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그리고 간도 기행 이야기 2
이은봉
일곱째 날(8월 11일):
백두산 자락의 펜션은 아침식사도 많이 부실했다. 빵도 부실했지만 계란도 한 개씩만 배급하듯이 겨우 주었다. 뱃속이 불편한 나는 적당히 아침밥의 예만 갖추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침이라서인지 이곳 펜션의 주변에서는 제법 한기가 돌았다.
백두산 자락의 펜션을 떠난 장따거의 버스는 곧바로 이도백하의 시내로 들어섰다. 이도백하는 잘 정리된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가의 화단에 심어 놓은 백일홍 등 갖가지 꽃들이 두루 시선을 모았다. 지금까지 거쳐 온 중국의 도시 중에서는 미관이 가장 잘 정비되어 곳이 이도백하였다. 이도백하부터는 거리의 간판도 왕왕 한글이 병기되어 있었다.
일단은 안도현의 송강을 거쳐 명월호수에 이르러 들꽃을 탐사하기로 했다. 명월호수 주변를 돌며 들꽃탐사를 할 계획이었다. 김광철 선생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런 뒤에는 백두산의 들꽃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잘 만들어진 책자를 보며 강의를 듣고 있는 데도 들꽃들의 이름은 듣자마자 이내 잊어버렸다.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 터였다.
한글이 병기된 간판은 명월호수까지 가는 길의 소도시에서도 눈에 띄었다. 광활한 옥수수 밭과 자작나무 숲이 반복되는 가운데 장따거의 버스가 이윽고 명월호수에 닿았다. 하지만 명월호수 입구에는 초소가 세워져 있었고, 백간 팀의 접근을 막았다. 최두열 팀장 등이 초소에 들러 그곳 지킴이에게 들꽃 탐사를 하고 싶다고 손짓발짓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곳의 지킴이는 이미 다 들꽃이 져버려 볼 수 없다며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실제로도 명월호수 주변에는 들꽃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는 이제 윤동주의 고향 용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명월호수를 지나자 차창가로 옥수수 밭과 함께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논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조선족이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리는데, 김광철 대표가 이번에는 나를 앞으로 불러냈다. 윤동주의 삶과 시세계에 대해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윤동주가 일본 후쿠시마 강옥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을 전락했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생애와 삶도 대충은 다잘 알고 있었다. 나는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등과 더불어 형성되었던 기독교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그의 삶과 시세계에 대해 한 시간 정도 소개를 했다. 그런 뒤에는 목소리가 좋고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려가며 윤동주의 시를 읽고 가볍게 코멘트를 했다.
용정에 도착해 백간 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대성중학교의 유적이었다. 유적으로 바뀐 대성중학교의 정문 좌우에는 윤주주의 서시를 새긴 비석과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동상이 멋지게 세워져 있었다. 대성중학교는 이제 은진중학교,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여고, 명신여고 등과 통합이 되어 용정중학교가 되어 있었다. 크고 굉장한 이 용정중학교의 한 구석에 이 대성중학교의 유적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성중학교의 유물관에서 은진중학교 학생이었던 윤동주 시인을 높게 기리는 것은 따라서 당연했다.
정문 앞의 동상과 시비 앞에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은 백간 팀은 자연스럽게 대성중학교의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성중학교 건물은 용정지역을 발판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박물관이었다. 다른 많은 애국지사들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윤동주 시인과 이상설 열사에 대한 소개와 전시가 내게는 더욱 눈에 띄었다. 이곳 용정의 대성중학교는 낡은 학교 건물을 잘 보존해가며 이렇게 항일독립운동 시절의 정신과 기상을 뜨겁게 부추기고 있는 것이었다. 아래층에는 윤동주의 시집, 발해의 왕조사 등을 팔고 있는 작은 서점도 있어 몇 권 책을 구입했다. 물론 인쇄, 제본의 솜씨나 종이의 질은 줄곧 보아왔던 것처럼 수준이 떨어졌다.
대성중학교에 들러 일제강점기 애국 열사들의 발자취를 살펴본 백간 팀은 일단 용정 시내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용정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용두레우물’부터 찾아보기로 했는데, 용두레우물은 해란강 가에서 멀지 않은 ‘거룡우호공원’ 안에 자리해 있었다. 다른 공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거룡우호공원’에도 노인들이 몇 분씩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두레우물은 함경도에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이곳까지 온 조선인 간도유민들이 1879~1880년 사이에 발견한 우물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만주족이 쓰다가 버린 우물을 조선인 청년 장인석과 박인언이 발견해 ‘용두레’를 달아 이용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그런 뒤 이 동네를 '용두레촌'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용정(龍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용정은 이 연변지역에서 최초로 조선족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곳인 셈이었다. 용두레우물가에는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용두레우물은 돌담으로 가를 두르고 윗부분을 통나무로 막은 뒤 사각의 구멍만 내놓아 제대로 안을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물론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이 우물은 조두남의 작곡한 노래 「선구자」의 2절에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운운의 구절에 나와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는 용두레우물도 수난을 좀 받았다. 홍위병에 의해 주변의 비석도 파괴되고 용두레우물도 메워져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87년 용정인민정부가 역사적 유물인 용두레우물도 중건하고 비석도 복원했다고 한다. 물론 애국주의 및 향토애 교육의 차원에서였다.
용정 시내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역사유산인 일본간도총영사관을 들러보는 것도 중요한 여행의 일정이었다. 장떠거의 버스를 타고 찾은 일본간도총영사관은 첫 모습부터 기분을 아주 음산하고 음침하게 했다. 당연히 기분이 언짢았다. 일본간도총영사관은 최근 들어 당시처럼 복원해 놓은 듯했다. 바쁘게 둘러보는 가운데에도 지하의 고문실에 펼쳐져 있는 광경은 끔직했다. 일제가 애국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들여 고문하던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는데, 너무 처참해 눈을 뜨고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간도총영사관을 설립할 당시 연변의 중심은 연길이 아니라 용정이었다. 1909년 간도협약 이후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연변 일대에서의 영사재판권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일제가 1907년 용정에 설치했던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영사관’으로 확대, 개편한 것은 이러한 법적인 근거에서였다. 일본간도총영사관은 이름은 영사관이었지만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 아니었다. 간도 일대를 지배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경찰조직의 총본부였다.
일본간도총영사관에서는 중국의 독립 운동가는 물론 조선의 독립 운동가도 엄청나게 고문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1922년에는 반일무장투쟁으로 일본간도총영사관이 몽땅 전소되기까지도 했다. 그런 다음에 재건된 용정일본총영사관은 1937년 폐관될 때까지 무려 2만여 명이 넘는 항일독립 운동가를 고문한 곳이었다.
이곳 지하의 고문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병신이 된 사람만 해도 4,00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아예 1000여 명은 서울의 서대문감옥으로 압송을 시키기까지 했다. 용정의 ‘3․13유혈사건’, ‘간도공산당검거사건’, ‘8․7유혈사건’ 등이 다름 아닌 이 일본간도총영사관에서 기획하고 자행된 사건들이었다.
일본간도총영사관을 둘러본 백간 팀은 서둘러 윤동주 시인의 생가로 향했다. 장따거의 버스는 백간 팀을 싣고 서둘러 윤동주 생가를 향해 땡볕 속을 달렸다. 마침내 장따거의 버스가 명동촌의 언덕 위에 섰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명동촌의 이 언덕 아래에 자리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곳곳에서 폭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햇볕이 너무 강해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는 주위를 둘러보지 못할 정도였다.
