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분신이 勞-學연대 투쟁의 출발점"
장기표(張琪杓ㆍ1945년 12월 27일생ㆍ 한국사회민주당대표)
제대 후 70년 서울대 법대(66학번) 2학년에 복학했다. 법대 이념서클인 ‘사회법학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회법학회는 ‘4ㆍ19 정신을 이어받아 학생들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동문제 해결을 그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노학연대’에 관한 논의와 토론이 잦았다. 10월 3일 주간 소식지 ‘자유의 종’을 창간했다. ‘자유의 종’에는 농활 체험기와 탄광촌 실태조사 보고서 등을 특집으로 실었다.
7일자 석간신문에 청계천 평화시장의 열악한 고용환경을 고발하는 기사가 나왔다. 10일 발행된 ‘자유의 종’ 2호에 이 기사들을 모아 전재했다. 우리는 평화시장의 실태를 특집으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태일 분신 보도를 접하고 커다란 당혹감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요구가 이뤄지기 전에는 장례를 치룰 수 없다’며 사체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후배 2명과 함께 명동 성모병원으로 갔다. 나는 당시 한일협정 관련 발언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어서 후배를 영안실에 들여보내고 나는 정문 앞 삼일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소선씨를 처음 만났다.
그는 우리에게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찾아온 목적을 물었다. 지극히 차분하고 뭔가 결의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왜 이제야 왔느냐. 당신들이 조금만 일찍 왔으면 아들은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이 살아온 길과 분신하기 직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2시간 이상 설명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씨는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학생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냐”고 물었다.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처음 만난 우리에게 “아들의 사체를 인계해 주겠다”고 흔쾌히 약속했다.
곧바로 학교로 돌아와 동지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70여명이 모였다. 학생들은 그 길로 모두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영안실에서 빈소를 지키며 학생장의 방법과 시기 등을 협의했다. 그날 밤 경찰이 들어 닥쳤다. 조화가 쓰러지고 집기들이 부서지는 등 난장판 끝에 학생들은 모두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씨는 경찰들의 발을 붙잡고 바닥에 넘어지면서 학생들을 도피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틈에 나는 영안실 뒷문을 통해 도망갔다. 이씨는 실신해 응급실로 옮겨졌다. 이씨는 학생들을 풀어주지 않는 한 아들의 장례식을 치룰 수 없다고 버텼다. 다음날 학생들은 풀려났다.
학생들은 영결식에서도 격리됐고, 모란공원 장지로 가는 버스에서도 따돌려 졌다. 장례식이 끝난 뒤 매일 밤 ‘창동 집’(행정구역은 쌍문동 208번지)으로 이씨를 만나러 갔다. 그 곳에는 삼동회 회원들과 전태일의 친구 후배들이 언제나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근무를 마치고 밤 11시쯤부터 모여들었다. 이씨는 언제나 더운 밥을 해 주었다. 새벽 1시쯤부터 우리는 노동조합, 근로기준법 등에 대해 토론을 했다. 내가 설명하고 그들이 질문을 했다. 나는 새로운 노동운동 방향을 3가지로 요약해 주었다.
첫째, 그 동안의 집행부는 개개인의 하소연을 들어 사업주에게 건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개별적 고충들을 모아 조합원에게 알림으로써 집단적 결집력을 바탕으로 제도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임금을 얼마 더 달라는 요구보다 노동시간 단축 등 근로조건 개선 쪽으로 요구사항을 모아야 한다.
셋째, 정책개선을 위해 정치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뿐 아니라 대학생들이 운동에 가담하는 노학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시간 단축의 경우, 사장들이 말로만 그렇게 하겠다 하고도 얼마 지나면 지켜지지 않는다. 따라서 ‘10시간 근로시간 준수’라는 약속보다 ‘오후 8시에는 평화시장 공장의 두꺼비집을 내린다(전원을 끊는다)’는 약속을 요구했고, 하나씩 관철시켜 나갔다. 또 노동교실을 마련하고 야학을 설치해 근로자들을 교육하고, 몇몇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중간 서클을 만들어 의식을 아래로 확산한다는 식이었다.
이후 나는 ‘청계노조 시위 등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전국에 수배됐을 때 이씨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민청학련 사건이 마무리 된 후 77년 6월 청계노조 관련 혐의로 검거돼 구속됐다. (장기표씨는 말을 마치며 “그가 보름달이면 나는 반딧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