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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영상 : https://youtu.be/a0OXApeOxBo
제목 : 용서의 열매는 관용이다.
본문 : 창 50:15-21
날짜 : 2026. 9. 13 주일오전예배
어느 마을에 오랫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두 이웃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다툼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한 집의 가장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가족은 어린아이들과 노모뿐이었고, 폭설까지 내려 장작과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집의 주인은 말없이 장작을 가져다 놓고, 쌀과 반찬을 챙겨 주었습니다. 가족이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지금 사람이 어려운데 어떻게 외면합니까?”
그가 과거의 잘못을 옳다고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잊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을 이용하여 되갚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을 채워 주었습니다. 원한을 품을 수도 있었고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선을 베풀었습니다. 용서가 마음속의 결단으로 시작되었다면, 그 결단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은 관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형들은 오래전 요셉을 미워했고, 죽이려고 했으며, 마침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긴 채 낯선 땅에서 종이 되었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형들은 그의 도움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 않을까?”
형들은 사람을 보내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며 용서를 구했고, 나중에는 직접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형들을 꾸짖거나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라고 고백한 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본문은 요셉의 용서가 복수를 멈추는 데서 끝나지 않고, 형들을 선대하고 돌보는 관용으로 열매 맺었음을 보여 줍니다.
1. 용서는 복수하지 않습니다.
15절을 보면 형들은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라고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말은 잠시 기분이 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다 갚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어근을 거듭 사용하여 “반드시 되갚다”는 뜻을 강조합니다.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만 참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요셉이 권력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벌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마음이 아니라 형들의 마음이 비친 것입니다. 자신들이 요셉의 자리에 있었다면 복수했을 것이기에 요셉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랑을 의심하고, 은혜를 계산하며, 이미 받은 용서조차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씀은 요셉에게 형들을 처벌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형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었습니다. 복수할 힘도 있었고, 인간적으로 복수할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최종 심판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상대방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19장 18절서도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용서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가 아프지 않았다고 속이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직접 복수하여 상대방에게 똑같은 고통을 돌려주려는 권리를 내려놓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상대방이 잘못한 만큼 나도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과 싸우는 일입니다. 말로 되갚고, 관계를 끊어 벌을 주고, 그 사람의 실패를 기다리며, 기회가 올 때마다 과거의 잘못을 꺼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복수를 포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판단하시기 때문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2. 용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요셉은 복수하지 않겠다는 말에 이어 20절에서는 용서의 더 깊은 근거를 밝힙니다. 본문을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당신들은 악을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계획하셨다”는 의미로, 인간과 하나님에게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하나의 사건 안에 형들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함께 나타납니다.
요셉은 형들이 한 일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한 일도 결국 좋은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형들의 행동은 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결과를 이루셨다고 해서 형들의 악이 선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좌절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요셉은 이미 창세기 45장 5절에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8절에서는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형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형들의 악한 행동만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형들이 요셉 인생의 최종 해석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에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 본래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질병도 아프고, 배신도 아프며, 억울한 일도 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보다 크셔서, 그것들을 붙드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 되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만 바라보면 우리를 해친 사람이 우리 인생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 사람이 한 말과 행동이 오늘의 감정과 내일의 선택까지 지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시선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이 아픔 속에서도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때 상처의 기억이 곧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처가 우리 인생을 다스리는 힘은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과거에 갇히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시간이 있었고 아직 설명되지 않는 눈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음을 믿습니다. 요셉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볼 수 있었듯이, 우리도 지금 당장 모든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상처 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복수의 사슬을 끊고 용서할 힘을 줍니다.
3. 용서는 선대하는 관용입니다.
21절에서 요셉은 다시 말합니다.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요셉은 “나는 복수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팔았던 형들과 그 자녀들을 계속 먹여 살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형들이 가장 염려하는 생계와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한 것입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용서의 시작이라면, 필요한 것을 채워 주며 선대하는 것은 용서가 맺은 열매입니다.
본문의 “기르다”라는 말은 먹을 것을 공급하고 생활을 책임지며 부양한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죽이지 않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양식을 주고, 형들의 어린 자녀들까지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어린 시절과 미래를 빼앗으려 했지만, 요셉은 그들의 자녀와 미래를 지켜 주었습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은 잘못을 묵인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되갚을 힘이 있으면서도 그 힘을 상대방을 살리는 데 사용하는 영적 강함입니다.
로마서 12장 20–21절에서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합니다. 요셉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행한 악을 또 다른 악으로 되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굶주림을 먹이고, 두려움을 위로하고, 미래를 보호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긴 것입니다. 용서가 관용으로 열매 맺을 때 악의 대물림이 멈추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본문 마지막에는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그들의 마음에 말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미 용서했는데 왜 또 불안해하느냐”고 차갑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마음에 닿는 말을 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침묵시키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을 덜어 주는 말을 선택합니다. 관용은 물질을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상한 마음을 일으키는 말과 태도로 나타납니다.
물론 선대한다는 말이 모든 관계를 아무 조건 없이 이전 상태로 돌려놓거나, 폭력과 학대를 계속 견디라는 뜻은 아닙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거리를 두고 보호를 요청해야 하며, 잘못에는 합당한 책임도 필요합니다. 요셉 역시 형들의 악을 분명히 악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적 관용은 정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보복을 내려놓고, 가능한 자리에서 상대방의 회복과 생명을 구하는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관용이 필요합니다. 가족이나 이웃, 교회 안에서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고, 필요한 때 작은 도움을 베풀고, 저주 대신 축복하며, 험담 대신 기도하고, 마음을 무너뜨리는 말 대신 살리는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거창한 행동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먼저 인사하고, 작은 필요를 살피고, 진심으로 평안을 빌어 주는 데서 관용은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용서도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성령을 주시며 날마다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45절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며, 그 이유를 하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관용을 베푸는 것은 상대방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관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복수를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형들은 종이 되겠다고 했지만 요셉은 그들을 형제로 돌보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해친 사람들과 그 자녀들까지 먹여 살리며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용서는 복수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고 판단과 보응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악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까지 붙들어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용서는 선대하는 관용입니다. 해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가능한 자리에서 상대방을 살리고 세우는 선을 선택합니다.
혹시 아직도 마음속에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거나 혹은 그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과거의 상처가 다시 살아난다면, 오늘 요셉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고백한 요셉처럼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악보다 크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힘을 주시는 만큼 작은 선대의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복수하지 않는 용서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깊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방을 선대하는 관용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이제 상대를 위해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고, 마음을 살리는 말을 건네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상처 입은 마음이 살아나며, 두려움 대신 평안이 자리 잡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