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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43권 / 묘지명(墓誌銘)
순계 이공 묘지명 병서(醇溪李公墓誌銘 幷序)
아, 이는 순계(醇溪) 이공(李公)의 묘이다. 공은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관명(官名)을 게시하지 않고 야호(野號)를 일컬은 것은 공의 평생의 지취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은 휘가 정리(正履)이고 자는 심부(審夫)로, 계통이 선원(璿源)에서 나왔으니, 영릉(英陵 세종)의 별자이신 계양군(桂陽君) 충소공(忠昭公) 휘 증(璔)이 시조이시다.
9대(代)가 전해져서 관찰사 휘 덕영(德英)에 이르러, 곧은 도를 지녀서 명릉(明陵 숙종)의 명신이 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시다. 증조는 휘 계화(繼華)이며, 조부는 휘 보천(輔天)으로, 지극한 행실과 감추어진 덕이 있었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유안처사(遺安處士)’라고 사시(私謚)하였다.
선고(先考)는 휘 재성(在誠)으로, 문학이 맑게 수양되어 정묘(正廟 정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3대(代)가 모두 문학과 행실로써 이름이 드러났다. 선비(先妣)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현감(縣監) 은(憖)이 그 선고이시다.
공은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품부 받아서 겨우 성동(成童)이 되었을 때에 이미 사예(詞藝)에 통달하였고, 자라면서 점차 명성이 자자해졌다. 정묘년(1807, 순조7)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신사년(1821)에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겼다. 부름을 받아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로 옮겼는데, 출납을 잘 헤아렸으며, 환곡 운반의 이해(利害)와 본말(本末)을 묵묵히 연구하여서 〈방적설(邦積說)〉과 〈방폐설(邦弊說)〉 등을 저술하였다.
기축년(1829)에 외직으로 나가 의령 현감(宜寧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의 풍속이 사납고 드세어 아전들 중에 농간을 부리는 자가 많았다. 공이 이들을 효유하여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부모께서 낳아주신 몸으로 간사히 속이고 훔친다는 오명을 무릅쓴단 말이냐. 염치와 수오(羞惡)는 바로 너희들의 본심이니, 각기 고하여 경계하여서 개혁하기를 도모하라.” 하니, 이에 모두 서로 속이지 말자고 경계하였다.
고을에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의 향약(鄕約)이 있었는데, 옛 것을 정비하고 폐해진 것을 일으켜서 알맞게 참작하여 가감하여서 월말에 조사하여 상과 벌을 시행하니, 백성들의 풍속이 크게 화순해졌다. 고을에 거두어들인 환곡이 수만 섬이 있었는데, 쌓아서 저장함이 법도가 없어서 허위로 처리한 것이 과반이었다.
공이 사창(社倉)의 법식에 의거하고자 하여 조례(條例)를 가지고서 상부의 관영에 의논하였는데, 도백(道伯 관찰사)이 평소 공과 지취가 달랐으나 공의 치적을 제일이라 칭찬하여 한 도(道)를 권려하였다. 경인년(1830, 순조 30)에 익묘(翼廟)의 부음이 이르자, 수령들이 어떤 상복(喪服)을 입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공이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기재된 바에 근거하여 “상께서 입으실 복은 참최복에 해당하고, 신하와 백성은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서 성복(成服)하고, 도백(道伯 관찰사)에게 달려가서 위문하였는데, 베로 만든 건(巾)을 쓰고 삼으로 만든 짚신을 신고, 자최복(齊衰服)을 입고서 갔다. 도백이 건(巾)과 질(絰)을 갖추고서 위문을 받자, 여러 수령들이 모두 창졸간에 공에게서 복을 빌려서 차례대로 예(禮)를 마치고서 나오니, 도백이 공이 예(禮)를 잘 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1831, 순조31)에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서 여막에서 거처하면서 예(禮)를 다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34)에 순묘(純廟 순조)께서 승하하시자 죽을 마시고 거적에서 잤으며, 방상(方喪)의 예절이 고례(古禮)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오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을미년(1835, 헌종1)에 등극경과(登極慶科)에서 급제하니,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 공과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공이 편지를 보내어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적임자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규례대로 전적(典籍)에 붙였다. 병신년(1836, 헌종 2)에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순조실록(純廟實錄)》을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가을에 관서(關西)의 장시관(掌試官)이 되었는데, 청탁을 하는 선비가 있으면 의리를 가지고서 깨우쳐주니, 관서의 선비로서 경시(京試)에 나아가던 이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다투어 발길을 돌렸다. 동당시(東堂試)의 제술(製述) 시험이 경학을 하는 유생이 익힌 바가 아니라고 하여 강송(講誦)만을 오로지 취하여서, 정원수는 적고 응시자는 많아 걸러낼 수가 없었는데, 시험을 본 유생들에게 아울러 내주어 공공(公共)으로 권점하여 인하여 방목(榜目)으로 삼으니, 선비들이 모두 가마 앞에서 늘어서서 절하고는 “우리 스승이신 선생께서 나오셨다.”라고 하였다.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되어 처음에 《논어》 첫 편을 강할 때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학문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과 ‘인애(仁愛)’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이 여섯 글자에 있어서 친근하고 절실하게 완미하여서 진실하게 공력을 더하신다면, 성인(聖人)의 학문이 자연히 성취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한다〔泛愛親仁〕’는 뜻에 미쳐서는 말하기를, “인군은 만백성에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아끼지 않는 이가 없어서 두루 덮어주고 고루 감싸주지만, 만약 어질고 현명하여 덕이 있는 사람을 얻어서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들이 뒤섞어 나와서 은혜와 덕택이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소의 신료들에 있어서 반드시 이러한 사람을 취하여서 아침저녁으로 좌우에 두고서 측근에서 모시게 하고, 또한 조심하며 삼가고 신중하여서 허물을 만들지 않는 사람을 취하여서 널리 초야의 학문과 재덕을 갖춘 선비를 구하게 하여서 감별하여 선발하고 장려하여 등용해서 초야에 남겨진 현능한 이가 없도록 하소서. 그런 뒤에야 인(仁)한 이를 친히 한 공효가 팔방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후에 주강(晝講)하는 때를 말미암아, 밤에 고요하여 아무 일도 없어서 이를 틈타 게을러지기 쉬운 때에 소대(召對)를 겸하여 행하기를 청하고, 또 고사(古事)를 써서 올리게 하여서 보고서 성찰하시는 데에 대비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공은 항상 진강(進講)을 하려할 때마다 미리 재계하여서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니, 성상의 도량이 깊고 그윽하였으나 공에게 여러 번 자문하시었다.
남응중(南膺中)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郞)이 되었는데, 죄수들의 공초가 망측하여 장차 진신(搢紳)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이때에 홍석주(洪奭周) 공이 안옥대신(按獄大臣)으로서 온 세상에 독이 전파될까 두려워하여서, 동료 정승들을 이끌고서 청대(請對)하였는데,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한 채로 물러났다.
