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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崔承老)는 경주(慶州) 사람이다. 부친 최은함(崔殷含)은 신라에서 벼슬하여 원보(元甫)에까지 이르렀고, 오랫동안 후사가 없으므로 기도하여 최승로를 낳았다.
〈최승로(崔承老)는〉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屬文]을 잘 하였다. 열두 살 때 태조(太祖)가 불러서 접견한 후에 『논어(論語)』를 읽게 하였는데, 매우 가상하게 여겨 염분(塩盆)을 하사하였다. 〈태조가〉 명령하여 원봉성(元鳳省) 학생으로 소속시키고, 안마(鞍馬)과 예식(例食) 20석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그에게 문한(文翰)에 관한 모든 책임[文柄]을 맡겼다. 성종 원년(982)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 行選官御事 上柱國)이 되었다.
당시 왕이 〈신하의〉 의견을 구하자[求言], 최승로가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신은 초야(草野)에서 나고 자라서 성품이 우매하고 학문도 부족합니다. 다행히 밝은 시절을 만나 오래 동안 외람되게도 근시(近侍)의 직을 맡았고 대대로 특별한 영예를 입었습니다. 비록 뛰어난 계책으로 시절을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오직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당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연간에 사신(史臣)으로 있던 오긍(吳兢)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지어 올려, 현종에게 태종(太宗)의 정치를 〈본받아〉 힘써 행할 것을 권고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일의 근본이 서로 비슷하고, 한 가문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정치가 훌륭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創業] 왕통을 물려주신 것[垂統]은 곧 시조[祖]의 공이요, 여러 임금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수성(守成)한 것은 뒤 임금들[宗]의 덕입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자손의 행복과 경사를 열어주셨는데, 뒤 임금들은 중흥하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했으니 일면 부족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정치에 치란이 있었고, 일에 선악이 있었으며, 많은 경우 시작할 때와 같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여,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이래로 신(臣)이 알고 있는 바는 모두 저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5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가 잘되었거나 잘못된 사적을 기록하여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조목별로 아뢰고자 합니다.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왕위에 오르셨으니, 그 시기는 난세[時當百六]에 해당하였고, 운수는 천년에 합치[運協一千] 하였습니다. 처음에 내란을 평정하시고 흉악한 무리를 정벌하실 때, 하늘이 전주(前主)를 내어 그의 손을 빌리었고, 그 뒤에 임금이 될 상서로운 조짐과 합하여[膺圖] 천명을 받아 〈왕 위에 오르시니〉 사람들이 〈태조의〉 성덕을 알고 진심으로 따랐습니다. 이에 신라[金雞]가 스스로 멸망하는 시기를 만났고, 고려[丙鹿]가 다시 일어나는 운을 타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곧 대궐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 공은 매우 높으시고 덕은 매우 크시다 하겠습니다.
거란(契丹)은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니 마땅히 먼저 우호를 맺어야 하는데, 저들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습니다. 우리가 곧 교빙(交聘)을 중단한 것은 저들이 일찍이 발해와 서로 연합했다가 갑자기 의심이 일어 옛 동맹을 고려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조께서는 이를 매우 무도한 것으로 여기시어 국교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바친 낙타도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심원한 계책으로 우환을 미연에 막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보존함이 이와 같으셨던 것입니다. 발해가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자 그 나라 세자인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나라가 의(義)로써 흥기하였으므로 그 나머지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태조께서는 이들을 더욱 가엾게 여기시어, 영접과 대우가 매우 두터웠고, 성과 이름을 하사하시기까지 이르렀으며, 또한 그들을 종실의 적(籍)에 붙여서 자기 조상들에게 제사[禋祀]를 받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들 중 문무(文武) 참좌(叅佐) 이하에게도, 또한 모두 벼슬과 품계를 넉넉하게 더하셨습니다. 이처럼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가게 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능히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와서 복속하게 만든 것입니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은 흉패(兇悖)하고 변란을 좋아하여, 임금을 죽이고 백성에게 모질게 했는데 태조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주무시고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죄를 다스리어, 마침내 〈신라를〉 바로잡아 회복하셨습니다. 그가 옛 임금을 잊지 않으시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여 안정시키신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 말기부터 우리나라[고려] 건국 초기까지 서북 변방 백성들은 늘 여진(女眞)의 번기(蕃騎)가 종종 내려와 침략과 도적의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셔서 한 사람의 훌륭한 장수를 보내어 그 곳을 지키게 하셨으니, 작은 칼을 〈휘두르는〉 수고도 없이 도리어 오랑캐들이 귀순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국경 밖의 소요[塵]가 다스려져서 변방에 근심이 없었으니, 태조께서 사람을 알아보고 임무를 적절히 맡기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능하게 함이 또한 이와 같으셨습니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운수가 다하여 스스로 귀화하기를 요청했으나, 〈태조께서는〉 두세 번 사양하시다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동쪽으로는 명주(溟州)로부터 흥례부(興禮府)에 이르는 사이 110여 개의 성들이 〈태조의〉 인자함에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즉시 귀부하여 왔습니다. 〈태조께서〉 예의바르고 겸손함으로써 사람들로 감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이 또한 이와 같으셨습니다. 다만 남쪽으로 후백제를 평정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였습니다. 무릇 크게 군사를 일으킨 것이 전후 수차례였으나, 태조의 깃발 아래와 무기와 군마 앞에서 어떤 자는 전쟁터에 나선 후 투항하고, 어떤 자는 위풍에 놀라 두려워서 투항하였습니다. 비록 창과 칼을 마주하고 싸워도 살상하지 않으려 하셨으니, 이는 어진 사람에게 적이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견훤은 죄악을 쌓은 지 수십 년 만에 결국 반역자[逆豎]에게 수감을 당하였다가 우리나라로 도망하여 반역한 자들을 토벌하겠다고 군사를 요청하였습니다. 태조께서는 이를 듣고 후한 예로 맞아들였고, 그가 죽자 부의도 넉넉히 내리셨습니다. 도리는 현세와 내세에 일관하였고, 의리는 산자나 죽은 자도 고루 미친 것이 이와 같으셨습니다. 후백제를 평정하자 〈태조께서〉 도성에 들어가셔서 궁핍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구휼하셨고, 위로와 타이름을 후하게 더하였으며, 여러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의 재물을〉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또 남북이 오래 동안 분열되고, 신구(新舊)가 나뉘어졌으나, 태조께서는 이를 한결같이 어루만지시고, 처음과 끝이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조의 도량이 크고 너그럽고 관대하심이 또한 이와 같으셨습니다.
