이 비박을 하며 지냈다. 1990년에는 K2의 노스 리지를 무산소 등정했고, 트랑고 타워를 세 차례 시도하여 드디어 그 기막힌 오벨리스크에 새 루트를 완성했다. 그 기간 사이에, 그는 엘 캐피탄에서 두 개의 신 루트를 등반했고, 어려운 스포트 루트 하나를 레드포인트했으며, 그의 모험들에 관한 탁월한 글을 썼다.
내가 처음으로 그렉을 알게 된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이었고, 몇 해 동안 우리의 관계는 저자와 편집자의 관계로서, 전화, 팩스, 우편을 통해 관계가 이어졌다. 언제인가는 실제로 같이 등반해보자고 자주 말하곤 했었다. 그가 가셔브룸 제5봉을 등정한지 몇 달 지나 어메리칸 알파인 클럽 디너 모임에서 그렉과 내가 만난 시점에 이르렀을 때는, 거대한 산군에서의 나의 등반 경력이 확실하게 쇠퇴기에 들어서 있었다. 1977 년이래 나는 매년 이삼 개월은 알라스카에서 시간을 보냈고, 1985년의 아마다블람 등반 후에는 쉬는 기간을 갖기로 결정했었다. 좀더 집 가까이 있고, 일과 가족을 위해 내 에너지를 집중하고, 햇볕이 따스한 암벽에서 등반하기를 원했다.
1993년 드디어 내가 산으로 돌아올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좀 익숙한 곳, 내가 정신적인 친화감을 느끼는 산으로서, 정말로 나를 긴장시킬만한 그 어떤 것, 어떤 어려운 등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나는 원했다. 그렉은 같이 모험하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해서, 우리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알라스카 산맥은 나에게는 언제나 특별한 장소였고 - 포레이커, 헌터, 그리고 데날리에서의 나의 등반들은 내 삶에 있어 가장 폭 넓고 강력한 체험들이었다 - 북으로의 여행이 자연스러웠다. 두 가지 목표가 즉시 떠올랐다. 마운트 헌팅톤은, 비록 고도는 작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봉 중의 하나이고; 별로 등정되지 않은 그 정상을 찾아가기를 나는 오랫동안 원해 왔고, 이 산의 4000 피트 높이의 서쪽 페이스는 웜업 루트로서 적당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이 등반의 성공을 밑받침으로 한 다음, 그 후 마운트 헌터의 보다 문제점이 많은 문풀라워 버르티스로 우리가 진행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루트는 데날리 활주로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2 년 동안 단지 네 차례 등정되었을 뿐이다.1981년 먹스 스텀프와 폴 오브리가 이 문플라워의 초등을 했는데, 그 버트리스의 꼭대기까지 등반하고 정상까지는 가지 않고 그 루트를 하강했다. 그 해 5월 데날리 등반을 위해 나도 비행기편으로 그 곳을 갔고, 그들이 문플라워를 내려 온지 며칠 지나서 먹스와 내가 그의 카힐트너에 친 텐트 안에서 자리를 같이 했고, 전쟁 이야기를 나누면서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서로 상대방을 평가했다.
2년 후 우리는 공동으로 하나의 시도를 했다 -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 가셔브룸 제4봉의 서쪽 페이스의 공략이었다. 뛰어난 수준의 고산 등반은 위험한 게임이다. 그러나 일기와 여러 가지 조건들에 관한 광적일 정도의 조심성 (fanatically astute) 그리고 자기 마음 속의 여러 가지 작용에 (internal mechanics) 대한 극도의 주의를 통해, 실제로 모든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나는 항상 느껴왔었다. 나에게 있어, 먹스는, 언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밀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등반가의 한 전형적인 인물이었고, 데날리에서 1992년 가이드 하다가 크레바스에서의 추락으로 인한 그의 죽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이런 나의 철학을 산산조각 냈다. 우연, 운명, 행운이 -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 이제는 종전에 내가 인정하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큰 힘으로 보이게 되었다.
전율, 그것과 더불어 나는 그 당시 1993년 5월 알라스카로 되돌아 왔다. 집사람 줄리와 세살 난 아들 헤이든을 3 주일 동안이나 떠나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과거에는 나에게 매우 많은 것을 준 그 산들이 이제는 너무 무섭고 심지어 내게 적대적이지 않을까?우리는 5월 15일 오전 11시 토코스티나 빙하에 (the Tokostina Glacier) 날아 와서 캠프를 세웠다. 그 동안에 노스 캘로라이나 출신의 명랑한 두 명의 등반가인 제프 버튼 그리고 크리스 콜드웰이 헌팅톤의 서쪽 페이스에 있는 ‘더 네틀 쿽’ (the Nettle-Quirk) 루트의 시작 지점에 이르는 길을 깊게 쟁기로 갈 듯 길을 텄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그렉과 나는 우리의 새 친구들이 닦아 놓은 길을 고마워하며 따라 갔고, 몇 시간 지나자 그 루트의 크럭스를 이루고 있는 페이스의 중앙을 가로질러 카로 잘라낸 한 가파른 일련의 완경사지대 (ramp system) 아래에 있는 비박 장소에 도착했다.