그러자 탄핵하는 상소가 곧장 나와서 홍공(洪公)을 몹시 급하게 몰아붙이니, 상께서 갑자기 발계(發啓)한 삼사(三司)를 견파(譴罷)하여 대각(臺閣)이 텅 비게 되었다. 공이 마침 헌납(獻納)에 제수된 상태에서 합계(合啓)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헌장(憲長 대사헌(大司憲))이 공의 이름을 넣어 연명(聯名)하여서 대간(臺諫)을 모두 쫓아내서는 안 된다고 논하였다.
이때에 홍공(洪公)과 시종 주선하여서 홍공에게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아는 사람은 오직 공뿐이었으니, 헌장(憲長)이 올린 상소의 말은 더욱 공이 참여하여 들은 바가 아니었다. 공은 글을 올려 스스로 인혐(引嫌)하여서 파직해 내쫓아주기를 청하였는데, 대간(臺諫) 권대긍(權大肯)이 ‘공(公)을 저버리고 자기 당(黨)을 위해 죽는다’는 말로써 논죄하여서 마침내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다. 용서를 받고 가릉(嘉陵)으로 돌아와 구황(救荒)에 대한 글을 저술하고 상평(常平)의 유법(遺法)을 강구하였다.
기해년(1839, 헌종5)에 절사(節使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에 차임되었는데, 경사에 돌아올 때쯤 양적(洋賊)이 국경을 넘어왔다가 현장에서 발견되어 도륙되었다. 공은 국경의 금제(禁制)가 엄격하지 않음을 걱정하여서, 만상(灣上 의주(義州))에 이르러 방(榜)을 붙여 효유하여 여러 비장(裨將)들이 음란하고 교묘한 짓을 하는 습속과 쇄마구인(刷馬驅人)의 무리가 횡행하여서 수치를 끼치는 습속을 절실히 경계하니, 일행이 정돈되어 엄숙하였다.
복명하고서 다시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제(齊)나라 왕이 아 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인 일을 진강할 때에, 이를 인하여 말하기를, “악을 다스림에 있어서, 악인으로 하여금 염치를 알게 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인후한 도리로 나라를 세워, 가르침을 먼저 베풀고 형벌을 그런 뒤에 가하였습니다.
혹 탐관오리로서 불법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대헌(臺憲)이 먹으로 그 문에 칠을 해서 사람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여, 지금까지도 사헌부의 하례(下隷) 중 ‘먹자〔墨尺〕’로 명명하는 자가 있으니, 국조의 전장(典章)이 삼대(三代)와 함께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유(類)가 여기에 해당됩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의 본체는 거울과 같아서 곱거나 추한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수시로 연마하고 씻어내어서 때가 모이지 않게 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마음이 항상 맑아서 사리(事理)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독서하여 학문을 진전시키는 것이 바로 연마하고 씻어내는 도구입니다.” 하였다.
또 관직(館職)을 사직하는 상소를 인하여서 진달하기를, “제왕의 학문은 근기(根基)를 쌓고 간가(間架)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나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같은 책은 성현(聖賢)의 심법(心法)과 치국(治國)의 규모에 있어서 더욱 상세하게 열거하였습니다. 이 두 책에 있어서 차분히 강구한다면 반드시 근기와 간가의 학문에 도움이 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3월에 상께서 인릉(仁陵)에 친제(親祭)를 올릴 때에 집례(執禮)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에 올랐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6월에 외직으로 나가 북청 부사(北靑府使)가 되었는데, 교화를 급선무로 여겨서 가장 먼저 행실이 독실한 선비를 찾아가서 모이기로 약속하여 학문을 논하였고, 수업을 청하는 이는 관사에 두고서 주자서(朱子書)를 전수하면서 친히 구두를 바로잡아 주었다. 예속(禮俗)이 무지몽매한 것을 걱정하여서, 도암(陶庵)의 예서(禮書)를 향숙(鄕塾)에 나누어주었다.
구포(瞿圃) 이명연(李明淵) 공의 사당에 배알하고, 향유(鄕儒)들에게 교조(敎條)를 따르도록 훈계하였다. 황명(皇明)의 호 한림(胡翰林) 극기(克己)가 자정(自靖)하여 우리나라로 와서 남겨진 사당이 본읍(本邑)에 있었는데, 공이 가서 배알하고서 묘비명(墓碑銘)을 지었다.
북쪽 땅에 면화(綿花)가 생산되지 않아서, 남쪽 지방의 장사꾼들이 빛바랜 옷과 해진 솜을 가득 싣고 와서 북쪽의 재화와 교역하면 관아에서 따라서 이를 징수하였는데, 공이 징수에 일정한 법도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정지하였다. 백성들이 사슴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서 이를 생업으로 삼았는데, 잡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빼앗아 관아에 귀속시켰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관에서 녹용과 물고기를 구하고자 한다면, 본래 봉전(俸錢)이 있다.” 하고는, 명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주검을 매장하고는 부자(富者)가 고문해 죽였다고 무함한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직접 가서 파내어 검사하여서 옥사가 바로잡힐 수 있었다.
공이 평소에 뇌저(腦疽)를 앓았는데, 돌아옴에 크게 퍼져서 바깥 관사에 나가 머무르면서, 계씨(季氏)에게 보내는 편지를 입으로 불러주어 쓰게 하고서 편안하게 별세하였으니, 이때가 계묘년(1843, 헌종9) 7월 27일이었다. 태어나서 갑자(甲子)가 한 번 돌아오는 환갑날에 21일 못 미친 때였다. 공의 병이 심해지자, 사민(士民)들이 모여들었고 촌부(村婦)들이 향을 사르고서 들어 올려 낫기를 기원하였으며, 상(喪)이 나자 달려와서 울부짖기를 마치 동기(同氣)를 곡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마침 장마로 물이 불어났는데 준걸한 선비들이 물에 들어가 상여를 끌었고, 치제(致祭)하고 제문(祭文)을 지으며 가마(加麻)한 이들이 몹시 많았다. 8월에 가평(加平) 태봉리(台峰里) 경좌(庚坐)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었다.
공은 충서(忠恕)가 바탕을 이루었고, 넓은 학식을 자질로 삼았으며 겸허함과 검약함을 겸비하였다. 새벽에 가묘에 배알하고서 몸소 삼태기와 빗자루를 잡았고, 제향(祭享)을 올릴 때에 재계하고 삼갔으며 정갈하게 제수를 장만하여 공경하고 삼갔다. 항상 대종(大宗)의 사당이 세워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소종(小宗) 가까이로 옮기길 도모하여서 사시(四時)의 정제(正祭)를 거행하였다.
시조의 사친인 신빈(愼嬪)의 묘가 남양(南陽)에 있었는데, 여러 후손들을 이끌어서 세일제(歲一祭)를 행하였다. 조위(祧位)가 장차 차방(次房)의 시골집으로 옮겨가게 되자, 공이 자청하여서 대신 섭행(攝行)하였다. 외선조(外先祖)의 기일에 반드시 제수를 도와서, 넉넉하지 못할지언정 빠뜨리는 것이 없도록 하였으니, 이는 모두 효(孝)를 미루어 행한 것들이었다.