통일을 이룩한 이래로 8년 동안 정사에 부지런하셨고, 예로써 사대(事大)하셨으며, 도의로써 이웃 나라와 교류하셨고, 편안할 때라도 안일하지 않으셨으며,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공손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도덕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셨습니다. 궁실(宮室)을 낮게 하여 겨우 비바람을 가리고자 하셨으며, 거친 옷으로 단지 추위와 더위만을 막고자 하셨습니다. 어진 이를 좋아하셨고 착한 일을 즐기셨으며, 자신의 고집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 바르고 겸손한 마음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민간에서 생장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두루 겪으셨으므로 사람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깨닫지 못한 것이 없으셨고, 만사의 안위를 미리 볼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상벌이 적당한 시기를 잃지 않았고, 진실과 거짓이 길을 함께하지 않았으며,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방법을 알아 제왕의 도리를 체득하신 것이 또한 이와 같으셨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그들의 재주를 잃게 하지 않으셨고, 아랫사람을 거느릴 때는 반드시 그의 능력을 알아보셨으며, 어진 이를 임용한 후 의심하지 않으셨고, 사악한 사람을 제거한 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불교를 받들고 유교를 중하게 여겨 임금으로서의 미덕[令德]이 이로써 갖추어지게 되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계책이 본받을 만하였습니다. 다만 건국 초기로 태평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아 종묘사직이 아직 아름답게 높여지지 못하였고, 예악과 문물은 오히려 부족한 것이 많았으며, 백관의 품계와 격식과 중앙과 지방의 규정과 의례가 미처 갖춰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조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弓劒], 이는 나라 사람들의 불행이고 참으로 믿기 어려운 천도(天道)로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혜종께서는 오랫동안 태자로 계시면서 여러 차례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위무하는[監撫] 일을 처리하셨고, 스승을 존경하여 예우하고, 빈객(賓客)과 관료들을 잘 대우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명성[令名]이 조야에 알려져, 처음 즉위하셨을 때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정종 형제를 참소하여 반역의 뜻[異圖]을 가졌다고 말하였습니다. 혜종은 듣고도 대답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묻지도 않으시고, 은혜로 대우함이 더욱 풍성하여 그 〈정종 형제를〉 대함이 처음과 같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분의 큰 도량에 감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덕정(德政)을 닦지 않고 지나치게 자신의 목숨을 아껴 좌우 전후에 항상 갑사(甲士)들로 뒤따르게 하셨으니, 이는 대개 사람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군주의 체통을 크게 잃으신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상(賞)이 장사(將士)들에게 치우쳐 은택이 고르지 못하고, 그러므로 조정의 안팎에서 원망하고 탄식하니 인심이 떠나게[攜貳] 되었습니다. 또한 즉위한 다음 해(944)에 곧 불치의 병을 얻어 침상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셨습니다. 이에 조신과 현사들은 그 앞에 가까이 가지 못했고, 향리(鄕里)의 소인(小人)들이 항상 침실 안에 거하였습니다. 그 병이 더욱 위독해질수록 노여움[嗔恚]이 날로 더해져서, 3년 동안 백성들은 그의 덕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혜종이 돌아가시는[晏駕] 날에 이르러 겨우 횡화(橫禍)를 면할 수 있었으니 가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종께서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석에 누워 오랫동안 계시니, 재신(宰臣) 왕규(王規)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먼저 이를 알아차리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되고 의리 있는 장군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일어나자 시위하는 군사[衛兵]들이 많이 도착하였고, 이에 간악한 계략은 성공하지 못하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으로 말미암았으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위대하시다 하지 않겠습니까? 정종으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그 사이 홍복[洪祚]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역시 정종의 공이십니다. 정종은 임금의 형제[連枝]로 왕위를 계승하시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시어[孜孜],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정밀하게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가며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까지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 초에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참(圖讖)을 그릇되게 믿게 되어 천도(遷都)를 결정하셨습니다. 또한 천성이 굳세어 고집을 굽히지 아니하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이 옳다고 생각해도 사람들은 진심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천도하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 남면(南面)하셨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광종께서는 뛰어난 용모와 우수한 자질로 태조의 사랑을 특별히 받았습니다. 친히 정종의 유언[顧命]을 받고, 형제간에 도와 왕위를 계승하여[鴒原襲慶], 왕위가 잘 이어졌습니다[鳳扆傳華]. 예의를 갖추고 아랫사람을 접하셨고, 분별력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판단하셨습니다. 종친과 귀족이라고 치우치지 않으셨고, 항상 세력이 강한 자들을 물리치셨습니다. 