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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동만이와 언제 처음 만났는가는 분명치 않다. 아마 79년 말에서 80년 초 사이일 것이다. 둘 다 사회계열에 같이 입학했으나 반이 달랐고, 또 나는 2학년 때 인문대학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대학 다닐 때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당시 우리들이 자주 갔던 일미집이나 한잔집 같은 대폿집에서 서로 스쳐 지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기억에 그와 통성명했던 적은 없다. 78년 5월에 그가 유신철폐 데모를 주동하다 감옥에 갔다는 것이 당시 내가 동만이에 대해서 들은 전부였다. 그리고 그해 6월 나도 유신철폐 데모를 벌이고 도망 다니다가 10월에 잡혀 감옥에 들어갔다.
79년 5월 동만이가 먼저 감옥에서 나오고, 나도 이어 8월에 형집행정지로 나오면서 동만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젊은 시절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다가 감옥생활을 했다는 흔치 않은 공통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같이 감옥 생활을 한 동료들을 평생의 동지로 생각했다. 동만이와 나도 그런 동지 관계였다. 우리는 광화문에 있던 74학번 김태경 선배의 서점에서 자주 어울리며, 운동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술도 마시곤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동만이와 나는 서로를 그런 많은 동지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을 뿐, 그 이상으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동만이와 내가 급속하게 가까워지게 된 것은 81년 9월 중순에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날은 정말 일진이 사나웠던 날이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 일당에 의한 야만적인 살육의 광풍이 지나간 후 나는 감옥에서 꼬박 1년을 보냈다. 9월 11일 만기 출소한 후 여기저기 친구들을 만나다가 동만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랬더니 동만이가 김태경 선배가 무림 사건 때문에 도망 다니고 있는데 자기와 연락이 된다, 그러니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전에 같이 술도 많이 마셨고, 또 소식도 궁금하고 해 그러자고 했다. 그래 서로 만나기로 했는데 그날이 내 기억으로 아마 일요일이었을 것이다(왜냐하면 당시 김태경선배의 약혼녀였던 강금실씨가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날은 출근을 하지 않고 오전부터 우리와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다).
동만이와 만나니 동만이가 나를 김태경 선배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인도했다. 김태경 선배가 살고 있던 집은 서울에서 안양 가는 길목에 있던 백조아파트였다. 오전 한 11시쯤인가 동만이와 내가 아파트에 들어서니 집안에 사람이 여럿 있었다. 강금실씨도 있었고, 74학번 오귀환 선배도 있었다. 그리고 한 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난다. 아무튼 여러 사람이 집에 있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수배 중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절대 보안에 부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해 두 번이나 잡혀 감옥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문제에 관해서만은 신경이 몹시 예민했다. 무언가 기분이 찜찜했지만 설마 무슨 일 있으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나중에 기회 봐서 조심하라고 이야기하기로 마음먹고 말이다.
금실씨가 점심 때 맛있는 것을 해 준다고 해 기다리기 심심하여 일부는 카드를 하고 일부는 화투로 오관을 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이상했다. 내가 오관을 떼는데 화투패가 계속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화투패가 떨어져야 오늘 재수가 어떻다니 하는데 화투패가 떨어지지를 않으니, 그때까지 수없이 오관을 떼어봤지만 화투패가 그렇게 안 떨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거 왜 이러냐 하면서 서로 낄낄대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에서 “띵똥” 하는 차임벨 소리가 들였다. 순간 모두 긴장하였다. 금실씨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전기 검침 나왔다고 하였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다시 화투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꼼짝 말고 손들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거 잡혔구나, 오관도 안 떨어지더니 정말 재수 없구나, 감옥에서 나온 지 열흘도 안 되어 또 잡혀가다니”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또 끌려가는 수밖에.
어디서 나온 자들인지 모르지만, 끌고 가면서 눈을 감으라느니, 머리를 숙이라느니 하면서 상당히 겁을 주었다. 이윽고 어딘가에 도착한 모양인데 계단이라고 하면서 눈을 감은 채 서로 허리를 붙잡고 올라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저기가 무척 소란스럽고, 산만하였다. 안기부나 보안사 같으면 절대 들리지 않을 민간인들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여기 경찰이구나” 순간 “심한 매는 맞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안심이 되었다. 내가 숨겨준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으니 내가 시달일 일은 없었다. 결국 그날 나는 석방되었고, 동만이도 그 다음날인가 석방되었다. 김태경 선배는 안타깝게도 구속이 되었지만, 이 일진 사나왔던 날의 소동 때문에 동만이와 나는 서로 급속히 가까워졌다.