평소에 항상 삼가고 침묵하여서, 당시 정사의 득실과 민생의 좋고 나쁨을 눈썹 사이에 어렴풋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관직을 지닌 이들이 일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인심을 교화하는 데에 근본을 두지 않는 것을 항상 수치스럽게 여겼다. 자신을 봉양하는 데에 있어서 담박하게 하여서 거친 음식도 이어가지 못하였으나, 생각은 세상의 굶주린 이들에게 있었다.
한 번은 흉년을 만남에, 종이 봉지를 만들어 쌀 한 되씩을 담아 족인(族人)들의 궁핍함을 구제하여서, 굶주려 죽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 소년이었을 적에 과장(科場)에서 돌아오다가 어떤 사람이 춥고 굶주려 땅에 엎드려있는 것을 보고는 들쳐 메고서 순라(巡邏)의 포막(鋪幕)에 이르러서 그가 따뜻해져 되살아나기를 기다렸다.
어떤 사람이 도둑을 만나 의관(衣冠)을 잃었는데, 새벽에 머리를 늘어뜨린 행색으로 와서 급한 상황을 고하자, 자신의 것을 내어 주면서 그 사람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몹시 많았기에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연석(筵席)에 출입할 때마다 성덕(聖德)을 이루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한때의 동료들이 지취가 화합되지 못하자, 공이 개연히 말하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만약 나에게 다른 일을 요구하지 않고 여기에만 전심하게 한다면 반드시 온 힘을 다할 것이니, 이 직임으로 늙어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옛날에 황상(黃裳)이 말하기를,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아 옛날의 철왕(哲王)을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천하의 제1등인을 등용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공이 거의 이에 해당되었거늘 그 뜻과 소원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공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서 당대의 명사들과 두루 교유하였는데, 노주(老洲) 오 문원공(吳文元公 오희상(吳熙常)), 연천(淵泉) 홍공(洪公 홍석주(洪奭周)),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공과 같은 이들과 모두 더불어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만년에는 사서(四書)와 정주(程朱)의 글에 전심하여서, “우리 유가의 법이 마침내 여기로 귀결된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심(心)과 성(性)과 명(命)과 이(理)에 대한 설을 논하여서 말하기를,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은 네 가지가 모두 이를 소유하고 있으니, ‘기질은 심(心)에 속하며 본연은 성(性)에 속한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미발(未發)일 때에는 기(氣)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선(善)만 있고 악(惡)은 없다.”라는 것을 종지로 삼고서, 일상생활에서 이(理)에서 발하고 기(氣)에서 발하는 분별을 관찰하여서 이를 가지고 취사하였다.
지(知)와 행(行)의 선후를 논할 때에는 주자(朱子)의 이른바 “중간을 막아 끊어내어서 양쪽으로 공부를 지극히 하여야 한다.”라는 것을 법도로 삼았다. 전대(專對)의 사행에서 이것으로써 중국의 유자(儒者)들에게 말해주어서 육(陸)과 왕(王)의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극력 분별하였다.
유자(儒者)들 중에 명(明)을 사모하는 마음을 읊조리는 이들을 위하여 본국에서 강론한 존주(尊周)의 대의(大義)를 서술하여 은일된 역사의 빠진 점을 보완하게 하였다. 또 이전 현인들의 학술의 원류를 서술하고서, 요약하여 《연원록(淵源錄)》의 뒤에 덧붙였다.
일찍이 백성과 국가의 이로움과 병폐에 대해 극론하되, 반드시 《대학장구》의 마지막 장(章)의 두 단락의 가르침을 거론하여서 여러 번 뜻을 지극히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함으로써 보여준다’는 것은 옛사람의 은미한 권도(權道)이고, ‘장사가 세 배의 이익을 보는 것을 군자가 안다’는 것은 시인이 탄식한 바이다.
사대부들이 석갈(釋褐)을 하자마자 이미 전택(田宅)과 구마(裘馬)에 전심하고 있다면 다른 데에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훗날 어디에서 손을 빌려 절약과 검소함으로써 상(上)을 인도하겠는가.” 하였다. 항상 권문귀족들을 피하여 멀리하여서, 조병현(趙秉鉉)이 조정의 대신들을 모아 연회를 벌이면서 공을 초대하였으나 공은 가지 않았으니, 그 강직하게 스스로 지조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문장에 있어서는 송(宋)의 증자고(曾子固)와 황조(皇朝)의 귀희보(歸煕甫)를 가장 아꼈으며, 저술한 시문집 몇 권이 있다. 《구황초략(救荒草略)》, 《독서만필(讀書漫筆)》, 《춘추고례(春秋考例)》, 《독사평번(讀史平反)》 4부는 모두 공이 손수 편찬한 것이며, 《영릉치치고(英陵致治考)》 한 책은 장차 성의를 다하여 교정하여서 미나리와 햇볕을 바치는 데에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겨우 원고의 반 정도를 완성하였다.
배위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으니, 통덕랑(通德郞) 광근(光謹)의 따님이며, 참판(參判) 기(耆)는 그 조부이시다. 1남 석용(碩鏞)은 뜻이 굳세고 각고하며 성실하여서 가업을 잘 이어가는 행실을 지녔다.
손자는 5명으로, 장손은 연소(淵韶)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공의 아우 전(前) 현감(縣監) 정관(正觀)이 내가 공과 종유하던 벗 중 말석에 있었다고 하여 분수에 넘치게도 묘지명을 구하니, 공과 종유한 지 오래되어 공에게 깊이 심복한 사람으로 마땅히 나만한 이가 없겠기에 감히 노쇠하였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훗날 군자로서 공의 학술의 올바름과 덕행의 훌륭함과 경륜의 풍부함과 문장의 성대함을 구하는 이들은 이 글에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오늘날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이른바 “걷고 난 뒤에 수레의 공용을 알게 된다.”라고 한 것이 어찌 참으로 그렇지 않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시에서 무성한 다북쑥을 노래하고 / 詩歌菁莪
이에 연비어약에 이르렀네 / 爰及飛躍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여 / 思皇多士
이 왕국에서 능히 내었도다 / 克生王國
공이 성세에 응함에 / 公應昌辰
상서로운 봉황이자 기린과 같았네 / 瑞鳳祥麟
왕의 조정에서 드러내어 지성으로 호령하여 / 揚庭孚號
홀 바로잡고 띠를 드리웠네 / 正笏垂紳
선을 몹시 좋아함이 / 優於好善
악정자와 같았네 / 樂正是似
범순부처럼 계옥하니 / 淳夫啓沃
용안에 기쁜 빛이 있었네 / 天顔有喜
육일거사의 정사요 / 六一政事
남풍의 문장이었네 / 南豐文章
백 리 고을 다스림에 소 잡는 칼을 썼으니 / 百里牛刀
백성들이 공수이자 황패라 하였네 / 民曰龔黃
숙향처럼 전대함에 / 叔向專對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네 / 不辱君命
내 손복과 석개를 본받아 / 我儀孫石
사학을 물리치고 정학을 지켰네 / 闢邪衛正
육ㆍ왕ㆍ모ㆍ대의 무리가 / 陸王毛戴
제멋대로 흘러 하늘에 닿으니 / 橫流稽天
손을 내젓고 담소하여서 / 麾之談笑
참된 근원을 트이게 하였네 / 疏瀹眞源
서양 오랑캐가 돼지처럼 날뛰니 / 洋醜豕躅
가까이 닥친 재앙에 근심이 간절하였네 / 憂切剝床
우리 행장을 정돈하여 / 整我行李
우리 강토를 물들이지 않게 하였네 / 無染我疆
처음을 궁구하고 끝을 살펴봄에 / 原始要終
명성과 실제가 순수하였네 / 名實純粹
성인 문하의 사교를 / 聖門四敎
거의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니 / 庶無不備
군자들이 의지하고 / 君子所依
소인들이 의탁하였네 / 小人所庇
공이 오고 공이 떠남에 / 公來公去
설산이 가볍고 무거워졌으니 / 雪山輕重
어찌하여 억지로라도 남겨두어서 / 胡不憖遺
우리의 동량기둥을 높이지 않았단 말인가 / 以隆余棟
보답을 누리지 못하여 / 報在不食
후손에게 넉넉하게 남겨주었네 / 垂裕遺贏
울창한 저 가릉에 / 菀彼嘉陵
고요한 무덤이 있노라 / 有侐佳城
산과 골은 변할지라도 / 陵谷雖變
훌륭한 명성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 不泐令名
나의 글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 我辭靡媿
천년토록 밝게 드러나리라 / 昭眎千齡
<끝>
[註解]
[주01] 선원(璿源) : 선(璿)은 왕실의 존귀함을 표시한 것으로, 선원은 이씨 왕조의 세계(世系)를 말한다.
