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군(谷山郡)
북한 황해북도 북동부에 있는 군.
면적은 520.68㎢, 인구는 12만 693명(2008 추정). 북쪽은 신평군, 동쪽은 강원도(북한) 판교군, 남쪽은 신계군, 서쪽은 수안군과 접한다.
지세는 높이 1,000m 이상의 높은 산과 계곡이 얽혀 있어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이라는 뜻의 ‘곡산’이라는 지명에 걸맞은 고을이다. 동·서·북의 3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이나, 중남부지역인 남강과 곡산천 유역은 곡산분지를 중심으로 저평야지대를 이룬다.
지형은 일반적으로 동부가 높고 남서부로 가면서 점차 낮아진다. 동부에는 아호비령산맥이 뻗어 있고 여기에 선바위산(1,106m), 명지덕산(910m), 덕업산(1,019m) 등이 있다. 남부에는 태을산(682m)이, 북서부에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언진산맥에 대각산(1,278m), 구봉산(910m), 고재봉(924m) 등이 솟아 있다.
주요 하천은 곡산천이며 이 하천은 선바우산천·용양천(룡양천)·양지천·유천(류천)·고성천·대각천 등 20여 개의 지류를 모아서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으로 흘러든다. 곡산천의 중류 연안에는 곡산분지가 발달했으며 남서부에는 미루평야(미루벌)가 있다. 신곡·친선·오류저수지가 있다.
산림은 군 면적의 약 63%를 차지하며 주요 수종은 참나무·잣나무·다릅나무·단풍나무·느릅나무·소나무 등이다. 토양은 현무암 위에 발달한 갈색산림토이다. 기후는 내륙 고원에 위치하므로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갖고 있다. 연평균기온 9℃, 1월평균기온 -8.5 ℃, 8월평균기온 23.7℃, 연평균강수량 1,347㎜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된 적은 없으나, 황해도의 평산과 평안남도 상원에서 구석기 유적이, 황해도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 유물·유적이 발굴되어 이 군에서도 구석기·신석기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군내의 선암리 돌널무덤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돌칼·돌화살촉 등이 발굴되어 곡산에 청동기시대문화가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십곡성(十谷城)이었으며, 덕돈홀(德頓忽) 또는 곡성(谷城)·고곡군(古谷郡)이라고도 한 것으로 보아, 지명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후 신라가 예성강 이북지역의 개발을 활발히 추진한 결과 748년(경덕왕 7)십곡성현이 되었고, 757년진서현(鎭瑞縣)으로 개칭되어 영풍군에 소속되었으며, 762년 성을 수축했는데 모두 경덕왕 때의 일이다.
825년(헌덕왕 17) 신라의 왕족 범문(梵文)이 이 곳 100여 명의 도둑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한 일이 있다.
[고 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4년 만인 940년(태조 23)에 곡주(谷州)라 개칭하고, 995년(성종 14) 방어사를 설치하였다. 1018년(현종 9) 방어사 대신 지군사(知郡事)를 두고 신은과 협계를 속현으로 소속시켰다.
1019년 거란이 침입해 곡산과 수안·신은을 노략질함에 따라, 정부가 양식과 농사용 종자를 공급해 주고 예성강 남쪽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켜 국방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1178년(명종 8) 조위총(趙位寵)의 반란군에게 성이 함락되어 재물을 약탈당하는 수난을 겪었고, 1258년(고종 45) 달포성(達浦城)에서 주민들이 방호별감을 사로잡아 몽고에 투항함으로써 1270년(원종 11) 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예속되었다가 1278년(충렬왕 4) 고려에 환속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왕이 유숙(柳淑) 등에게 명해 이 곳과 수안 등지에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도록 한 일이 있다. 1391년(공양왕 3) 서해도 관할에서 경기우도 관할로 이속되었다.
[조 선]
1393년(태조 2) 태조의 둘째 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출생지라고 해 곡산이라 개칭하고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듬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경기지역을 조정할 때 서해도로 환속되었다.
태조의 첫째 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 태종이 즉위한 뒤 1402년(태종 2) 곡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 전국 군현의 명칭을 조정할 때 곡산군으로 개칭되었고, 1669년(현종 10) 신덕왕후가 복위됨으로써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운중면 용봉동의 신덕왕후 출생지에 1799년(정조 23) 왕의 친필로 ‘聖后私第舊基(성후사제구기)’라고 새긴 비를 세우고, 하람산(霞嵐山, 일명 河南山) 정상에는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말을 달리던 곳이라 해 왕의 친필로 ‘馳馬舊基(치마구기)’라고 새긴 비를 세워 기념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중엽의 호구는 816호에 2,828명이었는데, 1828년(순조 28) 3,357호에 2만9911명으로 증가하였다. 조선 후기에 여러 장시가 형성되었으나, 황해도 지역보다는 교통이 편리한 평안남도 성천·양덕이나 함경남도 문천·원산과의 교역이 더 활발하였다. 1811년 주민들이 탐학을 일삼던 도호부사 박종신(朴宗臣)을 몰아내기 위해 큰 폭동을 일으켰다.
