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9월 당시 박희봉(이시도로) 주임신부는 문학진(토마스) 교수에게 '103위 순교복자성화'를 의뢰하였다. 작가는 10개월에 걸쳐 전례, 역사, 복식 등 전문가(오기선 신부, 유홍렬 박사, 석주선 선생) 등의 폭넓은 자문과 한국적 주체성을 살려 한 분 한 분의 표정과 복장을 특색 있게 그렸다.
시대와 신분이 각각 다른 순교자들이 평등한 위치에서 천국의 개선을 기다리며 기쁨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와 감동을 안겨준다. 그리고 천사들은 선녀의 모습으로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하늘 위에서 순교자들을 축복하고 있고, 아기천사들은 동자의 모습으로 나팔을 불고 춤을 추며 순교자들이 천상에 오르는 것을 경축하고 있다.
배경의 산세는 아름다운 도봉산의 일부로서 한국의 전통과 토속적인 모습을 풍기고 있다. 이 성화는 1977년 7월 15일, 김수환 추기경의 제막과 축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 후 1984년 5월 6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한국순교복자’ 모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고, 이 작품이 여의도 103위 시성 식장에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이 햇빛에 노출되어 화면 곳곳에 박락 현상이 생겼고,8월에 문학진 화백이 전면적으로 그림을 보수했다. 이 성화의 제작과정에서 순교복자들의 배치를 명동대성당에 있는‘79위 복자 성화도’(1926년, 프랑스 화가 쥬스타니안 제작)를 참조하였으나 대부이신 박성갑 교수(당시 서강대 재직)가 “한국순교복자 성화에서 외국인이 중앙에 있으면 주체성이 좀 부족해 보인다.”고 제안하여 중앙의 외국인 주교 자리에 김대건 신부를 모시고, 김대건 신부의 자리에는 외국인 주교를 옮겨놓게 되었다.
당시 이것은 가톨릭 교계제도에서 ‘쿠테타’라고 표현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고, 한국 천주교회가 자생적인 것처럼,성 미술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한 하나의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