먼 친척이나 천한 사람이라고 꺼리지 않으셨고, 홀아비 및 과부 등 불쌍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즉위한 해로부터 8년까지 정치와 교화가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쌍기(雙兾)를 등용한 뒤로부터, 문사(文士)들을 높이고 중용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재능 없는 사람[非才]들이 지나치게 등용되어 순서를 따르지 않고 별안간 승진하여 일 년[歲時]도 안 되어 갑자기 재상[卿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저녁마다 사람을 불러 접견하시고, 어떤 때는 날마다 불러 의견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기쁘게 생각하시고 정사에 태만하시니,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막혀서 통하지 않았고, 마시고 먹는 잔치가 길게 이어지고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남북용인(南北庸人)이 다투어 청탁하고 의탁하였는데, 지혜와 재능이 있는지는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예절로써 대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후생(後生)은 다투어 나아가고, 오래도록 덕 있는 자들은 점점 쇠락하였습니다. 비록 화풍(華風)은 소중하게 여기셨지만, 중화의 훌륭한 법식은 취하지 못하셨으며, 중화의 선비는 예의로 대우하셨지만, 중화의 현명한 인재는 얻지 못하셨습니다. 백성으로부터는 피와 땀이 서린 재물을 짜내고, 사방으로부터는 실속 없는 칭찬만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는 정치에 힘쓰지 않고 빈료(賓僚)만을 접견하니 시기는 날마다 깊어 가고 정사에 대한 토론[都兪]은 날로 막혀서, 당면한 정치적 득실에 대해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교를 너무 깊이 믿으시고, 불경[法文]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셔서, 관례에 따라 행해지는[常行] 재(齋)를 지내는 것이 이미 많은데도, 특별히 기원하는 분향(焚香)과 수도(修道)가 적지 않았습니다. 오직 복과 장수만을 구하시고 기도만을 일삼으시니, 한정된 재력을 다 쓰면서 무한한 인연을 만들려 하셨습니다. 제왕(帝王)의 지위를 스스로 낮추고, 사소한 선행을 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또한 연회와 놀이의 출입에 사치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단지 눈앞에 사고가 없는 것을 불교의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시어 잘못된 행위를 뉘우치고 고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궁실(宮室)은 반드시 제도를 뛰어 넘고, 의복과 음식은 모름지기 진귀하고 고운 것에 지극하셨습니다. 토목 공사는 적당한 시기를 생각하지 않았고, 공교한 것을 만드는데,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대략적으로 평상시 1년의 경비를 계산하면 충분히 태조대 10년 동안의 비용이 될 만 하였습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는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살해하셨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만약 광종께서 항상 공손하고 겸손하며 비용을 절감하고 처음과 같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생각하셨더라면, 어찌 그의 복록과 수명이 길지 못하여 겨우 향년 50세에 그쳤겠습니까? 그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합니다.
더구나 경신년(광종 11, 960)부터 을해년(광종 26, 975)까지 16년간은 간흉(姦兇)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하여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서, 군자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소인은 그 뜻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고 종[奴]이 그 주인을 논박하기에 이르러, 상하 간에 마음이 떠나고, 군신간이 해체되었습니다. 구신(舊臣)과 숙장(宿將)들은, 서로 차례로 죽어 멸족을 당했고[誅夷], 가까운 친인척들은, 모두 다 전멸(翦滅)당하였습니다. 더욱이 혜종께서 형제의 〈우애〉를 온전히 이루시고, 정종께서 나라를 잘 보존하셨으니, 그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가히 중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임금께서는 다 오직 외아들만 두셨는데,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못하였으니, 그 〈두 분〉의 덕을 갚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그들과 원한을 깊이 맺게 한 것입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외아들에까지 의혹과 시기를 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경종께서 태자로 계시면서 늘 편안하고 행복하지 못하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셨습니다. 아아! 어찌하여 처음에 잘 하셔서 명망을 얻었다가, 뒤에 잘 못하시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깊이 통탄할 일입니다.
경종께서는 깊은 궁궐 속에서 태어나 부인(婦人)의 손에서 자라나셔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셨습니다. 단지 천성이 총명하여 광종의 말년을 맞아 허물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으셨습니다. 즉위하시어 오래 동안 참소하고 중상한 문서들을 불사르게 하시고 여러 해 무고한 죄수들을 석방하시니 원한과 울분이 모두 제거되어, 조정과 민간에서 칭찬하고 축하하였습니다. 다만 정치의 도리를 알지 못하셔서 권호(權豪)에게 오로지 정권을 맡기셨으므로, 피해가 종친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재앙의 징조가 먼저 나타나, 비록 뒤에 깨닫고 뉘우치셨으나 책임을 돌릴 길이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거짓과 참[邪正]이 분별되지 않고, 상과 벌[刑]이 일치하지 않아, 잘 다스려지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정사에 태만하셨으며, 마침내 여색에 빠지게 되시고, 향악(鄕樂) 연주를 즐겨 관람하시다가 장기와 바둑으로 이어져 종일 〈두어도〉 싫증내지 않으셨습니다. 〈왕의〉 곁에는 오직 중관(中官)·내수(內竪)들 뿐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의 말은 들어갈 곳이 없고, 소인의 말만 항상 따르게 되었습니다. 〈경종께서도〉 일찍이 좋은 명성이 있었으나 말년에는 아름다운 덕이 없으셨으니, 이른바 ‘시작이 없지는 않으나, 좋은 끝맺음은 드물다.’라고 할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라면, 누군들 이를 원통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는 전하[聖上]께서 친히 보고 아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경종께서도 또한 칭송할만한 미덕이 있으셨습니다. 처음 병이 나서 아직 위독하시지 않았을 때, 마침내 침실에서 전하를 접견하시고 손을 잡고 말씀하시면서 나라를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사직(社稷)의 복(福)일 뿐만 아니라 백성의 행복입니다.
