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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리풀사진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리풀
동해로 가는 길
-양평에서 설악까지 On The Road 10.8.9-8.12
인간이든 동물이든 움직이는 생명체에겐 본능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아무런 구속을 받지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다니고 싶고 자연 속에 그냥 던져지고 싶은 바람, 그건 스스로를 찾고자 하는 내 안의 진정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도 그동안 너무 얽매인 삶을 살아왔다. 짜여진 일정과 계획, 예약문화 속에 젖어왔다. 그 자체가 사회생활에서는 건전한 삶의 방식이요 예의일 수가 있지만 어쨋든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이기도 하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일정을 꼼꼼하게 짜고 숙소를 미리 예약해두면 시간과 비용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가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난 여름휴가는 가족과 함께 사전 예약 없이 무작정 동해안 쪽으로 떠나봤다. 불과 4일간의 짧은 외출이지만 자유로운 여행 좀 하고 싶었다. 길위에서(On The Road) 마음 내키는 대로 방향을 잡고, 아무 곳에서나 머무르고 싶었다. 여름 성수기라 혹시 숙소를 못잡을 경우에 대비, 텐트와 코펠, 버너 등 비상시를 위한 야영준비도 했다. 그건 내게 여행이라기보다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8월 9일 서울을 출발,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지않고 양평 방향으로 해서 우선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둘러보고 황순원문학관이 있는 소나기마을도 다녀왔다.
옥천면 고개중간에 위치한 아름다운 독일식 펜션인 솔베르크에서 잠시 차 한잔 한 후 40년 전통의 옥천냉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용문산 캠프장으로 이동, 캠핑으로 1박했다. 익일아침 용문사를 둘러본 후 110년 역사의 풍수원성당을 거쳐 횡성축협한우프라자에서 점심식사, 심순녀안흥찐빵가게를 들른 후 서초수련원콘도에서 둘째 밤을 맞았다.
다음 날에는 국도로 봉평 효석문화마을을 방문, 이효석 생가 및 문학관을 둘러봤다. 온동네가 메밀밭인데 메밀은 이제 겨우 싹을 키우고 있는 상태, 9월이 돼야 메밀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9월 3일부터 12일까지 효석문화제가 예정되어 있다.
봉평에서 메밀국수와 메밀묵, 메밀부침, 메밀전병 등으로 점심을 한 후 대관령 양떼목장으로 직행, 양떼목장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기 시작, 목장 전체가 물안개로 목가적 분위기를 더했다.
이어 강릉 쪽으로 방향을 잡아 먼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생가인 오죽헌을 들렀다. 이어 조선후기 전형적인 상류주택인 선교장, 경포대를 구경한 후 경포대해수욕장 모텔에 머물렀다.
마지막 날인 4일째는 남쪽방향으로 1시간 반 정도 걸려 정동진 및 추암촛대바위를 둘러보고 다시 북으로 되돌아 동해고속도로를 이용, 낙산사를 거쳐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보고, 저녁 때 미시령 터널을 거쳐 귀경했다. 설악산은 대청봉 정상 2회, 공룡능선 종주, 울산바위 산행 등 산행목적으로는 종종 온 편이나 정작 권금성 케이블 카는 처음이다.
당초에는 귀경 길에 백담사와 만해축전이 열리고 있는 만해마을을 들를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맞지않아 바로 경춘고속도로를 경유, 귀경했다. 백담사는 용대리주차장에 주차 후 셔틀버스로 15분 정도 들어가야 하는데 저녁 6시가 마감이라 한다. 6시 이후에는 도보 이외에는 백담사로 들어갈 길이 없다.
양평 세미원(洗美苑)은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觀花美心)' 곳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세미원은 특히 여름에는 연(蓮)꽃밭으로 유명하며, 연 관련 유물 천여점이 전시된 세계 최초의 연박물관도 있다. 15세기 세계 최초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지중가온의 난방기법으로 된 과학영농온실과 18세기 궁중에 있던 화훼용 온실도 복원되었다.