텐트와 여분의 식량을 남겨 두고, 우리는 몇 개의 꽤 어려운, 완전한 물 얼음 피치를 ,교대로 선등하며 올랐다. 제프와 크리스는 우리보다 앞서 올라 갔고 긴 시간이 걸려도 하루만에 정상에 갔다가 그들의 비박 장소로 되돌아오기를 바라며, 비비 장비를 갖고 가지 않았다. 그들의 속공 정상 도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자, 그 완경사 구간의 꼭대기에서 (ramp) 이제 그들이 후퇴하고 있었다. 우리가 옆을 지나자, 그들은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고, 우리는 그 램프가 ‘하바드 루트’와 (the Harvard Route) 갈라지는 지점까지 계속 등반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따스하고 바람 없는 밤을 보냈다. 정상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전혀 극적인 면이 없었으며 - 구름 한 점 없었다 -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그날 오후와 저녁 시간 내내 하강하여 그 램프의 아래에 이르렀다. 이 지점에서, 그 페이스 하단 위의 위험할 정도로 부드러운 눈의 상태로 인해 우리는 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날 아침 9시까지는 캠프에 돌아왔는데, 집을 떠난 지 겨우 닷새 만이었다.
헌팅톤 등반은 오랫동안 잃었던 친구와 다시 교제하는 것과 같았다. 그렉과 나는 하나의 팀으로서 잘 활동했다. 마치 둘이 처음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항시 같이 등반해왔던 것 같았다. 그 무엇보다도, 그 등반을 할 때 나는 마음이 편했다.
5월 19일에 카힐트나 빙하로 날아왔고 문플라워 버트리스를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스키를 타고 올라갔다. 그 루트의 생김새를 (features) - the Twin Runnels, the Prow, Tamara's Traverse, the Shaft, the Vision - 조각 조각 연결해보는 것이 (piecing together) 재미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문풀라워 왼쪽의 단 한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그 암벽에 계속 이끌렸다. 우회하는 암벽 피치들로 엉성하게 연결되는 꾸불꾸불한 박빙과 가파른 경사지로 이루어진 분명치 않은 하나의 등반 라인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 루트는 적어도 한 구간에서는 상당한 인공 등반을 해야 하리라고 보였다. 먹스가 죽었던 날자에, 우리는 그 쪽에서의 쉬운 피치 두 개를 등반했다. 그러나 그것을 오를 가능성이 50 퍼센트 정도라도 되려면, 좀 더 많은 장비와 비박용 포탈리지를 필요로 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문플라워로 주의를 되돌렸다.
이제까지 좋았던 날씨가, 공항 활주로를 폐쇄시키고 또 고맙게도 우리로 하여금 캠프에서의 2 주일간의 휴식을 갖게 만들었다. 그 후, 큰 희망을 갖고 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 등반은 인연이 없었다. 그 첫날이 끝날 때, 내가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우리는 1000 피트도 못 올라가는 지점에서 되돌아섰다. 날씨가 좋았고 음식과 연료도 충분했으므로, 그렉은 분명히 계속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 본능적인 감각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나는 악마들과 투쟁했다. 선등하는 동안에는 아주 느낌이 좋긴 했으나, 후등자 확보 지점에 있을 때마다 나의 생각은 온통 내려가야 하겠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큰 루트를 시작할 때 수십 차례나 내가 느꼈던 그런 낮은 수준의 불안감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등반의 리듬 속으로 들어가면서 점차 사라지는 일종의 속이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 것은 지속적이며 결국에는 모든 것을 에워싸고 마는 두려움으로서 전에 한두 차례 내가 느꼈던 것이었다. 주의를 기울여야만 다른 그 어떤 것이었다.
아마 기상 조건이 너무 따듯했거나 - 얼음이 우리의 예상보다 얇아서, 물도 흐르는 경우가 꽤 있었고, 몇 개의 피치를 올라가는 동안 떨어지는 눈덩어리 때문에 내가 나가떨어질 뻔했고 - 또는 아마도 그 루트 위의 보다 높은 곳에서 어떤 무서운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저 내가 이 문플라워를 위한 준비가 아직 안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 당시의 그것이 아무리 비논리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나의 직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길하다는 나의 예감에 대해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렉은 하강에 동의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가 확인한 그 신 루트에 돌아 올 계획을 짰다.
문플라워에서의 우리의 그 실패가 힘과 겸손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었기는 하나, 헌팅톤은 귀한 선물이었으며, 오랫동안 내가 잃어 버리고 있었던 그 평온하고 가벼운 마음이 얼마 동안 나를 채워 주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이 내가 이 수직 세계의 단순성, 뒤로 물러설 길이 없는 등반을 4일 동안 하는 그 강렬함을 갈망해왔다는 점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우리가 돌아갈 때 나는 42세가 되어, 일과 가정의 일상 생활에 더욱 더 얽매이게 된다. 열정이 정말 문제가 될 때 내가 나 자신을 넘어서 밀어 부칠 열정이 있을 것인가? 아마 이 헌터의 노스 버트리스가 그 답을 주게 될른지도 모른다.1994년 5월 3일, 그렉과 나는 알라스카 산군의 중심점인 (epicenter) 카힐트나 빙하 비행장으로 돌아 왔다. 긴 시간의 공략을 위한 준비를 잘 갖추고. 우리보다 먼저 온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우리가 클라이머들이 모이는 ‘게토’라고 (the Ghetto) 부르는 곳에 자리잡았다. 장소상으로 딱히 정해졌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심리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이 ‘게토’는 마운트 헌터의 노스 버트리스에서, 실제이던 상상이던 간에, 여러 가지 루트를 노획하고자 하는, 항상 바뀌는 일군의 악당들이 (miscreants) 머물고 있었다. 1994의 여름에 그 비행장을 통과하게 될 1400 여명의 데날리 희망자들과는 달리, 우리 중 아무도 과연 우리들이 루트 상에 이를 수 있을는지 조차 - 올라가는 것은 그만 두더라도 - 알 지 못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느끼는 유대감의 일부이었다.