오직 혜종·경종 두 임금께서는 모두 태자[春宮]로서 〈계승하셨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뜻을 갖지 않았습니다. 형제 사이로 〈왕위를 계승할 경우〉에는 분명한 부탁이 없으면 반드시 다툼의 단서가 일어났습니다. 혜종께서는 2년 동안 병으로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흥화낭군(興化郞君)이란 아들을 두고 있었으나 나이가 어렸고, 또한 여러 아우들에게 뒷일을 충분히 부탁하실 수 없었습니다. 정종께서는 스스로 여러 신하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왕위[大業]를 이으셨습니다. 임종 때에도 일찍이 광종에게 왕위를 전하시어 왕실과 사직이 안정되었습니다. 정종과 경종 두 임금의 유언은 현명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찍이 혜종·정종·광종 세 임금께서 서로 왕위를 계승한 초기를 보니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개경·서경[兩京]의 문무 관리들의 절반이 이미 살상되었습니다. 더구나 광종 말년에 이르러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연루되었어도 대부분 정말로 죄가 없었고, 역대의 훈신(勳臣)과 숙장(宿將)들이 모두 죽음[誅鋤]을 면하지 못하고 없어졌습니다. 경종께서 즉위하시니[踐祚] 옛 신하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피해를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모두 후생(後生) 참적(讒賊)들이므로 진실로 애석하지 않습니다. 단지 천안낭군(天安郞君)과 진주낭군(鎭州郞君) 두 분은 본래 황실의 자손이어서, 광종께서도 오히려 몸소 관용을 베풀어 마침내 이들을 법으로 처리하지 않으셨는데, 경종의 시대에 이르러 충분히 왕실의 울타리로 삼을 수 있었는데도 권세를 잡은 신하의 피해를 입고 죽어서 지하의 원통한 혼이 되었으니, 종실[宗盟]에서 보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선왕께서 장수하시지 못한 것은, 이러한 불행에서 기인함이 많으니, 후세에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삼가 생각해보면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덕으로 중흥의 시기를 만나셨으며, 선왕께서 겸손히 양위하신 은혜로 인해 역대 왕들의 크고 높은[厖鴻] 업적을 계승하셔서, 하나의 생물도 그의 삶을 즐기지 않은 것이 없고, 한 사람도 그의 거처를 얻지 않음이 없습니다. 서울과 지방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신이 서로 경축하므로, 이른바 하늘이 내려주니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태조의 유풍을 잘 준수하신다면, 〈당〉 현종(玄宗)이 〈당〉 태종[文皇]을 추모한 고사(故事)와 어찌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 또한 네 조정의 가까운 정치[近事]에서 취사선택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즉 혜종께서는 골육을 보전한 공적이 있으시니, 이른바 형제간에 우애[友于]의 의리이며, 정종께서는 반란의 싹을 미리 아시고 내란[蕭墻之難]을 잘 진정시켜 다시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셔서 〈왕위를〉 전수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셨으니, 이른 바 지모의 밝음이며, 광종의 〈초기〉 8년간의 정치는 3대와 견줄 만하고, 또 조정의 의례와 제도도 자못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이른바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의 균형입니다. 경종께서는 선왕대의 원통하게 옥살이 한 죄수 수천 명을 석방하시고, 여러 해 동안 참소하여 헐뜯은 문서를 불태우셨으니, 이른바 관대함과 인자함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무릇 네 조정의 정치의 사적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잘한 사적을 받아들여 이를 행하시고, 잘하지 못한 사적을 보고 경계하셔서, 긴급하지 않은 일은 제거하시고, 이롭지 않은 노역을 폐지하시며, 오직 중요한 것은 임금은 위에서 평안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기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작을 잘하는 마음으로써 유종의 미를 생각하셔서 날마다 근신하시고[日愼一日], 비록 휴식을 취하여도 일은 그치지는 마시고, 비록 신분은 군주이시나 스스로 존대하지 마시고, 풍성하고 재덕이 있어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마시고, 오직 자기를 공손히 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시며,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을 끊지 않으시면, 복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를 것이고, 재앙을 〈물리치려〉 푸닥거리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의 수명이 어찌 만년이나 되지 않겠으며, 왕업이 어찌 단지 백세에 그치겠습니까?
신이 비록 어리석고 몽매하나 외람되이 국가의 요직에 있으면서 이미 아뢰려는 마음도 있기도 하고 또 회피할 길도 없으므로 삼가 비루한 소견을 기록하니, 시무책 28조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모두 별지로 첨부하여 올립니다.