세미원은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 속에 담는 자연학습장인 동시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등 자연의 소리와 시가 흐르고 춤이 있고 그림이 있고 사람과 자연이 한 차원 높은 어우러짐으로 발돋움하는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세미원 바로 앞에 있는 두물머리 역시 서울 근교에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한자로는 '兩水里'를 쓰는데, 이곳은 양수리에서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예전에는 이곳의 나루터가 남한강 최상류의 물길이 있는 강원도 정선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그리고 물길의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를 이어주던 마지막 정착지인 탓에 매우 번창하였다. 그러다가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육로가 신설되자 쇠퇴하기 시작하여,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어로행위 및 선박건조가 금지되면서 나루터 기능이 정지되었다.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옛 영화가 얽힌 나루터, 강으로 늘어진 많은 수양버들 등 강가마을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웨딩·영화·광고·드라마 촬영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또 사진동호인들의 최고 인기 촬영장이기도 한데, 특히 겨울 설경과 일몰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이나 되었다.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둘러보고 소나기마을을 가기 위해 서종면 방향으로 북한강변을 따라간다. 강건너 산능선과 산 아래 마을들, 숨죽이며 흐르는 강물결이 함께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강 위의 수상스키를 즐기는 모습도 여유로움을 더한다.
소나기마을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서 이름을 따 지은 마을이름이다. 이곳에는 황순원소설가의 문학관이 있고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 다양한 산책로가 개발돼 있다.
황순원문학관은 작가 황순원(1915-2000) 선생의 문학 업적을 기리고 알리고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황순원 선생의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으로, 선생은 이를테면 대표적인 실향민 작가다. 한국에는 이런 실향민 작가들이 많다. 선생의 고향은 이북이지만, 선생은 생애의 반 이상을 남한 땅에 사셨다. 통일 전에 남한 땅에 선생의 문학을 체험화할 만한 공간을 찾아 마련된 곳이 <소나기>의 작중 무대로 추정되는 경기도 양평이다. 알다시피 15세 이상의 한국 국민 중에는 읽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소설이 <소나기>다. 양평에 조성된 일명 <소나기마을>은 기존에 보던 문학관의 형식에 그치지 않고 소설의 의미를 되새기며 체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로 조성되었다.
팔당대교를 지나 양평읍 못미쳐 왼쪽 옥천냉면 방향으로 직진하면 용문산 끝자락인 옥천면 용천리에 마치 유럽의 고급저택을 연상시키는 펜션까페를 만날 수 있다. 이름도 멋진 ‘솔베르크’. 독일의 아름다운 마을 이름이다. 이 펜션카페는 필자가 경영하고 있는 잡지기사를 위해 2년전인가 필자가 직접 취재를 한 적도 있어 기억이 새롭다.
약 1,500평 규모의 언덕에는 6동의 유럽식 펜션이 있고 넓은 잔디밭정원과 정자, 족구 등을 할 수 있는 운동장도 있다. 이 건물과 정원은 1999년에 건립했는데 단체바베큐, 점심 경양식,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와 펜션으로 이용되고 있다. 넓은 잔디정원은 야외 결혼예식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펜션 각동을 이어주는 앞 통로는 목조로 베란다가 여러개 만들어져 있고 베란다 난간에는 빨간 제라늄꽃바구니가 아름답게 걸려있다. 영락없는 유럽식 정원 분위기다. 베란다 끝을 마무리한 첨탑형 건물은 스위스 루체른 호수 가운데 있는 베란다통로와 모양이 거의 같다. 첨탑 아래에는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의 장독대를 연상시키는 장독마당이 있고 개울이 흐르는 다리건너에 멋진 정자도 있다.
