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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8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사순절 3주 * 홍지훈 목사
누가복음 10: 38-42
마르타 콤플렉스
우리는 하루에 세 번 밥을 먹습니다. <삼시세끼>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정년퇴직하고 매일 집에만 머물면서 세끼 밥달라고 하는 남편을 <삼식이>라고 부른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유학시절에 완벽한 <삼식이>였습니다. 요즘에 삼시세끼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농촌과 어촌에서 불편하게 밥을 해먹는 아주 단순한 프로그램입니다. 아침 먹고 나면, 점심이 돌아오고, 곧이어 저녁을 준비해야합니다. 하루 종일 밥하고 먹고 치우는 일의 반복입니다. 그런데도 시청률이 높다고 합니다. TV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에게 먹는 일이라는 것은 매우 근본적인 일이다.”
생각해 보면 먹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니 생명체라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먹고 힘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먹는 행위>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은 먹지 않는 금식을 중요한 신앙적 행위로 선택하고 시행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이고 또한 당연한 <먹는 행위>를 중단하는 기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요즘 같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이면 수도사들은 일주일에 6일은 금식을 하고 주일에는 조금 먹었습니다. 이렇게 5주동안 지내고 마지막 고난주간에는 절대금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들도 사순절에는 채소만 먹고 육식은 금하도록 하였습니다. 유럽이라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평소에 친근한 육류음식을 사순절에는 멀리하는 방식의 경건입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지키는 라마단 절기에는 한 달 동안 해가 떴을 때에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해가지면 먹을 수 있어서 폭식을 하게 되고, 이것 때문에 비만이나 당뇨병 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지난 번 이슬람지역인 터키여행을 할 때 보니, 호텔에 숙박하는 이슬람 여행자들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는 금식에서 예외이기 때문에 이때 일부러 여행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는 식사문제와 씨름을 하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대접하려는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다닌 적이 없으니 적어도 13인분,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식사를 준비해야하는 상황입니다. 밥하는 일은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 말씀에만 집중하는 동생 마리아가 참 미울 법도 합니다.
어떤 교회 권사님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 돌보기도 바빠서 봉사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는 자녀도 다 자랐고 그래서 교회 식당봉사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모든 식사당번에는 자기 이름이 안 빠지고 꼬박꼬박 등장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지쳤고 힘들고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냐는 상담입니다. 아마 이 권사님은 <마르다형>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제 지쳐서 <마리아형> 교인들이 미워지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지요. 이런 현상을 <마르다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하는 설교는 대개가 천편일률적 해석에서 출발합니다. 마르다 보다는 마리아를 주님이 더 선호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부분 교회에서는 종종 정반대로 교회봉사를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한편으로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봉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단편입니다. 그리고 앞뒤 문맥과도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단락입니다. 그래서 해석이 참 어렵습니다. 더구나 마르다라는 여인은 복음서에 단 두 번만 등장하는데, 요한복음 11장에서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마리아와 함께 마르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이 세 사람이 한 형제인데, 주님이 이들을 매우 사랑하셨다는 것뿐입니다. 한 번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 속에서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고, 누가복음에서는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하는 듯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아까 상담을 요청한 마르다 콤플렉스에 빠진 권사님의 경우를 저도 주변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르다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예방하자고 주장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무리한 봉사를 하던 장로님 부부에게 제발 <마르타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도록 봉사를 줄이도록 권고했는데, 고집부리다가 결국 사단이 나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떤 설교에 보니까,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주일날 식사준비를 담당한 봉사자가 식사준비를 미리 하려고 예배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예배당을 나서는 것을 본 목사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설교입니다. 먼저 예배는 마치고 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마리아 편을 드는 것이지요. 주님이 마리아 편을 들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정반대의 해석도 찾았습니다. 그분은 <밥상도 예배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오늘날 같은 예배 형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식탁의 친교를 중심으로 예배드렸다고 전해집니다. 집에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식탁공동체의 때의 원칙은 많이 가지고 온 사람과 못가지고 온 사람이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그것을 잘 못해서 가난한 사람을 굶겼다가 바울에게 야단을 맞은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를 서비스(service)라고 합니다. 독일어로는 Gottesdienst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섬김입니다. 그러니 예배라 서비스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밥상도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만 하고 축도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식탁에 앉아서도,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도, 그리고 일터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마르다도 마리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마르다를 책망하듯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봉사를 열심히 하면서 봉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화를 품은 것이 잘못이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공평을 요청한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주님에게 요청한 것은 손님이 많으니 동생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답변을 보겠습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손님을 초대하였으니 얼마나 마음이 바쁘고 분주하겠습니까? 거기다가 그 손님이 예수님 일행인데요. 일행까지 합치면 꽤나 많은 손님일터인데, 혼자 준비하기가 참 난감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마르다와 같은 상황이라면 마르다처럼 마음이 급하고 분주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쁜데 도와주지는 못하고 놀고 있다고 속상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르다가 주님께 가서, “내 동생이 나를 혼자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에 대하여 아무 생각없으십니까?”하고 따지듯이 물어본 것도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마르다는 선생님에게 지시까지 내립니다. “동생에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당장 말씀하시지요.”라고 말입니다.