언덕 아래로 걸어 내려가려는데 커다란 선돌 위에 씌어져 있는 ‘윤동주 생가’라는 한글 글씨가 보였다. 조금 더 걸어내려 가자 담을 따라 옆으로 길게 세운 돌판 위에도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검은 글씨가 보였다. 이어지는 길옆에는 작은 돌판 위에 윤동주의 시를 새긴 수많은 시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진도 좀 찍고 시비의 시들도 좀 읽고 있는데 앞서가는 최두열 팀장이 뒤에 쳐져 있는 나와 송윤옥 처장에게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서둘러 달려가니 누군가 최두열 팀장이 등에 지고 다니던 배낭을 대성중학교 앞 가게에 두고 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누군가 귀엣말을 해주었다.
윤동주의 생가는 일제 강점기에 지은 조선식 기와집이었다. 오른쪽 끝의 방에는 윤동주와 그의 문학을 추모하는 약간의 시설이 있었다. 방을 둘러보니 좀 엉성한 제단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제단의 바로 위에는 사각모를 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윤동주 시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사진의 좀 위에는 ‘윤동주 시인 서거 70주년 기념’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광목천으로 만든 다소 조악한 플래카드는 이곳의 경제형편을 잘 말해주는 듯싶기도 했다. 제단의 밑에는 작은 모금함이 놓여 있었는데, 나는 우선 그곳에 한국 돈 몇 장을 넣었다. 그러고는 제단 앞에 서서 큰절을 했다. 문득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미래를 꿈꾸던 젊은 시절이, 용두동에서 자취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본채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있었는데, 사랑채 앞에서는 한 조선족 처녀가 이런저런 기념품과 음료수 등을 팔았다. 서둘러 냉커피 몇 잔을 사 나누어 마시는데,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는 김광철 대표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급해도 화장실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자꾸 불러싸니 마음이 급해 허겁지겁 발을 동동거려야 했다. 백간 팀을 실은 장따거의 버스는 서둘러 용정 시내의 대성중학교를 향해 달렸다.
다시금 확인한 것이지만 대성중학교의 유물전시관은 용정중학교와 담을 나누어 쓰고 있었다. 담 너머로 크고 넓은 용정중학교 운동장과 건물이 보였다. 최두열 팀장은 서둘러 이곳 가게에 들러 얼마간의 사례비를 주고 배낭부터 찾았다. 적잖은 여행 경비와 각종 서류들이 들어 있는 배낭이었다.
최두열 팀장의 배낭을 되찾은 백간 팀은 이내 일송정을 향해 달렸다. 일송정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였다. 누군가 별로 볼 것도 없는데 굳이 산꼭대기의 일송정에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다음 일정이 바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잘 보이는 곳에서, 그냥 멀찍한 곳에서 일송정을 바라다보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자고 제안했다. 너무 덥기도 하고 너무 지쳐 있기도 한 참이라 의견을 달리 하기가 싫었다.
장따거는 남쪽 멀리 일송정과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 지점에 차를 세웠는데, 마침 곁에 개구리참외를 파는 아주머니 행상이 있었다. 김광철 대표와 나는 차에서 내려 개구리참외를 좀 샀는데, 백간 팀과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서였다. 지열(地熱)이 아주 심해 에어컨이 없는 버스 밖에서는 잠시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백간 팀은 그렇게 참외를 나누어 먹으며 버스 안에서 얼마간 일송정과 소나무를 바라보다가 연길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버스를 타고 연길로 가는 도중 장따거는 게르마늄 성분이 들어 있는 팔찌, 목걸이 등을 파는 귀금속상점으로 백간 팀을 데리고 갔다. 겉보기와는 달리 실내의 귀금속상점은 조명도, 분위기도 화려했다. 김도경 원장과 유금자 선생 등이 게르마늄 목걸이와 팔찌에 다소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평소에 나는 몸에 붙이는 모든 장신구가 장난감과 유사하다고 생각을 했다. 모든 장남감은 금방 질린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게르마늄 성분의 팔찌, 목걸이 역시 금방 질리고 말 것이 뻔했다. 잠시 설명을 듣던 나는 이내 지루해져 아내를 데리고 귀금속상점 밖으로 나와 나무그늘 밑에 앉았다. 나무그늘 밑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듭 손부채를 하며 한참을 보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 모두 일본 오키나와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곳 면세점에 들리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게르미늄 성분의 팔찌를 갖기 원했다. 제법 돈을 들여 게르마늄 팔찌를 사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처음에는 게르미늄 팔찌를 좀 신기해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어머니는 게르미늄 팔찌를 마음에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금방 질진 것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 귀금속상점을 빠져 나오더니 백간 팀 전체가 어느새 장떠거의 버스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누가 좀 게르미늄 장신구를 구입했냐고 물었더니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귀금속상점을 출발항 장따거의 버스는 오래지 않아 연길 시내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러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저기 한자와 병기된 한글 간판들이 보였다. 조선집, 동교전기수리, 맹림술담배, 부산식당, 진미명태, 연길한복 등이 그것이었다. 어느새 거리에는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바라다보는 연길의 거리는 높고 깨끗한 건물들이 즐비했다.
연길은 연변조선인자치주의 주도였다. 연변조선인자치주에는 한족(漢族), 조선족, 만주족, 회족 등 23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었다. 연변조선인자치주라고 하지만 대단위 이주정책으로 인해 한족이 인구의 절반 이상이라고 했다. 250만 정도의 인구 중 실제로는 한족이 57%, 조선족 40%, 만주족이 3%, 회족이 0.3, 기타 소수민족이 나머지 인구를 이루고 있었다. 연변 지역 일대는 조선시대 말 우리 선조들이 이주해 살며 개척한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동북3성 지역을 침략해 점령한 일제는 1943년 12월 연변 지역 일대를 간도성이라고 명명했다. 연변 지역 일대를 간도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후였다.
백간 팀은 오늘 하루를 이곳 연길의 성보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성보 호텔은 연길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아래층은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의 고층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성보 호텔이었다. 짐을 풀고 각자 식사를 마친 백간 팀은 각각 연길 시내구경에 나섰다. 물론 아내와 나도 최두열, 김덕성, 김광철 등의 일행을 따라 연길 시내 구경에 나섰다. 초저녁이기는 하지만 거리에는 불빛이 휘황찬란했다. 원자력 발전소 덕분에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길을 따라 걸어 나와 도착한 곳은 청년광장이었다. 밤이 깊어가는 데도 청년광장에는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맨 먼저 만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었는데, 이들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브레이크댄스를 추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중년의 남녀들이 브루스를 추고 있거나, 탱고를 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각각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춤에 맞는 음악을 크게 틀고 있었다.
광장의 끝에는 제법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연길시 중심부를 흘러가는 이 강의 이름은 ‘부르하통하’라고 하는데, 여진어의 언어로는 버드나무가 무성한 강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밤의 ‘부르하통하’를 둘러보다가 나와 일행은 이내 성보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의 방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와이파이가 터져 카톡을 열어 보았더니 〈삶의문학〉 단톡방에 이재무 시인의 문자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이은봉 시인이 송수권 시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급하게 이재무 시인한테 이 메시지가 정말이냐고 카톡 문자로 물었다. 정말이라는 답이 왔다.
이재무 시인의 이 말, 믿어도 되나? 꿈에도 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상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무래도 잘 믿기지 않았다. 나태주 선생님한테 연길에 와 있다는, 윤동주 생가에 다녀왔다는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나태주 선생님이 이 송수권 시문학상을 추천해주었기 때문이다.
