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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산행기
2009년 1월 4일 10시~16시30분
남한산성은 시간이 나면 언제나 들리는 곳이다.
2009년 신년을 맞아 이번에는 마천역에서 출발하여 서문으로 수어장대, 침괘정 그리고 중앙주차장에 있는 오복순두부집에서 점심을 들고 종로5거리, 행궁을 거쳐 북문, 연주봉옹성, 서문을 거처 마천으로 다시 내려왔다. 13,389보의 산행, 370여년전의 인조대왕을 생각하면서 오늘은 이렇게 따뜻한데 그때는 왜 그리도 추위에 떨었다고 하는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당시의 군사들과 백성들, 20만 청나라 대군에 포위되어 말들의 전쟁이 벌어지던 곳, 그 길을 오르면서 다시금 남한산성의 역사를 되세겨본다.
아침 10시, 마천역 1번출구에서 만나기로 되었는데 개롱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온통 남한산성으로 등산 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오늘 우리일행은 풍수학회회원 11명이다. 마천에서 서문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갈레, 조금은 가파르지만 산줄기의 변화를 관찰하기엔 참 좋은 곳이다. 조금은 완만한 길을 선택하여 산에 오르다. 청량산의 주봉, 수어장대에 오르니 사방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계좌정향의 수어장대, 전후좌우에 막아주는 것도 없는데 언제나 와도 바람이
잦고 편안함을 느낀다.
수어장대를 거쳐 산성로타리 가는 길, 행궁의 청룡자락을 타고 침괘정을 거쳐 중앙주차장에 있는
순두부집으로 점심을 들러가다. 언제나 가도 손님들로 가득한 집, 산성손두부집, 오늘도 사람들로
넘친다. 20분은 족히 기다려야 자리가 날 것 같다고 한다. 계속 기다릴 수가 없어 바로 옆
오복순두부집에서 점심을 들다.
*오복순두부 , 이팔청춘, 열여섯 꽃띠부터 60여년간 두부를 만들어온 할머니와 그의 딸, 그리고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두부를 만드는 집. 근방에서 가마솥에 두부를 쪄내는 유일한 집이라고 자랑한다. 세번걸러 만들어낸 주먹두부는 고소한 맛이 안주로 그만이고 만두맛이 좋기로 유명한 만두전골은 이집의 대표적 메뉴다.
*산성손두부, 오복순두부와 함께 산성리를 대표하는 손두부집, 초가집같은 분위기의 허름한 건물인데 언제 와도 사람들이 분비는 곳이다. 맛의 특별한 차이는 없는데 항상 이집은 손님들로 분비고 이집이 차고 넘쳐야 옆집으로 손님들이 옮겨 가는 곳이다.
장사 잘되는 식당은 어떤 집인가 궁금하면 이곳을 풍수적으로 잘 관찰해 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장사가 안되는 식당은 어떤 집인가? 주변을 둘러보면 쉽게 발견하게 되는 데 식당의 위치와
건물의 방향, 그리고 대문의 위치..... 한번 연구해 볼만한 과제인 것 같다.
병자호란당시 포도청이었던 중부파출소를 지나 행궁으로 올라가다. 행궁은 뒤로는 청량산이 주산이고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청룡 끝자락이 안산으로 잡힌다. 항상 이곳에 오면 생각해 보는 것, 주산은 우뚝하고 청룡이 잘 감아돌고 수구도 겹겹이 겹치는데 어찌 47일밖에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게 되었는가 궁금해 하는 곳이다. 주산,청룡, 백호, 안산/조산, 명당.....어디에 더 가중치를 두고 건물의 위치와 좌향을 잡아야 할까? 왜 조선시대의 궁전이나 행궁들은 제대로의 위치와 좌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까? 분명 안산은 기울어지면 좋지 않다고 하는데 왜 이곳은 청룡끝자락을 안산으로 하여 안산이 기울어져 있을까? 물은 우측에서 동쪽으로 쭉 빠져 나가는데 왜 굳이 동향으로 좌향을 정했을까? 행궁 본체의 좌향은 신술공망, 그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가? 남향으로 하면 안산도 좋고 앞에 개울도 가로 지르고 ..........주산에 중점을 두다보니 다른 것을 놓치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행궁을 둘러보고 북문으로 이동하다.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300여명의 군사들이 북문을 나가 청군을 공격했다가 전부 전사한 곳이다. 북문의 좌향은 곤좌간향, 복동간에는 귀문방이라하여 문도 내지 않고 길도 내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이 북문의 좌향이 북동향인가? 문득 고향생각이 난다. 나의 고향은 백두대간의 소백산맥, 예천과 단양의 경계인데 예천과 단양을 잇는 저수령의 길이 나야 마을의 교통이 좋아지는데 예천에서는 단양으로 가는 길이 북동간에 있다하여 길을 내는 것을 수십년이나 미루어 왔었다. 이곳을 넘으면 전쟁에서 패한다고 하여 625동란중에도 군인들이 피해 갔던 곳, 그런데 병자호란 당시 청군을 공격할 때는 왜 이 북문을 선택하였을까?