문플라워에 눈독을 들이는 팀이 적어도 네 개는 되었고, 그들 모두 상당한 능력자들이었다. 몬타나 출신으로서 카나다 록키 산맥에서의 빙벽 귀재 조우 죠셉슨과 3년 간 연속으로 문플라워를 시도한 바 있는 스티브 마스치올리가 제일 선두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헌팅톤에서 온 우리의 친구들인 제프와 크리스가 있었다. 그 보다 후에 뉴 팔츠의 토박이인 마이크 디미트리와 브렛 월프, 그리고 솔트 레이크 시티의 등반가인 빌 벨코트와 뉴 햄프셔 빙벽 전문가 랜디 랙클리프가 관찰을 위해 날아 왔다. 루스 (Ruth) 협곡 여행할 때 자신의 파트너가 마지막 순간에 탈출한 뒤에, 알라스카에 혼자 온 카나다 출신의 켄 와리, 그리고 우리 모두를 비공식적으로 가족으로 받아준 베이스 캠프 무선 교환수 애니 두켓이 소중한 지원자 역할을 해주었다.
오직 빌과 랜디 만이 결국 문플라워에서 성공했는데, 이들은 6월 1일에서 7일 사이에 효율적으로 그리고 무사히 하산했다. 조우와 스티브는 세 번이나 합동으로 시도했는데, 그 번째 시도에서 15 피치 위의 첫 번째 아이스 밴드의 (ice band)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에 반해, 제프와 크리스는 ‘트윈 러넬스’에서 (the Twin Runnels) 후퇴하고, ‘토코스티나’로 날아가 헌팅톤의 웨스트 페이스 상에 있는 ‘하바드 루트’를 (the Harvad Route) 3일 만에 등정했다.
그러나, 이 ‘게토’의 지도급 인물은 (grand masters) 미네소타 태생 등반가로서 거의 나만큼 (우리가 만난 적은 없으나) 긴 세월의 경험이 있는 스콧 백스와, ‘닥터 툼’ (Dr. Doom) 마크 트와이트였다. 이들은 지난 4월에 그렉과 내가 탐내고 있는 동일한 루트를 포함하는 야심에 찬 공략 대상 리스트와 수주일 분의 음식을 갖고 카힐트나 지역에 도착했다. 보다 더 나쁜 점은, 이들이 탁월한 능력을 가졌고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실제로 그 루트를 끝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보다 몇 개월 전, 스콧과 마크는 마운트 헌터의 노스 버트리스 상의 새로운 루트들, 마운트 포레이커의 남쪽 페이스, 데날리의 동남쪽 페이스 등을 한 시즌에 모두 등반한다는 계획을 구상했었다. 이번 겨울 초에 마크가 내게 그들의 의도를 말한 적이 있었고, 내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양심적으로 내 사무실 벽에 걸린 8x10 크기의 노스 버트리스 사진에서 그의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렉과 내가 세밀하게 관찰한 (펜으로 표시했음) 그 등반 선은 이런 종류의 것에 대한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눈에 뜨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마크가 친구이긴 하나, 내가 이렇게 한 것은 그에 대한 이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그의 의도를 재어보자는 뜻이었다. 그와 스콧은 원하기만 하면 노스 버트리스 상의 어디든지 빨리 갈 수 있었으나, 그들의 산토끼 같은 초경량 스타일은 이 루트에서는 맞지 않음을 나는 꽤 믿고 있었다. 어린이를 위한 우화 속의 거북이와 같이, 그렉과 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the slow-and-steady) 하는 방법을 취했고, 그 루트를 벽 등반 개념으로 접근할 계획을 했다. 마크와 스콧이 그 루트에 먼저 착수했다가, 그들이 실패하면 우리는 그들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어느 정도 수집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곳에 오르면. . . . . 뭐, 내가 또 한번 판단 착오를 하는 셈이 되는 것이고, 또한 나는 지나친 소유욕으로 업을 짓기를 (karmic debits) 원하지도 않았다.
그 때 알라스카에 도착해서 날씨가 엄청나게 나쁨을 알게 되자 안심이 되었다; 마크와 스콧이 단 하나의 루트로 오르지 않았고, 카힐트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e 짐 오코넥의 세스나 185 기(機)에서 식량과 장비가 든 여섯 개의 무거운 더블 백을 끌어내고 있다가, 빙하 위에서 스콧과 마주쳤을 때, “당신들이 여기 있게 된 것을 신에게 감사드리시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나타날 때까지 이 루트를 우리가 하지 않았을 경우, 당신들이 그것을 하도록 하겠다고 마크와 내가 합의를 보았습니다.” 며칠 전 그들은 거의 끊임없이 부는 폭풍이 잠시 멈춘 동안 그 루트를 시도했었으나, 처음 여섯 개의 피치를 등반한 후 후퇴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한 말로 보아, 이제 우리는 그들의 시작 지점을 버리고 다른 곳을 찾음으로서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렉과 나는 즉시 일에 착수하여, 등반 시작 지점에서 겨우 1/4 마일 떨어진 그 빙하의 중간 지점의 묻을 곳까지 (cache) 많은 장비를 날랐다. 우리를 맞이할 노고를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위치 관측경을 (spotting scope) 갖고 갔고, 그 벽의 비밀을 간파하고자 그것을 세밀히 들여다보며 여러 시간을 보냈다.관측경이 (scope) 첫 번째 록 밴드를 갈라놓는 얕은 크랙을 드러냈고, 그 다음에는 얼음으로 채워진 아취 속으로 가는 왼쪽 방향의 트래버스를 보여 주었고, 이어서 너른 박빙 지대가 드러났다. 의심스럽게 보이는 믹스 등반 지대가 우향 경사지대와 400 피트 암벽으로 이어졌다. 믹스 등반 구간이 조금 이어진 다음에는, 마지막 록 밴드에서 그 루트와 문플라워가 만나게 된다. 그 후 북동 리쥐를 지나 정상으로 2000 피트를 힘들여 나아간다.