밤 10시쯤 되었을까. 정기훈 김광철 등 남자 회원들의 호출을 받고 다시 성보 호텔 밖으로 나왔다. 호텔 근처의 꼬치집에 모여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일행이 꼬치집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이 집 종업원과 사장은 신이 난 듯했다. 계속해 양고기꼬치, 닭고기꼬치, 소고기꼬치, 닭똥집꼬치 등을 내왔다. 술이 약한 나는 모처럼 나는 정신없이 취했다. 이내 졸리고 피곤했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나 먼저 호텔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밤거리의 술자리는 언제나 즐거웠다. 논두렁 건달처럼 아무런 책임 없이 세상을 어슬렁거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덟째 날(8월 12일):
늦게까지 자기로 했지만 눈을 뜨니 6시 15분이었다. 침대에 누워 「윤동주 생가」라는 제목으로 시 한 편을 썼다. 시를 주무르고 있다가 보니 벌써 아침밥을 먹을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조식을 각자 자유롭게 해결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서둘러 거리로 나왔다. 제과점에 들려 빵을 좀 사기로 한 것이었다. 조금 걸으니 삶은 옥수수를 파는 행상이 보였다. 너무 반가웠다. 몇 자루의 옥수수를 사 들고 제과점으로 가 빵을 좀 구입했다. 그렇게 하고 터벅터벅 호텔로 돌아오는 길인데, 느닷없이 아내가 옥수수를 좀 더 사자고 했다. 기왕이면 옥수수를 넉넉히 장만해 백간 팀 모두와 나누어 먹을 생각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옥수수와 빵, 요플레 등으로 간단히 조식을 해결했다. 이날 오전에는 다소간 시간 여유가 있었다. 좀 늦게 성보 호텔을 나선 백간 팀은 곧바로 연변대학교(延邊大學校)를 찾아 나섰다.
어렵지 않게 찾은 연변대학교는 겉보기만으로도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아주 넓은 터를 확보하고 있는 듯싶었다. 방학 중이라 그런지 학내에 학생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일단은 대학의 본관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게시판에 연변대학교의 연혁과 역사 등이 자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연변대학교는 이 지역 각 민족 간의 융합과 발전을 위해 조선족 지도자들의 선각적인 노력에 의해 1949년 중국공산당의 인가를 받고 설립되었다. 조선족 지도자들의 선각적인 노력에 의해 설립된 만큼 연변대학교(延邊大學校)는 중국 내에서 조선족을 위한 최고의 학부로 성장, 발전하고 있다.
연변대학교가 설립될 당시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주민은 조선족이었다. 중국 내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지정되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구 내에 조선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할 필요가 있었다. 지역사회를 지도할 수 있는 간부급 인사들을 양성해 연변조선인자치구의 발전은 물론 중국 전체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연변대학교의 2층에 올라 이 대학교의 연역과 역사 등을 둘러보는 것도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백간 팀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내 연길 시내의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연변박물관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당시 나는 연변박물관이 발해의 유물과 유적을 많이 보유, 전시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일별하며 느낀 것이지만 그러나 연변박물관은 일종의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이 연변지역에 사람들이 이주해 와 살게 된 과정을 서서화한 전시물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옥저, 읍루, 부여 등 고대국가의 강역에 대한 설명이 유물과 함께 전시가 시작되었다. 그와 더불어 청나라가 이 지역을 공동화한 이후 이 지역에 살기 위해 찾아온 조선인의 유민사가 상당부분 전시, 기술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끌만은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해 치열하게 수행했던 독립운동사도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져 있었다.
연변박물관에서 둘러본 백간 팀은 그곳에서 멀리 않은 곳에 옮겨가 장따거의 버스에서 내려 점심식사를 했다. 장따거가 안내한 곳은 김치찌개가 주식인 조선족 식당이었다. 모처럼 먹는 김치찌개가 입맛을 당겼다.
서둘러 김치찌개로 점심식사를 마친 뒤였다. 와이파이가 터져 핸드폰의 메시지부터 살펴보았다. 핸드폰을 열어 보았더니 나태주 선생이 보내온 문자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긴장을 하고 열어 보았더니 “이은봉 시인, 송수권 시문학상 본상 수상, 축하합니다.”라는 문자메시지가 급하게 읽혔다.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금이 3000만원인 문학상의 수상자로 확정된 것이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실제로 송수권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니!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내 입으로 백간 팀에게 말하기는 좀 쑥스러웠다. 과도한 자랑으로 들리면 위화감이 생길 수도 있었다.
백간 팀이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은 이른바 동간도,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수도 연길이었다. 백두산보다 북쪽, 중강진보다 북쪽인데도 찜통더위는 멈추지 않았다. 폭염이 내려쬐는 연길을 떠나 장따거의 버스는 훈춘을 행해 달리기 시작했다.
연길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버스의 오른쪽으로 두만강이 흘렀다. 이른바 두만강 400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두만강의 길가에도 역시 옥수수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는 터덜터덜 느릿느릿 훈춘을 향해 달렸다. 시속 50km나 될까. 버스의 오른쪽에서는 여전히 쉬지 않고 두만강의 강물이 흘러내렸다.
장따거의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터덜거리며 달려가는 길이었다. 최두열 팀장이 마이크를 잡고 막 오늘의 일정과 공지사항을 확인한 뒤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내가 불쑥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하고 잠시 바라보는 중이었다.
“너무 좋아, 참을 수가 없어 앞으로 나왔어요. 여기 있는 저의 남편 이은봉 시인이 어젯밤 송수권 시문학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상금이 삼천만원입니다. 그래서 자랑하러 나왔습니다. 축하해주세요.”
아내의 느닷없는 발설에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다들 박수를 쳐 얼떨결에 나도 따라 박수를 쳤지만 너무 쑥스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백간 팀의 이런 환호도 흐르는 시간을 어쩌지는 못했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저 멋진 두만강을 바라보는 것도 이제는 지치는 모양이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정기훈 선생이 선창하는 옛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다가 나는 그만 깜박 졸고 말았다.
그렇게 졸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섰다. 이어 누군가 차에서 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얼떨결에 따라 내리며 둘러보니 풀숲 저쪽으로 좁다란 다리가 보였다. 중국과 북한을 잇는 다리인데, 다리의 중간이 끊어져 있다고 했다. 우선은 소변이 급했다. 나는 다리 앞 오른쪽 풀숲으로 들어가 서둘러 내 몸에서 뜨거운 물기둥부터 꺼냈다.
다리 위로 제법 걸어 나갔는데, 두만강의 중간도 지나지 않아 다리가 끊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리 건너편 오른쪽으로는 북한군 초소가 보였다. 6·25 남북전쟁 때 끊어진 다리인가 하고 혼자서 생각했다. 어디에 안내간판이 있을 법한데, 내 눈에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김덕성 선생은 디지털카메라의 렌즈를 당겨 끊어진 다리 저쪽의 북한군 초소를 들여다보고는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킥킥킥 웃으며 자신이 찍은 사진 한 컷을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북한군의 초병이 주변의 풀숲을 향해 제 몸에서 뜨거운 물기둥을 꺼내는 모습이 잡혀 있었다.
다리 밑을 내다보니 강물 안쪽으로도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북조선과 중국 간의 국경선을 표시한 것인 듯했다. 철조망 안쪽에서는 많은 양 떼들이 몰려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다. 강가의 물웅덩이에는 오리 떼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한여름이라서 벌써 4시가 넘었는데도 햇살이 뜨거웠다. 너무 더워 더 이상 이 끊어진 다리 위에서 시간을 보내기는 힘들었다.
한 시간도 채 달리지 않았는데 버스는 훈춘 시내로 들어섰다. 겉보기에도 훈춘이 신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도시인 만큼 훈춘의 시내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도시의 건물들이 모두 크고 웅장했는데, 최근 중국 동북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들이었다. 건물 밑 상가에는 옹기종기 한자와 한글이 병기되어 있는 간판이 보였다. 이곳에도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훈춘 역시 옛날에는 이성계 장군 등 우리 선조들이 말을 달리던 땅일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활동하던 공간이 이곳 훈춘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훈춘시내를 버스로 달리다보니 갑자기 이용악의 국경시편들이 떠올라 회상에 젖게 했다. 훈춘 역시 강을 끼고 있는 도시였다. 시내 한복판으로 제법 큰 강이 흘렀는데,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불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혼자 이용악의 시에 나오는 ‘아무르강’인가 하고 생각했다.