성벽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면 연주봉옹성에 다다른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울의 조망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남한산성 전체의 산세도 관찰할 수 있고 산성을 지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세중 하나다. 항상 이곳에 들려야 남한산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 오늘도 역시 남한산성의 전경은 아름답게 눈에 들어 온다.
서문을 거쳐 다시 마천동으로 내려오다. 이길은 바로 인조대왕이 눈길에 넘어지면서 5시간이 넘게 내려오던 길, 370여년이 지난 오늘은 수많은 등산객들로 가득하다. 당시에는 국력이 약해서 항복하러 내려온 길이지만 이제는 체력(=국력)을 올리기 위하여 수 많은 시민들이 오르내리는 길이다.
이하는 다시금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 볼 수 있을 것 같아 작년도 산행기를 여기에 붙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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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함께 한 남한산성
산행일자 ; 2008년 1월 19일 김 훈 작가 외 시애라 클럽회원 100여명
2008년 1월 26일 풍수학회 회원(5명)
2008년 2월 6일 가족산행(4명)
1. 2008년 1월 19일 산행
산행코스 ; 남문-> 종로 로타리->침괘정->숭렬전->수어장대->성벽->서문->연주봉 옹성->북문->행궁->마방(하남)
병자년 겨울, 1636년12월 13일, 청의 대군이 몰려오자 3명의 신하와 함께 송파 나루를 건너 산성 남문으로 들어와서 47일간 청나라에 항거한 곳이 바로 남한 산성이다. 20만 청나라 대군에 포위되어 12천여명의 군사와 함께 47일간 항전하던 사항을 김훈 작가가 남한산성을 소설로 썼는데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바로 오늘은 작가 선생님을 모시고 이 곳에 왔다.
우선 남문에 올랐다. 송파에서 산성으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길은 서문이었으나 군주의 위엄을 감안하여 남문으로들어 왔다고 한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그런 명분이 그리도 중요한가 생각해 본다. 남문 안쪽으로는 至和門이라고 남문 안쪽으로 걸려 있는데 글씨에 힘이 없고 균형을 잃었다. 어린 아이가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작가는 얘기한다.
성안의 중심지, 종로 로타리로 이동하다. 이곳은 동서남북이 오거리로 되어 있고 현재의 모양이 병자호란 당시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고 한다. 임금의 공간인 행군이 5분 거리에 있고 이 곳은 백성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는데 임금이 들어오자 관리의 공간으로 바뀐 중요한 위치로 지금의 중부 파출소 자리는 병자호란 당시에는 포도청의 자리였다고 한다.
백제 온조의 궁궐터라고 하는 침괘정을 지나 소나무 숲을 걸어 올라 숭렬전에 다다르다. 이 곳의 소나무 숲은 조선왕조가 보호하던 소나무이고 그래서 이 곳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성안에서는 무덤이 보이지 않는다. 숭렬전은 백제 온조왕의 사당으로 온조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남한산성의 주봉 청량산의 정상에 위치한 수어장대(일명 서장대)에 다다른다. 여기는 군사시설의 중심지로 1만 2천명의 병사로 20만 청나라 대군과 맞서던 수어사가 주둔한 4개 부대의 최고사령부 건물이다. 경복궁의 도성이 바라다 보이고 산성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 중의 요지이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견고하게 잘 쌓은 성으로 3한 1타의 작은 구획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밖의 경사에 따라 총구멍의 경사도가 다르며 성을 꾸불꾸불하게 쌓았는데 이렇게 꾸불꾸불한 연유는 적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쏘기 위하여 꾸불꾸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 성안에 벽돌 공장이 있었고 바닥은 지금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서문은 말을 타고 나갈 수 없을 정도의 가장 초라한 성문인데, 이 서문을 통과하여 삼전 나루에 나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임금의 체통상 남문으로 나갈려고 했는데 청나라 태종이 받아 주지 않아 결국 서문으로 나갔고 1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5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급한 눈길이라 말들이 꼬꾸러 져서 임금이 몇 번 빙판에 넘어 졌다고 한다.당시의 치욕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겨 낼 수 있으리라.
