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독후 소감】
구순 원로학자의 생생한 슬픔을 담은 ‘광복수필’을 읽으며
― 高林 지교헌 교수의 ‘광복 회고담’, 젊은 세대가 읽어야 하는 이유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제가 특별회원으로 참여하는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에서 구순(九旬) 노학자의 귀한 옥고를 읽었습니다. 高林 지교헌 교수님(수필가, 철학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광복절 회고담을 생생하게 담은 수필이었습니다.
저는 이 귀한 옥고를 읽으면서
▲ 당시 저의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 당시 저의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이 옥고의 필자이신 구순 노학자님과 연세가 같은
▲ 저의 장형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기가 막혀 말씀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공출 이야기’였습니다. 지교헌 원로학자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하듯 회고하고 있습니다. 면서기가 농민의 뺨을 때린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농촌에서는 쌀이고 보리고 거의 모두가 공출(供出)로 약탈을 당하고 농민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부어오르기도 하고 떠돌아다니는 걸인들도 많았다. 농민들은 곡식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마니도 일정량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어 겨울이면 밤늦도록 가마니를 치는 집이 많았다. 어떤 집에서는 짚이 없어서 가마니를 치지 못한다고 하니까 면서기가 초가지붕을 벗겨서라도 가마니를 쳐야 한다고 하면서 농민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생시에 말씀하셨습니다. 기가 막혀 필설로는 옮길 수 없는 ‘식민시대의 생지옥과 같은 생활상’이었습니다. 지교헌 원로학자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하듯 묘사하고 있습니다.
『식민지시대를 생각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빈곤과 질병과 핍박과 노예의 생활이었고 남자는 징용과 징병으로, 여자는 정신대<종군위안부>로 끌려가고, 애국독립지사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하거나 일본의 경찰이나 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가혹한 형벌을 받고 심지어는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지교헌 원로교수와 연세가 같은 저의 장형은 생시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황국신민(皇國臣民) 시절의 비참한 학교생활 모습’이었습니다. 지교헌 원로학자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하듯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받는 국민학교는 규율이 매우 엄격하였다. 등교할 때는 마을에서 학생들이 모여 두 줄로 서서 등교하고 교실 마룻바닥을 닦기 위하여 기름을 가져가고 걸레를 만들어 가져가고 매월 수업료를 납부하였다. 선생님은 어찌나 엄격한지 우리는 거의 날마다 종아리를 맞지 않는 날이 없었고 한 학급의 학생 수는 80여 명이나 되고 날마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를 외치고,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는 구호 아래 한 마디라도 조선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즉시 제재를 당하였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저의 부모님과 장형께서 생시에 말씀하셨던 ‘식민시대의 이야기’를 구순 노학자가 또렷한 정신력으로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유려한 수필문장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원로학자의 귀한 증언을 읽으면서 ‘광복수필’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시대를 살아오신 원로학자의 이런 기록이야말로 어느 한 인터넷 공간에 묻혀 둘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독립기념관에 가면 더 생생한 영상 기록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당시를 살아오신 원로학자의 회고담을 통하여 매년 광복절을 맞이하는 8.15 전후만이라도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로학자의 수필 옥고는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습니다. 수필문학으로 등단하여 오랜 기간 천의무봉(天衣無縫) 필봉을 높여오신 노학자이기에 문장이 유려하여 젊은이들의 눈에도 술술 읽힐 것입니다.
원로 수필가의 문장은 흐르는 물처럼 막힘 없이 편안하게 읽히나, 행간에 흐르는 어둡고 가슴 아린 ‘고통의 메시지’는 바위 중력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픔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슬픔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기록은 그런 아픔과 슬픔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승화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슬픔을 공부하지 않고 어찌 미래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겠습니까.
원로학자의 이번 ‘광복수필’ 옥고는 그러므로 더 많은 독자가 읽어야 합니다. 더 많은 국민이 아픈 우리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연로하셔서 원고지에 글을 쓰시는 일도 힘들고,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에 원고를 쓰시는 일도 쉽지 않은 구순 원로학자께서 올리신 귀한 옥고입니다.
