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거조사 주지 태관 스님
“깨지더라도, 한 번은 울리고 가는 종같이 살다 가렵니다!”
“절에서 살아 볼래?” 한마디에 7살 때 입산
10대 시절 방황‧ 만행 “내 머물 곳은 산사”
문학 열병 앓던 시절, 5‧18 목도 후 ‘절망’
‘그날’ 기억한 시 탈고, 다음 시집으로 ‘출간’
미국서 만난 백석‧정지용, 새로운 시의 세계로 ‘초대’
은해사 중앙암에서 3년 성찰‧정진한 고귀한 시간
‘자아’ 무너트린 공간에 상대 품어야 진정 행복
나한과 나눈 10여 년 대화 526 연작시로 발표 ‘희망’
거조사 주지 태관 스님은 “526 나한님과 오고 간 이야기를 담은
526수의 연작시를 쓰고 싶다”며 “아직 첫 줄은 쓰지 못했지만
아마도 제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림은 침묵의 시이며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는
시모니데스(Simonides)의 말에 천착하면
태관 스님의 시집 ‘흰 눈 속의 붉은 동백(서정시학‧2020)’은 갈라진 죽필(竹筆)로
마지막 남은 먹물을 찍어 뼈대만을 그려낸 ‘갈필 화첩’이다.
수일, 수개월, 수년을 걸려 빚어낸 시어라도 마지막 탈고에서 과감히 털어냈다.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가능한 시작(詩作)이다.
태관 스님의 시집.
그렇게 압축되고 농축된 시는 모두 한 줄, 한 문장으로 끝난다. 하여,
시제(*)와 시(**)는 서로 선문답하듯 간결하다.
일반 시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시작 노트(***)가 있는데,
거기에 적힌 몇 마디가 시제와 시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풀어주며
약간의 서정을 더해준다. 시 한 수 음미해 보자.
‘물이 들어올 때까지만(*)
소라 속에 고인 바람같이 살다 가자(**)’
현명한 자는 익지 않은 열매는 따지 않는 법. 스스로 익어 떨어질 때를 기다린다.(***)
들어서야만 하는 ‘물의 간절함’과 내어주어야만 하는 ‘바람의 처절함’이 읽히기도 하고,
그리 내어주고 떠나는 게 순리라는 ‘다독거림’도 느껴진다.
윤재웅 문학평론가는 시평 ‘새로운 봄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밀물과 썰물의 사이에서 잠깐을 살다가는 바람의 생을 노래함으로써
그 바람 같은 삶이 곧 우리의 삶이라는 깨달음을 유도하고 있다.…
물이 들어와서 소라를 다시 잠기게 하면 바람은 다른 생명이 되어,
그 무엇이 되어, 어디론가 간다는 암시가 있는 것이다.
자연의 조화에 스스로를 맞추면서 사는 삶의 경지를 노래하는 새로운 형태의 선시가 아니겠는가.’
526 석조나한상의 미소가 순진무구하다.
108편의 시가 주제별로 편집돼 있지만 입산 직후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수행자의 여정을 엿볼 수 있는 시들이 이곳저곳에서 언뜻언뜻 보인다.
그 50여년 노정의 시간대에 삶의 흔적이 묻어난 시들을 올려놓고 시담(詩談)을 나눠보고자
석조나한 526분의 ‘순진무구 미소’를 품고 있는 영천 팔공산 거조사(居祖寺)로 향했다.
석조나한상이 봉안된 영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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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靈山殿‧국보)을 보호라도 하듯 둘러싼 산자락은 붉게 물들었다.
가을이 깊었음이다. 한때, 가을이면 길을 떠난 ‘가을 앓이’ 태관 스님이지만
거조사에 주석하면서부터는 길을 잘 나서지 않는다.
영산전에 가득한 ‘깨달음의 미소’에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우젓 한보시기 짊어지고 절로 간 사내아이(*)
지금은 늙은 중 되어 이산저산(**)’
시작 노트에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이라고 했다.
