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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안식은 이미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시나리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창2:2-3) 따라서 우리의 믿음에는 반드시 그 안식이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성경이 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한 믿음만 강조하는가
하면 그 믿음을 따라 그 뒤에 안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대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 소화가 잘 안 되는 신경성위장병이라는 말을 빌어서
이와 같은 신앙을 어떤 분이 신경성기독교신자 병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 항상 죄인인 것 같은 부족함을 느끼면서 질질 끌려가는 겁니다.
그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믿음이 앞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복음을
들으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믿음이 분명해 집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저 안식’이라는 말씀은 지금의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날의 안식이 아닙니다.
이건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디자인하신 안식을 말하는 겁니다.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하신 그 안식입니다. 우리에게만
시간 개념이 있을 뿐 하나님께는 토요일 일요일 하는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는 ‘오늘 날’이라는 날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오늘 날이라는 날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그 오늘 날입니다. 눅17장에서 주님께서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난 다음에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십니다. 이 삼일 부터가 바로 오늘 날입니다.
우리는 지금 2024년을 살고 있습니다만 이 역사적인 날과 중첩된 오늘이라는 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마음을 완고(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오늘 날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리는 모든 날 마지막 날입니다.
그 전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오늘이라는 날에는 아들로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오늘 날에 들어온 사람들만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일요일을 주일이라는 말은 허점이 있습니다. 일주일 전부가
다 주의 날입니다. 일요일만 주일이라고 하면 미혹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 안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전부가 다 주의 것이며 주의 날인 겁니다. 우리가 지금 주의 날이라
하루를 지키는 것은 그 중에 대표적인 의미로 하루를 정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도 말고 그리심 산에도 말고 하나님께 참 예배하는 때가 올지니
곧 이때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하십니다.
4절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율법주의자들이 안식일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주일 하루의 개념이 강해져
반 율법주의자들에게 얻어터집니다. 성도들에게 ‘안식을 범해’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짜 안식은 그만 범하고 맙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는
때리고 마는 우를 범하고 그 교회에 열심을 다하다가 그리스도의 몸을 망가뜨립니다.
우리는 이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성일 날 모이기만 하면 서로 싸우며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실컷 잡수세요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짓거리를
하려면 차라리 성전의 문을 닫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말1장)
지금 우리가 잘 못하면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 곧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형제임에도 이 몸을 그만 훼손시키고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이 지경이니 목자이신 주님께서
안식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주님이 쉬지 않으시면 우리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안식이 없는 겁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고 하는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 많은 시비가 있습니다.
사실은 안식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원어로는 안식일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안식을 거룩하게 생각하라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은 안식을 아는 사람에게만
그 분이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안식을 아는 자에게만 내가 주인이 되어 주시겠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고 하니까 한 날만 거룩하게 지키려고 할 뿐
그 안식 자체가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 그만 놓치고 마는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과 생명은 아니 부활과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항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계시는 겁니다.
5절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제 칠을 지키고 있었으나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일요일 주일 성수를 잘 하면서도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안식일과 창2:3절의 하나님의 안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의 안식일은 노동에서 쉰다는 의미입니다. 노동에서 안식과 그리스도 안의
안식과는 서로 다릅니다. 육신의 안식과 영혼의 안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6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제 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라면 왜 성령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7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오늘 날 바로 이 날이 제 칠일 안식의 날입니다. 이건 토요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인 겁니다. 그래서 안식과
안식일이라는 날과는 다른 겁니다.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고 율법적인 안식은
7일 중의 한 날의 안식입니다. 골2:16-19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
월삭, 안식일은 그림자입니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완성이 된 겁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은 사도행전까지 나오지만 로마서부터는 안식이라는 말까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안식에 지금도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날짜를 정해 놓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지만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신뢰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 믿음의 결부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굳은 믿음도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신뢰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부 곧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의 열매가 별로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은혜로 넘어 갈 때도 신음을 하고 은혜에서 진리로
넘어갈 때에도 신음을 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가 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주께서
나를 들으셨나이다 하는 이런 사모함을 신음소리로 나타나야만 비로소 깨달음이
오로 말씀이 환하게 이루어짐을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안타깝지만 말씀을 잘 가르치는 말을 듣고 믿음의 신뢰가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으로 인식은 됩니다. 인식이 된 것이 생각과 마음으로 소화가 되어서
내 영의 창고로 들어가서 양식이 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결부 곧 믿음의 화합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7절을 다시 보면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그러므로 이 오늘 날이란 말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말에 가려져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다시 6절로 되돌아 와서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받는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인하여 들어가기 못하였으므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까지는 순종을 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면
고생할 것이 뻔한 줄 알면서도 항상 그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정부가 여기 오는 사람은 전기, 수도 끊는다고
하면 아마 교회 나올 사람 몇 명 되지 않을 겁니다. 세상의 정사와 권세의 종이
되어 있는 우리의 습성이 이스라엘과 같이 되도록 하고 맙니다. 우리는 벌써
불편하게 살면 안 된다는 습성이 들어버렸습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그쪽만 가지고는 살지 못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뱅뱅 도는 겁니다. 이쪽 반 저쪽 반에 걸쳐져 있는 거죠.
가나안도 못 가고 그렇다고 애굽으로 돌아갈 처지도 못 되어 뱅뱅 돕니다.
이것 때문에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순종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불편하게 사는 것에 이력이 나야 합니다. 편하게 살려면 나중에
육육육(666)받고 맙니다. 이 것 안 받으면 매매를 할 수가 없으니 받을 수밖에요.
초대교회의 카타콤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불편한 것이 불편할 줄 모르는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지금 엄청 빠르게 변화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힐 때에 정욕과 탐심도 못 박힌 것을 알아야 합니다(갈5:24)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이 우리의 실세입니다. 믿음을 강조하다가도 결국 속에 있는
정욕과 탐심을 따라 해 치우고 마는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활개를 치고 있는 겁니다. 그 정과 욕심을 채우자고 하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음녀화 되어가는 원인이며 바벨탑이 되어 가는 원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광야에 나왔습니다.
광야도 교회입니다(행7:38) 교회까지는 나오지만 속에 있는 정욕과 탐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믿음의 화합이 되지 않아
안식에 들어가 못한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11) 경고하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찬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