우리가 거기에 가보기 전에는 풀을 수 없는 의문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그 루트의 형태가 자리잡았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강점에 맞게 활동하기로 동의했다; 그렉은 광범위한 벽 경험이 있으므로 어려운 인공 등반 피취를 선등하고, 나는 미끄러운 크럭스 구간을 하기로 했다. 이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날씨였다.
한편, 마크와 스콧은 문플라워 우측에 있는 새 루트의 등반을 시작했다. 그것은 4개의 주요 록 밴드를 거치면서 일련의 얼음 수로와 바위 턱을 (ice runnels and ledges) 따라가는 루트이었다. 우리는 관측경으로 (scope) 그들을 관찰했는데, 그들의 등반은 여러 곳에서 대단히 어렵게 보였다. 후일 마크는 한 피치에 대해 “전부가 미치게 만드는 믹스 등반이고, 둥그렇게 된 에쥐에서의 드라이툴링 (drytooling), 확보 불량, 좋지 못한 빌레이, 그리고 집에 있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것 같이 생긴 얼음”이라고 묘사했다. 그들의 속도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2500 피트를 16 시간 반만에 등반했고, 비박을 했고, 마지막 록 밴드까지 계속 등반했고 - 이것은 그 루트에서 가장 어려운 피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불량한 얼음 상의 두 개의 95 도 각도의 크럭스가 있었다 - 그 다음에 정상의 남쪽 바로 아래에 있는 평평한 곳을 돌아가며 위쪽으로 트래버스했다. 정상으로 쉽게 등반하는 길을 버리고, 마크와 스콧은, 스티브 마시올리가 (Steve Mascioli) 알려준 루트에 관한 정보의 도움을 받아가며, 폭풍과 화이트아웃 일기 상태에서 웨스트 리쥐를 하향 등반했다.
5월 17일 오후 11시, 켄, 조우, 그렉, 그리고 나는 웨스트 리지의 어두운 곳을 성큼 성큼 가는 두 마리의 젖고 지저분한 산토끼를 만났다. 이름도 그에 걸맞게 "Deprivation" (궁핍) 이라고 지은 그들의 루트는 왕복 72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저기서 길을 잃었고, 당신들이 도와서 우리가 돌아왔다” 라고 마크가 나중에 말했다. 눈이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마치 여름 방학을 맞아 해방된 학동들처럼 즐겁게 잡담하며 우리는 활주로까지 스키 타고 돌아왔다.
마크와 스콧의 등반이 끝난 후 일련의 폭풍이 닥쳤고 그 때문에 우리는 캠프에 갇혀 버렸다. 구름이 몰려올 때마다 거대한 눈보라의 파도가 노스 버트리스의 모습을 지워버렸는데, '게토‘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 대참사가 일어나리라는 추측을 - 그리고 정도의 차는 있으나 체념, 고뇌, 회의, 자기 과시, 유모어, 그리고 두려움 등등 - 많이 하게 만들었다.폭풍이 계속되는 날씨 때문에 생기는 이 무력감을 상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시간을 보내는 가장 흔한 방법을 설명하면서, “졸릴 때까지 먹고, 배고플 때까지 잔다” 라고 그렉은 말했다. 그밖의 다른, 인기 있는 방법들로는, 장비 만지작거리기, 빙하 위에서 이리 저리 스키 타기, 깨달음의 희망을 갖고 관측경 속을 응시하기 등이다.
켄은, 광적인 에너지가 발동하여, 어느 날 넓은 설동을 (snowcave) 팠고, 마크의 주도 하에 잔뜩 칭찬해 주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 곳으로 우리가 몰려갔다. 잭 대니얼스, 호세 쿠에르보, 듀와스, 그리고 다른 술 취한 사람들이 쏟아내는 어두운 음악, 심사가 뒤틀려 내뱉는 독백, 그리고 미친 듯한 웃음이 우리가 잠 잘 시간을 훨씬 넘기게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도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 잠시 날씨가 좋아지자 액체 보충과 피자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고, 그 “절망의 구덩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술이 깨자, 우리 대부분이 인내력 근육을 가동했다. 초자연적인 고요가 캠프 위에 머물렀다. 우리가 지도에 정밀하게 표시했던 등반에 대해, 특정 부분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나는 생각해보았다. 조급하거나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 우리가 그 루트에 오를 수 있을 것임을 나는 알았고, 일단 오른 후에는, 우리는 되돌아서지 않을 것이었다.
