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流行歌)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요가 그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대중과 밀착하여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민요·잡가·가곡·판소리와는 양식적으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일본을 통한 서양음악의 유입에서 발생된 것이다.
대중가요는 가곡류의 고급예술음악과는 구별되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강하게 띠는 음악 장르이므로 대중매체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대중가요가 시작된 1920년대는 일본 음악산업이 한국에 진출한 때였고, 경성방송국의 개설도 대중가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방송국이 개설되었다고는 하나 당시 한국에는 축음기와 라디오 같은 매체가 잘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가수들이 있는 유랑극단이나 약장수들이 축음기를 틀어놓은 장터, 또는 축음기나 라디오를 갖고 있는 부잣집 마당에서 듣는 노래의 형태로 대중가요는 보급되었다.
또 그리스도교의 보급으로 찬송가가 불리면서 대중가요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의 대중가요에서는 일본
창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당시에 유행했던 대중가요는 신파극 〈장한몽〉에 불렸던 주제가인데 신파극 〈장한몽〉은 일본소설을 번안·각색한 것이었고,
주제가 또한 일본 창가의 영향을 직접 받은 노래이기도 하다. 그밖에 일본 창가의 영향을 받은 대중가요로는 〈희망가〉·〈카츄사〉·〈시들은 방초〉 등이 있다.
본격적인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은
윤심덕(尹心德)이 최초의 대중가요 음반
〈사(死)의 찬미(讚美)〉 를 내면서부터이다.
이 곡은 〈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이라는 곡에 윤심덕 자신이 가사를 붙여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른 노래이다. 또한 이 곡은 윤심덕이 일본에서 음반을 취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윤심덕의 음반 취입은 대중가요가 대중매체를 중요한 전달방식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 이 노래는 가사에서 보여주듯이 대중가요가 슬픔·이별·죽음·절망 등의 개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이후 대중가요 가사의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뒤 1927년 김영환(金永煥)은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 〈낙화유수〉를 발표했다.
1932년 음반으로 나온 〈황성옛터〉는 전수린(全壽麟) 작곡, 왕평(王平) 작사,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노래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중가요 역시 일본식 음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일본가요는 일본의 5음음계인 요나누키 음계와 미야코 음계에 서양식 4박자 계통인 트롯으로 결합된 엔카[演歌]인데, 이것이 이른바 뽕짝의 원류이다.
일본가요는 〈장한몽〉처럼 직접 한국에 들어와 유행되기도 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의 작곡가가 지은 노래에서도 일본가요의 음 구조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중가요는 일본식 가요와 서양음악의 정서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중가요는 멜로디의 퇴영성과 가사의 절망적인 정서가 결합되어 대중들을 현혹하여 객관적인 현실 직시나 미래지향의 건전한 삶을 가질 수 없게 하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8·15해방과 함께 밀어닥친 미국문화의 압도적인 영향 속에서 한국의 대중가요는 일제강점기에 뿌리내린 왜색가요와 미국 대중음악을 모방한 서구색 가요의 두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서구색 가요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위해 공연하던 미8군 출신의 대중음악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두 흐름은 1970년대말까지 가요계의 주도권을 번갈아 쥐며 한국 대중가요의 주된 흐름을 이루게 되다가 차츰 서구 모방의 대중가요가 주류를 이루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청소년층이 대중가요의 주된 수용층으로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가요는 청소년 취향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발라드풍 가요와 댄스 가요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트롯 가요 역시 과거의 애상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경쾌한 댄스 리듬과 결합하는 양식을 보이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대중가요는 노래 중심에서 가수의 용모와 율동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