태관 스님의 고향은 전북 부안이다.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에 개암사가 있는데,
어머니는 젓갈을 머리에 인 채 아이의 손을 잡고 절에 가시곤 했다.
“어느 여름날, 어머님이 ‘절에서 살아 볼래?’ 하시기에 ‘예’하고는 개암사로 갔습니다.
절에 갈 때마다 스님들이 제게 주신 떡과 과일이 떠올라서였을 겁니다.”
7살 때 입산한 셈이다. 1년 후 큰 절인 고창 선운사로 갔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974년 사미계를 받았다. 은사는 현 은해사 조실 법타 스님과 맺어졌다.
동진 출가 한 태관 스님도 짧았지만 강렬한 질풍노도기를 10대 중반에 보낸 적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절이 싫어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중국집에서 심부름하고, 만화방에서 점원 생활도 했습니다.
절감했습니다. ‘아, 사회가 만만치 않구나!’
또 한편으로는 ‘내가 머물 곳은 절’이라고 확신했던 게 그때입니다.”
‘어이 홍시는 가지 끝에 달려 배고픈 길 붙잡나(*)
외진 당집 문전에 버려진 사잣밥 참으로 꿀맛이었네(**)’
10대에 나선 만행 길에서 맞닥트린 배고픔을 처연하면서도 정감있게 표현했다.
“절에서 갖고 나온 아주 작은 괘종시계 하나와 풀빵 세 개를 바꾼 적도 있습니다.
충남 금산을 지날 때로 기억합니다. 이틀을 꼬박 굶었는데
점방(店房)에 놓인 풀빵이 어찌나 먹고 싶던지요. 몇 번을 주저하다 결국 교환했습니다.”
전북 남원에서의 고등학교 재학 때 불현듯 글이 쓰고 싶어졌다.
철학, 미학, 문학 개론서를 읽고 세계문학전집 등을 독파해 갔다.(1978)
광양 백운암에 들어가 겨우내 1만 장에 육박하는 소설도 써 보았더랬다.
‘문학 스승’이 없었기에 머무는 곳의 지역 문인들과 만나 담론을 나누며 자신의 문학 깊이를 더해갔다.
광주 원효사에 바랑을 내려놓았다.
지역 인사들과 만나며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사회과학 서적을 펼쳤다.
그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목도했다.(1980)
‘제 목에 칼을 놓아 피 토하는 모란이여(*)
찬란한 순간이 꼭 지금이어야 하느냐 오월의 심란한 소름 앞에서(**)’
비명과 분노, 억울함과 고통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한복판에서
승복을 입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초라했고,
현실과 이상의 엄청난 괴리에 절망했다.
고창 문수사에 ‘처박혀’ 먹먹한 가슴을 누르고 또 눌렀다.
한 지인이 미국의 절을 소개하기에 일어섰다.(1982)
여행이나 유학을 위함이 아니었다. 한국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조심스러워서 내놓지 않았습니다만 5월의 광주를 쓴 시가 있습니다.
다음 시집에서는 ‘그날’을 기록‧회고한 시로 채우려 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억한 미발표 시 한 편을 청했다.
‘그 날(*)
빗발치던 최루탄 속에서 애절하게 흔드는 손이 있었다.
수국 같던 하얀 주먹밥(**)’
“최루탄이 난무하는 혼돈 속에서도 무심한 듯,
간절한 듯한 표정을 한 채 시위대에게 주먹밥을 나눠 주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념론자인가요? 폭도인가요? 아니면 배고플 동생을 찾는 누님인가요?”
1980‧90년대의 ‘광주 문학’은 자유를 갈구한 시민들의 숭고한 정신을 담아냈다.
