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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이조 판서 송공 묘갈명 병서〔參議贈吏曹判書宋公墓碣銘 幷序〕 【龍洲遺稿 卷十六 > 墓碣】
고(故) 예조 참의 증(贈) 이조 판서 송공(宋公)은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에 태어나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에 세상을 떠났는데, 영평현(永平縣) 조량리(助良里) 금주산(金柱山) 왼쪽 산기슭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묻혀 있다. 30여 년 뒤에 맏아들 송시철(宋時喆)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에 올랐으며, 그의 일곱 아들이 두각을 드러내어 아들 셋이 같은 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에 군자들은,
“덕을 쌓아 보답을 받는 것이 마치 ①좌계(左契)로 맞춘 것처럼 어긋나지 않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공의 휘는 극인(克訒), 자는 신백(愼伯)이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본인이 힘써 공부하여 서른 살에 급제하였는데, ②좌주(座主)가 실로 고(故) 재상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공이다. 처음 승문원에 예속되었다가 선발되어 춘추관에 들어갔으며 규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형조의 낭관을 거쳐 북도 평사에 제수되었는데, 연로한 부모로 인해 체직을 청하여 사헌부 감찰로 전직되었다.
무신년(1608, 선조41)에 사간원 정언에서 체직되어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당진 현감(唐津縣監)으로 나갔는데, 대부인이 연로하였기에 얼마 안 되어 해직하고 돌아왔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실록청 낭청을 겸하면서 병조 좌랑과 예조 정랑을 오갔으며, 세자시강원 문학, 사헌부의 지평과 장령을 거쳤다. 장악원 정으로 승진되고 또 녹훈도감 도청(錄勳都監都廳)을 겸하였다. 평안도 재상경차관(平安道災傷敬差官)에 제수되었으나, 실록청에서 아뢰어 유보시켰다.
계축년(1613)에 세자시강원 문학과 필선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옮겼다. 이때 대간이 문충(文忠) 이항복(李恒福) 공을 무함하였는데, 공은 입을 다물고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뒤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간교한 무리들은 여전히 재상 이항복 공을 헐뜯었고, 공은 이전의 주장이 변함없었기에 사도시 정(司䆃寺正)에 체부(遞付)되었다. 사헌부 집의와 사간원 사간으로 옮겨졌으나 공은 세 차례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권세를 잡은 자의 터무니없는 말이 날로 심해지는데다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그 자리에 있는 것을 공이 더욱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인년(1614)에 사복시 정과 세자시강원 겸필선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호서(湖西)에서 발해시(發解試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를 주관하였는데, 선발된 사람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많았다.
이듬해에 정조(鄭造)ㆍ윤인(尹訒) 등이 앞장서서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자, 문충(文忠) 이원익(李元翼) 공이 차자를 올려 광해군에게 효성을 다하는 도를 권하였다. 이에 간당들이 떼로 일어나서 이공을 거리낌 없이 공격하였다. 공이 마침 사간원에 있다가 이의를 제기하고 물러나자, 마귀 같은 자들이 심지어 군부(君父)를 무시한다는 등의 말로 공을 공격하여 내쫓으니, 공은 이때부터 높은 자리에 제수되는 일이 적었고 좌천되는 경우가 많았다.
병진년(1616)에 군기시와 사재감의 정(正)이 되었다.
정사년(1617)에는 북관 구황어사(北關救荒御史)의 소임을 받았으나, 또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무오년(1618)에 상을 당하였다.
경신년(1620)에 복을 마치고, 성균관 사예를 거쳐 통례원 통례로 옮겼다. 좌통례로 옮긴 지 겨우 한 달 만에 비변사의 천거로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승진하여 ③비의(緋衣)를 입게 되었는데, 어떤 일로 인해 시행되지 못하였다.
임술년(1622)에 명나라 장수 유유은(劉濡恩)의 접반사로 나갔다가 들어와 분병조 참의(分兵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대왕께서 종사를 안정시키고 광해군의 포악한 정치를 개혁하시고 지방관의 중요함을 깊이 생각하여 마침내 공을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제수하였다. 공이 울산을 다스리면서 정성을 다하고 관대한 정사를 펼치니,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하여 비석을 세웠다.
병인년(1626)에 또 중화 부사(中和府使)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무진년(1628)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진하 동지 성절사 겸 사은사(進賀冬至聖節使兼謝恩使)로 바다를 건너 명(明)나라에 나갔다. 당시 사신들이 표류되어 죽는 경우가 전후로 속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신가는 것을 사지(死地)로 나가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공은 명을 받고서 태연히 어떠한 기미도 내비치지 않았으니, 이 사실을 들은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돌아와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영광 군수(靈光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대각(臺閣)에 이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방해하였다. 상께서도 끝내 어쩌지 못하자 공은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경오년(1630)에 용양위 사직(龍驤衛司直)으로서 또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나갔다.