1. 우리나라가 삼한을 통일한 지가 47년이지만, 병사들이 아직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고 군량[糧餉]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은, 서북쪽이 오랑캐[戎狄]와 이웃하여 방위해야 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聖上)께서는 이러한 일을 염두에 두십시오. 대체로 마헐탄(馬歇灘)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태조의 뜻이며, 압록강가의 석성(石城)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중국[大朝]이 정한 것입니다. 간청하건대 장차 이 두 곳 중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판단하셔서 요충지를 가려 강역을 정하시길 바랍니다. 토착인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 곳의 방어에 충당하게 하고, 또한 그 가운데 두 세 명의 편장(偏將)을 뽑아서 이들을 통솔하게 하시면 경군(京軍)들은 교대로 경비하는 노고를 면할 수 있으며, 말먹이[芻]와 군량[粟]은 급히 운반하는[飛挽] 데에 드는 비용을 줄일 것입니다.
1.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는 공덕재(功德齋)를 지내기 위하여 때로는 친히 맷돌에 차를 갈기도 하시고 때로는 보리를 찧는다고 하시니, 저의 어리석은 마음에는 상께서 친히 근로하시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자신의〉 죄과를 없애고자 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키셨습니다. 때로는 비로자나참회법(毗盧遮那懺悔法)을 베풀기도 하고, 또 구정(毬庭)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귀법사(歸法寺)에서 무차회(無遮會)와 수륙회(水陸會)를 열기도 하셨습니다. 매번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이 되면 반드시 걸식하는 승려들을 공양하셨고, 때로는 내도량(內道場)의 떡과 과일을 걸인[丐者]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또 신지(新池)‧혈구(穴口) 및 마리산(摩利山) 등지의 어량(魚梁)을 방생하는 장소로 삼았고, 1년에 4번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 지방의 사원에 나아가 불경(佛經)을 개설하여 익히게 하였습니다. 또 살생을 금지하여 왕실 주방에서의 고기반찬은 요리사[宰夫]에게 짐승을 도살하지 못하게 하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대소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모두 다 참회하도록 하여, 쌀과 잡곡·땔나무와 숯·건초와 콩을 메거나 지고서 서울과 지방의 길에서 거저 주게 한 것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안에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사람을 초개와 같이 여겨 베어 죽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항상 백성의 고혈을 다 써서 재를 지내는데 공양하셨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자식이 부모를 등지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며, 여러 범죄자들은 변장하고 승려 및 떠돌아다니는 거지의 무리로 되어 여러 승려들과 함께 와서 서로 섞여 재 올리는 곳으로 나오는 자 또한 많았으니, 무슨 이익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왕위에 계시면서 실행하신 일들이 광종과는 같지 않으시나, 다만 이런 몇 가지 일들은 단지 성상의 몸을 수고롭게 할 뿐이고 이익을 얻을 바는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군왕의 도리를 바르게 하시고, 무익한 일은 하지 마시옵소서.
1. 우리 조정의 시위(侍衛) 군졸들은, 태조시대에는 궁성 숙위(宿衛)에만 충당하여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종께서 참소를 믿게 되자 장수와 재상들을 엄히 책망하시고, 스스로 의심을 품어 군사의 수를 더욱 늘리셨습니다. 주군(州郡)에 풍채 좋은 사람이 있으면 가려 선발하여 〈대궐〉 안에 들여 시위하게 하고, 모두 궁궐의 주방에서 먹게 하셨습니다. 당시의 의논은 번잡하고 무익하다고 여겼습니다. 경종 때에 이르러 비록 약간 줄였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수가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준수하시어 다만 날래고 용감한 사람만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시면, 사람들 사이에는 원망이 없을 것이고 나라에는 재물이 비축될 것입니다.
1. 성상(聖上)께서는 장·술·메주·국을 길에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광종을 본받아 죄의 업보를 없애고 인연을 맺는 뜻을 널리 베풀고자 하시지만, 이는 이른바 작은 은혜는 널리 미치지 못하는 바입니다. 만약 상벌을 명확히 하여 악한 것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신다면, 족히 복(福)이 다다를 것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은 임금이 정치하는 도리가 아니니, 이를 없애시길 간청합니다.
1. 우리 태조께서는 참으로 사대(事大)에 힘쓰셨으나, 오히려 몇 해에 한 번씩 사신[行李]을 보내시어 빙례(聘禮)를 행하셨을 따름이었습니다. 지금은 방문하는 사신뿐만 아니라 무역으로 인해 사명(使命)을 띤 사람들[使价]이 번거롭게 많으니,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또한 〈잦은〉 왕래로 배가 난파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요청하건대 지금부터는 교빙하는 사신에게 무역을 겸하여 행하게 하고, 그 나머지 때에 맞지 않는 매매는 모두 금지하십시오.
1. 모든 불보(佛寶)의 돈과 곡식은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각기 주·군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관리하게 하고, 해마다 이자를 받아 백성을 괴롭히고 어지럽게 합니다. 요청하건대 이를 모두 금지하고, 그 돈과 곡식을 사원의 전장(田莊)으로 옮겨 두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 주전(主典) 중에 전정(田丁)이 있으면 아울러 거두어 들여 사원의 장(莊)과 소(所)에 소속시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1. 왕이 백성을 다스린다고 해서 집집마다 가거나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聖祖]께서 통일하신 후에 외관(外官)을 두고자 하셨으나, 대개 초창기였으므로, 일이 번잡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보건대 향리의 토호들이 늘 공무(公務)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침해하고 학대하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니, 요청하건대 외관을 두시옵소서. 비록 일시에 모두 다 보낼 수 없을지라도, 우선 10여 개 주현(州縣)에 합하여 1명의 관리를 두고, 그 아래 각기 2, 3명의 관원을 두어서 위임하여 백성을 어루만지며 돌보게 하시옵소서.
