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주(蘇州) “장공관(蔣公館)”의 안방주인(蘇州“蔣公館”的女主人)
장개석(蔣介石)은 송미령(宋美齡/ 쑹메이링)이라는 새로운 여인과 결혼의 목
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앞선 3부인과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3부인과의 사
이가 좋아지고 나서 이혼이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관계를 처리하게 되어 장개석
(蔣介石)은 상당한 재산도 날리고,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굴곡을 겪었다. 첫째부
인인 모복매(毛福梅/ 마오푸메이)에게는 고향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장개석
(蔣介石)의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습관이 있으므로, 그녀는 고향집 풍호방(豊鎬
房)에 그대로 남아 살도록 하였다. 셋째부인인 진결여(陳潔如/ 천지에루)는 소주
(蘇州/ 쑤저우)사람이므로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장개석(蔣介石)은 그녀에
게는 거금 10만냥(元)을 주어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게 하였다. 오직 둘째부인인
요야성(姚冶誠/ 야오예청)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정성을 들여 다른 배
려를 하였다.
장개석(蔣介石)은 요야성(姚冶誠)이 아들 장위국(蔣緯國/ 쟝웨이궈)과 함께 상해
(上海/ 상하이)에서 소주(蘇州/ 쑤저우)로 이사하여 옮겨 살도록 일본 유학시절의
학우였던 오충신(吳忠信/ 우종신 : 貴州省主席역임)에게 부탁하였다. 당시 요야성
(姚冶誠) 일행이 소주(蘇州)로 이사하게 된 것은 장개석(蔣介石)의 친여동생인 장
서련(蔣瑞蓮/ 쟝루이롄)일가가 있고, 녕파(寧波/ 닝보)에서 따라온 가정교사인 진
지견(陳志堅/ 천즈지엔)과 장가서(張家瑞)/ 쟝쟈루이)가 있었다. 이로서 장개석(蔣
介石)이 요야성(姚冶誠)에 대한 배려수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주(蘇州)로 이사하여 처음에는 요야성(姚冶誠)은 오충신(吳忠信)의 집에 같이 살
았다. 요야성(姚冶誠)은 이런 생활은 오래 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정원이 딸린 집을 한 채 짓고 싶었다. 그녀
는 지세를 직접 살펴보았는데, 소주(蘇州)시 남쪽의 채정방항(蔡貞坊巷)에 있는 대
지 한 곳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떠들썩한 가운데 조용하고, 환경이 그윽하고 품
위가 있는데다가 정말로 정원이 딸린 저택을 짓는데 좋은 곳이다.
장개석(蔣介石)은 이 일을 그 뒤에 알게 되어, 얼른 심복인 안지경(顔芝卿/ 옌즈칭)
을 보내어 저택을 짓는 일을 처리하였다. 이 안지경(顔芝卿)이란 사람은 청말(淸末)
강소성(江蘇省)의 총독과 순무인 정덕전(程德全/ 청더추안)의 막료로 충직하고 성
실하게 처세하는 사람이었다. 일을 처리하는데 괄괄하고 노련하였으며, 장개석(蔣
介石)의 신임이 두터웠다. 안지경(顔芝卿)이 감독하느라 매우 애쓰는 가운데 1년도
채 이르지 못한 시간에 1929년 소주(蘇州)의 “장공관(蔣公館)”은 준공되었다고 말
했다.
이“장공관(蔣公館)”은 토지점용면적이 10여묘(畝)나 되고, 2만냥에 달하는 자금을
들여서 지었는데, 시공책임을 맡은 부류는 녕파(寧波)의 장인(匠人)들이 모두 동원
되었다. “장공관(蔣公館)”의 실제 건축면적은 1,400여㎡로, 주건물 한 채가 3층、
3칸으로 내화벽돌을 사용한 다층건물이다. 1층중간은 드넓고 밝은 응접실이고, 동
쪽곁채는 서재 겸 휴게실이며, 서쪽곁채는 서양식 바와 식품실이다. 그리고 2층은
모두 침실로 구성되어 있다. 3층의 방은 비교적 낮지만 통풍이 잘 되어 건조하여 창
고로 주로 사용하면서, 짐을 넣어두거나 잡물(雜物)、서예와 그림(書畫)、의복류의
물건을 쌓아 두었다. 본관의 건축재료는 모두 상등품에서 마루바닥과 나무못, 티크
징두리벽판을 사용하였고, 계단은 평평하면서 넓게 좋은 재료를 골라서 썼다.
본관의 북쪽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집이 한 동 있어, 북루(北樓)라고 불렀는데,
주로 하녀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저택의 주방과 식당도 그곳에다 만들어 두었다.
대저택의 동쪽에는 3칸짜리 단층 집이 있는데, 요씨(姚氏)가 독경을 외면서 기도하
는 불당(佛堂)으로 요씨(姚氏)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에서 염주를 손에 쥐고
향불을 피워두고, 부처님께 간곡히 기도하며 지냈다. 또다른 단층집이 하나 더 있는
데, 고용하고 있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이 “장공관(蔣公館)”은 전체가 높고
커다란 엔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대문은 골목안으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다. 평소에
는 입구대문은 꼭 닫혀있는데다가, 소주(蘇州)경찰국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전문요
원이 교대로 당번을 정하여 지키고 있다.
