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나무의 건강
글·사진 _ 이경준 (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 명예교수)
3월은 봄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봄바람은 차가운 대지에 봄소식을 전해주고, 겨우내 잠자던 꽃봉오리를 깨워 희망의 봄을 재촉한다. 바람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자연현상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바다를 끼고 있는 반도국가에서는 바다와 육지의 온도차로 인해 연중 바람이 불며, 하루 중에서 새벽의 동틀 녘을 제외하고 바람이 항상 불어온다.
바람은 우리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다. 육지로 구름을 몰고와 단비를 내려주어 육지에 생물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대기오염으로 찌든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것도 바람이 신선한 공기를 몰고 오는 덕분이다. 그러나 고맙지 않은 태풍, 한파 혹은 황사를 몰고 오기도 한다.
나무는 바람과 더불어 일생을 살아간다. 풍매화는 바람의 덕분으로 꽃가루가 날아 옆 나무의 암꽃을 수정시켜 종자를 맺는다. 맺은 종자는 솔씨와 같이 날개가 있을 경우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새로운 곳에 정착할 수 있다.
바람은 숲의 환경, 나무 생장과 그 모양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숲의 대기환경은 바람에 의해 변한다. 광합성에 필요한 이산화탄소(CO2)는 대기 중에 0.037% 정도로 아주 낮은 농도로 존재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숲 속 이산화탄소는 나무에 의해 흡수되면서 서서히 고갈된다. 이때 바람이 불어 새로운 이산화탄소를 공급함으로써 나무는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게 된다.
숲은 자신이 필요한 이산화탄소를 만들기도 한다. 땅 표면에 있는 낙엽과 수명이 짧은 가는 뿌리는 분해되어 이산화탄소로 방출된다. 이때 이산화탄소가 바람에 의해 확산되어 광합성으로 줄어든 숲 속의 이산화탄소를 보충해준다.
바람이 나무의 생장과 모양에 미치는 영향은 잎, 줄기, 뿌리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여름철 햇빛을 받은 잎의 온도는 상당히 상승하게 되는데, 바람이 불어 증산작용을 하면 기화열로 인해 잎의 온도가 내려가 열해(熱害)를 방지할 수 있다.
바람은 나무의 증산작용을 촉진한다. 바람이 잎 표면의 공기경계층의 두께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증산작용이 과다해져 나무가 수분 부족 상태에 이른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골짜기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는 수분 부족으로 인해 잎의 크기가 작아지고 억센 잎으로 변한다. 이렇게 변형된 잎은 증산작용을 적게 하며, 강한 바람에 숨구멍을 닫아 바람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바람은 가지와 줄기 모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바람이 심한 고산지대에서는 가지들이 한쪽 방향으로만 자라기도 한다. 수목한계선(tree line) 부근에서 자라는 침엽수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마치 깃발을 꽂아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면서 자란다.
바람은 일반적으로 나무의 키가 자라는 것을 억제하며 대신 직경생장을 촉진한다. 나무가 지속적인 바람에 노출되면 키를 낮추면서 직경이 굵어짐으로써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때 밑가지가 살아 있어 광합성을 하면 그 탄수화물을 이용해 밑동의 직경이 굵어져 바람에 견디는 힘이 더 커진다.
초살도(梢殺度, tapering)라는 말이 있다. 나무 직경이 밑동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가늘어지는 정도를 나타내는 전문용어다. 낙우송과 같이 위로 올라가면서 직경이 급속히 가늘어지는 나무는 초살도가 크다고 한다. 초살도가 크면 목재 가치는 작지만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게 된다. 이런 나무들은 바람에 노출되어 자라면서 밑동이 먼저 굵어지고, 결국 바람에 잘 쓰러지지 않는다.
대신 전나무나 가문비나무는 밑동 직경이나 위쪽 직경이나 큰 차이가 없어 초살도가 매우 작다. 이런 나무들은 목재 가치가 커서 기둥이나 전봇대로 안성맞춤이지만 바람에는 약하다. 나무 밑동은 바람에 노출됨으로써 더 굵어진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 나무는 바람을 인식(?)하고 이에 대처하여 직경이 더 굵어진다. 나무를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매 놓으면 밑동의 직경이 별로 굵어지지 않아 초살도가 작아지고, 결국 바람에 견디는 능력이 작아진다.
국내에는 미국에서 들어온 아까시나무가 자라고 있다. 초살도가 매우 작고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으며, 척박한 땅에서도 30년 정도 자라면 키가 20m 이상 되는 속성수다. 목재의 비중은 0.69로 참나무의 0.74에 버금갈 만큼 무겁고 좋다. 이 나무는 주로 연료림과 사방공사 목적으로 비탈면에 심어 왔는데 천근성 수종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자신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탈에서 쉽게 쓰러진다. 아까시나무의 수명이 50년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바람으로 인한 도복(倒伏) 때문이다.