그 여행이 제대로 될 것이라는 그 어떤 감이 있었다. 마크와 스콧의 성공도 자극이 되었지만, 그 보다는, 그것이 우리가 도착한 이래 점점 커지고 있던 그 느낌을 굳건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 그렉과 나뿐 아니라 ‘게토’ 내의 우리 모두 사이에, 하나의 미묘하고, 거의 전기처럼 강력한 단결과 신뢰의 분위기이었다.
5월 24일, 우리가 깨어보니 신설(新雪)이 한자 반이나 쌓여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눈부셨고 - 이번 여행기간 중의 어느 때보다도 더 맑았으며 - 우리는 마지막 준비를 하며 따스한 오후를 보냈다.
아침 7시에 캠프를 떠나 맑고 투명한 추위 속에 스키를 타고 노스 버트리스의 아래로 향했다. 오후 이른 시간까지 우리는 우리의 고정 라인을 쥬마로 올랐고 (jugged), 로프를 분류하고, 풀었다 (cast off). 우리는 즐거워 할 만 했다: 문제가 될 수도 있었던 두 개의 피치를 이미 지났고, 날씨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더 이상 캠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리석을 정도로 좋았다. 지루한 두 개의 믹스 피취를 지나니 안전한 오버행에 이르렀다. 그 오버행 아래에 포탈리지를 고정했다. 그러나 먼저 나는 우리가 '써그 앨리‘라고 (Thug Alley) 명명한 그 넓은 박빙과 씨름해야 했다.이 피취는 멀리서 볼 때 어렵게 보였고 더 가까운 곳에서 보아도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나의 불안을 묻어 둔 채, 그 아래쪽에 있는, 스티로폴로 만든 가파른 양파 껍질 위로, 얼음의 두께와 견고성에 따라 피크와 애즈를 (pick and adze) 번갈아 쓰면서, 이 얇은 베니아 판 얼음을 부시지 않기 위해 나의 크램폰에 섬세하게 체중을 실어 가며, 아이스 액스를 걸면서 올라갔다. (hooked my way up) 40 피트 오르니 각도가 약간 완만해졌고, 얼음 상태가 타격하기 대단히 좋게 되었다.(gloriously plastic) 도중에 몇 개의 아이스 스크루를 설치하면서 매달려 확보를 보는 지점까지 200 피트를 나아갔다. 이제까지 내가 해본 것 중 이번 것이 가장 멋진 싱글 피취들 중의 하나였다.
'써그 앨리‘는 이 루트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 중의 하나였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상해 볼 때 이 곳은 빙벽 등반을 하기에는 얼음이 너무 얇을 수 있었고, 그런 경우 우리는 피톤을 박아야 (nail)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었다. 포탈리지에 편히 앉아, 적어도 지금 당장은, 스프, 치즈, 그리고 따뜻한 초코렛 음료를 즐기면서 우리의 자신감이 용솟음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나의 생각이 어둡게 내면으로 향했고, 야심과 두려움이라는 낯익은 악마들과 씨름하였고, 이 벽이 내게 요구할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준비 태세를 내가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도망가고픈 충동을 거의 억누르기 어려웠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술수를 상상해보았다: 크램폰 하나를 떨어뜨린다, 버너를 떨어트린다. 로프를 떨어뜨린다, 장비 세트 걸이를 떨어트린다. 그렉도 나처럼 말은 안 했으나, 역시 뷸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갓 시작된 경력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고된 시련을 위한 준비치고는 너무나도 책상머리 타입의 것이었고, (all-too-sedentary) 건초염(腱鞘炎)에 걸려 몇 개월 동안 등반을 하지 못했었다. 알라스카로 가기 몇 주 전 그는 그 염증의 완화를 위해 팔꿈치에 코티손 주사를 맞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정말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라고 그렉이 후에 나에게 말했다. “나의 건(腱)들이 끊어진 신발 끈처럼 전혀 버텨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취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써그 앨리‘의 꼭대기까지 우리 자신과 짐들을 끌고 올라 갔고, 그 다음에 그렉이 차겁고 잘 박히는 빙벽을 (plastic) 프론트 포인트 하여 그 루트의 다음 장애물 지점까지 올랐다. 좁고 얼음으로 채워진 그 침니가 눈 버섯이 주렁 주렁 달려 있는 루프 지점에서 끝났다. 오른쪽에는 급경사이고 거의 들어가고 나온 데가 없어 인공 등반을 요하는 암벽이 있었고, 왼쪽에는 그 루프에 약간 갈라진 곳이 있어 그 곳을 통해 얇게 얼어붙은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슬랩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얼음 쪽으로 가는 것이 인공보다는 더 빨리 갈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했고, 그에 따라 내가 그 침니를 프론트 포인트 하여 오르고, 화강암에 대고 끽끽하는 크램폰 소리를 내면서. 왼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핀 모양의 (pin) 좋은 홀드가 하나가 있어 그 루프를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는데, 그 다음에 나는 난처하게 되고 말았다. 그 슬랩 위에 내 몸을 세울 수는 있었으나, 그 얼음이 너무 얇아서 거의 쓸모가 없었고, 그 핀은 루프 아래 15 피트 거리에 있었으며,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영원히 내가 찾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밑으로 등반하여 망연자실한 느낌을 가진 채 그 핀에 매달려 있었다. 그렉이 갈 수 있냐고 외쳤다. 나는 그 벽을 위로 쳐다보았고 - 안 될 것 같았다, 인공으로 해도 - 다시 한번 시도해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극도로 신경을 고문하는,그리고 간신히 밸런스를 유지하는 등반을 하여 25 피트를 오르고 난 다음, 나는 드디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위쪽의 각도가 점차 조금씩 증가했고, 15 피트 구간에서는 나의 빙벽 장비에 완전히 체중을 실어야 만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닿을 수 있는 범위 이내의 모든 얼음판 조각을 살펴보았다; 1/8 인치나 1/4 인치가 넘으면 피크가 얼음 바닥에 닿았다. 당겨서 올라갈 만한 실질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나의 왼발 크램폰이 그 슬랩 아래 6 인치 지점을 문지르다가, 신만이 알 수 있는 그 무언가에 닿았고 내 심장 박동도 정상 궤도로 돌아 왔다. 나는 50 피트 추락 거리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는 정말 큰 실수를 했어” 하고 나는 독백을 했다.