방황
81년 가을은 무척 암울하였다. 80년 서울의 봄의 실패와 광주의 피맺힌 절규가 우리의 가슴을 돌덩이처럼 내리 누르고 있었다. 모두들 무기력감에 젖어 1, 2년 전의 그 정열과 패기를 잃은 채 점차 소시민화되어 가고 있었다. 동만이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동만이는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학생 시위 관련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입학이 불허되면서 진로를 설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80년 5월에 또 제명된 터라 학교에 대한 미련은 없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다만 징역을 한 번 더 살면서 더욱 응어리진 전두환 일당에 대한 분노가 간신히 나를 지탱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틈나는 대로 술이나 마시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답답한 노릇은 같이 술 마실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모두 자괴감에 빠져 만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만나면 결국 나올 80년 봄에 관한 이야기가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틈만 나면 우리를 잡아넣으려고 혈안이 된 전두환 정권의 감시도 영향이 컸다. 결혼식 같은 때나 모여 술 한 잔 했을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 연락을 삼가는 것이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도 지극히 당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로 만나는 사람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나는 주로 동만이, 삼철이와 어울려 다녔다. 당시 삼철이는 종로2가에 있는 삼미에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인천으로 내려가려면 지하철 1호선 부근이 제일 편하기도 했고, 또 당시는 종로통 일대가 아직도 서울의 중심이었던 터라 술집도 그 부근이 제일 괜찮았기 때문에, 우리는 무교동, 다동, 청진동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술값은 주로 삼철이와 동만이가 지불했다. 삼철이는 직장이 있었고, 동만이는 나보다 집안 형편이 한참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술값을 내는가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썼다. 그냥 주머니에 돈 있는 사람이 내는 거였다. 그러면서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운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하고, 아직 청춘의 나이인지라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그랬다.
동만이, 삼철이, 나 이렇게 셋이 어울려 다녔지만, 삼철이는 직장이 있었고, 동만이와 나는 놀고 있었던 관계로, 동만이와 나 둘이 어울리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나는 서울로 올라갈 일이 있으면, 우선 동만이 집으로 전화를 해 우리끼리 만날 약속부터 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동만이가 전화 받기를 지독히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동만이는 좋은 말로 해서 느긋하고, 나쁜 말로 해서 좀 게을렀다. 또 마음속으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그것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 무슨 부탁을 하면 잘 거절하지 못해 전화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신호를 하나 정했다. 전화가 걸려와 신호가 세 번 따르릉하고 울고 난 다음 끊어졌다가 다시 걸려오면 내가 전화를 건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만나 술 마시고 다녔다.
81년 겨울부터 82년 여름까지 동만이와 술 마시는 동안 여러 우여곡절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생전 처음 직장이라는 것을 잡았다가 보름도 안 돼 그만두었다. 회사 안에 내분이 있었던 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운동판이라는 생각이 점 점 더 강하게 들어만 갔다. 동만이도 82년 봄부터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롯데호텔 영업 파트에 근무했었는데, 동만이 성격에 영업은 글쎄 별로였다. 동만이는 영업은커녕 영업하라고 나온 지갑이나 열쇠고리 등 판촉물은 내게 주고 나와 만나 수다를 떨거나 술이나 마셨다(그 지갑은 얼마 전까지도 내 책상 서랍에 있었는데 지금은 정한식 목사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그것도 얼마 안 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실연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동만이가 실연을 당한 것은 81년으로 기억되는데 동만이에게 그 아픔은 상당히 오래갔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우리는 거의 매일을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총각이라 집에 꼭 가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하여 술 먹다 취하면 근처 여관에서 같이 자곤 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있던 동만이네 집은 거의 내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만이 부모가 출근하고 난 후 둘이서 운동에 대한 모사도 꾸미고, 가끔은 호기심에 불량 비디오를 빌려와 감상도 하고, 또 동만이 아버지가 애써 구해 모아 놓은 양주 중 색깔 없는 것만 골라 먹고는 거기에 물을 채워 넣기도 했다. 이런 우리를 두고 주변에서는 심지어 쟤네들 서로 사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우리기획 시절
82년 여름 동만이와 술 마시고 다닌 지도 어언 1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술만 마실 수는 없었다. 무언가 해야 했다. 직장은 다니기 싫었다. 어떻게든 운동과 연관된 일을 해야 했다. 동만이도 나와 대략 비슷한 생각이었다. 궁리 끝에 우리는 번역 사무실을 내기로 했다.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회과학 책을 발굴, 번역하여 사회과학도 보급하고 돈도 벌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동만이와 나는 서로 주안점이 달랐다. 동만이는 번역을 통하여 공부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보다 학구적, 이론적인 데 관심이 많았다. 반면 나는 번역을 통하여 적당히 내 용돈만 벌 수 있으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 번역은 적당히 하고 대신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후배들도 만나고 하면서 다시 운동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자는 것이었다. 한두 달 동만이와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에 서울대학교 운동권 후배인 78학번 최민과 박태견까지 합류하였다. 우리 넷은 결국 번역사무실을 끼고 운동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에만 합의하고, 나머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우선 사무실부터 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중구 신당동에 우리기획이라는 출판기획 겸 번역사무실을 내고, 내가 대표를 맡았다.
