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4. 3. 15. 04:08
韋堂 安潚 著「非有子問答」序
[해설] 이 글은 이상설(李相卨)선생이 동향(同鄕)의 벗이며, 먼 인척인 안숙(安潚)이 저술한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을 보고 그 서문으로 지어준 것이다. 이 글을 지은 때는 이상설선생이 과거에 급제하고 관계(官界)에 나간 다음해인 1895년 11월로서 약관 26세 때였다.
선생은 이미 전통적 성리학자로 유명하였지만, 한편 개화사상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 일가견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의 병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습속(전통과 구습을 말함)에 얽매여 시세(時勢)의 발전을 알지 못하여 개혁을 하지 못하고, 옛것에만 빠져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개화(開化)에만 급급한 것으로 근저를 굳게 갖지 못하고 자기 것만 옳다고 독책(督責)하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순고식(因循姑息-낡은 습관이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 만을 취함)하여 끝내는 발전할 기약이 없는 것이다.”라는 글을 남겨 주체 의식과 개화사상을 엿보게 한다.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을 쓴 안숙( 安潚)은 호가 위당(韋堂)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1864년(고종 1)에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94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895년에 이상설(李相卨)선생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成均館 正五品)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 국망(國亡) 소식을 듣고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그의 저서로는 미간행의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과 「위당집초(韋堂集草)」등 몇 권이 있는데, 그의 아들 안태식(安台植, 1975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84번지 거주) 님 이 소장하고 있다.
[머리말]
네 일찍 들으니 운산(運算)을 잘하는 사람은 반드시 분수(分數)에 밝아 결승(決勝)하고, 행기(行棋- 바둑·장기의 돌이나 말을 움직이다)를 잘하는 사람은 국세(局勢)를 살펴 착수한다고 한다. 이로써 보더라도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모름지기 그 요령을 잘 얻어 때에 따라 알맞게 조치하므로 그 설시(設施-알기 쉽게 풀이하여 보임) 하는 것은 마치 재부(宰夫-요리사)가 탕국(大국)을 조화시키는 것과 같아서 쓰고 짠 것을 각각 그 맛에 알맞게 하는 것이다.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의 병폐는 두 가지가 있다. 습속(전통과 구습을 말함)에 얽매여 시세(時勢)의 발전을 알지 못하여 개혁을 하지 못하고, 옛것에만 빠져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개화(開化)에만 급급한 것으로 근저를 굳게 갖지 못하고 자기 것만 옳다고 독책(督責)하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순고식(因循姑息-낡은 습관이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을 취함)하여 끝내는 발전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나의 벗 안상사숙(安上舍潚) 씨는 호서(湖西-충청도’를 달리 이르는 말) 망사(望士), 나와 사돈(朱陳-인척)의 정의(情義)가 있어 늘 보고 만나는데, 그 아담하고 묵중하고 민첩한 것이며 학문이 넓고 생각이 깊어 진실로 복력(伏력)의 한 기마(驥馬)이나, 세상에 알아주는 사람(伯樂子)이 없어 물외(物外)에 우유(優游)하지 못하고 문득 웃고 울부짖는 심정을 글로 지어 그 강개민울(慷慨憫菀)한 기분을 털어 내어 모아서 한 책을 만들어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이라고 제명(題名)하였다.
그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수람인물(搜攬人物)과 우병어농(寓兵於農)이라는 정론(政論)은 경사(經史)에 근본하여 고금(古今) 불역(不易)의 요도(要道) 이므로 선성(先聖)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으며, 그 훈농무재(訓農務材)와 통상혜공(通商惠工)과 식재교양(殖財敎養)과 같은 논설은 시무(時務)와 각국 공호(公好)의 신법(新法)에 달하여 삼권분립(三權分立)의 각 설(設)에 묵계하는 바였다.
범연히 보면 옛날의 번잡과 범용(凡冗)에 가까운 것 같아 실용에 적합하지 못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실(名實)이 콱 짜이고 강조(綱條)가 다 얽매여 그저 겉치레만의 문자에 비할 바 아닐 뿐만 아니라, 집법자(執法者)가 취해본다면 미진일벌(迷津一筏)과 암실고등(暗室孤燈)과 같을 것이며, 또한 눈을 닦고 귀를 후비는 일조(一助)가 될 것이라고 일러 둔 다.
을미년(乙未年, 1895) 남지절(南至節-동짓날)
보재거사 이상설 씀(溥齋居士李相卨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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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安潚)
[진사시]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899위(929등/1055명)/합격연령>21歲
1863년(철종 14) ∼1910년(융희 4). 조선 말기의 절의사(節義士). 자는 공위(公威), 호는 위당(韋堂), 본관은 순흥(順興). 생원(生員) 안우량(安友良)의 아들로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급제한 유림(儒林) 출신으로 전통 학문에 조예가 깊었지만, 신학문(新學問) 또한 관심이 깊었다.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의 천거로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成均館正五品)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행되자 일제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였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의 자결 소식을 듣고 제문(祭文)을 지어 충정(忠貞)의 뜻을 나타내었다. 1910년(융희 4)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피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괴산의 오랑강(五浪江)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저서로 미간행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이 있다.
집필자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