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烈帝의 21세기 한국역사)
해상제국 22담로 남부여 백제, 바다를 지배한 자 천하를 지배하리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백제, 백제를 부활시킨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천하를 지배하리라...
19세기 그레이트 브리튼이라 불리우며 번영을 구가한 대영제국... 대영제국이 번영을 누리고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릴 수 있었던 건 바로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영국 못지 않은 대제국이 있었다. 바다를 지배하여 천하를 지배한 나라, 그 나라가 바로 백제였다.
백제는 바다를 지배하였다. 제해권을 장악한 백제는 중국대륙과 일본 열도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바다를 지배함으로써, 백제는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고 일약 대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백제
우리는 백제에 대해 약했지만 문화는 발달한 나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백제는 북방의 맹주 고구려가 두려워한 강대국이었다.
백제가 멸망할 때 인구가 76만호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69만호보다 많은 인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구수이다. 하지만 백제의 진면목을 본다면 수긍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적다고 할 수 있는 인구수이다.
쇄족에 묶인 거인 백제, 그 실체를 벗겨보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遼西)를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하였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后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송서』 ?열전? 백제조)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 역시 (요서에) 웅거하면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양서』 ?열전?)
우리는 해상왕국하면 신라의 장보고(張保皐 [?~846])라는 인물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그보다 수백 년 앞서 백제는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만들어 바다를 평정했으며 중국 25사 비롯한 여러 문헌에 그 사실이 수록되어 있고 역사적 사실로도 공인되고 있다.
고구려가 중장기병과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곽으로 대표되는 나라였다면 백제는 아시아 최강의 함대를 보유한 해상제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토확장이 고구려만의 전매특허이며 백제는 전라 · 충청지역에 틀어박힌 소국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제의 강역은 고구려에 못지 않았고 실제 경제적 가치를 고려하면 오히려 백제의 영토가 더 광대했다고 할 수 있다.
백제는 요서 지역은 물론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 진출해 그 지역을 지배한 사실을 수록한 『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양서(梁書)』?『남사(南史)』?『북제서(北齊書)』?『통전(通典)』?『문헌통고(文獻通考)』등이다. 일찍이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은 신시배달 이래로 황하 중류유역과는 구별되는 문화권으로서 한반도 및 만주와 밀접한 문화교류를 갖는 황해-발해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황하 중류유역의 거주민들인 제하족(諸夏族)에 의해 동이라 불렸고 근 3천 5백년 동안 중국 해안선일대를 지배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6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동이족(東夷族)은 강제로 국경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지만은 서한(西漢) 무제(武帝)는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반대하고 서한으로 이주한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 28만 명을 받아들여 지금의 발해만 서부연안 창주지구(滄州地區)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그곳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기초 위에서 백제의 중국 동부 해안지역 진출이 수월했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중국 동부 해안지역 진출은 단순히 백제의 대외진출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한민족과 중국 동부 해안지역의 관계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백제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현행 국사교과서는 불충분하지만 이렇게 결론지었다.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중략) 또,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동 지방과 일본의 규슈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
인용된 글에서는 백제가 4세기에 들어와서야 해상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백제는 앞에서 밝힌 대로 이미 대방고지의 소서노왕국(於瑕羅, 비류백제) 때 축적해 놓은 경제기반을 발판으로 건국 초부터 해상무역활동을 시작해왔으며 3세기부터는 교역만 하던 단계를 넘어 본격적으로 군대를 동원, 대륙영토를 개척하는 고토수복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가 요서지역에 진평군과 요서군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출발점인 대방고지가 해상활동의 거점이자 요서에 인접했던 난하지역에 위치한 것도 큰 잇점으로 작용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CE 246년)조에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백제)왕은 (낙랑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곳 주민을 빼앗았다”고 하였고 분서왕 7년(CE 304년)조에도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부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는 이미 고이왕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그 서부 현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자치통감』 영화(永和) 2년(346)년의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져서 서쪽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다.
일찍이 당(唐)의 관리로 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상관에게 올리는 글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吳)?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연(燕), 제(齊), 노(魯) 등지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으며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의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조)
라고 하여 단군 이후 다시 중원대륙의 옛 땅을 회복(多勿)하여 통치했던 고구려 · 백제의 위용을 사실(史實) 그대로 직필(直筆)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는 “이는 과장된 것이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사대 모화주의자의 한 사람인 최치원이 과연 자신의 상관인 당(唐)의 관리의 비위를 크게 거슬리게 할 것이 틀림없는 그 같은 근거 없는 과장된 말을 하였을 리는 전혀 만무하였으리라.
요서 · 진평을 점거한 백제는 이에 머물지 않고 중국 해안선을 따라 구석구석 식민지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해갔다. 그리하여 백제 동성왕(東城王: 479~501) 때에 이르면 북경 지역과 산동성, 상해(上海) 양자강 이남까지의 중국 동부지역과 황해바다 전체를 평정한 대제국이 되었다.