갑술년(1634)에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못 되어 병으로 면직되었다. 그해 7월 24일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인조대왕께서 특별히 부의(賻儀)를 명하셨다.
공은 풍채가 장대하고 귀가 컸으며 너그러운 도량을 지녔다. 남들에게 사납고 교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비루한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순수하고 성실한 태도가 밖으로 넘쳤으니, 사람들이 한 번만 봐도 중후하고 덕망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부모를 섬겨서는 효(孝)와 경(敬)을 다하였고, 관직을 맡아서는 반드시 청렴하고 성실하다는 명성을 들었다. 사람을 다스리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 바로잡거나 꾸미려는 습속을 지니지 않았고 또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권세나 이익, 번잡하고 화려한 일에는 겁쟁이처럼 물러나고 피하였다.
만년에는 ‘정곡(靜谷)’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남산(南山) 아래에 집을 지어 좌우에 책을 두었으며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죽 심고는 날마다 그 사이에서 읊조리며 유유자적하였으니, 은자(隱者)의 지취(旨趣)를 깊이 터득했다고 하겠다.
송씨(宋氏)는 본래 여산(礪山)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휘 유익(惟翊)은 고려조에 진사과에 올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관직을 마쳤으니 공의 14대조이다. 이 분이 휘 숙문(淑文)을 낳았는데, 숙문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호부 상서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휘 희식(希植)을 낳았는데, 희식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냈다. 이 분이 휘 송례(松禮)를 낳았는데, 송례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를 지내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추시(追諡)는 정렬(貞烈)이다.
본조에 들어와 휘 익손(益孫)은 추충정난 공신(推忠靖難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여산군은 휘 유(瑠)를 낳았는데, 유는 예산 현감(禮山縣監)을 지냈다. 예산 현감은 휘 세인(世仁)을 낳았는데, 세인이 일찍 죽어 아우 참봉 휘 세지(世智)의 아들 휘 초(礎)를 후사로 삼았다. 휘 세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풍저창 수(豊儲倉守) 파평(坡平) 윤확(尹確)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세 번 장가들었다.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도사 완(浣)의 따님이고, 계림 정씨(鷄林鄭氏)는 찰방 탁(擢)의 따님인데 함께 정부인(貞夫人)에 추봉(追封)되었으며 모두 아들이 없다. 후부인(後夫人)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사재감 첨정 흡(洽)의 따님으로 유순하고 총명하여 집 안팎에서 칭찬하였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16년 뒤에 향년 69세로 생을 마쳤으며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딸은 일찍 죽었고 아들이 바로 장령군(掌令君)이다. 장령은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를 지낸 정지경(鄭之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일곱을 낳았다. 장남은 광엄(光淹)이고, 다음은 광렴(光濂)ㆍ광순(光洵)ㆍ광준(光浚)ㆍ광연(光淵)ㆍ광택(光澤)ㆍ광속(光涑)이다. 광렴ㆍ광순ㆍ광연은 갑오년(1654, 효종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광렴은 벼슬하여 상의원 직장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광순은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지냈고, 광연은 병오년(1666)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벼슬에 있다. 광속은 기유년(166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광엄은 처음에 대사헌 이만(李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뒤에 서윤 이문순(李文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셋을 낳고 아들이 없어 광순의 아들 징은(徵殷)을 후사로 삼았다.
광렴은 처음에 장령 정시성(鄭始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징헌(徵獻)ㆍ징원(徵遠)ㆍ징문(徵文)이다. 뒤에 판관 김수장(金壽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광순은 저작 이상재(李尙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과 딸 셋을 낳았는데, 아들은 징은(徵殷)ㆍ징구(徵久)ㆍ징오(徵五)ㆍ징규(徵奎)이다. 광준은 처음 감찰 윤원지(尹元之)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셋을 낳았다. 뒤에 현감 한강(韓崗)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광연은 판서 이정영(李正英)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 징오(徵五)를 후사로 삼았다. 광택은 군수 박수형(朴隨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광속은 판서 김수흥(金壽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내외의 현손(玄孫)이 남녀 모두 10여 명이다.