본동 뒤 산비탈 숲속에는 ‘하이디’와 ‘삐삐’라는 이름의 별채가 있는데 소나무숲과 야생화가 함께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의 미적 감각과 정성이 그대로 담겨있는 풍경이다. 이 모든 아이디어와 현재의 모습은 이곳 ‘솔베르크’성(城)의 성주(城主)인 안귀란 사장(여)의 땀과 정성의 결실이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거의 집관리에 관여하지 않고 지난 10년 이상 안사장 자신이 직접 가꾸고 다듬은 정성의 산물이란다. 안사장은 독일에 가기 헐씬 전부터 늘 이와같은 전원생활의 꿈꿔왔는데 유럽에서 바로 그 꿈의 실체를 직접 보고 귀국후 과감히 이를 현실화시켰다고 한다. 그녀의 오랜 꿈을 이룬 셈이다.
안사장은 남편의 직장 관계로 독일에서 3년 반 정도 거주한 적이 있는데 귀국후 그들가족이 살던 독일의 작은 도시 솔베르크의 아름다움을 못잊어 이곳 용문산 자락에 ‘솔베르크’라는 이름의 까페형 펜션을 차리게 되었다고 한다.
본관 실내까페도 유럽식으로 차려놨다. 벽 선반 여기 저기에는 유럽에서 가져온 이쁜 컵들과 도자기인형 등 소품들이 가득하다. 실내에 들어서면 이층 오르는 계단난간 나무기둥에 독일어로 글씨가 새겨진 것이 특히 눈에 띈다. 처음에는 그냥 장식으로 새겨놓은 것이겠지 하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다. 따님이 독일에서 학교 다닐 때 직접 쓴 독일어로 된 시(詩)란다. 제목은 한국어로 번역하면 ‘내 꿈이 있는 집으로’이다. 엄마의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그대로 시로 만든 것이라 한다. 독일학교에서 이 시로 1등을 하고 그곳 신문에도 날 정도로 유명했던 시란다. 안사장 가족 모두의 꿈이 이곳 ‘솔베르그’에서 아름답게 꽃피우고 있는 것 같다. 솔베르크에서 차 한잔으로 삶의 멋을 느껴본다.
저녁은 40년 전통으로 유명한 옥천냉면집에서 완자, 편육과 함께 냉면으로 때우고 저녁 잠자리인 용문산 캠프장으로 향했다.
용문산 캠핑장은 용문산관광단지내에 있다.
용문사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캠핑장은 꽤 넓은 규모인데 의외로 비어있는 자리가 많다. 이곳 캠핑장은 관광단지 좌측상단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 관광단지 매표소에서 입장료(1인당 2천원)를 내고 리어카를 이용하여 텐트 등 짐을 옮겨야 한다. 화장실, 샤워장 등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어둡기 전에 서둘러 텐트를 친다.
그동안 비박을 위해 산악회 산우들과 몇몇 오지를 다닌 적은 있지만 가족과 함께 캠핑을 하기는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캠핑경험은 색다른 의미도 있다. 특히 영국에서 휴가차 온 아들과 함께라는 점에서 감회가 깊다. 아들녀석은 필자가 영국근무(4년간)를 마치고 귀국할 때 놓고 왔는데 영국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졸업하고 런던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
필자가 그동안 사용하던 비박용 텐트는 2-3인용이라 너무 작아 7-8인용 중형텐트를 새로 샀는데 말이 7-8인용이지 3-4명이 사용하면 딱 좋은 싸이즈다. 원터치 설치에 플라이가 양쪽으로 딸려있는 텐트라서 편리하기는 하다. 바닥깔개가 있지만 얇아서 잠자리가 조금 불편하다. 조금 두꺼운 플라스틱매트리스를 추가로 구입해서 바닥에 깔고자는 게 좋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용문사 산책에 나섰다. 입구좌측에는 용문산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용문산 등산은 용문사 내로 들어가 은행나무 좌측으로 올라간다.