제, 노, 오, 월은 고조선시대에 조선계 동이족인 우이(?夷), 래이(萊夷) 서이(徐夷), 회이(淮夷) 등이 세력을 형성한 곳이다. 진시황 6국 통합전쟁 당시 강제로 밀려나왔던 조선민족(동이족)은 백제의 해상제국 건설을 계기로 중원대륙으로 다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최근의 연구로는 백제가 멀리 필리핀 군도까지 지배하고 동남아시아와 교역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필리핀 군도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으로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墓誌石)이 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부여씨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에 분봉(分封)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성씨를 삼았다고 한다.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백제는 부남국(扶南國: 캄보디아), 태국과도 교역하였다. 이러한 무역로를 따라 승려 겸익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갖고 왔다고 한다.
경제대국이 된 백제는 동으로는 일본을 위성국으로 삼아 지배했다. 일본 나라현 텐리(天里)시 이소노가미 신궁에는 백제왕이 왜국의 신공왕후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봉안되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왕이 칠자경(七子鏡) 등과 함께 신공왕후에게 바친 것으로 왜곡되어있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각각 세계수(世界樹)와 태양을 뜻하는 왕권의 상징물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이나 고구려와는 별도로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5세기 중반의 백제는 대왕을 축으로 하여, 그 좌우에는 고조선시대와 북방 유목국가처럼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5이 포진하고 있었다. 『송서(宋書)』 ?이만열전(夷蠻列傳)? 백제국전에는 여기(餘紀)를 우현왕, 여곤(餘昆)을 좌현왕으로 부르고 있다. 좌현왕은 백제 대왕이 통치하는 본국 바깥의 동방인 일본열도를, 우현왕은 그 서방인 중국대륙의 일정지역을 관장하였다.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에는 백제라는 지명이 무수히 남아있다. 백제는 위성국인 왜를 신라 · 고구려와의 전쟁에 무수히 동원하였다. 집안현의 광개토대왕비에 숙적인 후연(後燕)을 복속시킨 기사 이외에도 백제 · 왜와 싸운 기사에 상당한 비중을 둔 것은 백제가 그 만큼 강성했다는 말이며 고구려가 백제를 지배할 경우 백제가 소유한 광대한 식민지와 해상권을 일거에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구려도 해상활동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의 원천인 해상교통로를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였는데 이것이 때로는 고구려와 백제가 갈등관계에 처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당(唐)시대의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 백제조에는 “진(晉)시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고유하였는데, 백제 또한 요서(遼西)?진평(晉平) 두 군(郡)에 웅거하였다”고 하여 고구려, 백제가 나란히 요동?요서를 점거한 사실을 적고 있다.
백제의 영토확장에 따라 식민지 접경지역의 국가들과 충돌도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제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북제서(北齊書)』 후주기(後主紀)에는 AD 571년 “백제의 왕 여창(餘昌: 27대 위덕왕)을 使持節(황제의 신임표시의 符節)?都督(군사책임자)?東靑州刺史(행정책임자)로 삼았다.(以百濟王餘昌爲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라고 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가 백제 소유였음을 밝히고 있다.
단명의 왕조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 당시에 한족(漢族) 정권은 중국 남부에서 남조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그 세력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 보자는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백제와 화친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지역의 백제 관리와 백제 장수들에게 중국 관직을 제수한 것이다. 백제 또한 그러한 관직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관직은 현지의 한족들과 토착인들을 지배하는 데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남제서(南齊書)』와 『자치통감(自治通鑑)』에는 백제 동성왕(東城王) 때인 AD 488년과 AD 490년, 후위(後魏)의 기병 수십만 명이 백제 대륙영토를 침략했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고 하였고8 『남제서』 백제전에는 수훈을 세운 백제의 장군들이 광양태수(廣陽太守)?대방태수(帶方太守)?광릉태수(廣陵太守)?청하태수(淸河太守)?낙랑태수(樂浪太守)?성양태수(城陽太守)?조선태수(朝鮮太守)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낙랑태수? 대방태수 ? 조선태수’라는 기록을 통해 낙랑군 ? 대방군이 난하유역에 위치해 있었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왜냐면 당시 한반도의 낙랑 ? 대방지역은 이미 오래 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지명은 오늘날 중국해안선 거의 전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백제가 병력을 동원하여 제?노?오?월 등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했다고 한 최치원의 증언을 그대로 입증해주고 있다. 백제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한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무려 34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이었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가 대중국 투쟁을 벌이며 대륙 해안선을 따라 경쟁적으로 획득한 식민지들은, 안타깝게도 신라가 망국통일을 하면서 당에게 고스란히 조공 바치고 말았다. 그러나 대륙에 남겨진 조선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산동지역의 이정기(李正己) 일가는 당군에게 포로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 ? 대진국 군대와 합세하여 치청번진(淄靑藩鎭)을 경영하면서 당(唐) 황실을 풍전등화로 몰아넣었고 뒤를 이어 장보고(張保皐) 대사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을 가능케 한 것도 그 전에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