전체공관은 졸정원(拙政園)과 같은 소주원림(蘇州園林)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스타
일을 갖추고 있는데, 공관 안의 석가산과 정자누대전체 및 본관을 멋있는 크고 작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3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자두나무, 매화, 복숭아나무,
살구나무와 비파나무 등 과일나무를 공관에 심어두어, 전체를 삥 둘러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봄철에는 온갖 꽃이 피어 아름답고, 여름에는 수련이 물을 뿜
어내고, 가을에는 단계표향(丹桂飄香)의 정취 즉 계수나무 향기가 사방에 풍기고, 겨
울에는 송백(松柏)의 기상이 꿋꿋이 드러나는 곳이다.
◯ 사람들은 여기가 장개석(蔣介石)공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장개석(蔣介石)이 이곳에 둘러 가는지 혹은 나타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人們隻知道這里是蔣介石的公館,但蔣介石究竟在這里露面沒露面,
就全然不知道了。
요야성(姚冶誠)은 이집에 대하여 매우 만족하였으며, 이곳에 사는 동안에는 조용하
면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며 지냈다. 요씨(姚氏)는 평소에도 매우 깔끔하면서도 단정
한 옷차림을 하여 자신의 품위에 신경을 많이 썼다. 요야성(姚冶誠)은 3명의 전문하
녀를 고용하였다. 항상 그녀 곁에 꼭 붙어 다니면서 머리를 빗겨주는 하녀를 신란(新
蘭)이라고 불렀고, 소주(蘇州) 현지에서는 그 방면에 대단히 명망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방에서 요리하는 여인은 오현(吳縣)의 광복(光福)사람이었는데, 아금(阿金)
이라고 불렀다. 기력이 세면서 힘들이는 일을 해야 하는 전문일꾼으로 빨래를 하거나
마루를 닦고, 화장실이나 주위를 청소하는 여인은 녕파(寧波) 사람으로 아아(阿娥)라
고 불렀다.
요야성(姚冶誠)은 특별히 현지에서 최고의 의사이면서 내과와 외과 등 모든 의료방면
에 정통한 방신성(龐新聲/ 팡신성)이라고 부르는 개인의사를 불러서 요씨(姚氏)의 의
료건강을 책임지도록 맡겼다. 후일 이 사람이 요씨(姚氏)에게 신망을 얻어 공관전체의
일을 책임지는 대집사가 되었다. 이밖에도 공관의 차를 운전하는 황(黃)기사와 화초재
배와 화단을 가꾸는 일에 책임을 맡은 사람 등 모두 10여명의 고용인이 있었다.
인근의 사람들은 이 집 “장공관(蔣公館)”의 여주인인 요야성(姚冶誠)이 평소에 외출할
때, 주위사람들과 친밀히 지내면서 시가지에 나갈 때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면모가 수려하면서, 피부가 희고 깨끗하며, 매우 온화하게 다른사람
을 대하여, 늘 미소 짓는 모습으로 사람을 바라본다고 모두가 말하고 있다. 요야성(姚
冶誠)은 부처님오신날이나 기타 어떤 재일(齋日)이 되면, 그녀는 하녀들에게 요리를 푸
짐하게 준비하도록 하여 주위 이웃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나누어 주어 모두
가 음식을 먹고서 함께 맛을 보면서 배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보통 때에도 요야성(姚冶誠)은 이웃과 잘 어울리면서 하녀들을 시켜 향기로운
맛을 느끼는 전을 부치거나 발효두부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기를 좋아하였다. 그
저택 안에 들어서면 복숭아, 자두나무, 매화나무, 비파나무 등 여러 과실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런 나무에 과일이 열려 익으면, 이것을 따서 이웃의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
누어 주어 신선한 과일맛을 보게 하면서 어린아이들을 친손자를 대하듯 사랑하고 위
해주면서 아이들을 예뻐하고 아껴서 아이들도 그녀를 친할머니처럼 따랐다.
요야성(姚冶誠)이 살던 소주(蘇州)의 “장공관(蔣公館)” 에는 장개석(蔣介石)이 비록
같이 살면서 그녀를 직접 만나러 올 수는 없지만, 둘은 항상 서신왕래를 하면서 지냈
다. 편지속에서 하는 이야기는 비록 대부분이 장위국(蔣緯國)의 학업이나 생활태도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장개석(蔣介石)과 요야성(姚冶誠)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이 넘치고
여전하다는 것을 편지에서 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장개
석(蔣介石)은 소주(蘇州)를 지나가는 도중에 요야성(姚冶誠)을 잠깐 만나 마음을 전하
기도 하였다. 요야성(姚冶誠)은 얼른 장위국(蔣緯國)을 함께 데리고 가서 서둘러 정류
장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기도 하였다. 한번은 요야성(姚冶誠)이 장위국(蔣緯國)
을 데리고 남경(南京)으로 가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난 일도 있다.
1936년 “서안사변(西安事變)”이 폭발하자 요야성(姚冶誠)은 마음이 무척 초조하였
으며, 남편인 장개석(蔣介石)에게 어떤 변고나 신상에 사고가 일어날까 몹시도 두려
워하였다. 요야성(姚冶誠)은 당시의 고승인 인광대(印光大)법사를 찾아가 장개석(蔣
介石)을 위하여 3일재계(三日齋戒)을 요청하여 사흘동안 불경을 외면서 장개석(蔣介
石)의 보우(保佑)와 무사안일한 귀환을 빌었다. 그러자 과연 장개석(蔣介石)은 무사
하게 남경(南京)으로 귀환하였다. 요야성(姚冶誠)은 너무 기뻐서 특별히 사람을 인광
대(印光大/ 인광다)법사에게 보내어 거금을 전달하였으며, 금불상을 만들어 절에 바
쳐 보살님의 은덕을 갚겠다고 청하였다. 이때부터 요야성(姚冶誠)은 불법(佛法)을 충
실히 따르면서 불심(佛心)이 더욱 돈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