일주문을 지나면 울창한 소나무숲길이다. 역시 명찰다운 진입로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일설에는 경순왕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용문사는 특히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높이 41미터, 둘레 11미터의 크기로 수령이 1,100년에 이른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캠핑장에서 라면과 감자,옥수수 등으로 아침을 마친 후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소재 풍수원성당을 향한다. 이 성당은 강원도에서 처음 세워진 고딕양식의 천주교당이다.
본래 이곳은 조선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등으로 탄압받던 천주교 신도들이 피난 온 곳으로 고종 27년(1899) 프랑스인 르메르 이신부가 초가사랑방에 초대신부로 부임한 한국의 네번째 천주교회로 출발한 곳이다. 지금의 교회는 제2대 정규하(아우구스띠노 1863-1943)가 설계하여 고종 광무 10년(1906) 착공, 이듬해(1907)에 완공하였는데, 중국인 기술자와 전 신도들이 공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본당 건물 뒤에는 유물관도 있다.
다음 목적지는 횡성 서초수련원, 이곳에서 2일째 숙박할 예정이다.
서초수련원 가는 길에 횡성군 우천면 우향리에 있는 횡성축협한우프라자에서 한우고기로 점심식사를 했다. 꽃등심 160g에 4만원. 가격이 만만치않지만 고기 질은 정말 좋은 것 같다. 아들녀석이 특히 맛있어 한다. 안흥 지나가는 길에는 안흥의 명물인 찐빵을 조금 샀다. 도로변에 심순녀안흥찐빵이라는 간판이 있어 차를 세웠는데 벽에 붙여놓은 신문기사 등을 읽어보니 심순녀씨가 안흥찐방의 원조라고 한다. 네비게이션을 보면 안흥찐빵마을이 별도로 존재하는데 어느 곳이 진짜 원조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쨋든 어느 신문에서 취재한 기사이고 찐빵으로 군민대상까지 수상하였다고 하니 이곳이 원조인 것 같기는 하다.
서초수련원에서 여장을 풀고 인근 송어회전문식당에서 송어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이번 여행 중에는 매번 다른 음식, 가능하면 그 지역의 토속음식을 먹어볼 예정이다.
서초수련원에 머무는 저녁동안 밖에는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태풍이 계속 북상 중이라 한다. 앞으로의 일정이 염려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운좋게도 날씨가 개이기 시작한다. 당초 예정했던 봉평 '효석문화마을'로 향한다. 약 1시간 걸려 봉평에 도착, 먼저 이효석생가를 찾는다. 어느 유명인사의 생가나 다름없는 초가집이다. 생가 입구에는 원래 생가는 이곳이 아니고 700미터 떨어진 곳인데 부지확보가 여의치않아 철저한 확인을 거쳐 이곳에 생가를 복원해 놨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생가를 둘러본 후 문학관으로 올라간다. 문학관은 현대식 건물로 이효석소설가의 일대기, 주요 단편소설에 얽힌 이야기, 발표한 잡지 및 책 등이 전시되어 있다.
효석문화마을에서 메밀국수, 메밀무침, 메밀전병 등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대관령양떼목장으로 방향을 잡는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3리에 위치한 대관령 양떼목장은 해발 800미터 이상 높이의 대관령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태백산맥의 웅장한 자태와 목장 산책로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특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바뀔 때 마다 와 닿는 느낌은 마치 유럽의 알프스로 착각할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 우리 가족이 도착한 시간에는 마침 비가 조금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가 멀지는 못했지만 대신 목가적인 풍경은 더 좋은 편이었다.
건초 먹이주기 체험을 통해서 순한 양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눠보기도 한다. 약 40분간 시원하게 탁 트인 산책로를 걷다보니 어느덧 일상의 잡다한 상념들은 멀리 사라지고 대자연의 품 속에 동화되어 진정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낀다.