강을 건너고도 한참을 달린 뒤 버스는 한 호텔 앞에 섰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호텔 앞에는 길게 가로로 세워진 입간판이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읽어 보니 ‘琿春紅麴國際大賓(혼춘홍국국제대빈)’이라고 쓰여 있었다. 로비에서 호텔방의 열쇠를 받는 중이었다. 느닷없이 아내가 나를 한쪽 옆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아직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여보. 오늘 저녁식사는 당신이 한 턱 쏘아. 백간 팀 모두에게. 상을 받게 되었다고 축하받았잖아.”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가 상금을 받은 뒤에 한 턱을 쏘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상금을 받을 때는 다들 만나기가 어려워 져! 그러니 지금 한 턱 쏴!”
“어디서? 이 호텔 식당에서?”
“응”
“그럼, 알아 봐. 최두열 팀장과 상의해봐.”
아내가 최두열 팀장과 함께 로비의 담당자에게 알아보았는데 밥값이 별로 비싸지는 않았다고 했다. 맥주 몇 잔을 곁들여도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 듯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아내가 권하는 대로 나는 백간 팀 모두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마음은 있어도 주춤거리며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잘 아는 아내가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호텔 2층에는 따로 멋진 식당이 있었다. 누군가 북한에서 임대해 외화벌이로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말했다. 북한 여자는 꽃으로 장식된 더 멋진 방이 있다며 방값을 따로 더 받는다고 말했다. 구태여 꽃으로 장식된 더 멋진 방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백간 팀은 꽃으로 장식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방 하나를 골랐다.
원탁의 둥글고 큰 식탁에 앉은 배간 팀은 각자 좋아하는 이런저런 음식을 시켰다. 예쁜 북한 여자가 음식을 내오는 등 이런저런 서빙을 했다. 나는 우선 맥주부터 유리잔에 따라 목을 축였다. 다음에는 온갖 덕담을 나누며 여러 음식을 배불리 먹고 마시며 훈춘의 밤을 보냈다. 상을 받는다고 한 턱을 내는 자리라서인지 나는 좀 쑥스럽고 멋쩍었다.
식사를 마친 뒤 정기훈 선생, 이동희 교수 부부, 문수정, 김현숙 등은 훈춘 시내의 야시장을 구경하러 갔다. 나도 따라갈까 하다가 너무 피곤해 쉬기로 했다. 하지만 곧 쉬는 것을 포기하고 김덕성, 김광철, 최두열 선생 등과 함께 일층 로비의 와인 바에서 북한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 일층 로비에 있는 와인 바도 북한에서 임대해 그곳에서 생산한 와인을 팔았다. 북한산 와인을 다 마시고도 부족해 러시아산 와인을 시켜 먹기도 했는데, 모두 너무 달아 내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것은 말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 몇 잔 들이키기도 전에 김광철 대표와 나는 우리 민족의 강역과 관련해 논쟁을 시작했다. 김광철 대표는 백두산 및 동북3성과 관련해 우리 민족의 발상지 운운한다는 것이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나는 어느 민족이나 이동을 하며 자신의 강역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과거의 고구려가 백두산 및 동북3성을 강역으로 했다는 것까지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가 우리 민족의 선조라는 것까지 부정하면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남한의 시각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논쟁은 언제나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김광철 대표는 나와 주고받던 논쟁을 점차 최두렬 선생과 주고받는 논쟁으로 초점을 바꾸어갔다. 논쟁의 주체와 객체가 바뀐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너무 피곤해 호텔의 방으로 돌아왔다. 스믈스믈 잠이 밀려와 베갯잇을 적셨다.
아홉째 날(8월 13일):
이날도 아침 6시에 기상을 했다. 물론 중국 시간이었다. 호텔에서 조식을 마친 백간 팀은 아침 7시에 버스를 탔다. 버스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국경을 이루는 방천을 향해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좀 황량했다. 최근 들어 심은 미루나무 숲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보였다.
창밖의 두만강은 여전히 모래사장을 만들며 동해로 흘러가고 있었다. 두만강 가에는 여기저기 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버스 왼쪽으로 보이는 모래언덕에는 오토캠핑장이 세워져 있어 시선을 끌었다. 방천까지의 길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길이 넓지 않았다. 방천은 모래사장이 몰려 있는 두만강 하구의 ‘조아(조서선 아라사) 우정의 다리’가 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었다. 중국과 조선과 아라사가 만나는 곳인 방천……. 장따거는 자신의 버스를 주차비 소형차 10엔, 대형차 20엔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는 주차장 안에 세웠다.
주차장 한쪽으로는 두만강 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대충 그곳을 둘러본 백간 팀은 이제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용봉각까지 갈 참이었다. 줄을 서서 겨우 탄 셔틀버스는 대만원이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데도 셔틀버스 안은 더웠다. 셔틀버스는 탑승객들 중 백간 팀을 용봉각 앞에 내려놓고 다시 달렸다. 내처 러시아 국경 너머까지 가는 버스인 듯했다.
용봉각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웅장한 관람용 탑이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용봉각 입구에서도 이런저런 특산물 등을 팔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전망대로 가려고 줄을 서 기다리는데 너무 더워 그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형편이 이러니 특산물 등에 주목할 겨를이 만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은 당연히 백간 팀만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유람을 나온 중국 사람들로 바글바글 시끌시끌했다. 우선은 찜통더위를 뚫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용봉각의 전망대에 올라가 조중아의 국경지대를 한 번 둘러보는 것이 급했다.
겨우겨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멀리는 동해와 가까이는 러시아, 북한 등의 땅을 바라보았다. 아, 넓고 크구나. 저기가 아라사이구나. 저기가 함경북도구나. 탄성이 절로 나왔지만 너무 더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용봉각은 아주 규모가 큰 탑이면서 누각이었다. 하지만 더위는 용봉탑의 규모 따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서둘러 셔틀버스를 타고 방천의 정류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상책이었다.
장따거의 버스는 에어컨을 튼 채 도문을 향해 출발했다. 왔던 길을 뒤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일단은 훈춘을 거쳐야 도문에 갈 수 있었다. 장따거는 훈춘으로 가는 길 어디에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했다. 길가에서 좀 떨어진 어딘가에 장따거의 버스가 멈추었는데, 주위를 살펴보니 식당 앞이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야외에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조롱박넝쿨이 그런대로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곳이었다.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여 식탁 앞에 앉았는데, 음식 중에서 커다란 생선요리가 먼저 눈에 띄었다. 한 입 떼어먹어 보니 아무 맛이 없었다. 다른 음식들로 전혀 입맛에 맞지 않았다. 향채를 넣지는 않았지만 그렇고 그런 중국음식이었다. 준비해간 고추장에 흰밥 몇 숟가락을 겨우겨우 비벼먹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장염 증세가 심해 자주 설사를 하는 등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장떠거의 버스는 서둘러 도문을 행해 출발했다. 백간 팀은 오늘 내내 도문을 거쳐 다시 연길까지 가야 했다. 드디어 오늘 밤까지 연길로 되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도문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는 아직도 지치지를 않은 김광철, 김익승, 이희천, 정기훈 등 백간의 일행이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계속 「직녀에게」 「광야에서」 등의 노랫소리가 터져 나왔다.