1. 엎드려 보건대 성상께서는 사자(使者)를 보내시어 굴산(屈山)의 승려 여철(如哲)을 맞아 대궐로 불러 들이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철이 과연 사람들에게 복을 비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는 곳의 물과 흙도 역시 성상의 소유이고, 아침저녁으로 먹는 음식도 또한 성상께서 하사하신 것이오니,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늘 복 비는 것을 일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번거롭게 대궐로 맞아들인 연후에야 감히 복을 베푸는 것입니까? 이전에 선회(善會)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요역을 피할 것을 도모하여 출가해서 산에 살았습니다. 광종께서는 〈그에게〉 공경을 다하고 예의를 다하셨습니다. 갑자기 선회가 길가에서 참혹하게 죽어서 그의 시신이 길에 뒹굴며 이슬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같은 평범한 승려가 자기 자신 또한 화를 당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 겨를이 있겠습니까? 요청하건대 여철을 산으로 돌려보내시어 선회와 같은 비난을 받지 않게 하시옵소서.
1. 신라 때에 공경(公卿)·백료(百僚)·서인(庶人)의 의복·신발·버선에는 각기 품색(品色)이 있었습니다. 공경과 백료는 조회 시에는 공란(公襴)을 입고 천집(穿執)을 갖추었으나, 조회에서 물러나오면 편복(便服)을 입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무늬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는데, 귀천을 나누고 존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란은 비록 토산품이 아니라도 백관들이 스스로 만족하며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태조 이래로 귀천을 논하지 않고 마음대로 옷을 입었습니다. 비록 관직이 높아도 집이 가난하면 공란을 갖출 수 없고,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능라금수(綾羅錦繡)를 입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건은 좋은 것이 적고 조잡한 것이 많습니다. 무늬가 있는 것은 토산품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입을 수 있으니, 염려스러운 것은 다른 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에 백관의 예복이 법식에 맞지 않아서 수치를 당할까 하는 것입니다. 간청하건대 관료들이 조회에서는 모두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과 천집을 갖추도록 하고, 일을 아뢸 때에는 버선신·명주신·가죽신을 신도록 하며, 서인들은 화려한 문양과 주름이 잡힌 고운 비단[紗縠]을 입을 수 없게 하고 다만 굵은 명주[紬絹]만 입도록 하십시오.
1. 제가 듣건대 승려[僧人]들이 군현을 왕래하면서 관(館)·역(驛)에 유숙하며 향리와 백성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그들의 영접[迎候]과 공급이 더디다고 꾸짖는데도, 향리와 백성들은 그들의 함명(銜命)에 의문이 들어도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니 폐단이 더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부터 승도들이 관·역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십시오.
1. 중국[華夏]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습속은 각기 그 지역의 특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악(禮樂)이나 시서(詩書)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모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개혁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거마(車馬)·의복 제도는 토착적인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하여 사치와 검약을 적절히 하되 중국과 꼭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1. 여러 섬의 주민들은 그 조상의 죄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낳고 자랐으나, 토지에서는 먹을 것이 나지 않아 생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광록시(光祿寺)에서 수시로 징발하고 요구하므로, 날로 곤궁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주·군의 사례에 따라 그들의 공역(貢役)을 공평하게 해 주시옵소서.
1. 우리나라는 봄에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겨울에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여 사람들을 널리 징발해 노역(勞役)이 대단히 번거로우니, 원컨대 이를 대폭 줄여 백성의 수고를 덜어 주십시오. 또한 여러 종류의 우인(偶人)을 만드느라 공역과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데, 한번 〈의례에〉 올려 진 뒤 부수어 버리는 것 역시 심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인은 상례(喪禮)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데, 서조(西朝)의 사신이 예전에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던 일도 있으니,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옵소서.
1. 『주역(周易)』에서 이르기를, ‘성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천하가 화평해진다.’고 하였습니다. 『논어(論語)』에서도 이르기를, ‘하는 일 없듯이 다스린 사람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였는가? 공손히 자신을 바르게 하여 남면(南面) 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순일한 덕이 있고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절제하시고 겸손하시며[撝謙], 늘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신하를 예의로 대우하시면, 누구든 마음과 힘을 다해 나와서는 좋은 계책을 아뢰고 물러가서는 국정을 바로잡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왕이 신하를 예의로써 부리면 신하는 왕을 충성으로써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시고, 스스로 교만하지 않으시며, 신하를 대할 때 공손하시고, 만일 죄지은 사람이 있어 그 경중(輕重)을 법대로 논의하신다면, 태평의 위업을 곧 기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 태조께서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가 궁궐에서 공역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가 교외에 살면서 토지를 경작하여 세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켜 부리는 일[役使]이 날로 많아지니, 곧 밖에 살던 노비까지 징발하여 부역에 충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궁(內宮)의 몫[分]으로는 경비 지급이 부족하여 창고의 쌀까지도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성상의 시대에도 그 폐단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또 궁궐 내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으니 헛되이 소비하는 것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국경에 환란이 있게 되면, 군량이 원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오로지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궐 안의 노비·마구간에 있는 말의 수를 헤아려 결정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1. 세속에서는 선을 행한다[種善]는 명목으로 각기 소원에 따라 불전[佛宇]을 지으니,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게다가 중앙과 지방의 승려들도 자기가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자 다투어 공사를 행하고 있고, 널리 주군의 장리(長吏)들을 권유하여 백성을 징발하여 부역시키게 합니다. 〈이 일이〉 공역보다 급하여, 백성들이 매우 괴롭습니다. 바라옵건대 엄중하게 이를 금지시켜 백성들의 노역(勞役)을 없애 주십시오.