바람은 나무의 키가 크는 것을 억제하고 대신 뿌리의 생장을 촉진한다. 이러한 현상은 나무가 진화과정을 거쳐 오랜 세월을 살아남으면서 터득한 생존전략인 듯하다. 바람이 불면 잎에서 만들어진 에너지를 우선적으로 밑으로 내려 보내 밑동을 굵게 하고, 뿌리의 발달을 촉진함으로써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대비한다. 결국 에너지를 지상부와 지하부에 재분배하여 키는 작아지고 뿌리는 커져서,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는 안정된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내풍성(耐風性)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바람에 의해 나무뿌리의 생장이 촉진되지만, 뿌리가 얼마나 깊게 들어가는가는 나무의 타고난 성질에 달려 있다. 낙엽송, 가문비나무, 버드나무, 포플러, 아까시나무는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는 천근성(淺根性) 수종이며, 바람으로 쓰러지는 도복현상이 자주 관찰된다. 소나무류, 잣나무, 은행나무, 참나무류, 단풍나무류, 느티나무, 회화나무는 깊이 들어가는 심근성(深根性) 수종이다. 방풍림(防風林)을 만들 때 심근성 수종을 선택해야 한다. 제주도 감귤 밭의 방풍림은 모두 심근성인 삼나무다.
나무는 1년에 한 개씩 나이테를 만들면서 직경이 굵어진다. 밑동의 나이테는 대개 동심원을 그리면서 사방으로 고르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비탈에서 자라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에서 자라는 나무의 밑동의 나이테는 동심원을 그리지 않는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바람을 직접 맞는 앞쪽의 줄기 부분은 바람의 압력 때문에 세포분열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나이테가 잘 생기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불어가는 뒤쪽 줄기 부분은 나이테가 만들어짐으로써 나이테가 뒤쪽으로 쏠려 있는 편심생장(偏心生長)을 하게 된다.
태풍은 심한 바람을 몰고 온다. 한국의 경우 몇 년에 한 번씩 태풍의 피해를 입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기후변화로 그 피해가 점점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2002년 8월 루사, 2003년 9월 매미, 2004년 8월 메기, 2007년 9월 나리, 2010년 9월 곤파스 등이다. 속리산의 정이품송도 잦은 강풍에 가지가 찢겨 나가 이제는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정이품송은 침엽수에 속하는데, 침엽수의 목재는 활엽수보다 인장강도가 낮아서 바람에 더 쉽게 부러지며, 넓은 들의 한복판에 혼자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2년 8월 31일 찾아온 태풍 루사는 필자가 근무하던 경기도 수원시에 있던 서울대 농생대 캠퍼스를 관통했다. 이 태풍으로 200여 그루의 나무가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혀 나갔다. 100년 가까이 된 캠퍼스에는 거목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바람을 많이 타는 큰 나무들이 주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천근성인 포플러가 많이 쓰러졌는데, 그 중에서 국내에서 가장 먼저 심겨진 나무 중의 하나로 고 현신규 박사가 현사시(은수원사시나무)를 개발할 당시 어미나무로 쓰였던 은백양이 쓰러져 가슴을 아프게 했다.
위와 같은 바람에 대한 나무의 생리를 이해하면 바람에 대비해 나무를 건강하게 키우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가로수와 조경수는 평소에 가지치기를 통해 나무의 크기를 줄이고 가지와 잎의 양을 조절하면 바람에 대한 저항성이 증가한다. 그러나 조경수의 경우 밑동의 가지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나무를 옮겨 심을 때 우리는 밑가지를 대부분 제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바람에 대한 저항성을 낮춘다. 밑가지를 그대로 두어야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고 밑가지가 광합성을 하여 초살도를 크게 해서 바람에 견디는 능력을 높여 줄 수 있다.
나무를 이식하면 우리는 지주를 오랫동안 그대로 둔다. 강원도의 낙락장송과 같이 큰 나무(대경목)를 옮기다 보니 지주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어른 키만 한 나무들을 주로 옮겨 심으며, 지주는 3년차부터 제거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야 나무가 스스로 밑동이 굵어지고 뿌리를 발달시켜 독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 7월 서울 통의동 백송(600년생, 천연기념물 제4호, 1993년 지정 해제)이 폭우와 바람에 의해 쓰러져 죽었다. 국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백송이었다.
가로수에 너무 철저하게 지주를 세우면 나무가 바람을 인식하지 못해 줄기가 제대로 굵어지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을 타야 쓰러지지 않기 위해 직경과 뿌리의 발달이 촉진된다.
2010년 9월 1일 태풍 곤파스로 서울에서 쓰러진 나무들
태풍으로 쓰러진 소나무(우측)를 다시 세웠으나 뿌리가 많이 죽어 수세가 약해져 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부산시의 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로 서울 홍릉수목원의 천근성 수종인 이태리포플러가 쓰러졌다. 키가 20m 이상 커서 피해를 입은 듯하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로 서울대학교 구내에 옮겨 심은 소나무가 쓰러졌다. 지상부가 크고 지하부가 작아 균형이 맞지 않는 대경목은 항상 도복의 위험성이 크다.
고산지대(해발 1,800m)에서 전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의해 한쪽 방향으로 쏠려 깃발 형태로 자라고 있다.
첫댓글 자연현상이란 참으로 솔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