이제 강릉이 점점 가까워온다. 강릉은 오죽헌을 비롯하여 선교장, 경포대, 허난설헌유적지, 초당두부마을, 해수욕장 등 보고싶은 곳이 많다. 먼저 네비게이션 목적지를 오죽헌으로 바꿔놓는다.
대관령에서 1시간 못미쳐 강릉 오죽헌에 도착, 경내 규모가 엄청 넓다. 이곳 오죽헌(烏竹軒)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오죽헌은 원래 1505년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 용인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외손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했는데, 이것이 후에 집 이름이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건물로 4칸짜리 대청과 2칸짜리 방과 마루로 구성돼 있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정은 고미반자를 두었으며 삼면은 창호문으로 둘렀다. 주심포와 유사한 이익공계 형식을 보이고 있어, 주심포 집에서 익공식 집으로 넘어가는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조선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 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1963년 1월 3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 건물 옆에는 율곡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文成祠)가 있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 '道德博聞 安民立政'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경내에는 오죽헌, 문성사 이외에도 어제각, 바깥채 및 안채, 율곡기념관, 시립박물관 등이 있으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지폐에서 5천원권에는 율곡 이이,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도안되어 있는 것 만 봐도 이들 두분이 얼마나 훌륭한 분들인가를 짐작케 한다. 5천원권에는 율곡의 초상화와 오죽헌 몽룡실, 검은 대나무,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이 그린 포도그림과 초상화가 도안되어 있다.
오죽헌 몽룡실 옆에는 600년된 매화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오죽헌이 지어질 당시부터 심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의 손때가 묻어있는 나무로서 신사임당은 특히 매화를 좋아해 첫째 딸 이름을 매창(梅窓)이라 짓기도 하고 고매도(古梅圖) 등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율곡선생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에도 이 매화를 새겨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오죽헌을 둘러보고 다시 조선시대 전형적인 상류주택인 선교장으로 방향을 잡는다.
정문을 들어서면 먼저 우측 연꽃밭 뒤에 자리잡은 고풍스러운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은 선교장의 별채인 활래정(活來亭)이다. 물이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한국 민가정원 정자의 극치를 이루는 곳으로 관동팔경을 지나는 많은 풍류객들이 이곳에서 시문을 남겼다.
활래정을 지나면 넓은 마당 건너 일자로 늘어서 있는 대궐같은 한옥이 보인다. 이 건물들이 선교장과 부속건물들이다.
선교장(船橋莊)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內蕃)이 1703년에 건립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안채, 열화당, 행랑채, 동별당, 서별당, 활래정 외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0대에 걸쳐 3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거주하며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명성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65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세기 한국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바 있다.
선교장 건물들 중 집안의 친척들이 살던 초가2동, 집안식구들의 공부방과 거처로 사용하던 서별당과 동별당, 서별당 전면의 연지당, 문간채로 지나던 선비와 풍류객들이 사용하던 행랑채, 주건물 밖에 위치한 홍예헌 등은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해보고자 하는 방문객들의 숙소로도 제공되고 있다.
다음 행선지는 경포대. 경포대해수욕장을 지나 경포호수를 돌면 언덕 위에 대궐같은 정자 하나가 보인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인 경포대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 당시 강원도 안렴사 박숙이 현 방해정 뒷산 인월사 옛터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고 이후 현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은 위치에 맞추어 높낮이를 설정하고, 다양한 행사에 따라 공간을 나누며,시각의 연속성이 요구되는 곳에 적절한 공간 형태를 부여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팔경 등은 천하의 장관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내부에는 율곡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의 어제시(御製詩) 및 유명한 문장가로 알려진 강릉부사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들의 글이 걸려 있다.
경포대 아래 언덕에는 신사임당상이 있고 한시비(漢詩碑)광장도 있다. 한시비광장 중앙에는 송강정철선생관동별곡비가 세워져 있고 원형둘레에 숙종 및 정조 임금의 어제시를 비롯한 유명 문장가들의 시비가 늘어서 있다. 3일째 저녁은 회집에서 우럭매운탕으로 하고 경포해수욕장 앞 모텔에서 잤다.