우리 기획 내에서 동만이와 나는 주로 출판사 영업과 번역할 책 발굴 등 바깥일과 번역 원고에 대한 최종 검토를 맡았다. 동만이와 나는 각 출판사들을 돌아다니며 번역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달라고 부탁하였고, 또 종로서적 등 해외서적을 취급하는 서점과 각 대학 도서관, KDI, KAIST 등 전문 연구 기관을 찾아다니며 뭐 번역할 만한 좋은 책이 있나 뒤적였다. 그리고 틈틈이 자기 몫의 번역일도 했다. 최민과 박태견은 자기 몫의 번역일도 하면서 우리가 번역 일거리를 맡길 사람들(주로 감옥에서 막 나와 일거리를 잡지 못한 후배들)을 찾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친구들이 우리보다 감옥에서 나온 지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신당동 우리기획 사무실은 얼마 안 가 감옥에서 막 나와 오갈 데 없는 후배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최민과 박태견이 학림 사건의 주요 인물이었던 까닭에 주로 학림 쪽에 관계했던 후배들이 많이 찾아왔으나, 간혹 동만이나 나를 찾는 후배들도 있었다. 특히 당시 내 막내 동생이 대학 2학년이었기 때문에 막내와 막내 친구들이 술 한 잔 먹고 싶으면 들르곤 하였다.
신당동에서도 술은 거의 매일이었다. 바깥에 나가 일을 볼 때면 의례 인사가 술이었다. 또 사무실 안에서도 거의 매일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아예 술을 끼고 살다시피 했다. 거기에는 동만이와 내가 술이라면 결코 사양 안 한 탓도 있지만, 또 둘 다 후배들 술 사주는 데 인색하게 굴지 않은 탓도 컸다. 지금 같으면 불가능했겠지만 당시는 한창인 때라 그렇게 매일 술을 마셔도 별 탈이 없었다. 최민이와 박태견이도 술 마시는 데는 결코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우리 넷은 82년 하반기를 그렇게 신당동과 동대문 일대에서 술을 마시며 지냈다.
83년으로 넘어가면서 우리기획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으나, 우리 내부에서 우리기획의 운영을 둘러싼 의견의 차이가 노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번역 일을 오래 할 생각이 없었다. 운동판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임시방편이었을 뿐이었다. 동만이도 점점 번역에 흥미를 잃어가는 눈치였다. 번역은 공부도 아니고 사업도 아니었다. 사업으로 가져가려면 아예 전문적으로 출판기획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동만이 생각에 아직 시기상조였고, 또 그럴 생각도 없었다. 반면 최민이의 생각은 달랐다. 최민이는 우리기획을 전문적인 출판기획 쪽으로 가져가자는 입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투자를 하고 번역일은 줄여야만 했다. 최민과의 의견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기획은 점점 감옥에서 막 나온 빵잡이들의 소굴 비슷한 쪽으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좋지 않은 징조였다. 자칫하다가는 일도 못 하고 감옥만 가는 수가 생길지 몰랐다. 문제를 풀 계기는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81년 감옥에 간 김태경 선배가 83년 1월엔가 출소를 한 것이었다. 출판 문제에 관한 한 김태경 선배는 당시 우리들의 눈에 독보적인 전문가였다. 김태경 선배의 입장은 최민과 같았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 기획은 아예 번역 사무소로 가던가 아니면 출판기획 쪽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 중간은 없었다. 그런데 번역 사무소는 잠시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누구도 그것을 전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출판기획으로 가는 수 이외에는 어떤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김태경 선배가 우리기획에 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동만이와 나는 우리기획을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운동판으로 다시 돌아갈 작정이었다. 이제 돌아가면 다시는 운동 이외의 길은 기웃거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만이도 앞으로 무엇을 할까 뚜렷이 결정은 내리지 못 한 것 같았지만, 우리기획을 정리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기획을 청산하고 남은 돈 50만원을 들고 3월 초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속초까지 가는 동안 어떤 때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창밖에 펼쳐지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한적한 저녁 포구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전복 한 마리 시켜놓고 깔짝깔짝 소주를 마시면서 옆에 앉은 뱃사람이 낙지를 한 바가지 시켜 마치 국수 먹듯 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였고, 강구 포구에서 한 마리에 이만 원짜리 영덕대게를 시켜 먹고는 둘이서 배가 불러 술도 못 먹고 배가 꺼질 때까지 포구를 거닐기도 하였으며, 울진에서 어부들이 투망질하며 은어를 잡는 것을 바라보다 즉석에서 삼천 원에 한 바가지를 사서는 모래사장에 앉아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닷새 만에 서울로 올라왔다.