저는 원로학자의 깨알같은 옥고를 거듭 읽으면서 좀 더 큰 활자로 편집하여 저의 블로그에도 올려 가족, 지인들과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귀한 옥고 보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23. 8. 6.
윤승원 소감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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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며
지교헌 수필가, 철학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또다시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광복’이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로부터 해방되고 국가의 주권이 회복되고 독립하여 압박과 서러움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1940년 봄에 마을에 있는 2년제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선어(한국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1941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 후에 입학시험을 거쳐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식 교육을 받다가 5학년 때에는 일본의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패전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천하무적이라는 일본제국주의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원자탄 앞에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받는 국민학교는 규율이 매우 엄격하였다. 등교할 때는 마을에서 학생들이 모여 두 줄로 서서 등교하고 교실마루바닥을 닦기 위하여 기름을 가져가고 걸레를 만들어 가져가고 매월 수업료를 납부하였다.
선생님은 어찌나 엄격한지 우리는 거의 날마다 종아리를 맞지 않는 날이 없었고 한 학급의 학생수는 80여명이나 되고 날마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를 외치고,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는 구호 아래 한 마디라도 조선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즉시 제재를 당하였다.
우리는 거의 날마다 풀을 등에 지고 등교하거나 낫을 가지고 가서 풀을 베어 퇴비증산에 진력하였다. 서툰 솜씨로 풀을 베다가 손을 베거나 다치는 일도 빈번하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퇴비증산10만관돌파’라는 플래카드가 교문에 걸리기도 하였다.
4학년 이상은 ‘보리밭밟기’나 ‘모심기’나 ‘보리베기’와 같은 근로봉사에 동원되고 소나무의 관솔 따기에도 동원되었다. 어떤 때는 ‘송근(松根)캐기’로 지쳐 쓰러질 정도였다.
학교의 게시판에는 날마다 일본군의 전황(戰況)를 알리는 글과 지도가 나타나고 싱가폴이 함락되었을 때는 “갓다소 닛뽕, 단지데 갓다소 …”(이겼다. 일본, 단연코 이겼다 …)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루스벨트대통령과 처칠수상의 머리를 일본도(日本刀)로 꿰어놓은 그림도 나타나고 학생들에게는 작은 고무공이 장난감으로 지급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항상 빈약한 의복에 신발은 거의 짚신이나 ‘게다<나막신>(屐)’를 신었는데 짚신은 진 데를 밟을 수가 없고 게다는 끈이 잘 끊어져서 매우 불편하였다. 어떤 아이들은 온 몸이 부스럼투성이에 옷은 남루하여 요즘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습이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쌀이고 보리고 거의 모두가 공출(供出)로 약탈을 당하고 농민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부어오르기도 하고 떠돌아다니는 걸인들도 많았다. 농민들은 곡식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마니도 일정량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어 겨울이면 밤늦도록 가마니를 치는 집이 많았다.