그러나 문학 비평가들이 짚었듯이 ‘사실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극단적 해결 모색, 광주 신비화 편향’을 넘어서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 ‘그 날’은 이 한계를 어느 정도 넘어섰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사회에서는 ‘월북‧납북 문인’이라 낙인찍혀
금서로 묶여있던 백석, 정지용의 시를 미국에서 만났다.(1982)
한국적 미학, 향토적 정서에서 나온 시어들은 태관 스님을 새로운 시(詩)의 세계로 초대했다.
귀국했을 때는 ‘88 올림픽’의 막이 내리고 있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조계사 인근 여관에 여장을 풀고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 달 동안 칩거 생활을 이어갔다.
“밥만 시켜 먹고 문밖을 거의 나오지 않으니 주인장이 ‘스님 맞냐?’고 물어요.
그즈음 중앙승가대학교에서 학인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계사에서 개운사까지 걸어가서 입학했습니다.”
강원을 중도에 그만둔 후 처음으로 조계종 교육기관에 들어간 것이다.
도반들은 이미 기본 교육을 마치고 주지를 맡고 있을 때다.
거조사 가을 전경.
은해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중앙암에서
암주로 3년을 보내고 거조사 소임을 맡았다.(2011∼)
중앙암에서 쓴 시는 광주에서 지어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하다.
‘같고 같다(*)
땅과 가슴을 맞대고 적막을 듣는 아침(**)’
‘적요
개미도 까치발을 들고 걸어가는(**)’
“땅과 가슴을 맞대고 적막에 귀 기울이면 내면으로부터 솟구치는 울림을 들을 수 있습니다.
허명으로 똘똘 뭉친 ‘자아’는 들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무너뜨린 ‘무아’이어야 합니다.
적요도 고요하게만 느끼면 시끄러운 겁니다.
시끄러움도 고요함으로, 안 좋은 것도 좋은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醜)를 미(美)로 승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 또한 무아입니다.
내 경계를 무너뜨려야 상대를 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그때 알았으니
중앙암에서 허투루 시간을 쓴 것만은 아닌 듯해 ‘잘 살았다’고 위로하곤 합니다.”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자신을 경계하려
성찰과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다짐의 시’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깨지더라도’는 ‘태관의 철학’을 강건하게 보여준다.
‘깨지더라도(*)
한 번은 울리고 가는 종같이 살자(**)’
“그 어디에 있었든, 단 한 번도 머리 깎은 본분을 망각한 적 없습니다.
‘비구의 삶이 최고’일 것이라는 제 소신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산전에는 ‘526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나한상이 있는가 하면 함박웃음 짓는 나한상도 있고,
가만 보면 토라진 나한상도 앉아 있다.
‘3일만 기도해도 소원성취’한다는 도량인데 그럴 만하다.
5백나한을 다 만나 보기도 전에
이마 ‘탁’ 치며 웃음보를 터트릴 수밖에 없으니 복이 통째로 굴러온다.
화, 짜증, 우울 등을 날리는 건 덤이다.
“저도 가끔은 ‘형님!’하고 부릅니다.
‘코로나로 중생이 힘들어해요. 형님 어찌 좀 해 봐요!’
‘절 살림이 예전만 못해요. 형님 손 좀 써 봐요!’
나한님의 표정 하나에 미소 하나이니 500 미소를 만끽할 수 있는 도량입니다.”
거조사 주지로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한상을 마주했다.
나한님들과 나눈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나눈 대화를 시로 적어보려 합니다.
526 나한님과 오고 간 이야기이니 526수의 연작시로 이어갈 것입니다.
아직 첫 줄도 쓰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시작하겠지요.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아마도 제 마지막 시집일 겁니다.”
짙어가는 붉은 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인다. 영산전의 어느 나한님 미소를 닮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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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관 스님은
전북 부안 출생. 1974년 사미계 수지.
현 거조사 주지. 시집으로 ‘흰 눈 속의 붉은 동백’이 있다.
2022년 11월 16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