터덜거리며 달리던 장따거의 버스가 천천히 도문시내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한자와 함께 한글이 병기된 간판이 보였다. 세관네트워크, 이모네식당, 원통택배, 통상구거리 등이 그것이었다.
장따거의 버스는 예정대로 도문의 두만강 가에 위치한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버스에서 막 내렸는데, ‘하나투어’, ‘모두 투어’라고 이마에 쓴 대형버스 두 대가 보였다. 버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모두 한국어를 말했다.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이었다. 반가웠다.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으니 정성스럽게 알려 주었다.
도문에서는 보트를 타는 여행계획이 있었다. 백간 팀은 모두 최두열 팀장을 따라 선착장으로 몰려나갔다. 최두열 팀장이 배표를 마련하자 모두들 주황색 구명조끼부터 입었다. 안내인이 구명조끼를 입지 않으면 보트에 타지 못한다고 우리말로 말했다. 아마도 조선족 청년인 듯싶었다.
백간 팀을 실은 보트는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두만강 상류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강 건너 낮은 언덕에는 늘 그런 것처럼 북한군의 초소가 서 있었다. 초소 근처에는 어려 보이는 군인들 두엇이 눈에 띄었다. 보트가 상류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지 10분 쯤 되었을까. 핸들을 돌린 보트가 하류 쪽으로 몸을 향했다. 보트는 곧바로 시동을 껐다. 보트는 물결을 따라 이내 하류로 흘러내려 갔다. 보트의 시동이 걸린 것은 그렇게 흘러내려가던 보트가 선착장에 거의 다가왔을 때였다. 도합 20분 정도 걸린 두만강에서의 뱃놀이는 이렇게 끝났다.
두만강에서의 뱃놀이를 마친 뒤에는 강을 따라 좀 걸었다. 산책을 하자는 것인데, 너무 더워 금방 짜증이 났다. 이곳저곳 주차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보니 가까이 커피숍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와 나는 얼른 커피숍으로 들어가 냉커피 한 잔씩으로 몸을 식혔다.
다시 장따거의 버스에 탄 백간 팀은 북한을 잘 보이는 도문의 한 지역으로 이동을 했다. 도문은 본래 함경북도 온성군과 마주 보는 도시였다. 장따거의 버스는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가는 철교가 잘 보이는 일광산 살림공원 앞에 섰다. 이 살림공원 전망대에 오르자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가는 철교가 더욱 잘 보였다. 단체사진을 찍은 뒤에도 백간 팀은 각각 여러 장의 장의 사진을 찍었다.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더위는 가시지를 않았다. 버스 안의 에어컨 냉기 속으로 들어오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장따거의 버스는 마침내 연길을 향해 밤길을 터덜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연길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연길 역에 이르면 장따거의 버스의 버스와도 이별이었다. 오늘 밤부터는 기차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연길 역에 도착한 백간 팀은 버스에서 짐을 내린 뒤 서둘러 장따거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지만 그것이 실현되기는 거의 어려울 터였다.
연길 역에서는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를 탈 참이었다. 장따거의 버스가 돌아간 뒤에도 하얼빈 행 기차가 출발하기까지는 2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연길역 광장은 제법 크고 넓었다. 백간 팀은 모두 귀빈실 앞 광장으로 짐을 모았다. 그런 뒤 그곳에 둘러 앉아 기타를 치며 놀았다. 기타를 치며 희락의 분위기를 잡는 사람은 역시 정기훈 선생이었다. 그렇게 역 광장에 주저앉아 기타를 치며 놀자 몇몇 중국인 여자들이 참여해 흥을 돋우기도 했다. 그 중에 한 분은 한국에 가 돈을 번 적이 있다고 했다.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하얼빈으로 출발하는 기차에는 타는 손님이 많았다. 외국인은 일일이 여권을 대조해본 뒤에 기차역 안으로 입장을 시켰다. 백간 팀이 마련한 기차의 좌석은 이른바 연와라고 부르는 고급 침대칸이었다. 백간 팀의 몇몇은 한 침대칸에 모여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듯도 했다. 본래 체질이 약한 나는 너무 피곤해 덜컹거리는 기차바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열째 날(8월 14일):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을 깨고 보니 5시 15분이었다. 잠시 게름을 피우다가 벌떡 일어나 세면장으로 달려 나갔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원한 물로 몸까지 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저 생각이나 할 뿐이었다. 백간 팀이 타고 있는 열차의 고급 침대칸 연와에서도 샤워까지 할 수 있는 시설은 없었다.
열차의 차창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젖히자 광활한 대지가 망막을 가득 채웠다. 벼를 심은 논도 보이고, 옥수수를 심은 밭도 보였다. 기차는 아득한 논과 밭 사이로 달리고 달렸다. 하얼빈을 향해 달리고 달리던 기차가 잠시 멈춰 섰는데 차창 밖으로 牛家-周家-平房이라고 쓰인 작은 푯말이 보였다. 기차가 지금 주가(周家)에 멈춰 서 있는 것이었다. 다음 역은 평방(平房)……. 백간 팀은 하얼빈 역까지 가지 않고 평방 역에서 내릴 참이었다. 백간 팀이 찾아가려고 하는 731부대가 평방 역에서 좀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731부대는 일제가 세균전을 준비하건 곳이었다. 실제로는 평방 역도 하얼빈 시의 변두리였다.
평방 역에서 내린 백간 팀 중 몇몇은 대소변이 급했다. 평방 역에 있는 화장실은 이곳에서 내린 승객까지 이용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화장실을 찾아간 몇몇이 돌아오지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들이 돌아온 뒤에야 백간 팀은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을 했다. 종점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데도 사람이 아주 많았다. 두어 대 버스를 보낸 뒤에야 백간 팀은 일제의 731 세균전 부대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린 뒤에야 버스는 우리 일행을 어딘가에 토해 놓았다. 한참을 둘러보니 길 건너편에 ‘731부대 입구’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백간 팀은 731부대를 둘러보기 전에 아침식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최두열 팀장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쉽게 식당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꽤 먼 곳에서 예식장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식당까지가 너무 멀어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기는 좀 힘들었다. 백간 팀은 버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한 카센터에 짐을 맡기고 좀 걸어 예의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종종걸음으로 유적을 새로 복원해 놓은 731 세균전 부대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짐을 맡기고 관람을 시작한 새로 지은 731 세균전 부대 박물관은 우선 규모가 굉장해 주목이 되었다. 하지만 이 박물관의 건물 형태가 어딘지 모르게 좀 낯선 것은 사실이었다.
나와 아내는 이 박물관 입구에서 15엔씩을 주고 각각 731부대에 관해 한국어로 설명이 나오는 이어폰을 빌렸다. 생각해보면 중국으로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유적일 터였다. 그런데도 박물관 형태로 잘 복원해 놓은 731 세균전 부대의 각종 유적은 대단했다.
731 세균전 부대의 끔찍한 유적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을 때도 찜통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일부는 무개차를 타고 옛날 731 세균전 부대의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너무 더워 가판대에서 아이스크림부터 사먹었다. 그러고는 짐을 찾으러 박물관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짐을 찾은 백간 팀은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해 걸었다. 일단은 시내버스를 타고 하얼빈 역까지 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하얼빈 역에 자리해 있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을 둘러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게 하얼빈 역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는 했다. 이 시내버스는 무려 55분이나 달려간 뒤에야 백간 팀을 하얼빈 역 근처에 내려놓았다.
하얼빈은 사람들이 아주 많아 사는 대단히 큰 도시였다. 역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하얼빈 역사(驛舍) 곁으로 다가갔는데,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다. 역 광장 바닥은 타일로 만든 포장이 여기저기 깨져 있거나 벗겨져 있었다. 움푹움푹 패인 곳도 많아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도 좀 불편했다. 컵라면, 생수, 삶은 계란 따위를 파는 잡상인들도 아주 많았다. 더러는 노숙자도 눈에 띄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결한 느낌을 주는 곳이 하얼빈 역의 주변이었다.