1.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집은 9척이고, 제후(諸侯)의 집은 7척이다.’라고 하였으니, 나름대로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이 존비(尊卑)와 상관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 짓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군·현 및 정(亭)·역(驛)·진(津)·도(渡)의 세력가[豪右]들이 경쟁하듯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하게 되니, 이는 다만 한 가문의 힘을 다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예관(禮官)에게 명령하셔서 존비에 따른 가옥의 제도를 참작하여 정하도록 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이를 준수하게 하며, 이미 지어졌지만 〈제도를〉 위반한 것은 또한 헐어버리게 하여, 후대를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1. 사경(寫經)·불상[塑像]은 단지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것인데, 어째서 진귀한 보배로 장식하여, 도적들의 마음을 끌게 합니까? 옛날에는 불경은 모두 누런 종이였고, 전단목(旃檀木)으로 축을 만들었으며, 그 초상(肖像)은 금·은·동·철을 쓰지 않았고, 다만 돌·흙·나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훔치거나 훼손시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도를 넘었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가령 상인들은 불상을 훔치거나 훼손하고 도리어 매매에 힘써 생업으로 삼았는데, 요사이에도 그 관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이런 일을 엄히 금지시켜서 그 폐단을 혁파하십시오.
1. 옛날 진(晉)에서 덕이 쇠하자 난(欒)·극(郤)·서(胥)·원(原)·호(狐)·속(續)·경(慶)·백(伯) 등이 강등되어 조예(皂隷)가 되었습니다. 우리 삼한공신(三韓功臣)의 자손들은 매번 유지(宥旨)로 반드시 포상과 등용을 이르고 있지만, 아직 벼슬을 받은 사람 없고 〈여전히〉 천민에 섞여있으며, 신진 관료들이 방자하게 업신여기고 모욕하니,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광종(光宗) 말년에 조정의 신하를 죽이고 쫓아내었으니, 세가(世家)의 자손들이 가문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누차의 은사[恩宥]에 의거하여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들을 등용하십시오. 또한 경자년(태조 23년, 940)에 전과(田科, 역분전)를 받은 사람과 삼한 〈통일〉 후에 입사(入仕)한 사람에게도 역시 공을 참작해 관계와 관직을 내리신다면, 원통하게 굽힌 자들의 누명이 풀어질 것이고 재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1.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믿는 것이 비록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제왕(帝王)과 사서(士庶)가 공덕을 닦는 일은 실제로 같지 않습니다. 서민들이 수고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고, 소비하는 것도 자기의 재물이므로,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제왕은 즉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梁) 무제(武帝)는 천자의 높은 지위로서 필부의 선덕을 닦았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왕들은 그 연유를 깊이 생각하고, 일마다 모두 적합함[中]을 참작하여, 폐단이 관료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듣건대 사람의 화복·귀천은 모두 처음 태어날 때부터 받는다고 하니, 마땅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불교를 믿는 것은 단지 내세의 인과(因果)만 심을 뿐이고, 〈현세에서〉 보답을 받는 유익은 적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여기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또한 〈불교·유교·도교의〉 3교는 각각 업(業)으로 삼는 것이 있으니, 행하는 자가 그것을 섞어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수신은 실로 내세를 위한 바탕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세는 지극히 먼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심 없이 널리 만물을 구제해야만 합니다. 어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노역시키고, 창고의 저축을 소비하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익을 구하셔야 되겠습니까? 옛날에 〈당(唐)〉 덕종(德宗) 왕비의 부친인 왕경선(王景先)과 부마인 고염(高恬)이 황제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금동 불상을 주조하여 왕에게 바쳤더니, 덕종이 말하기를, ‘나는 억지로 만들어진 공덕[有爲 功德]은 공덕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라 하였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실로 그 사실은 비록 믿기 어려우나,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익 없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조정의 겨울과 여름에 열리는 강회(講會) 및 선왕(先王)·선후(先后)의 기일재(忌日齋)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함부로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지만, 그 나머지 줄일 수 있는 것은 바라옵건대 줄이십시오. 만약 줄일 수 없다면, 『예기』의 월령(月令)에서 말한 내용을 따르십시오. 즉 ‘5월 중기(中氣, 하지)는 음양(陰陽)이 다투고 생사(生死)가 구분되니, 군자는 재계(齋戒)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지 말 것이고,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고 좋은 음식을 적게 먹어 기호와 욕심을 절제하면서 심기를 안정시킬 것이며, 모든 관료들은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형벌을 없애서 음기가 일어나는 것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11월 중기(中氣, 동지)는 음양이 다투고 만물이 움트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고,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기호와 욕심을 금지하여 몸과 마음[形性]을 안정시키며,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하면서 음양이 안정되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5월과 11월〉에는 불사를 정지할 수 있는데, 어떠십니까? 너무 추우면 일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고, 음식물이 정결하지 못합니다. 너무 더우면 땀이 나서 뚝뚝 떨어지고, 많은 벌레들로부터 잘못되어 상할 수 있으며, 재에 받치는 음식이 정결하지 못할 것이니,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또한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해도, 내일 반드시 그 선한 일에 보답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정치와 교화를 잘 수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1년 12달을 반으로 나누어, 2월부터 4월까지와 8월부터 10월까지는 정사와 공덕을 반반씩[參班] 시행하시고, 5월부터 7월까지와 11월부터 정월까지는 공덕을 제외하고 정사에 전념하시되 날마다 정사를 들으시고 낮과 밤으로[宵旰] 부지런히 정사를 도모하십시오. 매일 오후에는 군자의 사시사철 하는 의례를 행하시며 정사를 잘 돌보고 몸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계절에 순응하게 되어 성상의 몸도 편안하게 되고 신하와 백성의 노고도 덜게 될 것이니, 어찌 큰 공덕이 아니겠습니까?