[주02] 휘 증(璔) : 세종의 아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 1427~1464)으로, 자는 현지(顯之),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세종과 신빈(愼
嬪) 김씨(金氏) 사이의 소생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도와, 세조(世祖)가 즉위한 뒤에 좌
익 공신(左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주03] 휘 덕영(德英) : 이덕영(李德英, 1659~1721)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형(季馨)이다. 1695년(숙종21) 별시 문과에 병과
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1699년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이어 장령ㆍ헌납ㆍ집의ㆍ사간ㆍ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1712년 승지에 발탁되고, 황해ㆍ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다가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었으
며, 재직 중에 별세하였다.
[주04] 사시(私謚) :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에게 사후에 친속이나 문인이 지어주는 시호를 말한다.
[주05] 휘 재성(在誠) : 이재성(李在誠, 1751~1809)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중존(仲存), 호는 지계(芝溪)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처남
이자 지우였으며, 이서구(李書九)ㆍ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의 일원들과도 교유하였다. 평생 벼슬하지 않았으
며 만년에 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으로 《지계집(芝溪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주06]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의 향약(鄕約) : 이황(李滉, 1501~1570)이 제정한 향약으로, 1556년(명종11)에 예안(禮安)에
낙향했을 때 제정한 〈예안향약(禮安鄕約)〉이 알려져 있다. 퇴계는 이황의 호이고, 문순은 시호이다.
[주07] 익묘(翼廟)의 부음이 이르자 : 익묘는 익종(翼宗)의 묘호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인바, 훗날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효명세자는 1830년(순조30) 5월 6일에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에서 훙서(薨逝)하였다. 《純祖實錄 30年 5月 6日》
[주08] 거애(擧哀) : 국상(國喪)이 있을 때 슬피 망곡(望哭)을 행하는 것을 이른다.
[주09] 방상(方喪) : 신하가 임금의 초상에 입는 복제로, 임금의 상을 당했을 때 부모상을 당한 경우에 견주어 참최 삼년(斬衰三年)으로 복
을 입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신하가 임금을 위해 방상 3년을 입는다.[方喪三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
해 유씨(劉氏)가 “방상은 부모의 상에 견주어 의(義)로써 은혜를 아우르는 것이다.[方喪, 比方於親喪而以義竝恩也.]”라고 하였
다. 《禮記集說 檀弓上》
[주10]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 : 1760~1840.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금릉,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벼슬이 영의
정에 이르렀다.
[주11]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 1774~184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벼슬이 좌의
정에 이르렀다.
[주12] 가을에 …… 되었는데 : 이정리(李正履)는 1836년(헌종2) 7월에 평안 도사(平安都事)에 제수되었고, 이로 인해 관서 지방의 시험
을 관장하게 되었다. 《承政院日記 憲宗 2年 7月 18日, 21日》
[주13] 동당시(東堂試) : 대과(大科)나 문과(文科)의 속칭으로, 여기서는 문과 향시(鄕試)를 이른다. 본래 ‘동당’은 진(晉)나라의 궁전 이
름인데 이곳을 한때 과장(科場)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과거를 뜻하는 말이 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과거 시험의 본고시(本考試)
인 예부시(禮部試)를 동당시라고 칭하였는데,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주14] 널리 …… 한다〔泛愛親仁〕 : 이 말은 《논어》 〈학이(學而)〉 제6장에 공자가 “자제(子弟)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손하
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진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仁)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여가
를 이용하여 글을 배워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한 부분에 보인
다.
[주15] 남응중(南膺中)의 옥사(獄事) : 1836년(헌종2)에 남응중(1810~1836) 등이 일으킨 역모 사건을 말한다. 남응중은 남경중(南慶
中), 문헌주(文憲周), 남공언(南公彦) 등과 함께 충청도 목천(木川)에서 작당하여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역
을 도모하였으나, 이속(吏屬) 천기영(千璣英)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관련자들이 체포되자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동래에 있는 왜관(倭館)에 들어가 탈출을 도와줄 것을 청하였지만, 거절당하고 관헌에
인도되었다. 남응중은 결국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고, 이 모의에 가담했던 이들도 극형에 처해졌다. 《憲宗實錄 2年 12月 12日, 18
日, 19日, 21日, 23日, 24日》
[주16] 문사랑(問事郞) : 문사낭청(問事郞廳)의 준말로, 죄인을 심문할 때에 기록과 낭독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은 임시 벼슬이다.
[주17] 이때에 …… 되었다 : 1836년(헌종2) 12월 24일 밤에 좌의정 홍석주(洪奭周) 등 국청(鞫廳)의 여러 대신들이 청대(請對)하여 당
시 수렴청정 중이던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를 뵙고서 남응중(南膺中) 일당의 공초 내용과 관련하여 논하였는데, 이 일이 문
제가 되어 탄핵상소가 올라오고 급기야 삼사(三司)가 합계(合啓)하여서, 결국 이 일로 홍석주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의 처
벌을 받았다. 《承政院日記 憲宗 2年 12月 24日, 25日, 28日》
[주18] 공은 …… 청하였는데 : 1837년(헌종3) 1월 10일에 당시 헌납(獻納)으로 있던 이정리(李正履)가 상소를 올려서 합계(合啓)할 당
시 신병이 있었고 또 부향(祔享)의 일로 재계하였던 까닭에 합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이윽고 삼사(三司)를 견파(譴罷)하라는
명이 있었을 때에는 사간원의 현직(現職)이 자신뿐이어서 규례대로 연명하였을 뿐이라고 변론하였다. 《承政院日記 憲宗 3年 1月
10日》
[주19] 대간(臺諫) …… 논죄하여서 : 1837년(헌종3) 1월 12일에 집의(執義) 권대긍(權大肯)이 상소하여, 이정리(李正履)가 시임 대관
(時任臺官)으로서 병을 칭탁하고는 율(律)을 더하자는 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부르는 명을 어기고서 마침내 우선 정
계(停啓)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이는 공(公)을 저버리고 자기 당(黨)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행위이므로 유배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承政院日記 憲宗 3年 1月 12日》
[주20] 가릉(嘉陵) : 가릉군(嘉陵郡)을 가리키며 지금의 경기도 가평이다.