어떤 집에서는 짚이 없어서 가마니를 치지 못한다고 하니까 면서기가 초가지붕을 벗겨서라도 가마니를 쳐야 한다고 하면서 농민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이제 와서 78년 전의 식민지시대를 생각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빈곤과 질병과 핍박과 노예의 생활이었고 남자는 징용과 징병으로, 여자는 정신대<종군위안부>로 끌려가고, 애국독립지사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하거나 일본의 경찰이나 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가혹한 형벌을 받고 심지어는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애국지사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철없는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고 오직 신사참배에 열중하고 대일본제국과 그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영광이요 출세요 명예라고만 배우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1945년 8윌 어느 날, 우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등교하는 우리는 멀리 학교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학교에 도착하여 보니 여러 가지 교육자료들이 운동장 한 구석에서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날마다 경례하는 천황이 살고 있다는 궁성(宮城;二重橋)의 사진이나 일장기(日章旗)등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들은 모두 말이 없고 풀이 죽어 있었지만 어느 선생님 한 분이 운동장의 조회단상에 올라가서 조선어로 말하기를 “일본은 전쟁에서 패전하였고 벌떼같이 몰려들었던 모든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완전히 쫓겨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평란이 되었다’ ‘광복이 되었다’ ‘독립이 되었다’는 말들을 처음으로 듣게 되고 태극기의 모습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너무나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38선이 그어지고 사람들은 이념적으로 갈라지고 대립하여 대혼란을 거듭하다가 남북한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게 되고 1950년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6·25한국전쟁’이 일어나 세계역사상 최대비극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이때 남북에서 희생된 생명은 얼마나 많으며, 실종자와 부상자와 부모를 잃은 고아는 얼마나 되며, 파괴된 건물과 도로와 각종시설은 얼마나 되는지 일일이 매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거를 거쳐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는 지속적으로 국제연합의 군사적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받고, 4.19학생혁명과 5.16군사혁명을 비롯한 많은 개혁과 변화와 약진을 거쳐 온 세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을 포함하는 어떤 국가와도 모든 분야에서 협력하고 교류함으로써 당당히 선진국의 대열에 서게 되고 저개발국의 모든 면에 도움을 주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국도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우리를 강점하였던 일본과도 국교의 정상화를 이루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국방등과 같은 모든 영역에서 유대와 협력을 이루어 국제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광복절을 맞이하여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위대한 뜻을 받들어 대한민국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보다 넓은 세계를 바라보며 과거를 뒤돌아보고 앞날을 내어다 보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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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에서
◆高林 지교헌(수필가, 철학가) 23.08.06 23:01
민족적 국가적 대사건이나 중요사건에 대하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이 기억을 더듬고 사료를 찾아내어 글로 정리하여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경우는 겨우 초등학교 5학년 때에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세월에 걸쳐 각계각층에서 일제 통치를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이며 그들의 글을 통하여 지난날을 뒤돌아보고 뉘우치고 깨우칠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일본의 침략과 강점을 규탄하기보다는 역사를 통하여 깊은 교훈을 얻고 나아가 국제사회에 공헌하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날의 대일감정을 초월하여 일본과 어깨를 겨누고 협력할 시대적 요청을 확신하고 새로운 국제협력과 인류문화의 창조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일제의 통치뿐만 아니라 한국전쟁(6.25)과 같은 대사건에 대하여도 많은 사람의 기록과 반성과 평가가 소중한 문학(시 소설 수필 희곡 등)의 형태로 서술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졸고를 값지고 과분하게 평가해주신 데 대하여 감사합니다.
(청계산에서 – 고림 지교헌)
◆ 답글 / 윤승원
저의 졸고 소감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점을 보완해서 강조해 주셨습니다. 제가 ‘슬픔’이란 말을 소감 제목에 사용한 것은 수필문학적 정서에서 나온 말입니다. 잊어선 안 되는 슬픈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제 숙적이라는 반일감정보다는 협력 시대입니다. 모든 분야 국익과 안보를 위한 한미일의 공조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입니다.
잘 아는 분 중에 최근에 일본인 사위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딸을 일본으로 시집보내는 것에 대해 고민도 많았다는 그분은, 그러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더 컸습니다.
저도 축하의 말에서 ‘韓日전 스포츠 경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선의의 경쟁 관계,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으로 응원할 때도 ‘적군’이 아니라 ‘청군 · 백군 다 같이 이겨라’라고 하면 된다고요. 국제 공조 파트너십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승원 올림)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에서
◆ 낙암 정구복(역사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3.08.07. 11:24
고림 지교헌 선생의 회고담이 윤승원 선생의 블로그를 통해서
드론처럼 띄워져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글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 답글 / 윤승원
낙암 교수님이 펼쳐 놓으신 ‘올사모 마당’ 멍석 덕분에 귀한 역사기록인
회고 수필 옥고를 읽습니다.
생생한 역사의 증언을 원로 학자님 옥고를 통하여 듣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