그 25 피트를 내가 어떻게 내려 왔는지를 몰랐다. 너무 두려워서 토할 것 같았다. 루프 아래의 그 양호한 핀(pin)으로 내려왔는데, 나 자신에 대해 실망했고 확보 지점까지 왔을 때 나는 홀백을 집어던지고 집으로 가버리려고 했다. 그렉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일이 우리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고 말하면서 그는 장비를 챙겼고, ”오른쪽으로 가면 인공으로 할 자신이 있다“고 했다.
세 시간 동안에 걸쳐, 거꾸로 설치한 여러 개의 나이프 블레이드에 묶은 슬링을 연결하고, 한 개의 리베트를 박고, 얼음이 쐐기처럼 박혀 있는 크랙에 설치한 스펙터로부터의 (a Spectre) 마지막 인공 등반, 그리고 나중의 50 피트 짜리 급경사 얼음 등반을 하여, 그렉이 ‘에니그마’ (the Enigma) 꼭대기의 또 하나의 매달려 확보 보는 지점에 체중을 싣고 매달렸다. 그 때까지는 나도 짜증을 그만 두고, 그 피치의 세컨딩을 하면서 그렉의 기술과 끈기에 감탄했다.
불안스런 비박 후에, 좀 더 계속된 믹스 등반, 비틀기와 돌기, 에트리에 (etrier) 드나들기 등을 하여 ‘크리스털 하이웨이’의 (the Crystal Highway) 밑에까지 왔다. 이 루트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경사지로서 한번의 스윙으로 완벽하게 박히는 스티로폴 같은 구간이 로프 길이 세 번만큼 이어졌다. 이제 우리는 기가 막힌 위치에 있게 되었다. 빙하 위 2000 피트 높이에서 번쩍이는 얼음 거울에 매달려 있는데, 우리 왼편에는 매끈한 표면의, 황금빛 화강암의 벽이 있고 또 오른편에는 ‘머쉬룸 필드‘의 (the Mushroom Fields) 기괴한 모양의 구근(球根) 형태를 가진 눈 지대가 있었다. 보기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은 튀어나온 벽이 머리 위로 기울어져 서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상당한 인공 등반을 요할 것을 알았다; 결국 그곳이 이 루트의 크럭스임이 증명되었다. 그 날 밤 포탈리지 속으로 기어들면서, 그것에 관한 생각을 기꺼이 하지 않았다.그렉에게는 아침이 너무나도 빨리 왔다. 그도 내려 갈만한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으면 환영했으리라고 나도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가 장비를 떨어트리지 못했다. 나는 하니스를 착용하고 파카를 입고서, 관람자가 됐음을 다시 한번 행복하게 생각했다. 텐션을 받으며 하는 거북한 트래버스, 루프에서의 회전하기 (swing), 바닥이 드러나는 크랙에서의 나이프 블레이드 때려 박기 그리고 얼어있는 바위 플레이크에서의 (flake) 스카이 훅 설치 등등을 하며, 그가 톡톡 소리를 내며 침착하게 위로 올라갔다. 12 시간이 지나고 200 피트 피치 두 개를 한 후, 그가 어려운 ‘섬훼어엘스 월’을 (the Somewhere Else Wall) - 마치 “내가 다른 어떤 곳에 있기를 바라노라‘ 하는 뜻임 - 해결했고, 우리는 등반한지 네 번째 밤을 맞게 되었다.
드디어 내려가고자 하는 생각이 항시 내 마음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지 않게 될 정도의 침착성과 확신을 갖는 지점에 드디어 내가 이르렀다. 이제는 후퇴가 불쾌한 선택이 될 정도로 이미 충분히 높이 와 있었고, 위로 오르는 탁력이 붙어 피로를 극복할 수 있었다. 문플라워와 만나게 되는 세 번째의 아이스 밴드에 우리가 가까이 오게 되었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그 위의 비교적 낮은 각도의 경사 지대가 자석처럼 우리를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계속되는 추위가 우리를 지치게 했고 - 오후 만 되면 그 벽에는 겨우 몇 시간 동안만 해가 약하게 비출 뿐이다 - 하루 16 시간씩의 그 과로를 우리가 느끼고 있었다. 추한 생김새의, 눈이 끼어있는 오버행이 그 마지막에 있는 작은 폭포의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빙하에서 찾아냈던 믹스 등반 탈출로 쪽을 향해 왼쪽으로 트래버스 했다. 나는 지치기는 했으나 원기는 있었다. 지금의 이 피치, 이번의 등반, 바로 이 순간에 나는 완전히 탈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극히 조금씩 올라가며, 지난 25 년간 내가 배워 왔던 모든 요령과 내가 고안해낸 몇 가지 트릭을 사용했다. 스테밍, 재밍, 핀칭, 동전 두께 에쥐에서 한 개의 프론트 포인트 위에서의 흔들림, 장갑 벗기와 끼기, 모서리 크랙에서의 아이스 툴 겹쳐 놓기, 쐐기처럼 박힌 돌에 캠 작용을 하게 배치한 애즈 (adze), 크랙 속에 쐐기처럼 박은 피크 등으로 한 시간을 보낸 후, 또 다른 고정 확보물 세트에 - 21 번째 피치임 -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뒤로 기대자, 아드레날린이 지지직 하는 전기 소리를 내며 썰물처럼 빠지면서 얼어붙은 손으로 피가 다시 공급되도록 했다.