하얼빈 역사(驛舍)의 이곳저곳을 한동안 기웃거렸지만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힘들게 찾아낸 역사 안의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은 별로 크지도, 세련되지도 않아 보였다. 백간 팀은 사진을 찍고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기록을 둘러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안중근 의사의 초상 밑에는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이만우가 헌화한 시든 꽃다발이 남아 있었다. 아, 이만우! 지난 시절 언젠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고려대 교수 출신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아무튼 하얼빈 역사 안의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은 좀 낡고 초라해 보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얼빈 역사의 한 구석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는 했다. 문득 한국에서는 비극적인 유적일수록 파괴하기에 급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에서 나온 백간 팀은 서둘러 오늘 밤을 묶을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구라파 여관! 호텔이 아니라 여관이라는 것이 재미있었다. 택시를 타기가 어려워 결국 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한 구간을 더 가야 숙소였다. 캐리어를 끌고 한참을 이동해 도착한 ‘구라파 여관’은 말 그대로 여관이었다.
처음 우리 부부는 이 호텔 202호에 들었는데, 무엇인가 문제가 생겨 308호로 옮기게 되었다. 옮기게 된 308호에 들어서는데, 화장실에서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앞에 308호에 들었던 누군가가 아주 냄새가 고약한 대변을 보고 떠난 듯했다. 왕짜증이 났지만 누구한테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내가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 데도 고약한 냄새는 쉽게 가시지를 않았다.
잠시 침대에 누워 쉬는데, 최두열 팀장이 오늘은 이른바 ‘자유여행’을 하라고 했다. 나와 아내는 4시에 로비에서 이동희 교수 부부를 만나기로 했다. 이들 부부를 따라 다니며 이른바 ‘자유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우선은 중앙대로 주변에서 점심 겸 저녁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한참을 찾아다니다가 한국식당을 발견한 백간 팀 몇몇은 냉면, 김치찌개 등 이런저런 우리음식을 시켜 모처럼 입을 호강시켰다.
점심 겸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는 하얼빈의 밤 문화로 유명한 중앙대로를 따라 걸었다. 1.5km 정도나 된다는 이곳 중앙대로는 하얼빈의 모든 문화와 예술을 품고 있는 첨단의 거리라고 했다. 중앙대로에서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 각종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생음악이 연주되고 있었고, 마술 공연, 춤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더러는 다락방 연주회가 벌어지고 있어 사람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옛날 금과 청의 왕조가 발원한 곳이 하얼빈이라고 했다. 하얼빈은 만주어로 명성, 명예 등의 뜻을 가진 아러진(阿勒錦)에서 온 말이었다. 이미 19세기 초 하얼빈은 러시아를 통해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국제적인 면모를 갖춘 도시가 되었다. 1903년에는 러시아에 의해 철도까지 부설되어 당시 하얼빈에서는 30여개 국가에서 온 외국인이 16만이 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얼빈은 당시 이미 경제와 문화가 번성해 동북아에서 가장 문물이 풍성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하얼빈 시내에 유럽식 건축물이 많아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얼빈 시내의 이른바 중앙대로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생겨난 곳이었다.
중앙대로를 오가며 이국풍의 분위기를 즐긴 뒤에는 성소피아 성당을 찾아 나섰다. 성소피아 성당은 호텔인 구라파 여관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나와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성소피아 성당 가까이에 갔을 때는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지면서도 빛나는 여름 태양은 성소피아 성당 위로 금빛 황홀을 장막처럼 깊이 드리우고 있었다. 금빛 황홀과 함께 빛나고 있는 성소피아 성당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더러는 혼자 더러는 여럿이 이 황홀경을 사진에 담느라고 잠시 여념이 없었다. 해가 지자 성소피아 성당은 다시 아름다운 조명을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조명 속의 성소피아 성당의 마당에서는 분수가 튀어올라와 더욱 회감을 만들어냈다.
성소피아 성당은 하얼빈 시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당이었다. 기록에는 높이가 53. 35미터, 넓이가 721평방미터라고 나와 있었다. 소피아 성당은 무엇보다 배점정(拜占庭) 양식 건축물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고 했다. 1996년 11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고 1967년 6월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해 지금 관광객들에게 개방을 하고 있었다.
1903년 러시아에 의해 철도가 부설되자 하얼빈에는 제정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들어오게 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제정 러시아 보병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곳에 처음 병사들은 위한 군인 성당이 지어진 것은 1907이었다. 이 군인 성당은 오래지 않아 1923년 재건축을 위한 시공식이 개최되었는데, 그것이 정작 완공된 것은 9년 뒤인 1931년이었다. 무려 9년간이나 심혈을 기울려 붉은 벽돌로 세운 이 성당은 화려하면서도 전아한 품격을 갖고 있었다.
성소피아 성당 근처를 배회하다 보니 한국식 상호를 단 커피숍 거피베네가 보였다. 몇몇은 너무 더워 이곳에 들어가 냉커피며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었다. 그런 뒤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일행은 후끈거리는 밤의 열기를 뚫고 조린공원(兆麟公園)을 향해 걸었다. 조성된 지 100년 넘는 이 조린공원은 중국인 항일독립운동가 이조린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원이라고 했다.
백간 팀의 몇몇이 조린공원을 찾은 것은 이곳이 안중근(安重根) 의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조린공원은 우덕순(禹德淳), 유동하(柳東夏) 등과 함께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3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거사계획을 꼼꼼하게 점검한 곳이었다. 조린공원에는 안중근 의사가 서거 이틀 전에 쓴 ‘청초당’이라는 휘보가 그 특유의 손도장과 함께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했다. 이 비석의 다른 한 면에는 역시 안둥근 의사가 쓴 ‘연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하지만 어두운 밤에 찾아간 조린공원에서 이들 안중근 의사의 유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핸드폰의 전등을 켜들고 조린공원의 이곳저곳을 헤매 다녔지만 끝내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비석을 찾지는 못했다.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죽으면 이곳 조린공원에 임시 매장했다가 해방이 되면 조국으로 옮겨 제대로 매장을 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백간 팀의 몇몇은 중앙대로를 따라 터벅터벅 호텔 ‘구라파 여관’으로 돌아왔다. 일행 중 몇몇은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조린공원을 방문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조린공원을 다시 가기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송화강 가에는 좀 가보고도 싶었다.
저녁 10시쯤 호텔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샤워부터 했다. 지난 밤에 기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 바람에 오늘 아침 겨우 고양이 세수만 했던 터였다. 샤워를 마친 뒤에는 너무 피곤해 내일 아침 늦게까지 푹 자기로 했다.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잠이 함부로 막 퍼부어댔다.
열한째 날(8월 15일):
늦게까지 푹 자려고 했지만 오늘 아침도 습관처럼 일찍 눈이 떠졌다.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와이파이가 터져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으로 카톡 메시지, 기타 문자 메시지 등을 확인했다. 네이버를 통해 국내의 신문기사도 좀 읽었다. 서울도 엄청 덥다는 기사가 여기저기에 떠 있었다.
아침식사 시간은 7시, 출발시간은 7시 30분이라고 했다. 세면을 마치고 짐을 다 꾸리니 6시 40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1층 로비로 내려왔더니 식사시간까지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호텔 밖으로 나오자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렇게 그냥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강이 들었다. 호텔 근처의 ‘유럽프라자’를 지나 시원한 바람을 쫓아 중앙가도까지 나가 보았다. 어제 저녁과는 달리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어제 저녁 그렇게 요란하던 중앙가도가 이렇게 조용하다니! 서울의 강남역 주변과 홍대역 주변도 아침에는 이렇게 다 조용하리라.
