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방 열자 빛바랜 고문헌 수천건이 쏟아졌다.
동아일보, 이소연 기자, 2022. 12. 28.
충북 청주 고령신씨(高靈申氏) 가문의 장손 신모 씨의 자택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문헌들이 살고 있다. 집안 서재 한 칸을 채우고도 넘쳐 더 이상 둘 곳 없는 고문헌들을 지키기 위해 회사의 자투리 공간을 빌릴 정도다.
12월 28일 동아일보와 전화로 만난 신 씨는 “자료가 워낙 방대해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이 문헌의 진가를 드러날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고민이 커져가던 와중에, 9월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화재청이 종중(宗中)을 포함해 민간에서 보존해온 기록유산을 전수 조사하고 있다는 전화였다. 흔쾌히 조사에 응한 신 씨는 빛바랜 고문헌들이 가득한 ‘비밀의 방’ 문을 활짝 열었다. 문화재청에서 9월 28일부터 한 달간 고령신씨 가문의 고문헌 자료 실태를 전수 조사한 결과 2359건에 이르는 새로운 고문헌의 존재가 드러났다.
고문헌 가운데는 조선후기 문신 신좌모(1799~1877)가 1855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청나라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 작성한 ‘연행일사(燕行日史)’ 유일본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외교문서를 기록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간 그가 남긴 일지에는 청나라 문인들과 나눈 대화와 시조가 빼곡했다. 조사에 참여한 김근태 고문헌과콘텐츠연구소 대표는 “당대 조·청 문인들의 문화교류사를 보여주는 핵심 사료”라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민간 기록유산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디지털화하는 ‘기록유산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일부 지역 대학 등에서 개별적으로 민간 기록물을 조사한 적은 있지만, 문화재청이 나서 전수 조사를 하고 일원화된 DB를 구축하는 건 처음이다. 올해 첫 사업에 나선 문화재청은 충청·전라·제주 지역에서 2만 건이 넘는 신규 고문헌 자료를 찾아냈다. 내년부터는 지역을 넓혀 2026년까지 전국에 흩어진 민간 기록유산을 전수 조사할 방침이다.
그간 민간에 보존해온 고문헌들은 조선왕실의 기록문화유산에 비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비지정문화재’였다. 개인이나 지역 문인들이 남긴 사적인 기록물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근 역사 연구에서 한 시대의 생활문화상이 생생하게 담긴 미시사(微視史)의 중요성이 커지며 민간 기록유산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정제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전문위원은 “한 개인이 남긴 가장 사적인 역사는 거시적인 한국사의 공백을 채워줄 핵심 사료”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이번 전수 조사에서 충북 제천의 양승운 의병연구가가 수집해온 항일 의병 사료 가운데 독립지사 이범진 열사(1852~1911)가 남긴 유일한 시고(詩稿) 1건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김근태 대표는 “주 러시아 초대 공사로 조국 독립을 위해 힘쓰다 1911년 경술국치에 항거하며 자결한 이 열사는 생전 기록이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다“며 ”이 시고는 그가 남긴 유일한 문학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양 연구가 소장 자료에서 1896년 경북 안동에서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한 권세연(1836~1899)의 격문도 발견됐다.
20세기 대표적인 문인 화가로 꼽히는 아산 조방원 화백(1926~2014)이 개인적으로 수집해온 고서 1만990건도 이번 조사에서 빛을 보게 됐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 목판본 919장이 대표적이다.
이아람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행정사무관은 “성리대전 목판본이 이렇게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발견된 것 역시 처음”이라며 “문화재청은 이 사료들을 미래의 국가지정문화재로 보고 후속 연구를 진행해 기록유산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기사 내용을 정리하여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