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독일 시절
I. 또 다른 곳으로...
인야의 독일 행은 따지고 보면 전적으로 독일인 피터씨와 연결된다.
독일인이지만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가, 인야가 스페인에서 귀국해 가졌던 개인전(1994년)에 들렀다가... 그림 몇 점을 사간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인연이 인야로 하여금 미국으로 가기 전 벽화 공부를 할 겸 멕시코행을 결심하게끔 길을 열어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미국행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갈 곳이 없어 방황할 때도, 피터씨는 또 하나의 기회를 찾아보라며 독일의 함부르크로 인야를 불러 자신의 집에 한 달 반여를 머물게 해주었다.
그 함부르크 체류 덕분에 인야는 멕시코로 돌아가 한국으로 귀국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고, 귀국 후 '멕시코 벽화 운동' 책 출간 문제와 IMF 시대가 맞물리면서 이어진 힘겨운 생활 끝에 새로운 삶을 찾아 다시 독일 행을 감행하기까지... 피터씨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이번 2차 독일 행의 목적지는 함부르크가 아닌 '베를린'이었다.
이미 영구 귀국해 함부르크에 살고 있는 피터씨에게 의지하거나 의탁하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인야의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야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피하기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베를린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인야의 독일 행은 애당초 피터씨와의 인연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a. 목적지는 '베를린'
사실, 인야에게 이제 어디로 떠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지내보니, 독일이라는 나라가 그나마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수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런대로 살기에 좋았던 스페인도, 자신을 받아주는 것조차 거부했던 미국도, 나름 많은 미술적 기법을 습득했던 멕시코도 아닌, 어쩐지 자신의 작품을 받아줄 것 같은 나라가 독일이었고, 그 가능성만을 쫓아 인야가 택한 목적지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Berlin)이었다.
출국 전날 밤, 인야는 짐을 거의 다 싸놓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상황을 보고하고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드렸다.
그런데 어쩐지 서글펐다.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은 없었고,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날 저녁, 인야는 신촌 작업실 멤버인 O 선생의 염원이던 첫 개인전 오프닝에 들러 축하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난히 맑은 서울 공기 너머로 지는 석양을 보았다.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평소와 달리 기쁜 감정은 전혀 없었다.
다음 날 그 시간이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비행기 안에 있을 터라서, 그깟 날씨 따위에 기뻐할 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또 떠돌아다녀야 하는가?'
지금의 불안과 두려움은 팔자 좋은 관광객으로 여행을 가는 입장이 아니기도 했지만,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을 일부러 택해 가는 용기가 충만하거나 두둑한 배짱이 있는 모험가도 아니었기에... 생길 수밖에 없던 처절한 감정이기도 했다.
다음 날 새벽, 제자들의 때늦은 전화로 밤을 설친 인야를 깨운 것은 똑같이 밤을 새운 누님이었다.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누님 집을 나섰다.
잘 다녀오라느니, 잘 있으라느니 하는 여유로운 작별 인사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제대로 된 작별도 없이 공항으로 달려 나왔던 것이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니 인야의 몸이 착 가라앉았다.
탑승 출구 앞 유리창 너머에 자신을 태우고 갈 비행기가 버티고 서 있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떠나는 것도, 그리고 사는 것마저도......
늘 한국을 떠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느냐는 물음이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그 두 가지가 인야를 아련하게 했다.
인야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강해져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자.'
비행기가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해안 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그게 정식 항로인지는 모르지만, 창으로 금강이 보이고 군산이 보였다. 저기로 뻗은 시 외곽도로를 지나 농공단지의 하늘색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그 옆 어딘가 인야의 눈으로는 닿을 수 없는 한 점에... 어머니가 멍하니 앉아 계실 것이라는 생각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 비행기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영어를 너무 빠르고 굴리듯 말하는 여 승무원에게 부탁해 인야는 한국 신문 하나를 받아 두었다.
나중에 독일에 가서라도 읽어볼 생각으로.
가끔 안내 방송에서 한국말이 흘러나오긴 했지만 이젠 영어의 세계였다.
낯설고, 안 들리고, 이해도 쉽지 않은......
첫 번째 기착지인 싱가포르에 도착해 세관을 무작정 통과했다가, 짐 찾는 곳에서 확인하려고 물으니 세관을 다시 돌아 비관세 지역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권에 찍힌 도장을 취소하고 다시 대합실로 올라와 앉았다.
거기서 9시간여를 보내야 했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비행기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바깥 기온은 34도가 넘고 습도도 높다고 했지만 공항 안은 한적하고 쾌적했다. 인야는 그 후텁지근하고 끈적거리는 열대 기후가 싫어 여행사에서 제공한 시티 투어에도 나가지 않고 공항에 머물러 있었다.
'저렇게 수많은 비행기는 오고 가는데, 사람은 그렇게 쉽게 오갈 수가 없다. 비행기는 사람을 날라주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사람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만 생겨나지 않았으니까. 무심한 비행기처럼 오갈 수 있다면 사람은 이리 복잡하지 않을 것을......'
인야를 암울하게 한 것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몇 시간씩이나 우두커니 대합실에 앉아 아무도 아는 이 없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려야 하는 혼자라는 사실.
'어디서나 사람들은 다들 정착해 살아가는데, 나는 자꾸만 어딘가로 떠나곤 한다......'
싱가포르에서의 긴 기다림이 끝나고 다시 비행기에 오른 지 열다섯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취리히(Zurich)를 이륙해 베를린(Berlin)으로 향하는 기내에서 인야는 깊은 피로에 잠겨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나 많은 시간을 하늘에서 보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이제 한 시간 정도면 베를린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새 삶의 터전이 될 거라 생각한 곳인데, 과연 어떻게 나를 받아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