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퇴직연금 [3] : 일본 확정갹출형 기업연금
지난 2002년 12월 4일, 일본 최대 안경전문기업 미키는 직원들의 퇴직금을 관리×운영해 왔던 후생연금기금을 해산한 데 이어 퇴직일시금제도도 폐지했습니다. 경기불황으로 기금 운용환경이 극도로 악화된 것이 이유였습니다. 여기에 회계제도가 변경되면서 기업연금자산 적립부족분이 고스란히 부채가 되면서 재무구조가 악화되는 악순환도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미키가 선택한 방법은 ‘일본판 401k’로 불리는 확정갹출연금제도의 도입이었습니다. 직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순조롭게 이 제도가 정착됐고, 2004년 12월까지 전체 직원의 87%에 해당하는 2,642명이 확정갹출연금제도를 선택했습니다. 때맞춰 악화일로였던 회사의 재무구조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보통 25년이 걸리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단 7년 만에 맞이하게 된 일본은 퇴직금 설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 도입에 나서는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가장 유사한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 퇴직연금이 도입조차 되지 않은 우리로서는 일본 기업연금제도의 변화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1. 일본판 401k, 확정갹출연금제 도입
지난 1962년 도입된 적격퇴직연금과 이를 대체하기 위해 2001년 시행된 확정급부형 기업연금(DB형 연금), 1964년 후생연금기금제도 등 일본의 기존 기업연금은 기업이 책임을 지고 약속된 지급액을 종업원에게 지불하는 형식으로 운용돼 왔습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장기불황 속에서 사실상 제로금리로 운용돼 왔던 연금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게 됐고, 급기야 여기저기서 연금지급을 못하는 회사가 생겨났습니다. 믿었던 공적연금도 연금지급 연령이 계속해서 올라가 오는 2020년까지 65세 이후에나 구경할 수 있게 됐습니다.
후생노동성 연금국 후생노동사무관 야시모토 마나부는 “10년 불황과 저금리의 장기화로 연금자산 운용환경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기존 연금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면서 “이후 확정갹출연금제도의 조기 도입, 특별법인세 폐지, 하이브리드형 연금제 도입 등이 활발하게 논의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 내에서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의식이 확산되면서 스스로 연금자산의 운용×관리를 할 수 있는 확정갹출연금제가 도입됩니다. 미국의 401k제도를 참고해 지난 2001년 10월 실시된 이 제도는 회사나 근로자가 매달 내는 금액을 정하고 근로자는 이 돈을 책임지고 운용하며 실적에 따라 받는 연금액이 달라집니다. 퇴직금제도 운용의 자율성이 확대됐고, 기존 확정급부형의 문제점인 후발채무와 직업유동성 등의 해결, 금융시장 활성화 등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401k와 달리 ‘개인형’ 연금을 같이 두는 게 특징인데, 이는 60세 미만 근로자 중 기존 기업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나 자영업자를 위한 배려입니다.
2. 아직은 미약한 확정갹출연금제
“나눠먹을 파이가 작다 보니 관련회사도 시큰둥하고 특히 가입자들도 일반 적금과 다른 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견업체들의 참여가 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 상황을 지켜보는 정도입니다.” 다이와증권 펜션컨설팅의 미쓰라 후지타 부장은 당초 예상했던 시장규모의 20% 정도에 불과한 확정갹출연금제 시장을 놓고 금융기관 간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에 대해 이같이 털어놨습니다. 2004년 3월말 기준 일본의 기업연금 규모는 총 76조엔에 달합니다. 후생연금기금이 가입자수 849만명에 약 50조 엔, 적격퇴직연금 777만명에 약 21조 엔, 확정급부기업연금은 135만명에 8조 엔 대입니다. 반면 확정갹출형 연금의 경우 시장규모가 예금 4조 엔, 펀드 2조5,000억 엔, 보험 1조2,000억 엔 등 대략 7조7,000억 엔 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등록된 운영관리기관은 693개, 가입자 수는 기업형과 개인형 합계 105만여 명 정도입니다. 시행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전체 기업연금의 1%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이는
Ø 60세 이전에는 중도인출이 불가능한데다 기존 적금과의 큰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점
Ø 연금 적립금에 대한 특별법인세 등 각종 세금문제와 관련해 재무성과 후생성 간의 의견차
Ø 일본 투자자의 보수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3. 공격하는 은행×증권, 방어하는 보험
지금까지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일본 내 대부분 전문가들은 퇴직연근 관련 시장의 팽창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일본신탁협회 업무부 마쓰무라 홍보연수팀장은 “퇴직연금제도는 초기에 투자해 3~5년 후 수익이 발생하는 전형적인 규모의 경제가 발생하는 사업”이라면서 “매월 적립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연금자산의 특성을 감안할 때 금융사에는 향후 신사업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확정기여형(DC) 연금시장 규모를 2010년 27조 엔, 2020년에는 138조 엔 대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향후 급팽창할 시장에 대비하기 위해 금융권의 사활을 건 영업전쟁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은행을 비롯한 증권사는 향후 충분한 수익원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내다보고 관련 계열사 설립, 조직 개편 등을 통해 공격적인 영업에 나선 상태입니다. 반면 기존 DB형 연금을 취급했던 보험사나 신탁회사는 시장잠식을 우려해 방어적인 측면에서 관련 영업에 뛰어들었습니다.
4. 국내 기업연금에의 시사점
급격한 고령화를 비롯해 보수적인 성격의 투자자, 정부기관 간의 줄다리기, 비공식적인 관계가 중요시되는 금융기관과 기업의 관계 등 401k를 도입한 일본의 상황은 그 성패 여부를 떠나 기업연금 도입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후생노동성 연금국 기업연금국민연금기금과 간다 과장은 “일본은 강제적인 공적연금의 일부를 정책저긍로 적용 제외 제도로 자율화해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의 연계를 꾀한 것이 특징”이라면서 “제반여건에 있어 비슷한 부분이 많은 한국도 일본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연금에 대한 적용제외 및 갹출방식의 조정 등을 통해 충당금 중 기업연금으로 전환 가능한 부분을 확대하는 방안과, 기업연금의 형태 면에서 확정급부제도 만이 아니라 확정갹출제도나 혼합형 등을 동시에 수용함으로써 기업 및 종업원의 선택폭을 넓혀줘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에 퇴직일시금의 연금화를 기본방향으로 하되 유족연금, 질병연금 등 부가적 연금을 가미하고, 금융, 세제상의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충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