[주21] 쇄마구인(刷馬驅人) : 중국에 사신 갈 때에 방물(方物)을 말에 싣고 가는 사람으로, 민간에서 징용하였다.
[주22] 다시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 이정리(李正履)가 1840년(헌종6) 3월 20일에 교리에 제수된 것을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憲宗
6年 3月 20日》
[주23] 제(齊)나라 …… 일 : 제나라 위왕(威王) 때에 아(阿) 지방을 맡아 다스리던 아 대부(阿大夫)가 탐학한 짓을 하면서도 위왕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쳐 정사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게 하자, 위왕이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뇌물을 바치면서 명예를 구하였다는 이유로 아 대부를 팽형(烹刑)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를 보고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제나라
가 크게 다스려졌다고 한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주24] 먹자[墨尺] : 먹자는 사헌부(司憲府)에 속한 나장(羅將) 혹은 사령(使令)을 가리킨다.
[주25] 또 …… 하였다 : 이정리(李正履)는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으면서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의 내용은 《승정원일기》 헌
종 8년 2월 14일 기사에도 보인다. “근기(根基)를 쌓고 간가(間架)를 세우는 것”이라는 말은 승정원일기에 실린 이정리의 상소의
해당 부분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신이 듣건대 제왕의 학문에는 근기(根基)가 있고 간가(間架)가 있으니, 신심(身心)과 성명(性
命),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요점은 이른바 근기이고, 예악(禮樂)과 전장(典章), 구경(九經)
과 팔병(八柄)의 도구는 이른바 간가입니다. ……
정자(程子)가 ‘9층의 대(臺)를 만들 때에 모름지기 그 근기를 크게 하여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하였고, 주자(朱子)가 ‘《대학》으
로 간가를 만들고 다른 책으로 메워 보충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근기가 견고하지 않고 간가가 정해지지 않고서 성왕(聖王)의 공업
(功業)을 성취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臣聞帝王之學, 有根基有間架, 身心性命修齊治平之要, 此所謂根基也, 禮樂典章九
經八柄之具, 此所謂間架也. …… 程子曰: 如作九層之臺, 須大其基方得. 朱子曰: 大學作間架, 以他書塡補云. 蓋未有根基不
固, 間架不定而能成就聖功者也.]”
[주26] 3월에 …… 올랐고 : 인릉(仁陵)은 순조(純祖)의 능으로, 당시 있었던 친제(親祭)에서 이정리(李正履)가 집례(執禮)를 맡은 일로
인하여 가자(加資)된 사실이 《헌종실록》 8년 3월 12일 기사에도 보인다.
[주27] 도암(陶庵)의 예서(禮書) : 도암은 이재(李縡, 1680~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ㆍ한천(寒泉)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예학(禮學)에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사례편람(四禮便覽)》
이 있다.
[주28] 구포(瞿圃) 이명연(李明淵) : 1758~1803. 자는 여량(汝亮), 호는 구포,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
다. 1790년(정조14)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으면서 전강(殿講)의 수석이 되었고, 그해에 증광 문과 전시에 급제하여서 승문원 부정
자에 임명된 이래, 사간원 정언ㆍ사헌부 집의 등을 지냈다. 시폐를 극간한 이유로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나가 1799년 북청 부사(北
靑府使),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으며,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두문불출하였다. 《老洲集 卷17 永興府使李公墓誌銘》
[주29] 호 한림(胡翰林) 극기(克己) : 호극기(?~?)는 송(宋)나라 유학자인 호안국(胡安國)의 17세손으로, 1620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등주(登州)에서 배를 탔다가 표류하여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에 이르러 북방에 정착하게 되었고, 함경도 이성(利城)과 북청(北靑)
에서 거주하였다. 문장을 잘 짓고 천문, 지리, 의약, 복서에 두루 밝았다고 한다. 《碩齋稿 卷9 海東外史 胡克己》
[주30] 자정(自靖) :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에게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
마다 스스로 선왕(先王)에게 뜻을 바칠 것이니, 나는 떠나가 은둔함을 돌아보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본래는 스스로 의리에 맞게 처신하여 그 처지를 편안하게 여긴다는 뜻인데, 후세에는 은둔하여 지조를 지킴을 가리
키는 말로 많이 사용하였다. 여기서는 명나라에 대한 지조를 지켰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書經 微子》
[주31] 바로잡힐 : 원문의 ‘평번(平反)’은 잘못된 판결로 억울하게 죄를 입은 일을 다시 조사하여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한 소제(漢昭帝)
때 준불의(雋不疑)가 경조 윤(京兆尹)이 되어 현(縣)을 순행하면서 죄수들을 조사하고 돌아올 적마다, 노모가 불의에게 “이번에는
평번을 해서 몇 사람이나 살렸느냐?”라고 물었는데, 만일 평번을 해서 죄를 감해 준 일이 많으면 기뻐하고, 평번한 것이 없으면 노
하여 밥도 먹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71 雋不疑傳》
[주32] 가마(加麻) : 애도의 표시로 스승이나 존경하는 사람의 상(喪)에,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주33] 시조의 사친인 신빈(愼嬪) : 신빈은 세종의 후궁인 신빈(愼嬪) 김씨(金氏, 1406~1464)로, 이정리(李正履)의 시조인 계양군(桂陽
君) 이증(李璔, 1427~1464)이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의 소생이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34] 세일제(歲一祭) : 친진(親盡)한 조상에 대하여 1년에 한 번씩 묘제(墓祭)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주35] 조위(祧位) : 제사를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된 조상의 신주로서 체천(遞遷)할 신위를 가리킨다.
[주36] 옛날에 …… 하였다 : 황상(黃裳, 1146~1194)의 자는 문숙(文叔), 호는 겸산(兼山)으로, 융경부(隆慶府) 보성(普成) 사람이다.
가왕부(嘉王府), 즉 영종(寧宗)의 익선(翊善)이 되었을 때, 광종 황제가 유시를 내려 “가왕의 학문은 모두 경의 공이오.”라고 하
자, 황상은 인용한 글과 같이 대답하였는데, 이에 광종이 천하의 제1등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황상은 주희(朱熹)라고 대답하였다.
《資治通鑑後編 卷129 宋紀 光宗》
[주37] 정자(程子)의 …… 것 : 이는 본래 주자(朱子)의 말로, 《근사록(近思錄)》 권1에 정이(程頤)가 “성(性)은 곧 이(理)이다. 천하의
이치가 그 말미암아 나온 바를 근원해 보면 불선함이 없으니, 희로애락이 미발(未發)했을 때에 어찌 일찍이 불선함이 있겠는가.