4일째 마지막 날이 밝았다. 태풍이 지나갔는지 바다가 잔잔하다. 오징어회덧밥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잠시 경포해수욕장을 산책한 후 정동진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포대에서 정동진까지는 약 30분 거리. 강릉시내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약 18㎞ 떨어진 지점에 있다. 〈한양(漢陽)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부락〉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위도상으로는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도봉산의 정동쪽에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신라 때부터 임금이 사해용왕에게 친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2000년 국가지정행사로 밀레니엄 해돋이축전을 성대하게 치른 전국 제일의 해돋이 명소이기도 하다.
바위 사이의 작은 틈새를 돌아 배가 드나들게 되어 있는 작은 항구에서는 꽁치·가자미·전복 등을 잡는 어선이 출항하며, 1년에 두 번 정월 대보름과 오월 단오에 동제(洞祭)를 겸한 풍어제를 지낸다. 항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정동진역이 있다. 정동진역은 1994년 TV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잘 알려지자 청량리역에서 해돋이열차가 운행되면서 유명한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부산·동대구·대전·광주·전주·의정부·춘천 등 전국의 여러 역에서도 이곳으로 관광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정동진을 둘러본 후 다시 1시간 쯤 걸려 추암에 도착. 추암은 1년전 두타산 무릉계곡 산행시 한번 왔던 곳이다.
애국가 첫소절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장소로 동해안 일출을 상징하는 명소이다.
바다에 솟아 오른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그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 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남겨놓았으며, 이때 혼자 남은 남자의 형상이 촛대바위라고 한다.
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10여 척의 기암괴석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져 절경을 연출하며,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부부바위, 코키리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불린다. 이곳의 바위군(群)은 동해시 남서부에 분포된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 일대의 석회암이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던 한명회(韓明澮)는 이곳의 바위군(群)이 만들어 내는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凌波臺)'라고도 하였다. 예로부터 영동지방의 절경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해돋이 무렵, 태양이 촛대바위에 걸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해돋이 명소로 각광받는다. 주변에 추암해수욕장, 해암정 등이 있다.
추암 촛대바위를 본 후 낙산사 및 설악산으로 가기 위해 동해고속도로를 이용,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2시간 정도 걸려 낙산사에 도착, 일주문을 지나 낙산유스호스텔 아래 주차장에 주차 후 낙산사를 오른다.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 3대 명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설법을 펼치며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낙가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특히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과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칠관음상 등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보타전, 창건주 의상대사의 유물이 봉안된 의;상기념관 등 숱한 성보문화재를 갖추고 있어 관음성지이자 천년고찰이다.
낙산사는 지난 2005년 4월 5일 산불로 사찰 거의 전부가 소실된 바 있다.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어느 정도 복원되었을까 궁금했는데 5년여의 공사로 거의 대부분 복원되어 원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옛모습을 그대로 살려낸 듯 하다. 낙산사 입구인 홍예문을 지나 원통보전에 이른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원통보전은 원통전 혹은 관음전으로도 불리며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다. 2005년 화마로 원통보전 역시 완전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산사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신라시대의 고승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하였던 곳에 세운 정자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정자는 1925년에 지은 것이다. 동해도립공원의 명승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으로 바닷가 암벽 위 정자에서 맞는 해돋이는 손꼽히는 일출경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9월 9일 강원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의상대에서 해안좌측으로 내려다보이는 홍련암(紅蓮庵)은 역사적으로 낙산사 창건의 모태가 된 암자로, 낙산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반드시 친견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뒤 목숨을 건 구도 끝에 마침내 백의관음(白衣觀音)을 친견한 성스러운 관음성지이다. 널리 알려진 창건설화는 홍련암에 산다는 유명한 파랑새와 관련이 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서부터 멀리 이곳까지 찾아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파랑새〔靑鳥〕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감으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푸른 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과 관련된 설화는『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낙산사 아래 해변에는 낙산해수욕장에 펼쳐져 있다. 필자가 결혼 후 얼마 지나지않아 아이들이 아직 없을 때 이곳 낙산해수욕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적이 있어 특히 감회가 새롭다.