서문 밖을 돌아서 산성 서북쪽을 관찰할 수 있는 연주봉 옹성으로 이동하다. 이곳에 가면 성벽 밖을 관찰 할 수 있고 용마산, 예봉산, 검단산과도 연결이 되어 봉화로 서장대와 연락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시에 검단산에 조선의병들이 왔으나 봉화로만 응답하고 성을 구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고 한다.
다시 내려 오면 북문이다. 병자호란 때 대규모 전투가 없었는데 김유장군이 300여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북문 밖 가파른 비탈길로 나가다가 산뒤에 숨겨진 청나라 복병들에게 전멸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패전한 뒤 사기가 떨어지고 결국 47일만에 청나라에 투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종로로 내려와서 침괘정을 거처 행궁으로 이동하다. 행궁은 전쟁 때 피난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강화도, 수원, 북한산성에도 행궁이 있었다.이곳은 당초 목적지가 아니었으나 이미 강화도 가는 길은 막혀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내행전 자리는 임금과 딸린 사람들의 자리였고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이두문자가 나왔다. 통일 신라시대부터 중요한 자리로 추정된다. 내행전의 자리에 않으니 바람이 없고 따뜻하다.
하남의 입구 마방에 들러 점심을 들고 김훈 선생님의 특강을 듣다.
본인은 혼자 숨어서 글 쓰는 사람이다 . 남한산성-병자호란 때 47일간 버티면서 고립무원의 성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를 그려 냈다.
당시에 별의 별 놈이 다 있었다. 갇힌 성안에서 달아나야 살아 난다고 하여 도망간 사람도 많았고...
그러나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함께 싸워야 산다고 산성으로 들어 온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을 존경하지도 않는다. 끝까지 싸우고 싸운 지식인들 , 김상헌 대감과 청빈한 지식인들.......
매우 높은 이상과 고매한 조선의 지식인들-자손만대에 추앙을 받아야 하겠지만 눈앞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이었다. 성문을 열고 적의 노예가 됨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최명길,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돼지, 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양대의 축이 있었다. 오늘은 싸우자고 하고 내일은 투항하는 사람들, 각양각색의 사람들, 정치적 식견없이 살아가는 일반인들, 별의 별 놈들이 많았다.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것도 그려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소설은 미완성이다.
그 시대에 태어 났다면, 정9품이나 되었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 내었을까?
생각만 해도 진 땀이 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뒤에 태어 난 것을 감사한다.
인조 임금이 투항하고서 전쟁은 끝난다. 7년 전쟁을 하면서 백성들의 학살, 국가가 거들이 났다.
일본의 군사적 야망이 좌절되고 우린 완전히 참패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승리였다.
1만2천명의 군사는 성 주변에 있던 군사들이 모여든 향병이었다. 일관된 지휘계통이 안 잡혔고
훈련이 안된 군사들이었다. 45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 간장 220통이 전부였다. 화약이 있고 대포가
있었으나 쏘지 못했고 성밖은 20만명의 청나라 군사가 포위하고 있었다. 청나라 태종이 군사들을
인솔하고 내려 왔다. 아시아 최강의 군대 20만명에 포위되어 그 성안에서 47일간 무엇을 했는가?
가장 열심히 한 것이 말(言)이었다. 싸움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다. 성안의 궁핍한 생활을 알고
있었고 성을 깨 부시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을 포위하고 기다렸다.
싸움이란 북문에서 일어난 싸움이 전부였다. 그외 성벽에 오르는 군사를 죽인 것이 싸움의 전부였다. 밖과 싸우기 보다 안과 싸우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말과 말들이 서로 부닥치는 것을 그렸다.
결국 임금은 투항했다. 매우 처참하고 굴욕적으로 투항했다. 이 지구상에 청나라만 있는 것으로 알고 살겠다. 청나라가 요청하면 기한을 어기지 않고 나가겠다. 군사시설을 만들지 않고........
해마다 처녀 500명을 뽑아 청에게 받치겠다. 미모의 수준을 유지하겠다. 처녀를 지방에 할당하여
못 채우면 곤장을 쳤다.
인조의 투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배를 가르고 죽어야 할 치욕이다. 강한 나라로 살아가야 한다.