…… [性即理也. 天下之理, 原其所自來, 未有不善, 喜怒哀樂未發, 何嘗不善? …… ]”라고 한 부분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註)
에 보인다.
[주38] 전대(專對) : 사신(使臣)을 뜻하는 말이다. 외국에 나간 사신이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전권으로 대응하는 데서 온 말로, 《논어》 〈자
로(子路)〉의 “《시경》 3백 편을 외우더라도 정치를 맡겨줌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 감에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
다.
[주39] 육(陸)과 …… 견해 : 육(陸)과 왕(王)은 남송(南宋)의 학자 육구연(陸九淵, 1139~1192)과 명(明)나라 때의 학자 왕수인(王守
仁, 1472~1528)이다. 육구연의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왕수인의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
명(陽明),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육구연이 ‘심즉리(心卽理)’의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을 주창하여 주희(朱熹)의 ‘성즉리
(性卽理)’와 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에 대항하였는데, 이때부터 유학은 심학(心學)과 이학(理學)의 두 학파로 갈라졌다. 뒤에 육
구연의 학문은 왕수인에게 계승되어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였다.
[주40] 존주(尊周)의 대의(大義) : 《춘추(春秋)》의 기본 의리로,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격하는 것이다. 여기에
서는 과거 천자의 나라였던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서 높임을 이른다.
[주41] 나라가 …… 보여준다 : 원문의 ‘국사시검(國奢示儉)’은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함으로써 보여 준다.
[國奢示之以儉.]”라고 한 증자(曾子)의 말을 축약하여 말한 것이다.
[주42] 장사가 …… 안다 : 원문의 ‘식가삼배(識賈三倍)’는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에 “마치 장사가 세 배의 이익을 보는 것을
군자가 아는 것과 같다.[如賈三倍, 君子是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43] 석갈(釋褐) : 신분이 낮은 사람이 입는 옷인 갈옷을 벗고 관복을 입는다는 뜻으로 벼슬에 처음 입사(入仕)함을 이른다.
[주44] 조병현(趙秉鉉) : 1791~1849.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길(景吉), 호는 성재(成齋)ㆍ우당(羽堂)이다.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
다. 조만영(趙萬永)ㆍ조인영(趙寅永) 등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정치를 이끈 중심인물이었다.
[주45] 송(宋)의 증자고(曾子固) : 북송(北宋)의 문장가로 당송팔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증공(曾鞏, 1019~1083)으로, 자고는 그의 자이
다.
[주46] 황조(皇朝)의 귀희보(歸煕甫) : 명(明)나라 때 문장가 귀유광(歸有光, 1506~1571)으로, 희보는 그의 자이다.
[주47] 미나리와 …… 데 : 원문은 ‘근폭지헌(芹曝之獻)’으로, 하찮은 것이라도 임금을 생각하여 바치고자 하는 아랫사람의 정성을 가리킨
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추운 겨울을 지내고 봄철의 따스한 햇볕을 쬐면서 이 햇볕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 임금에게 바
치려고 하였는데, 그 마을의 한 부자가 그에게 “옛날에 미나리를 즐겨 먹던 가난한 농부가 그 지방 부호에게 미나리를 바쳤다가 부
끄러움을 당한 일이 있는데 바로 그대가 그런 사람이다.”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列子 楊朱》
[주48] 무성한 다북쑥 : 원문의 ‘청아(菁莪)’는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서 온 말로, 인재를 교육하여 무성한 다북쑥을
기름과 같이 한다는 뜻이다. 모서(毛序)에서는 ‘인재 기르는 것을 즐거워한 시’라고 하였다.
[주49] 연비어약(鳶飛魚躍) : 만물이 천리에 순응하여 본성대로 제자리를 얻고 살아가는 모습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 〈대아(大雅) 한록
(旱麓)〉에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고 하였다.
[주50] 훌륭한 …… 내었도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이 왕국에서 태어났네. 왕국에서 능히 인재를
내었나니, 주나라의 동량이 되리로다.[思皇多士, 生此王國. 王國克生, 維周之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51] 봉황이자 기린 : 상서로움의 증표가 되는 것으로, 여기서는 걸출한 인재를 뜻한다.
[주52] 왕의 …… 호령하여 : 《주역》 〈쾌괘(夬卦) 괘사(卦辭)〉에 “쾌는 왕의 조정에서 드러냄이니, 지성으로 호령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이 있게 하여야 한다.[夬揚于王庭, 孚號有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53] 선을 …… 같았네 : 악정자(樂正子)는 이름이 춘(春)으로 증자(曾子)의 제자이다. 그가 노나라에서 벼슬하자 맹자께서 이 말을 듣
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였는데, 이를 의아하게 여긴 공손추가 그 이유를 묻자 맹자가 “그 사람됨이 선(善)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손추가 “선을 좋아하는 것으로 족합니까?” 하자, 맹자가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도 충분하거늘 하물며 노나라
에 있어서랴.[好善優於天下, 而況魯國乎?]”라고 한 내용이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보인다.
[주54] 범순부(范淳夫) : 북송(北宋)의 명신(名臣)인 범조우(范祖禹, 1041~1098)로, 순부는 그의 자이다. 그는 평소에 남의 잘못을 말
하지 않았으나, 일을 당하면 원칙을 지켜 조금도 숨기지 않고 시비(是非)를 분별하였다. 신종(神宗) 때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자
치통감(資治通鑑)》을 기술하고, 당나라의 역사 비평서인 《당감(唐鑑)》을 저술하였다. 《宋史 卷337 范祖禹列傳》
[주55] 계옥(啓沃) : 신하가 자기의 식견으로 임금을 잘 계도(啓導)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 〈열명(說命)〉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그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시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56] 육일거사(六一居士) : 송(宋)나라 때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로, 육일거사는 그의 호이다. 당송팔대가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문장가로 유명하지만, 인종(仁宗) 때 간관(諫官)을 지내고 추밀 부사(樞密副使) 등을 거쳐 참지정
사(參知政事)를 지내는 등 정치가로도 업적을 남겼다.
[주57] 남풍(南豐) : 송(宋)나라 남풍(南豐) 출신인 증공(曾鞏, 1019~1083)으로, 자는 자고(子固)이다. 가우(嘉祐) 진사로 중서사인(中
書舍人)에 발탁되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경술(經術)에 깊고 문장에 정교하였다. 저서로는 《원풍유고(元豐
類稿)》가 있다.
[주58] 소 …… 썼으니 : 큰 재능을 작은 일에 시행함을 말한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자유(子游)가 다스리는 무성(武城)에 가
서 현가(絃歌) 소리를 들으시고,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雞, 焉用牛刀?]”라고 말한 데서 온 것이다.
[주59] 공수(龔遂)이자 황패(黃覇) : 모두 훌륭한 관리로 알려진 이들이다. 공수는 한(漢)나라 남평양(南平陽) 사람으로 자는 소경(少卿)
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간쟁을 잘하기로 유명하였고,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패검(佩劍)을 팔아 소를 사서 농
사에 힘쓰도록 권장하는 등 훌륭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 《漢書 卷89》 황패는 한나라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차공(次公)이다.