내가 공의 집 가까이에 살고 또 한(漢)나라 장자의 기풍을 지닌 선배를 사모하여 종유한 지 오래였다. 장령군이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가는 길에 용담(龍潭)에 있는 내게 들렀는데, 울면서 말하기를,
“선군의 묘목이 두 손으로 감쌀 만큼 자랐는데 아직도 비석을 세우지 못했으니, 불효의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은 선생을 기다린 것입니다. 선생께서 일찍이 태사(太史)를 지내셨으니, 감히 선군의 사적이 묻히지 않도록 비문을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마침내 서술하고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모나게 끊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 不爲崖岸斬絶之行
이로써 성가가 크게 드러났고 / 以博聲價
두려워하고 위축된 태도를 짓지 않았으니 / 不爲畏避朒縮之態
명을 수행함에 게으르지 않았네 / 唯命不惰
혼탁한 세상이 어찌 공을 어지럽히며 / 何濁世之我亂
간악한 자들이 어찌 공을 두렵게 하랴 / 何鯨浪之我栗
일생 순수하고 근실함이 ④만석군 석분을 크게 닮았으니 / 一生醇謹大類萬石奮兮
그대 자손 마땅히 대대로 드러나리라 / 宜爾子孫之世發
【龍洲遺稿 卷十六 > 墓碣】
① 좌계(左契) : 좌권(左券)과 같은 말로, 좌우(左右)로 나누어 한쪽씩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마주 붙여 증거로 삼는 신표이다.
② 좌주(座主)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주시관(主試官)이었던 사람을 경칭(敬稱)하는 말이다. 급제한 자는 좌주에 대하여 문하생이 되어 평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③ 비의(緋衣) : 당상관이 입는 붉은색의 관복이다.
④ 만석군 석분(石奮) :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의 사람이다. 그의 네 아들 건(建), 갑(甲), 을(乙), 경(慶)이 모두 선하고 효성스러운 행실로 벼슬이 이천섬(二千石)에 이르렀다. 그 식록을 합하면 만 섬이므로 만석군이라 불렸다고 한다. 《漢書 卷46 萬石列傳》
故禮曹參議、贈吏曹判書宋公以萬曆癸酉生,以崇禎乙亥卒,葬在永平縣助良里金柱山左麓子坐午向之原。卅有餘年,嗣子時哲趾美登第,爲司憲府掌令,有男子子七人,頭角嶄然,三人同年陞上舍。君子曰“於是乎樹德而食報者,若持左契”云。
公諱克訒,字愼伯。六歲而孤,能自力學,三十而釋褐,座主實故相一松沈公也。初隷槐院,選入史局,例陞典籍。由刑部員外,拜北道評事,親老乞遞,轉殿中。戊申,以正言遞,爲兵曹佐郞,出知唐津縣,未幾,以太夫人年高解歸。辛亥,兼實錄郞廳,來去兵曹佐郞、禮曹正郞,出入春坊文學、持平、掌令。陞拜掌樂正,則又兼錄勳都廳。爲平安災傷敬差,而實錄廳啓留之。癸丑,歷文學、弼善,轉掌令。時臺評妄誣李文忠恒福公,公噤不從,由是遞降直講。俄拜司諫,奸黨之齮齕李相猶爾,公執前說不變,遞付司䆃正。移執義遷司諫,公三辭不就。當是時,柄用者譸張爲幻日深,公益不樂不得言而居其職也。
甲寅,除司僕正、兼弼善。是年,主發解試于湖西,所貢多知名士。明年,鄭造、尹訒等首發廢母之論,李文忠元翼進箚,勸光海烝烝之道。奸黨鵲起,駁擊無忌憚。公適在諫院,立異而退。鬼蜮至以無君父等語,移擊公逐之,公自此右授者尠而左詘者多矣。丙辰,正軍器寺、司宰監。丁巳,受北關救荒御史之任,又以親老免。戊午,丁憂。庚申,制除,由司藝移通禮,轉左纔閱月,以備局薦,陞東萊府使衣緋,以事不果行。壬戌,爲唐將劉濡恩接伴使,入拜分兵曹參議。
癸亥,仁祖大王靖宗祊,剗革昏暴,深惟共理之重,遂用公爲蔚山府使。爲治推至誠尙寬大,去後民思之爲立石。丙寅,又除中和府使。丁卯,遞還。戊辰,拜工曹參議,以進賀冬至聖節兼謝恩使,杭海朝天。時前後使价漂渰相繼,人多視爲死地。公獨受命夷然,無幾微見於色,聞者韙之。還拜禮曹參議,旋除靈光郡守,臺閣有不悅者惎之,上終不得而公辭不赴。庚午,以龍驤衛司直,又出爲善山府使。甲戌,爲掌隷院判決事。翌年,爲富平府使,莅任未數月,病免,七月二十四日終于家。訃聞,仁祖大王特命賻。
公爲人豐貌大耳,器宇寬裕。暴慢之氣,不加於人;鄙倍之言,不出於口;醇謹之實,溢於儀容,人一見可知爲重厚長德人也。事親,孝敬備至;居官,必以淸謹聞。治人接物,不事矯揉、賁飾之習,且不喜交游。其於勢利紛華,退避若怯夫然。晩年自號靜谷,一室南山之下,左右圖書,積石爲階,列植花卉,日哦其間,怡然自適,深得靜者之趣云。
宋本礪山望族。有諱惟翊,在麗朝登進士科,卒官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卽公十四代祖也。生諱淑文,政堂文學,贈戶部尙書。生諱希植,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是生諱松禮,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司事,礪良府院君,贈諡貞烈。入本朝,有諱益孫,策推忠靖難功臣,封礪山君。礪山生諱瑠,禮山縣監。禮山生諱世仁,蚤歿,以弟參奉諱世智之子諱礎爲后,官至司憲府監察,贈吏曹判書,是爲公皇考,娶豐儲倉守坡平尹確之女生公。