투항이 약소한 민족, 생존술로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반대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투항하기 전날 김상헌 선생은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발견되어 미수에 그친 위대한 정신이
있었다. 동양성리학이 길러 낸 훌륭한 인재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가면 되는 길이다. 자손만대
추앙하면 된다. 거룩하고 고귀한 길이나 따라 갈 수 없는 길, 비극적인 아이러니다.
생활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결말이 매우 빈약한 소설이다. 대장장이가 전쟁 끝나고 성에 돌아와서 새봄이 오니 농사를 시작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그 이상의 희망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희망이라고 하면 세상을 속인 것이다. 소설을 다 쓰고 나서 매우 슬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거짖말을 쓸 수가 없었다. 일상을 써 나간 것이다. 사실의 언어, 사실위에 정의를 세우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정의 위에 사실을 건설 할 수는 없다. 정의, 신념이 아닌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신념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타고난 허무주의자, 신념을 가진 자보다 의심에 가득 찬 사람을 존경한다. 관념, 추상으로 엮어진 신념이란 가치를 의심한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의 눈으로 바라 본다. 일상의 구체성으로 복귀한다. 의사가 병을 고친다. 감기라는 추상성, 그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감기에 들린 인간을 고친다. 감기라는 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고통은 다르다. 언어와
글과 삶 사이에 벌어지는 복잡하고 난처한 것 의심하는 편의 자다. 구체적인 편이다. 행복하고 밝고
남을 편하게 해 주는 글을 쓰고 살았는데 비극적인 글이 되고 말았다.
악과 폭력에 끝없이 짖 밟혀 가면서 인간의 운명이 드러난다. 대안이나 결론을 제시 할 수가 없었다.
정치지도자가 아니다. 운명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 내는 것으로 나의 임무는 끝났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은 이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건배를 제의 하겠다 해군은 바다로를 세번 한다. 육군은 앞으로를 세번 한다.
앞으로!, 앞으로! , 앞으로!
남한산성은 육군의 싸움터다. 군사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소설을 집필하는데 6~7개월이 걸렸다.
그전에 답사를 많이 하였다 2~3년간 답사하였다. 그 당시에는 성벽이 허물어진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성벽을 보는 순간 너무 놀랬다. 조국의 견딜 수 없는 비극,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 갔다.
이런 슬픔이 소설을 쓰겠다는 계기가 되었다. 구석구석 들여다 보면서 계절의 묘사, 지형의 묘사...
이 성을 좋아해서 여기와서 거의 살았다.
질문 1
유명작가와 3번째의 만남이다. 지천명의 나이인데 소설을 쓰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 달라.
-> 잘 모르겠다. 앞이 뿌였게 보일 뿐이다. 안개가 끼어 있는 느낌, 구름이 걷히고 선명하게 느끼는 것, 소설을 쓰려면 세상을 악착스럽게 들여다 보고 악착같이 해석해 내고 훈련이 필요하다. 되도록이면 안 하는 게 좋다.
질문 2
이번 산행에 큰 마음 먹고 왔는데 회사가서 전할 메세지가 무엇인가? 아들 딸에게 돌아가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 그거야 잘 모른다. 내 책 광고하느라 출판사에서 버스에 내 얼굴 붙이고 광고하고 돌아 다녔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친구가 묻더라.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본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추한 것도 아니다. 본래 기업은 그런 것이다. 선악미추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문제다.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실패하면 거대한 사회악을 만드는 것이다. 나라도 마찬
가지다. 국익을 저버리면 그것은 악이다.
질문 3
소설이 100만부가 팔렸으면 엄청난 부자인데, 돈에 대한 철학은 무엇인가?
-> 아들아 돈을 벌어 와라.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기 인격을 완성하려면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야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은 자기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기자시절에 월급 타다 와이프한테 갖다 주면 용돈을 받았다.
월급 타면 외상값 받으로 오고 ....... 그 꼴을 보면 추잡스럽고 산다는 게 울분이 났다.
그러면 그 돈으로 술을 먹는다. 돈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미워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질문 4
칼과 말로 되어 있는 역사, 몽고도 그랬고 우리를 점령했는데 왕을 왜 안 없앴는가?