율령(律令)에 밝았으며 하남(河南)과 영천(潁川)의 태수를 거쳐 승상(丞相)에 오르고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史記 卷96》
[주60] 숙향(叔向)처럼 전대(專對)함에 : 숙향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 양설힐(羊舌肸)의 자(字)로, 학식이 풍부하여 외국에 사신 가
서나 외국의 빈객을 접대할 적에 응대(應對)를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전대는 사신(使臣)을 뜻하는 말인바, 외국에 나간 사신이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전권으로 대응한다는 뜻으로, 《논어》 〈자로(子路)〉의 “《시경》 3백 편을 외우더라도 정치를 맡겨줌에 제대
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 감에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
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주61] 손복(孫復)과 석개(石介) : 모두 훌륭한 선비로 알려진 송(宋)나라의 문인이다. 소식(蘇軾)의 〈학교공거차자(學校貢擧箚子)〉에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옛것을 잘 배우기로는 손복, 석개만한 이가 없다.[通經學古者, 莫如孫復石介.]”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손복(992~1057)은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문인으로 자는 명복(明復)이며 평양(平陽) 사람이다. 태산(泰山)에 살면서 《춘추
좌씨전》을 가르쳤는데 명성이 널리 알려져 과거를 거치지 않고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에 제수되었으며, 태산학파(泰山學派)를
창도하여 석개, 문언박(文彦博) 등 유수한 학자를 배출해 송학(宋學)의 선구가 되었다.
석개(1005~1045)는 자가 수도(守道)이며 봉부(奉符) 사람이다. 학문에 독실하여 경서(經書)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국자감 직강
(國子監直講), 태자중윤(太子中允)을 역임하였는데 엄격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조래선생(徂徠先生)으로도 일컬어졌다. 《宋史 卷
432 孫復列傳, 石介列傳》
[주62] 육(陸)ㆍ왕(王)ㆍ모(毛)ㆍ대(戴) : 육구연(陸九淵, 1139~1192)과 왕수인(王守仁, 1472~1528), 모기령(毛奇齡, 1623~1716)
과 대진(戴震, 1724~1777)을 가리킨다. 육구연은 남송(南宋)의 학자로 호는 상산(象山)이며, ‘심즉리(心卽理)’의 주관적 유심론
(主觀的唯心論)을 주창하여 주희(朱熹)의 ‘성즉리(性卽理)’와 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에 대항하였는데, 명(明)나라 때의 학자
왕수인이 이를 계승하여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시켰다.
모기령은 명말청초의 학자로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증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인용은 방대했지만 상세하게 확인하지 않아 오
류가 많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사서개착(四書改錯)》을 지어 주자를 비판한 바 있다. 대진은 청(淸)나라의 경학가로 모기령과 마찬
가지로 고증학에 조예가 깊어, 훈고를 구하고, 훈고를 통해 의리를 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주63] 돼지처럼 날뛰니 : 원문의 ‘시촉(豕躅)’은 《주역》 〈구괘(姤卦) 초육(初六)〉에 “파리한 돼지가 날뛰려는 마음이 간절하다.[羸豕孚
蹢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64] 가까이 닥친 재앙 : 원문의 ‘박상(剝床)’은 《주역》 〈박괘(剝卦) 육사(六四)〉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르니 흉하다.[剝牀以膚,
凶.]”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그 상전(象傳)에 “상을 깎아 살갗에 이르는 것은 재앙이 매우 가까워진 것이다.[剝牀以膚, 切近災
也.]”라고 하였다.
[주65] 사교(四敎) : 문(文)ㆍ행(行)ㆍ충(忠)ㆍ신(信)을 가리킨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네 가지 덕목으로 가르쳤는데, 즉 문
ㆍ행ㆍ충ㆍ신이었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66] 설산이 가볍고 무거워졌으니 : 두보(杜甫)가 엄무(嚴武)에게 준 시에서 엄무(嚴武)에 대해 “공이 오니 설산이 무거워지고 공이 가
니 설산이 가벼워졌네.[公來雪山重, 公去雪山輕.]”라고 한 데서 온 표현으로, 상대방의 덕망을 찬양하는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
16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주67] 어찌하여 …… 말인가 :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억지로라도 원로 한 분을 남겨두어,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
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고 한 표현을 원용한 것이다. ‘동량기둥을 높이다’라는 것은 《주역》 〈대과괘(大過卦) 구
사(九四)〉에 “구사는 들보기둥이 높으니 길하다.[九四, 棟隆, 吉.]” 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상전(象傳)〉에 “들보기둥이 높으