우리가 세 번째 아이스 밴드를 향해 비교적 쉬운 믹스 지대를 등반하고, 마지막 바위 밑의 매달려 비박하는 지점까지 수백 피트를 터벅터벅 가고 있는데, 안개가 우리 주위에서 소용돌이 쳤다. 노스 버트리스 왼쪽을 하루 동안 더 어렵게 등반을 해야 하기는 하나, 최악은 이미 지났고, 우리는 정상으로 향하는 그리고 그것을 넘어가는 길고 지루한 행군을 위해, 우리의 벽 장비를 머지 않아 버릴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구름은 뭔가 흉조를 보였고, 우리가 포탈리지로 기어 들어간 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큰 눈사태가 처음 우리 위를 쓸고 지나갈 때 우리는 놀랐다. 그러나 나중에는 플라이를 북처럼 두드리는 눈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 구름이 여전히 산을 뒤덮고 있었고, 꾸준하게 눈이 쌓이고 있었다. 나는 줄리와 헤이든의 사진을 뚫어져라 하고 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수없이 생각하고 또 그들과의 피부 접촉을 그리워하며. 내가 사진을 꺼낼 때마다 걱정을 했다고, 그렉은 나중에 내게 말했다 - “이 미친 짓을 그만 두자고 당신이 말하고 또 내려가자고 주장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라고 -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런 집 생각이 나의 타오르는 상상을 진정시켰고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이론 관 속에 갖힌 채, 우리는 먹고 쉬고 하면서 날을 보냈다. 나는 “한산(寒山)”이라는 책 한 권을 갖고 왔었다. 이것은 먹스의 애독서 중의 하나로서 한산이라는 중국 시인의 관조에 (musings) 관한 작은 책이다. 이 오래 된 시들이 우리의 상황에 특히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나 음식 같은 것에는 잠시만 빠져 있을 수 있을 뿐이고, 슬그머니 사적인 명상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아침. 조용하다. 고요하고 너무나 추움. 나는 지퍼에서 얼음을 제거하고 포탈리지 플라이의 얼어붙은 나이론을 도로 벗겼다. 데날리는 멀리서 빛을 발하며 서 있고, 구름 한 점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하는 일마다 힘들어하며, 우리는 느릿느릿 우리 자신을 무덤에서 꺼내고 최소한의 것만을 배낭에 꾸렸다: 침낭, 패드, 이틀간의 식량과 연료, 줄일 대로 줄인 장비 등등. 그 밖의 것은 모두 홀 백에 들어갔고,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빙하에 제물로 바쳐졌다. 포탈리지는 해체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버렸다. 그것을 포기하고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제 후퇴는 없다.빙벽 등반에는 쉬운 것과 (올라갈 수 있는 것) 필사적인 것 (차라리 시도하지 않으려는 것) 사이의 중간 지대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북동 릿지로 가는 그 빙원과 (icefield) 우리 사이의 마지막 장애물인, 문플라워에 이르는 “비블러 다시 오다라는 출구‘는 (the Bibler Come Again Exit) 어렵게 보였다. 나는 그것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될 수 있으면 애니의 오두막에서 파스타나 먹고 맥주나 마시면서 나는 앉아있고 싶었다. 나는 이 산을 벗어나 있기를 원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실제로 그 ‘컴 어겐’ 루트를 즐겼다. 꼭대기 바로 밑에서 나의 에너지도 그리고 로프도 소진되어, 할 수 없이 그렉이 그 마지막 오프위드를 (offwidth) 신음 소리를 내며 올라오게 되었다. 6 인치의 눈가루가 덮인, 부서지기 쉬운 청빙으로 이루어진 5개의 피치가 이어졌다. 우리의 배낭이 가볍기는 했으나, 둘 다 힘이 빠졌다. 북동 릿쥐 산꼭대기 (crest) 바로 밑의 확보지점에 쓰러지듯 앉던 그렉이 결국 배낭을 잃어버렸다. 지친 눈으로 그렉이 “머리를 부딪쳤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버트리스의 위에 있는 코니스 (cornice) 밑의 완벽한 자연 상태의 독수리 보금자리로 그를 당겨 올렸다. 버너를 달랠 수 있는 만큼 달래어 만든 최대한의 많은 뜨거운 차로 우리의 쇠약한 에너지를 회복하는 일에 착수했다. 한 시간 동안의 해가 우리의 사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젖은 침낭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알래스카의 여명 속에서 잠시 동안의 밤을 - 그 루트 상에서 여섯 번째임 -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우리가 그 리쥐 위로 불쑥 올라서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에 관해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태양은 축복이었으나, 그 산의 위 부분은 두껍게 눈이 덮여 있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맥 풀린 채 터벅터벅 걷다가, 나는 그만 에쥐에 너무 가까이 갔고, 커다란 눈덩어리를 부서트려 그것이 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펄쩍 뒤로 뛰며, 나는 “잠을 깨워주는 전화” (alarm call) 라고 중얼거렸고, 다시 힘든 노동을 계속했다.