서둘러 호텔 ‘구라파 여관’의 식당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아침식사부터 했다. 미처 7시가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아침식사는 시작이 되어 있었다. 여행의 일정에 쫓기다가 보니 줄곧 식사조절을 못하고 혈당조절도 못했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이 있는 큰 거리로 나갔다. 하얼빈 역까지 가는 버스는 번번이 만원이었다. 오래지 않아 용케 좀 비어 있는 시내버스가 왔다. 백간 팀은 모두 우르르 버스에 몸과 짐을 실었다.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달려간 하얼빈 역은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별별 사람들로 벅적거렸다. 벅적거리는 것은 온갖 장사들 때문이기도 했다. 하얼빈 역의 바닥은 여기저기 타일이 깨져 있어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에 별로 편치 않았다.
시간이 있으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 안의 이곳저곳을 좀 더 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하얼빈 역에서 백간 팀은 목단강 행 8시 44분발 기차를 타야 했다. 기차를 탈 수 있는 출구를 찾기 위해 최두열 팀장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오갔다. 우선은 목단강 행 기차를 탈 수 있는 출구를 찾는 일이 급했다. 목단강 행 기차를 탈 수 있는 출구 앞에 서자마자 곧바로 개찰이 시작되었다. 역시 외국인은 여권을 제시해야 했다. 하얼빈 역에서도 밀려드는 사람들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가 어려웠다.
목단강 행 기차는 정시에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백간 팀은 모두 10호차 몸을 실었는데, 나와 아내의 칸은 15호실이었다. 기차에 몸을 실은 백간 팀은 각자 떠들기고 하고, 잠을 자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백간 팀을 실은 기차는 비산비야의 들판을 끊임없이 달리고 달렸다. 한참을 자고 나서도 차창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비산비야의 옥수수를 심은 밭이거나 벼를 심은 논이었다. 차창 밖의 풍경 중에 높거나 큰 산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은 먼 구릉지 아래로 옹기종기 몇몇 마을도 보였다.
중국인들이 모여 있는 곳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기차 안에서도 그들은 알아듣기 어려운 중국어 사투리로 시끄럽게 지껄여댔다. 갑자기 은퇴를 하고 시간이 있으면 중국어를 좀 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터널은 길었다. 4~분분을 지나도 계속 터널 안이었다. 기차가 드디어 산지를 지나고 있는 것이었다. 터널을 빠져 나오자 차창 밖으로 산이 보였다. 하지만 산이 아주 높고 깊어 보이지는 않았다.
예정 시간보다 1시간 30분 쯤 늦게 기차는 목단강 역의 플랫폼에 도착했다. 한자로는 목단강(牧丹江)이라고 쓰여 있지만 중국어로는 무단강이라고 읽는 곳이었다. 오늘 밤 백간 팀이 묶을 곳은 ‘호텔 하와이’였다. 백간 팀이 묵을 호텔 하와이는 역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백간 팀은 잠시 호텔 하와이까지 택시를 타고 갈까 어쩔가 하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냥 모두 캐리어를 끌고 걷기로 했다. 걸으면서 만나는 목단강 시의 풍경도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 호텔 하와이는 시내의 중심가에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 도착한 호텔 하와이는 제법 깨끗하고 쾌적했다. 역시 가격이 비싼 호텔이 좋았다. 일단은 호텔방을 배정받아 짐부터 부렸다. 그런 뒤 백간 팀에게는 다시 자유여행의 시간이 주어졌다. 최두열 팀장은 중국 돈 50엔씩을 나누어주고 각자 자유롭게 점심식사를 해결하라고 했다. 무언가 낯설어 조금 주춤대다가 호텔 앞의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이동희 교수 부부, 김현숙, 문수정, 박창명 부부 등이 자장면을 주문해 먹고 있었다. 물론 한국식 자장면은 아니었다. 나도 따라 시켰는데, 역시 맛이 별로 없었다. 그냥 점심식사를 때우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이렇게 모인 백간 팀의 몇몇은 나머지 시간에 목단강 가의 빈강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호텔을 나와 조금 걸었다. 이내 각종 먹거리와 실용품을 파는 건너편 시장이 나왔는데, 시장은 한창 축제 중이었다. 호텔에서 목단강 가의 빈강공원까지는 꽤 멀었다. 지도를 보고 걷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과일가게가 보였다. 누군가 과일을 좀 사 목단강 가 유원지에서 함께 먹자고 말했다. 때마침 나타난 과일가게에 우르르 몰려가 각자 양껏 과일을 샀다. 나도 먹음직해 보이는 복숭아와 포도 등을 샀다.
호텔에서 40분 정도 걸었을까. 가로놓인 언덕을 올라가자 나무데크가 돋보이는 목단가의 유원지가 나왔다. 빈강공원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내려가야 했지만 우리 일행은 오후의 햇살을 피해 나무그늘에 앉은 뒤 준비해간 과일부터 먹었다. 수박도 먹고, 참외도 먹고, 복숭아도 먹고, 자두도 먹고……. 아무튼 온갖 과일을 맛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잠시 쉬던 일행은 빈강공원으로 짐작되는 강의 하류를 향해 걸었다. 조금 걸어가자 포청천, 노신, 관운장 등 중국의 영웅들을 조각해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 이곳 조각공원에 이르자 중국 전통악기를 펼쳐 놓고 연주를 사람이 보였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자 이번에는 도복을 차려 입고 건강 체조를 하는 부부가 눈길을 끌었다.
빈강공원에서 우리 일행이 보려고 하는 것은 팔녀투강비였다. 별로 많이 걷지 않았는데도 광장과 잇닿아 있는 팔녀투강비가 눈에 들어왔다. 크고 웅장한 팔녀투강비는 목단강 시가 자랑하는 조각 작품이었다. 또한 이 팔녀투강비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공동으로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중요한 상징물이기도 했다.
1938년 10월의 일이었다.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끝내 차디찬 목단강에 뛰어들어 장렬히 최후를 마친 8명의 여성 전사가 있었다. 8명의 여성 전사는 제2로군 제5군 부녀대의 지도원 냉운(冷運), 반장 호수지, 양귀진, 피복 공장의 공장장 안순복(安順福), 전사 곽계금, 황계청, 왕혜민, 이봉선(李鳳善)이었다. 이 중에서 안순복과 이봉선이 조선족 처녀였다. 안순복과 이봉선은 조선의 한복, 곧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채 팔녀투강비 속에 활달하게 살아 있었다. 한복 저고리를 입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문득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1938년 봄의 일이었다. 일본의 관동군은 송화강 하류에서 ‘3강대토벌’을 실행했다. 당시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1사에는 30명으로 구성된 여성유격대원이 있었는데, 예의 8명의 여성 전사들은 바로 이 부대의 소속되어 있었다. 그해 10월 이들 여성유격부대는 목단강 하류에서 숙영을 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에 의해 포위가 되고 말았다. 8명의 여성 전사는 본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강변 쪽에 남아 계속 일본군을 유인했다.
이들 덕분에 여성유격대의 본대는 무사히 빠져 날 수 있었다. 하지만 8명의 여성 전사는 끝내 일본군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목단강에 투강해 일제에 강렬히 저항했다. 그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지휘였던 주보중 장군은 이 ‘팔녀투강’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기리는 제사(祭辭)를 짓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이 ‘팔녀투강’에 얽힌 스토리를 제재로 한 영화 「중화의 아들딸들」을 제작한 적도 있었다.