1. 『논어』에 이르기를, ‘자기가 모실 귀신이 아닌데도 그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전(傳, 春秋左傳)』에서 이르기를, ‘귀신도 그의 동족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부정한 제사에는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종묘·사직의 제사가, 아직도 법전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산악의 제사와 성수의 초제는 번거로움[煩瀆]이 도를 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제사는 자주 지내지 않아야 하는데,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롭게 되면 불경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시고 공경을 다하여 진실로 태만하지 않으시나, 제관[享官]들이 보통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싫증내어 공경을 다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제사를 즐거이 받겠습니까? 옛날 한(漢) 문제(文帝)는 제사지낼 때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공경하되 복을 빌지는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식견이 뛰어나 훌륭한 덕이라 할 만합니다. 만약 천지신명이 알지 못한다면 어찌 능히 복을 내리겠으며, 만약 신명이 안다면 사사로이 이익을 구하려고 아첨하며 군자를 기쁘게 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천지신명이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부역에서 나오는 것이니,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 만일 백성의 부역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이 분명히 기도로 얻는 복보다 많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법식과 다른 기도와 제사를 없애 늘 스스로 삼가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품고 그것이 하늘을 감동시키시면, 재해는 절로 물러가고 복록은 스스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1. 본조(本朝)의 양천(良賤)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창업하신 초기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본래 노비를 소유했던 사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본래 소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종군하여 포로를 얻거나 재화로 노비로 사기도 하였습니다. 태조께서는 일찍이 포로를 풀어주어 양인으로 삼고자 하셨으나, 공신의 뜻이 동요될까 염려하여 편의를 따르도록 허락하셨는데, 60여 년이 지나도록 항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비를 조사하여 그 시비를 가리게 하시니, 이에 공신들이 탄식과 원망이 없지 않았으나 간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목왕후(大穆王后)께서 간절히 간언했지만, 받아들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예(賤隷)가 뜻을 얻어 존귀한 사람들을 능멸하여 업신여기고 앞 다퉈 허위를 꾸며 본래의 주인을 모함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근을 만들어 놓고, 능히 〈그 피해를〉 차단하지 못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 누명을 씌어 죽인[枉殺] 사람이 매우 많아 크게 실덕(失德)하였습니다. 옛날에 후경(侯景)이 양(梁)의 궁성[臺城]을 포위하니, 〈왕의〉 측근인 주이(朱异)의 가노(家奴)가 성을 뛰어넘어 후경에게 투항하였습니다. 후경이 그 종에게 의동(儀同) 벼슬을 주자, 그 종은 말을 타고 비단 도포를 입고 성으로 가 소리쳐서 말하기를, ‘주이는 50년간 벼슬살이하여 겨우 중령군(中領軍)이 되었으나, 나는 처음 후왕에게 벼슬살이하여 벌써 의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성안의 종들이 다투어 나와서 후경에게 투항하므로, 궁성이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지난 일을 깊이 성찰하셔서 천한 이들이 귀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에서 공평하게[執中] 처리하십시오. 대개 벼슬이 높은 사람은 이치를 알아서 불법이 드물고, 벼슬이 낮은 사람은 참으로 그 지혜가 능히 비행을 꾸밀[飾非] 수 없는데, 어찌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궁원(宮院)과 공경(公卿)이 비록 위세로써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혹시 있다 할지라도, 지금의 정치가 거울처럼 밝고 사사로운 것이 없으니, 어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주(周)〉 유왕(幽王)·여왕(厲王)이 도를 잃었어도 선왕(宣王)·평왕(平王)의 덕을 가릴 수 없었고, 〈한(漢)〉 여후(呂后)의 부덕(不德)도 문제(文帝)·경제(景帝)의 현명함에 누를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지금의 판결은 중요한 일은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 것이며, 앞 시대의 판결은 자꾸 캐내고 따져서 어지럽게 하는 단서를 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최승로는 왕이 뜻을 가지고 있어 함께 할 수 있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글을 올렸다. 나머지 6개 조항은 사서에 전해지지 않는다.
〈성종〉 2년(983)에 〈최승로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전임되자 글을 올려 사양하였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7년(988)에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임명되었고, 청하후(淸河侯)로 봉하여졌으며, 식읍(食邑) 700호를 받았다. 여러 차례 표문을 올려 치사(致仕)하기를 빌었지만,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성종〉 8년(989)에 〈최승로가〉 죽으니,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으며, 향년 63세였다. 왕이 통곡하며 슬퍼하였고, 교서를 내려 그의 공훈과 덕행을 표상하였으며, 태사(太師)로 추증하였고, 부의로 베 1,000필, 면(麵) 300석, 경미(硬米) 500석, 유향(乳香) 100냥, 뇌원다(腦原茶) 200각(角), 대다(大茶) 10근을 내렸다. 목종 원년(998)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덕종 2년(1033)에는 대광 내사령(大匡 內史令)으로 올려 추증되었다. 아들은 최숙(崔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