조선의 왕을 안 없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 짐작이다. 중국은 왕조가 자주 바꼈다. 200년마다 바꼈다. 그게 나라도 건강하게 만들었고
강력한 지도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 할 때 한반도를 쳐 들어 왔다. 모택동까지 쳐들어 왔다. 중국의 왕조는 한반도가 멀어서 완전히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조공 바치고 말을 잘 듣는
변방국가로 두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질문 5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봉사활동에 대하여는? 깊은 슬픔, 나 하고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로 보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 태안에 가서 이틀간 기름 닦고 왔다. 끝이 안 난다. 밀물 때마다 기름이 들어 온다. 그 넓은 바다를, 돌맹이 하나 하나도 닦아야 한다. 삶을 관찰하라. 거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게 글 쓰는 자의
태도이다. 삶의 태도와는 다르다. 기름은 닦아야 한다.
바다앞에 거대한 유조선- 이 세상에 돌아 다녀서는 안 된다. 크렌인이 더 무서웠다. 왜 저런
괴물같은 크레인이 돌아 다녀야 하는가? 그런데 대안이 없다. 고민 할 뿐이지 알 수가 없다.
질문 6
광해군은 외교의 줄타기로 나라를 지켰다. 소현세자, 며느리 독살설이 있는데 인조의 리더로서 자질은? 리더로서의 평가, 덕목에 대하여 얘기해 달라.
->광해군은 인격 파탄자, 패륜아라고 하는 것이 상당한 사실 같다. 외교는 균형이 이루어 질 때 전쟁을 피할 수 있다. 동북아 균형자리- 그것은 한계가 있다. 명과 청이 대등한 세력이므로 균형이 이루어졌다. 그후 대륙에서 균형이 깨지고 그 결과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인조가 투항한 것은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고 단 하나의 길이었을 뿐이다. 그 후 북벌정책을 만들었고 청을 쳐 들어 갔다. 대의명분을 노린 정권의 국내기반 강화였다.
투항 한 것은 리더쉽의 중요한 본질이다. 북벌정책은 이념적인 것이다. 북학파- 청나라 문물을 배우게 되었다. 조선 정치사의 장관이다. 진화하는 자 만이 지도자의 길을 갈 수가 있다. 북벌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북학전환이 위대하였다. 전환노력이 중요하다. 이것이 전환기 리더의 덕목이다.
사실에 입각한 정신이 중요하다. 관념이 아니고 ....나는 수행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상은 작가와 산행을 중심으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둔다.
2. 2008년 1월26일 산행
행궁터를 중심으로 다시 돌아 보았다. 남한산성의 주봉 청량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으로 자리 잡은 곳, 좌청룡이 감아 돌고 수구는 겹겹이 겹치는데 47일간 비극의 역사가 펼쳐 지던 곳, 참 좋은 터인데 무엇이 부족 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건물의 좌향을 재어 보니 신술공망(291.5도)이다.
행궁터와 침괘정을 돌아보고 중앙주차장 내에 있는 산성 손 순두부집에서 점심을 들다. 산성 손 순두부집은 남한산성에 올 때마다 들리던 곳인데 항상 사람들이 모여 든다. 바로 우측에는 3대째 주먹순두부를 하였다고 하고 메스컴에도 몇 차례 소개 되었고 건물도 재대로 된 깔끔한 집인데 왜 유독 이 허름한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까 매우 궁금한 곳이다.
산성 손 수두부 집은 좌로는 상아궁 한정식집과 마을 정보센터가 확실한 청룡 역활을 담당하여 주고 있고 우측에는 오복 손 순두부집이 백호 역활을 해주고 있다. 오복 손 순두부집 뒤로는 병자호란 당시의 포도청, 지금은 중부파출소가 자리한 곳이다. 건물 뒤로는 도로와 작은 개울이 감싸 지나가고 있고 그 바로 뒤로는 산이다. 건물 앞에는 대형 공영주차장이 있고 그 앞에는 남한산성의 개울이 가로지르고 있고 그 다음은 산이다. 건물의 좌향은 자좌오향, 대문의 출입구는 곤문, 연기가 나는 꿀뚝은 태방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의 원리을 잘 적용해 보면 왜 그리 사람이 모여드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인 것 같다.
3. 2008년 2월 6일 산행
지난 추석에도 가족산행 온 곳인데 이번에도 구정 가족 산행을 다시 왔다. 청나라 20만 대군에 포위되어 1만2천의 군사로 47일간 어떻게 버텼을까를 생각하면서 역사의 현장을 다시금 돌아다 보았다. 당시를 생각한다면 지금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것이며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더우기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산에 오르기에 아주 좋은 코스인 것 같다.
2월8일 구정 다음날도 와이프와 남한산성의 솦 속을 걸으러 다시 방문 하였다.
언제나 가도 좋은 곳 - 남한산성, 바로 우리집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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