사람 마음이 급하고 분주하면 실수를 하게 됩니다. 마르다의 경우에 그녀가 말씀대신 봉사를 택한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그녀가 혼자 일하다가 지쳐서 자매인 마리아에게 속으로 화를 내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해석의 한계가 있습니다. 마르다의 잘못은 마음이 너무나 급한 나머지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의 기준으로 바꾸어 판단하는 실수 말입니다. 늘 우리들이 매일처럼 하는 실수와 똑같은 실수입니다.
신앙의 영역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자기판단의 기준입니다. 물론 사람은 살면서 자기가 배운 대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판단합니다. 자기문제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면 다행인데, 자기와 연관된 타인의 문제에도 관여하여 판단하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조직이던지 조직 안에는 질서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분여된 권한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남이 내 권한을 침범해 들어올 때나, 또는 상대방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나에게 그 의무를 전가할 때, 나는 내 판단기준을 가지고 그를 상대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손님 접대를 잘해야 한다는 자기 판단을 내세워서 마리아를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손님 접대를 도와야 한다는 자기 판단을 가지고 이를 용납하고 있는 주님까지 평가했습니다. 주님이 하실 평가를 지금 마르다가 대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와 참 흡사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용서하라고 하는 데, 우리는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고 하고, 주님은 좀 불공평해도 네가 참고 희생하라고 말씀하는데도 우리는 나 혼자 희생은 못하겠다고 합니다. 믿음이 오래된 사람이 처음 믿는 사람을 좀 기다려주고 이해해 주어야한다고 주님이 말해도, 우리는 처음부터 바르게 잘 가르쳐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마르다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우리 속에는 마리아의 모습도 있습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 옆에 오셔서 이런 상황을 만나면 언제나 마리아 편만 들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함께 힘을 합쳐야 할 일이 생겼는데, 나는 말씀묵상만 하겠다고 전혀 거들지 않으면, 그래도 주님이 잘했다고 하실까요? 성경 여러 군데에서 이미 주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마음과 몸이 일치하고,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여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후의 상황을 기록했다면, 주님은 마리아에게도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서 너도 네 할일을 하라고” 한 말씀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마지막 절 42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식사준비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아무런 책망도 받지 않고 그저 말씀을 붙잡고 살아도 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빠지기 쉬운 오류의 함정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써 있는 문자에 집착한 나머지 이 일이 벌어진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실수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런 어록을 일반화하여 모든 경우에 적용하다가 스스로 이중적인 논리에 빠지고 마는 경우입니다.
아마 주님의 말은 이런 뜻이었을 것입니다. “마르다야 수고하는 구나. 그런데 내게 와서 동생 일로 항의하는 것을 보니, 그 일에 네게 무척이나 힘들고 부담되는가 보구나.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단다. 네 힘과 능력 안에서 소박하게 차려준 밥상도 내게는 예배인데, 마르다 너는 너무나 밥상차리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겨서, 대접하려는 좋은 일을 하다가 스스로 마음이 상처받고, 자기 상처를 형제에게 퍼주려고 하는 건 아닌지 좀 생각해보렴. 거기다 나도 원망하고 있지 않니? 그럴 바엔 차라리 너도 내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나 나누는 것이 어떻겠니? 어찌 보면 하나님의 일이란 모두가 한 가지 아니겠니? 말씀을 듣던, 밥을 하던,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는 일 아니겠니?”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를 진정시켜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똑같이 적용해야할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이 사순절 3주인데,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 주님의 마음은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아서 써 있지 않은 행간 속에서 주님의 소리를 그렇게 찾아보았습니다. 예배와 봉사는 물과 그릇 같은 관계입니다. 신앙과 행위도 똑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가능하면 이 두 가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균형을 허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계획이나, 조직, 훈련, 연습, 평가 이 모든 것을 인간이 하지만,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우리가 성경공부를 중단하고 함께 묵상기도를 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공부보다는 기도를 할 때도 있고, 말보다는 침묵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을 선호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모두가 다 한 가지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여러 가지 종류의 활동과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힘들고 덜 힘든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리고 서로가 다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가 하나입니다.
어떤 일을 택하든지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 생각을 내 판단으로 바꾸려고 하지만 않고, 주어진 일을 감당하면서, 인내하고, 희생하고, 봉사하고 묵상으로 주님께 다가간다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첫댓글 이제 이해가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