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1500)
한스 홀바인 1세
한스 홀바인 1세(Hans Holbein the Elder, c.1465-1524)는
후기 고딕과 북유럽 초기 르네상스 전환기의 화가이다.
그의 초기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그의 작품의 제작 시기로 미루어 보아 1465년경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의 아버지가 장인으로 일했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한다.
홀바인이 어디서 어떻게 그림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 것은 이미 장인으로 인정받은 쾰른 시기였으며,
이 시기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1490년경 홀바인이 고딕 예술의 중심지였던 울름(Ulm)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고,
이후 1493년 그는 아우크스부르크로 다시 돌아와 활발히 작업했다.
그러나 1517년경 그는 빚 문제로 인하여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나서
독일 국경의 알자스(Alsace) 지방의 이젠하임(Isenheim)으로 이주해,
이후 스위스 루체른(Luzern)에서 활동하다가
1524년에 이젠하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당을 위한 많은 제단화를 제작했으며,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의 디자인도 했다.
그의 그림과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서는
고딕 스타일의 독특하고 빛나는 색감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1500년 이후에는 그의 그림에서 르네상스 양식이 나타나게 되며
원근감과 명암법에 대한 이해와 발전을 볼 수 있다.
홀바인이 독일에서 어떻게 르네상스 작품을 접했고 연구했는지 불분명하지만,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프랑크푸르트의 성당 작업을 할 때
네덜란드의 르네상스 작품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카이스하임 제단화에서 보이는 간결하고 극적인 인물묘사와
선명한 색감의 표현과 원근법이 적용된 역동적인 구도가
홀바인 후기 작품의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홀바인이 아우크스부르크에 살았던 1494년에서 1500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12개의 패널을 제작했는데,
전체적으로 회색의 그리자유(grisaille) 기법으로 그렸기에
이 작품을 <회색의 수난>(Gray Passion)으로 부르게 되었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주립미술관에서 구입했다.
이 작품은 원래 세 폭 제단화였는데,
중앙에 나무로 조각된 그레고르 에르하르트(Gregor Erhart, c.1470-1540)의
작품은 사라졌고, 홀바인이 그린 날개 패널만 각각 6개씩 남아 있으며,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는 <회색의 수난>의 일곱 번째 장면이다.
아침이 되자 모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끝에,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마태 27,1-2)
이 작품을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맨발로 서서 계시는데,
맨발은 십자가에서 당할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한다.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군사들은 창과 몽둥이를 들고
주먹으로 예수님을 때리며 폭력을 가하고 있고,
예수님의 손과 목에 밧줄을 감으며 난폭한 표정으로 예수님을 결박하고 있다.
자주색 식물 문양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천개와 휘장을 비롯하여
손잡이를 식물 문양으로 우아하게 장식한 녹색 재판관석은
유다 지방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총독의 권위를 더해 주는데,
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재판관석에 앉아 손을 씻고 있고,
시종은 주전자의 물을 총독의 손에 붓고 있다.
이는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마태 27,19) 하고
말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유다인들에게 넘겨주면서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마태 27,24) 하고 자기의 무죄함을 밝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지만, 얼굴이 깨끗하고 머리에 후광이 빛나고,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했으나 옷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다.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다.
빌라도와 시종과 군사들이 쓴 모자와 투구도 다양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의 기법들이 스며든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