면 길한 것은 아래로 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棟隆之吉, 不橈乎下也.]”라고 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성은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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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醇溪李公墓誌銘 幷序
嗚呼。此醇溪李公之墓。公闡嵬科登顯仕。不揭官名。稱其野號者。以公平生志趣之在玆也。公諱正履字審夫。系出璿源。以英陵別子桂陽君忠昭公諱璔爲始祖。九傳至觀察使諱德英。以直道爲明陵名臣。公高祖也。曾祖諱繼華。祖諱輔天。有至行隱德。學者私謚曰遺安處士。考諱在誠。文學淸修。爲正廟所奬詡。拜寢郞不就。三世俱以文行著名。妣全州柳氏。縣監憗其考也。公生稟異質。纔成童。已通詞藝。稍長名聲藉甚。丁卯成進士。辛巳拜康陵參奉。轉義禁府都事。被辟換軍資監奉事。料量出納。默究糶糴轉運利病源委。著邦積邦弊等說。己丑出監宜寧縣。邑俗勁悍。吏多偸弄。公諭之曰爾等奈何以父母所生之身。冒姦僞偸竊之名。廉耻羞惡。是爾輩本心。其各致告。圖所以釐革。於是皆相戒勿欺。邑有退溪李文純公鄕約。修舊起廢。斟酌損益。月季考校而施賞罰焉。民俗大和。邑糴屢萬石。因積貯無法。虛勘過半。公欲依社倉式。以條例議于上營。道伯素與公異趣。而贊公治行第一。風勵一路。庚寅翼廟諱音至。守宰疑所服。公據補編所載。謂上服當斬衰。臣民則朞年。率吏民擧哀成服。奔慰道伯。布巾麻屩。齎衰服以往。道伯巾絰受慰。諸守宰皆倉卒借服於公。輪次成禮而出。道伯詡公知禮。辛卯遭艱。居廬盡禮。甲午純廟昇遐。啜粥寢苫。見人方喪儀節有不及古者。嗚咽流涕。乙未擢登極慶科。金陵南公公轍,淵泉洪公奭周馳書相賀曰。朝廷得人矣。例付典籍。丙申以記注官參修純廟實錄。秋掌試關西。士有通關節者。諭之以義。西士赴京試者。聞之爭旋踵。以東堂製述非經生所習。專取講誦。額小人多。無以刊汰。則幷出付試儒公共圈點。因爲榜目。士皆羅拜輿前曰吾師先生出矣。除副校理。始講論語首編。進曰聖人之學。不過孝弟忠信仁愛也。殿下於此六字。親切玩味。眞實加工。則聖學自然將就。因及泛愛親仁之旨曰。人君於萬姓兆民之衆。無一不愛。遍覆均燾。而若不得仁賢有德之人而親近焉。則邪佞雜進。惠澤不降。臣願殿下於大小臣僚。必取此等人。朝夕左右。暬御近侍。亦取其小心謹愼。不作罪過者。敷求草野學問才德之士。甄拔奬用。野無遺贒。然後親仁之效。可及於八方矣。後因晝講。請兼行召對於夜靜無事。昬惰易乘之時。且令書進古事。用備觀省。公每當進講。宿齋豫戒。至誠悃款。聖度淵默。而於公屢有顧問。膺中獄起。爲問事郞。囚供叵測。將網打搢紳。時洪公奭周以按獄大臣。懼流毒一世。倡僚相求對。辭不達意而退。彈章徑發。持洪公甚急。上遽罷發啓三司。臺閣一空。公適拜獻納。不參合啓。而憲長聯公名論不宜盡逐臺諫。是時與洪公終始周旋。知其斷無他意者惟公。而憲長疏語。又非公所與聞也。公上章自引。乞賜斥退。臺諫權大肯論以背公死黨。遂謫靈巖。宥還嘉陵。著捄荒書。講究常平遺法。己亥差節使書狀官。比還京有洋賊越境。現發就戮。公憂邊禁不嚴。到灣上榜諭切戒。雜稗淫巧及刷驅輩隳突貽羞之習。一行整肅。復命復拜校理。進講齊烹阿大夫事。因曰治惡莫善於使之知恥。本朝立國仁厚。先敎而後刑。或有貪汚不法者。臺憲以墨漆其門。俾不得齒諸人。至今憲隷有以墨尺名者。國朝典章。可與三代同稱者。此類是也。又言心軆如鏡。姸媸莫逃。必時磨濯。塵垢不集。然後此心常淸。事理瞭然。讀書進學。卽其磨濯之具。又因辭館職䟽。陳帝王之學。築根基立間架。若大學衍義聖學輯要。於聖贒心法。治國規模。尤所詳列。於此二書。從容講究。必有裨於根基間架之學矣。三月上親祭仁陵。以執禮敍勞陞通政。拜工曹參議。六月出爲北靑府使。以敎化爲先務。首訪篤行之士。約會論學。請業者館置之。授朱子書。親正句讀。悶禮俗貿貿。分賜陶庵禮書于鄕塾。拜瞿圃李公明淵祠。戒鄕士遵述敎條。皇明胡翰林克己自靖東來。有遺祠在本邑。公往拜之。銘其廟碑。北地不產綿。南賈稛褪衣敗絮。以易北貨。而官從以征之。公恥其無藝。悉停之。民獵鹿矢魚以爲業。有獲輒攘而屬官。公曰官欲需茸魚。自有俸錢。命置之。有埋尸而誣富人拷死者。公親往掘檢。獄得平反。公素患腦癤。歸而大肆。出次外廨。呼筆與季氏書。怡然而逝。時癸卯七月二十七日也。距其生甲子一周。未及晬二十一日。公疾㞃士民坌集。村婦頂香祈瘳。及喪奔走啼號。如哭天倫。値潦水漲。髦士入水牽輀。奠誄加麻者甚衆。八月厝于加平台峯里庚坐。從先兆也。公忠恕成質。淹博爲資。濟以謙虛退約。晨謁家廟。躳操畚箒。祀享齋愼。蠲潔洞屬。常恨大宗祠屋未建。謀所以移近小宗。擧四時正祭。始祖私親愼嬪墓在南陽。倡諸孫行歲一祭。祧位將遷于次房鄕廬。公自請替攝。外先忌辰。必助需。寧不腆無闕。是皆孝之推也。居恒愼默。時政得失。民生休戚。隱約於眉睫間。常以居官者一切辦事。而不本於敎化心術爲可耻。自奉澹泊。蔬糲不繼。而念在於一世之飢者。嘗値荒年。製紙囊納升米。周族人竆乏。俾免捐瘠。少日自塲屋歸。見人寒餓仆地。擔致邏幕。候其溫甦。有人値盜失衣冠。曉以徒髫來告急。輟與己具。不問名姓。此類甚多。不可殫記。每出入筵席。以成就聖德自任。而一時僚寀。趣味落落。公慨然曰今日急務。孰有大於此者。若不責我以他事。俾得專意於此。則必有以自効。雖老死此職無恨也。昔黃裳有云若欲進德修業。追踵古先哲王。須用天下第一等人。公庶幾當之。而罔卒其志願。惜哉。公少好學。徧交富世名士。如老洲吳文元公,淵泉洪公,臺山金公邁淳。皆相與往復。晩年專意四子程朱書曰。吾儒家法。畢竟歸宿於此。嘗論心性命理之說曰。本然氣質。四者皆有之。不可謂氣質屬心。本然屬性也。以程子所謂未發之中。氣不用事。有善無惡者爲宗旨。日用之間。察其發於理發於氣之分。以爲從捨。論知行先後。以朱子所謂
隔斷中間。兩致其功者爲度。專對之行。以此說與中州諸儒。力辨陸王之偏枯。爲諸儒之謳吟思明者。述本國所講尊周大義。俾補潛史之闕。又述先正學術源流。約附淵源錄之後。嘗劇論民國利病。必擧大學末章兩節之訓而屢致意焉。且曰國奢示儉。古人微權。識賈三倍。詩人所歎。士夫纔釋褐。已專心於田宅裘馬。其無意於他可知。異日何所藉手。以節儉導上哉。常避遠權貴。趙秉鉉宴集廷紳邀公。而公不往。其骯髒自守如此。於文章最愛宋曾子固皇朝歸煕甫。有詩文集若干卷。救荒草略,讀書漫筆,春秋考例,讀史平反四部。皆公手編。而英陵致治考一書。盖將極意櫽括。庸備芹曝之獻者。纔成半稿云。配平山申氏。溫和慈惠。贈淑夫人。通德郞光謹女。參判耆其祖也。一男碩鏞。堅苦愨實。有克家行。孫男五人。長淵韶。餘幼。公弟前縣監正觀。以不佞嘗在朋從之末。猥謁幽堂之誌。盖從公久而服公深者。宜莫如余也。故不敢以耄癃辭。後之君子。求公學術之正。德行之懿。經綸之富。文章之盛者。觀於此而知之矣。嗚呼。今日何處得來。古所謂徒步然後。知車之功用者。詎不信哉。銘曰。
詩歌菁莪。爰及飛躍。思皇多士。克生王國。公應昌辰。瑞鳳祥麟。揚庭孚號。正笏垂紳。優於好善。樂正是似。淳夫啓沃。天顔有喜。六一政事。南豐文章。百里牛刀。民曰龔黃。叔向專對。不辱君命。我儀孫石。闢邪衛正。陸王毛戴。橫流稽天。麾之談笑。疏瀹眞源。洋醜豕躅。憂切剝床。整我行李。無染我疆。原始要終。名實純粹。聖門四敎。庶無不備。君子所依。小人所庇。公來公去。雪山輕重。胡不憗遺。以隆余棟。報在不食。垂裕遺贏。菀彼嘉陵。有侐佳城。陵谷雖變。不泐令名。我辭靡媿。昭眎千齡。<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