목단강 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1986년 9월7일 빈강공원 광장에 매우 거대한 팔녀투강비를 건립했다. 팔녀투강비를 둘러보다 보니 글을 새긴 철판이 보였다. 이 철판에는 팔위여열사(八位女烈士) 명단과 함께 소속을 밝혀놓았는데, 그곳에는 안순복 열사와 이봉선 열사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 놓고 있었다.
팔녀투강비 옆 광장에는 연을 날리는 사람도 있었고, 날리는 연을 파는 상인도 있었다. 팔녀투강비의 앞과 뒤에서 각자 혹은 단체로 사진을 찍고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백간 팀은 중국 동북3성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최두열 팀장은 예정대로 백간 팀 모두와 이번 여행을 매조지하는 회식을 주선했다. 회식의 장소는 백간 팀이 묵고 있는 호텔의 맞은편에 있는 건물의 8층 중식당이었다. 조금은 멋진 식사를 하기로 하고 비싼 음식을 주문했지만 내 입맛에는 별로 맞지 않았다. 내 입맛에 꼭 맞는 중국음식은 없는 듯했다. 향채는 넣지 않았지만 가득가득 나오는 중국음식은 전체적으로 매우 느끼했다. 몇 숟가락 뜨지 않았는데도 비위가 편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장염에 걸려 있는 듯도 했다. 자꾸 설사가 나왔다.
회식을 마친 뒤에는 호텔 하와이 건너편의 시장 근처 빈터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이번에도 역시 정기훈 선생이 기타를 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한참을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우리 부부는 더 이상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호텔로 돌아왔다. 씻자마자 잠이 퍼부어 죽은 듯이 쓰러져버렸다.
열둘째 날(8월 16일):
이윽고 귀국을 해야 하는 날이 밝았다. 백두산과 간도 일대를 찾아 떠난 11박 12일의 여행이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백간 팀은 대절버스에 몸을 실었다. 발해의 왕궁이었던 ‘상경용천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1시간 30분 넘게 벌판을 달려온 버스는 일단 먼저 발해의 유물을 모아놓은 박물관의 입구에 섰다. 입장료를 내야 했는데, 더불어 ‘발해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도 팔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내가 50엔을 주고 ‘발해의 역사’ 한 권을 구입했다.
박물관의 행정 담당자는 일단 버스를 박물관 입구에 세워 입장료를 내게 했다. 버스는 오래지 않아 백간 팀을 발해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버스가 발해 박물관의 앞에 섰는데, 나는 속이 부글거려 화장실이 급했다. 아무래도 장염이 심해진 듯했다. 그토록 효험이 있는 정로환을 한 주먹씩 복용해도 이번에는 쉽게 설사가 멎지 않았다. 엉성하고 더러운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있느라고 박물관 관람은 뒷전이었다. 설사를 처리한 뒤 급하게 둘러본 발해 박물관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된 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형편이 이러하니 백간 팀은 이곳 발해 박물관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백간 팀을 실은 버스는 곧바로 발해의 왕궁 터인 상경용천부를 향해 달렸다. 버스는 상경용천부의 성벽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에 주차를 했다. 이곳에서도 하나투어라는 회사명이 붙어 있는 대형버스가 눈에 띄었다.
우선은 화장실부터 들려 다시금 부글거리는 속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미 팬티에는 설사한 똥물이 좀 묻어 있는 듯싶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속을 달래러 들어간 공중변소는 앞이 터져 있는 특유의 중국식 시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 뒤에야 나는 비로소 상경용천부의 왕궁 터를 보기 위해 성벽 위의 전망대에 섰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경용천부의 왕궁 터는 크고 웅장했다.
겨우겨우 그렇게 상경용천부 왕궁 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비가 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버스로 돌아가 우산을 챙겨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왔더니 버스 주변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좀 늦기는 했지만 나와 아내도 상경용천부 왕궁 터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 터에는 일년생 화초인 백일홍이 가득가득 피어 있었다. 일부러 백일홍을 피워 상경용천부 왕궁 터의 유적을 관리하는 듯했다.
상경용천부라고 불리는 왕궁 터는 상경성 안에 자리해 있었다. 상경성의 안에는 상경용천부라는 궁터 외에도 발해진을 비롯해 무려 6개의 마을이 흩어져 있었다. 상경성은 외성(外城), 궁성(宮城), 황성(皇城)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최두열, 문수정, 김현숙, 문수정, 김덕성, 김광철 등 백간 팀의 몇몇은 이미 상경용천부 왕궁 터의 저쪽 담벼락 안에까지 깊이 들어가 있어 보이지조차 않았다. 다소 늦기는 했지만 나와 아내도 건너편에 보이는 성벽까지는 걸어 가보기로 했다. 그곳 성벽의 전망대에 올라 조금쯤 둘러보는 참이었다. 앞장을 서 달려갔던 백간 팀 몇몇이 벌써 시간이 다 되었다며 바쁘게 되돌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따라 우리 부부도 서둘러 발길을 돌려 걸어 나왔다. 하지만 걸음이 늦은 나와 아내는 또 버스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다.
이제 백간 팀을 실은 버스는 발해의 궁찰이라고 하는 흥륭사를 향해 달렸다. 궁찰이라고 해도 지금 보기에는 별로 큰 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평지에 세워진 절이라서인지 가람의 배치도 대강 평범했다. 일자로 늘어서 있는 직사각형의 가람이 차례로 서 있었고, 그 뒤의 끝에 널리 알려져 있는 발해의 석등이 놓여 있었다. 실물로 확인한 석등은 유명세만큼이나 나름의 위용이 돋보였다. 발해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석등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의 흥륭사 가람과는 별로 잘 안 맞아 보였다. 석등도 석등이지만 해태상도 주목이 되었다. 화강암이기 때문일까. 석등과 마찬가지로 해태상도 석질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이번 동북3성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 바로 이곳 발해의 궁찰인 흥륭사를 둘러보는 일이었다. 마지막 일정을 마친 백간 팀은 조금쯤 시간의 여유를 두고 목단강 공항으로 버스를 몰았다. 버스가 서서히 목단강 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시 뱃속이 요동을 쳐 나는 거듭 인상을 쓰며 화장실이 있는 곳 아무데나 버스를 좀 세워달라고 청했다. 내 청을 듣고 버스가 고속도로 입구의 주유소 근처에 있는 공중 화장실의 앞에 섰다. 나를 비롯한 몇몇이 바쁘게 내려 화장실을 행해 뛰었다. 버스로 되돌아온 나는 다시금 정로환 한 줌을 먹고 꾸벅꾸벅 졸았다. 잠깐 졸은 듯싶은데, 버스는 어느새 목단강 공항 주차장에 백간 팀을 내려놓고 있었다.
대한민국 인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의 탑승시간까지는 좀 여우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컵 라면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때웠지만 나는 무엇을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탑승 수속을 밟은 뒤에도 시간이 촉박하지는 않았다. 목단강 공항의 면세점을 한동안 어슬렁거렸지만 구입을 하고 싶은 물품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환전한 중국 돈이 좀 남아 있어 12년산 위스키를 한 병 샀다. 인천공항에서보다 조금은 더 비쌌다.
비행기에 탄 뒤에는 기내식으로 나온 빵조각을 먹자마자 그만 잠에 빠졌다. 잠에 빠졌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인천공항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김광철, 최두열, 김덕성, 송윤옥 등을 제외한 나머지 회원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사무처장인 아내 송윤옥과 대표인 김광철 샘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경남 고성과 통영이 집인 최두열, 김덕성 선생을 모시고 간단하게나마 저녁식사를 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인천공항의 식당에서 먹은 된장찌개 백반은 입과 배를 제법 편안하게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는 우리 부부도 이번 여행의 종지부를 찍으며 큰아들이 사는 길음동으로 가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2016.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