公凡三娶。淸州韓氏,都事浣之女;鷄林鄭氏,察訪擢之女,竝追封貞夫人,皆無子。後夫人淸風金氏,司宰監僉正洽之女,柔嘉淑明,門內外稱之,生一男一女。後公十六年,年六十九而卒,祔葬于公。一女殀,一男卽掌令君也。掌令娶文科牧使鄭之經女,生七男,長光淹,次光濂、光洵、光浚、光淵、光澤、光涑,光濂、光洵、光淵,甲午司馬。光濂筮仕,至尙衣直長而殀。光洵,橫城縣監。光淵,丙午文科,持平。光涑,己酉司馬。
光淹初娶大司憲李曼女,不乳。後娶庶尹李大純女,生三女而無子,以光洵子徵殷爲后。光濂初娶掌令鄭始成女,生三男一女,男徵獻、徵遠、徵文,後娶判官金壽長女,生一男一女,幼。光洵娶著作李尙載女,生四男三女,男徵殷、徵久、徵五、徵奎。光浚初娶監察尹元之女,生三女,後娶縣監韓岡女。光淵娶判書李正英女,無子,以徵五爲后。光澤娶郡守朴隨亨女,生一女。光涑娶判書金壽興女,生一女。內外玄孫男女亦十餘人。
不佞居與公第近,且響往先輩有漢時長者風,從游者雅矣。掌令君以書狀赴燕,過余龍潭之上,泣而言曰:“先君之墓木拱矣,尙闕顯刻,不孝安所逃罪?其實有待也。先生曾爲太史,敢以不朽事屬。” 我不可辭,遂敍而銘之。銘曰:
不爲崖岸斬絶之行,以博聲價。
不爲畏避朒縮之態,唯命不惰。
何濁世之我亂?何鯨浪之我栗?
一生醇謹大類萬石奮兮,宜爾子孫之世發。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2015
☛조경(趙絅) 1586(선조 19) ~ 1669(현종 1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김상헌(金尙憲)·이정구(李廷龜) 등과 교유했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대북정권하에서 과거를 포기, 거창에 물러가 살았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고,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교리·헌납 등을 역임했다. 이무렵 서인계 공신이 조정의 여론을 무시하며 정국을 좌우하자,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함께 맞서며 남인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지평으로 있으면서 같이 공부했던 김상헌과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탄핵하여 조야(朝野)의 지원을 받았다. 1630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할 때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다.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에 군사를 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자고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거쳐 1643년 왜란 후 재개된 5번째의 일본사행(日本使行)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서 다녀왔다. 이때의 일을 〈동사록 東槎錄〉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이어 형조참의·김제군수·전주부윤·대제학 및 각 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50년(효종 1) 예조판서로 재직중, 효종의 북벌계획을 눈치챈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를 보내어 추궁하고 죄를 주고자 하는 등 위기에 처하자, 영의정 이경석과 함께 책임을 떠맡고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낸 후 은퇴했다. 이후 포천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살던 중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허목(許穆)·윤휴(尹鑴)·홍우원(洪宇遠) 등과 함께 서인의 의견을 반박하고 3년설을 적극 주장했다. 이 일 때문에 서인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뒤 행부호군(行副護軍)에 서용되었다. 주자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문사(文史)에도 박학하여 진한(秦漢) 이후의 글을 모두 섭렵했다. 저서로 〈동사록〉·〈용주집〉이 있다. 1676년(숙종 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1681년 출향되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