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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이 이야기하듯 스님의 인터뷰, 포행 사진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은 열반처 무심당 앞 법전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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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성철스님은 제자에게 1951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그만큼 그릇이 큰 재목이었다. 아래의 일화가 일찍 여문 법력을 일러준다.
성철스님이 법전스님의 깨달음을 인가한 1957년의 이야기다.
성철스님이 정진하던 파계사 성전암을 찾아간 법전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조주구자(趙州狗子) 화두를 받았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우째서 없다고 했노?”라는 성철스님의 서릿발 같은 질문에 법전스님은 막힘이 없이 일렀다.
“일월동서별(日月東西別)하니 좌인기이행(坐人起而行)이라(해와 달이 동서를 구별하니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더라).”
며칠 뒤 성철스님은 또 다시 법거량(法擧量)에 나섰다.
법전스님은 이번에도 막힘이 없었고 성철스님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2009년 법전스님이 발간한 자서전 <누구 없는가>에는 당시의 소회가 실렸다.
“7년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환희에 찼다”며 “눈을 뜨고 보니 밤과 낮이 둘이
아니었으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목숨을 건 수행의 끝자락에서 탐진치(貪瞋痴)를 떨쳐낸 참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철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은 뒤 법전스님은 문경 대승사 묘적암으로 향했다.
절구통 수좌로서의 본색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한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몰랐다.
당시 스님은 저 쌀이 다 떨어지기 전에 공부를 마치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겨울을 찬밥 한덩이에 김치 한 조각 물 한 모금으로 버텼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았고 비로소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초극의 경지를 체험했다.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극복한 자리에는 초인(超人)의 오도송이 남았다.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치니 비치는 것과 그림자가 둘 다 없더라.
이것이 또한 무슨 물건이냐 청산이 백운 속이더라.”
법전스님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좌들 사이에서 ‘절구통 수좌’로 불렸다.
수마(睡魔)를 조복받아 며칠째 한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용맹정진을 했기 때문이다.
올곧은 정진의 상징이자 인간 한계를 극복했음을 보여주는 훈장과 같은 별명이다.
어느 날 ‘수좌들이 정말 잠을 자지 않는가’ 의문스러워 장군죽비를 들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법전스님은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칠일이 지나도 꿈쩍을 하지 않았고,
수좌들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절구통 수좌의 수행가풍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인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예방을 받은 법전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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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선지식들이 그러하듯 법전스님도 이사(理事)에 걸림이 없었다.
화두참구로 터득한 혜안으로 불교계의 앞날에 빛을 드리웠다.
1981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맡으면서 10ㆍ27법난으로 혼란스러웠던
종단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울러 1967년 해인총림이 설치되면서 해인사와 인연을 맺었다.
1969년 유나(維那) 소임을 맡아 총림 초기 체계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1984년엔 해인총림 수좌(首座)로 천거되면서 방장인 성철스님을 보필하며
수행가풍 확립에 최선을 다 했다.
1996년부터 해인총림 방장(方丈)에 취임하면서 법보종찰을 이끌었다.
가람수호와 총림대중의 화합을 통해 수행가풍 진작에 매진한 선승(禪僧)의
면모는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는 종정에 취임함으로써 정점을 찍었다.
2002년 조계종 11대 종정, 2007년 12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10년간의
대임(大任)을 원만하게 회향했다.
스님의 연보는 단순하다. ‘어느 절에서 안거를 지냈다’가 대부분이다.
출세해서도 공심(公心)을 잃지 않았으며, 본래자리 바깥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108배와 화두참선을 삶의 지남(指南)으로 삼았던 산승의 표본이다.
내면을 향한 스님의 근성과 기백은, 헛것에 취해 불성(佛性)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현대인들에게 뜨거운 메시지를 남긴다.
스님은 자서전 <누구 없는가>의 마지막 구절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이렇듯 조용히 살다가 육신의 몸을 벗으면 몇 겁을 살더라도 다시
수행자가 되어 마음 밝히는 일에 생을 걸리라.”
한없이 소박하고 투명한 삶을 견지했던 도인이, 오늘 적멸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 임종게
山色水聲演實相
曼求東西西來意
若人問我西來意
巖前石女抱兒眠
산빛과 물소리가 그대로 실상을 펼친 것인데
부질없이 사방으로 서래의를 구하려 하는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서래의를 묻는다면
바위 앞에 석녀가 아이를 안고 재우고 있구나
■ 법전대종사 연보
1925년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출생
1938년 장성 백양사 청류암으로 입산(入山).
1941년 영광 불갑사에서 설호스님을 계사로, 설제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
1947년 백양사 강원 대교과정 수료
1948년 24세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및 보살계 수지
1948년~1950년 문경 봉암사에서 시작한 봉암사 결사에 동참해 법사인
성철스님을 만나 하안거와 동안거 정진
1951년~1954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을 시봉하면서 하안거와
동안거 정진, 성철스님에게서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받음
1955년 대구 파계사 성전암을 복원, 성철스님을 모심. 문경 원적사, 상주 갑장사에서 안거.
1956년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홀로 정진
1957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정진하던 중 성철스님에게서 깨달음을 인가받음
1958년 태백산 홍제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 정진
1959년~1966년 문경 갈평토굴 및 태백산 도솔암, 사자암, 백련암, 김용사 금선대,
지리산 상무주암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함.
1967~1968년 해인총림 해인사에서 하안거, 동안거
1969년 해인총림 유나 역임
1969~1984년 김천 수도암에 주석하면서 가람 중수 및 선원 복원. 제방의 납자 제접
1981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역임
1982년 조계종 총무원장 역임
1984~1993년 해인총림 수좌 역임
1986~1993년 해인사 주지 역임
1993~1996년 해인총림 부방장 역임
1996년 해인총림 제7대 방장 취임
2000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역임
2002~2007년 조계종 제11대 종정 역임
2007~212년 조계종 제12대 종정 역임
2009년 자서전 ‘누구없는가’ 출간
2014년 12월 23일 도림사 무심당에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원적
[불교신문3070호/2014년12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