낙산사에서 20여분 정도만 가면 설악산이다.
설악산은 등산 때문에 종종 온 곳이지만 오늘은 가족과 함께 관광차 권금성에 오르기 위해 찾았다.
권금성은 케이블카로 5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이 케이블 카는 1971년에 개통됐다. 권금성 높이는 해발 850미터.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높이는 700미터이다. 50명 탑승의 케이블 카는 성수기에 5분 마다 운행한다. 케이블카 정상에 오르면 매점과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 서면 바로 눈앞에 노적봉이 웅장한 암봉으로 다가오고 토왕성폭포도 보인다.
설악동에서 권금성 케이블카 터미널 방향을 바라보면 거대한 자연 성곽처럼 솟아오른 봉우리가 권금성 봉화대이다. 권금성의 흔적은 험준한 봉화대를 중심으로 그 위쪽과 깎아지른 듯한 봉화대리지 아래쪽으로 이어져 청운정 부근까지 남아 있다. 이 성은 둘레 1,112척에 높이가 4척이나 되었다고 하며 고려 중종 41년(1254)년에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권금성(權金城)이라는 이름은 몽고가 고려를 침략할 때 권(權)씨와 김(金)씨 성을 가진 두 장수가 백성들을 이곳에 피난시켰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10분 정도 걸어서 권금성 바위능선에 오를 수 있다. 넓은 마당바위 모양의 바위능선에 오르면 설악산의 장엄한 능선경관이 펼쳐진다. 멀리 1275봉, 나한봉,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공룡능선이 누워있고 세존봉, 장군봉, 적벽도 보인다. 눈앞에는 만물상이 우뚝 서 있다. 권금성이 있었던 봉화대 정상에 서면 멀리 울산암릉이 장쾌하게 보이면서 동쪽으론 동해가 달려든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생긴 노적봉도 한눈에 들어온다. 권금성 정상부근에는 1,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무학송(舞鶴松)을 볼 수도 있다.
2년전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거쳐 대청봉을 오른 후, 소청산장에서 1박하고 새벽 6시 희운각대피소에서부터 공룡능선을 혼자 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공룡능선을 넘으면서 쓴 졸시를 다시 읊조려본다.
꿈을 꾸었다
운해雲海 속을 걷고 있었다
바다 위에는 거대한 파도가 출렁이고
공룡, 공룡의 무리가
하늘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승천을 위한 처절한 몸짓이었다
난 구름 위를 춤추며 나아갔다
아! 샹그릴라
형형색색의 꽃들이 깊은 계곡을 수놓고
뻗어내린 가지, 가지 마다
수많은 꽃봉오리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능선 마다 거대한 동화나라 바위성城
그 너머로 신선들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그곳은 하늘나라가 아니었다
나는 거대한 공룡의 등을 기어오르는 한 마리 개미
샛길도 없는 길
떨어지면 죽는 외줄을 타고 있었다
굽이쳐 꿈틀대는 웅장한 등줄기
거칠고 험난한 쥬라기 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설악은 이처럼 언제나 변함없는데 우리네 인생은 하루 하루가 변하고 있다. 자식은 커서 어른이 되고 어른은 늙어 언젠가는 흔적없이 사라진다. 아내, 아들과 함께 오른 설악산 권금성, 아내가 말한다. 조만간 공룡능선을 함께 넘어보자고. 더 늙기 전에 함께 저 공룡의 등을 타고 설악의 속살을 품어보자고....(글/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