우리는 자주 바꿔가며 선등을 했다. 그러나 무릎 깊이 때로는 허리 깊이의 분설(粉雪)로 인해 우리는 거의 기어가는 정도였다. 내 앞에서 한 차례 심한 고생을 해 본 후 “이건 영혼 파괴 작업이야”라고 그렉은 한숨을 내뿜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으나, 다른 선택이 있기가 어려웠다. 그 코니스를 지난지 12 시간 지나, 우리는 마운트 헌터의 고원에 비틀거리며 도착했다. 해발 14,570 피트이고 우리들의 보금자리에서 수마일 거리였다. 우리가 산에서 보낸 여덟 번 째 날이었다.
우리는 배낭을 떨어뜨리고, 껴안고, 경치에 감탄했다. 천지가 고요했고, 눈 닿는 범위 이내에는 구름도 없었다. 나는 줄리와 헤이든의 사진을 나의 갈라진 입술에 대었다. 우리가 도착한지 몇 분지나, ‘덕 그리팅“의 (Dough Greeting) 파이롯들 중의 한 명이 옆으로 날아가며 우리에게 날개를 기울여 인사를 보냈다. 저 아래 캠프에서는, 마크와 스콧과 애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했다. 그 생각을 하니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무릎까지 차는 눈이 또 다시 정상의 고원을 가로질러 가는 하산 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차고 있는 신발 바닥을 쿵쿵거리기도 하고, 따스한 오후의 태양을 활용하여 쉬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다. 세 시간 후 추운 황혼이 왔고, 그렉과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아침에, 4 마일에 이르는 헌터의 웨스트 릿지 그리고 6000 피트에 달하는 그 고도 차이가 여전히 우리와 카힐트나 빙하 활주로 사이를 가르고 있었고, 그 날 중에 산에서 벗어나려면 자동차를 타야만 함을 알았다. 오전 7 시의 추위는 면도칼 같아, 뼛속까지 에이는 듯 했다. 아무리 발을 따스하게 만들려고 노력해도 대여섯 시간 동안 아무 감각이 없었다. 더 나쁜 점은, 내가 완전히 기가 빠졌고, 크레바스와 코니스와 눈사태에 대해 겁먹고, 내려가는 올바른 길을 찾을 자신이 없어졌다. 그렉이 앞장을 서서, 그 눈의 바다를 쇄빙선처럼 갈랐다.
우리는 각자 눈이나 크레바스 속으로 한쪽 발을 몇 번 빠트린 적은 있었으나, 운 좋게도 더 이상의 나쁜 일은 없었다. 오후 늦게 우리는 북서쪽 분지로 (basin) 갈 때 통과하는 가파른 협곡으로 (gully) 하강했는데, 이것은 웨스트 릿지 바닥에서의 1 마일 반을 (그리고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약간의 등반을 포함함) 피할 수 있는 변형 루트이다.
기상 상태는 열대였다. 축축하고 지저분한 눈이 우리의 발에 달라붙었고 거대한 세락들이 (seracs) 삼면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추파를 던졌다. 우리는 눈사태 잔해의 거대한 더미를 뛰어 내려갔다. 가장 위험스런 경사를 이룬 곳은 이미 미끄러져 내려갔다고 우리의 어리석은 짓을 합리화하기“까지 하면서.
떨어진지 얼마 안 되는 얼음 덩어리들이 있는 - 어떤 것은 냉장고 크기 정도 되는 것도 있었는데 - 미식 축구 경기장 크기의 설원을 종종 걸음으로 뛰어 지났다. 몇 군데에서는 얼마 전에 난 사태로 인해 우리가 따라 가고 있는 길을 쓸어 버렸다. 이 길은 며칠 전 웨스트 리쥐를 등반한 콜로라도 출신의 그 네 사람이 남긴 것이었다. 마운트 헌터를 오르는 소위 “노멀” 루트로서의 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노스웨스트 베이슨은 (basin) 굉장히 위험한 장소이다.
두 개의 작은 사람 모습이 그때부터 몇 시간 전에 그 루트의 밑 가까이 있는 버려진 캠프까지 스키를 타고 올라 와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의 곡예를 보며 실컷 웃고 있었으리라. ‘메인’ (main) 빙하까지의 마지막 수백 야드를 비틀거리며 내려가는데, 그들이 와! 하는 환성과 고함을 지르며 우리를 향해 뛰어 왔다. "뭐 좀 먹었어요?“ 하고 우리의 지친 얼굴을 들여다보며 스콧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와 마크가 우리의 배낭을 받고 간절히 원하고 있는 우리의 손에 뜨거운 차를 디밀었다.따스한 저녁 햇살 속에 우리의 등반에 관해 이야기하며 앉아 있자. 지난 9일 간의 긴장이 점차 썰물 빠지듯 했다. 그렉과 나는 알라스카에 온 소기의 목적을 찾았다: 이 월 어브 새도우는 우리 둘의 경력을 합산한 지난 반세기 동안의 등반 중 가장 어려운 루트였다. 나는 이 느낌이 곧 사라지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 격렬함도 과거지사이고, 그 체험도 이미 기억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그리고 우리는 집으로 갔다.
마이클 케네디는 클라이밍 지의 편집인이자 발행인이다.
shlee 抄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