[근 대]
1895년(고종 32) 지방행정제도 개편 때 곡산군으로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곡산읍에서도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군민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 때 황해도 대표로 황해도 동북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경섭(李景燮)과, 뒤에 중국으로 망명해 김구(金九)·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독립군 조직을 위해 활약한 이용훈(李容薰)이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대 이후 당시 동양 최대의 텅스텐광산으로 알려졌던 백년광산(百年鑛山)과 기주광산 등이 개발되어 갑자기 거대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다. 1942년의 호구는 1만4551호에 8만3048명이었다.
남북분단 이후 황해북도 곡산군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유물, 유적
멱미면 마하리 문성동의 검암령(檢巖嶺)에는 문성진(文城鎭)의 유지가 있다. 길이 험하고 진의 방어시설이 완벽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방어했던 곳으로, 지금도 성문터와 진영터가 남아 있다.
문성진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종 때는 병마만호가 설치되었으며, 1683년(숙종 9) 첨사진으로 승격되었다.
'곡산읍지'에 따르면, 진에는 첨사 통솔하에 장교 8명, 이속 6명, 나졸 8명, 아병(牙兵) 440명이 있었다고 한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부근에 달보산고성(達寶山古城)이 있었다고 한다.
‘달해산성지(達海山城址)’라고도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성 둘레가 1만5060척이라고 되어 있다.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에 따르면, 신라와 백제가 국운을 걸고 싸울 때 요충지였다고 한다.
화초면 문고리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옛 성터가 있으며, 그 부근에 군막과 창고가 있었던 까닭에 대막곡(大幕谷)·소막곡(小幕谷)·창대동(倉垈洞)의 지명이 남아 있다. 하람산 정상에는 조선 태조가 개국 전에 말을 타고 무술을 익힌 치마대(馳馬臺)와 그 때 마시던 물인 수라천(水刺泉)이 있고, 또 그것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세운 ‘치마구기비’가 있다.
운중면 임계리 용봉동은 태조의 두 번째 비인 신덕왕후가 출생한 곳으로 ‘신덕왕후사제구기비’가 있다. 광복 당시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던 곡산객사와 그 동쪽에는 고려 말기에 창건된 척서루(滌暑樓)가 있었다.
곡산객사는 창건연대는 전하지 않으며, 정조 때 부사 이익진(李益晉)이 중수했고, 1798년(정조 22) 곡산부사로 와 있던 정약용(丁若鏞)이 개축하였다.
객관의 현판에 쓰인 ‘象山館(상산관)’이라는 글씨는 정조 때 문신 윤사국(尹師國)이 쓴 것이며, ‘鎭瑞館(진서관)’이라는 액자글씨는 곡산부사로 있던 임정(任珽)이 쓴 것이다.
척서루는 곡산객사 안의 동쪽에 있는 누대로 고려 말 지곡주사(知谷州事) 윤상(尹商)이 창건하였다. 당시의 문호 이색(李穡)이 척서루에 관한 내용을 <곡주신루기 谷州新樓記>에 담아 기록하였다.
한편, 산에는 오래된 절이 많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달산에 고달사(高達寺)·불봉사·운흥사(雲興寺), 증봉산에 사효사(思孝寺), 운달산에 사벽사(沙壁寺), 오륜산에 관적사(觀寂寺), 백운산에 정림사(淨林寺)가 있었다. ≪곡산읍지≫에는 양수사(兩水寺)·백운사(白雲寺)·진국사(鎭國寺)·입암사(立巖寺)·금전암(金田庵) 등의 이름도 보이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곡산면(谷山面)
군의 남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7.82㎢, 인구 7,23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능동리이다. 북쪽에 구봉산(九峰山, 916m)이 높이 솟아 있으며, 그 지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100m 내외의 구릉이 많이 형성되어 있으나,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이다. 동남쪽에 곡산천이 흐르는데,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었고 토지가 비옥해 경작지나 주거지로 이용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로 밀·보리·콩·벼·조·메밀 등이 경작되고 닥나무[楮]도 재배된다. 능동리에 있는 주물공장에서는 솥·농기구 등을 제작해 인근지방까지 판매된다.
1·6일에 열리는 곡산장은 남천리에서 열리며, 농산물·일용잡화·소 등이 거래된다. 신계∼양덕간의 2등도로, 곡산∼수안간의 3등도로가 있어 버스가 운행된다. 그 밖에 각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지나 교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구읍내에는 옛 객사가 남아 있고, 남산 기슭에는 유명한 호로천의 약수터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능동(陵洞)·남천(南川)·장림(長林)·송항(松項)·부평(富坪)·적성(赤城)·연하(蓮荷)·장(長) 등 8개 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