각자의 길을 찾아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고 83년에 들어서면서 세상의 기류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야만적 폭력이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대학을 비롯한 여기저기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이 격렬해져 갔다. 그에 따라 5.18이후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던 운동권도 서서히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우리 친구들도 점차 예전의 기력을 되찾아 갔다.
동해안 여행에서 올라오자마자 동만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건설 논의에 합류하였다. 당시 민청련 건설 논의는 김근태, 조성우, 장영달, 이범영 선배 등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고 있었는데,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공개적인 청년 운동단체를 건설하자는 것에 대해 운동권 내에서 찬반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한쪽에서는 운동의 주력은 청년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인 만큼 공개적인 청년 단체를 만들지 말고 모두 산개하여 노동자, 농민 속으로 들어가자며 민청련 건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다른 한쪽은 노동자, 농민 운동이 주력이지만, 청년 운동의 역할도 분명히 있는 만큼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청년 단체를 건설하여 운동의 최전선에서 투쟁을 전개해 나아가자는 입장이었다. 동만이와 나는 민청련 건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여름 내내 논의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83년 9월 민청련은 창립되었다.
민청련 건설 논의에 참여하면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서울에서 부평초 같이 떠다니면서 술이나 마시는 삶은 그만둘 작정이었다. 내 고향 인천에서 운동의 뿌리를 내려, 죽어도 거기서 죽고 살아도 거기서 살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술도 인천에서 마셔야 했다. 나는 서울에 올라가는 일을 점차 줄여 나가면서 인천의 후배들과 인천에 뿌리를 둔 공개적인 운동단체를 만들 논의를 시작했다.
그 무렵 동만이는 일본 마이니찌신문 한국 특파원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거기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제작에도 깊이 관여했다. 나는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으면 광화문 조선일보사에 있는 동만이네 사무실부터 들렀다. 거기서 우리나라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은 온갖 소식들도 접하고, 때로는 얼마 전 결혼한 모 탤런트가 애를 낳았는데, 까만 아이가 나오는 바람에 간호원이 혼비백산했다더라, 그 아이가 아프리카 모 대통령의 자식이라더라는 등의 정가 뒷소식에 낄낄대기도 했다. 마침 오귀환 선배도 당시 조선일보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기만 하면 셋이서 광화문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83년 가을 나는 평생 나의 반려가 될 짝을 만났다. 동만이는 불행히도 아직 그렇지 못했다. 동만이는 내가 자기 짝을 만났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나는 서울에서 집사람을 만날 때면 거의 대부분 동만이와 함께 했다. 우리 집사람이 나를 빼 놓고 가장 많이 술자리를 함께한 사람은 아마 동만이일 것이다.
83년 12월 전두환 정권은 학원사태 제적자에 대한 선별적인 복교 허용 방침을 발표하였다.전두환정권은 무슨 큰 시혜나 베푼 듯이 생색을 냈지만 우리는 그들의 방침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선별적인 복교 허용 방침도 문제였지만, 80년 당시 교수, 언론인, 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쫓겨났는데, 그들을 놔두고 우리만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순한 복교가 아니라 나라의 민주화 자체였다. 당연 대책위가 만들어졌고, 내가 의장을 맡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일을 하려면 여기저기돈이 많이 들었다. 유인물 제작 비용과 같이 공식적으로 들어가는 돈은 모금이라도 해서 충당하면 되었지만, 후배들을 만나 의견을 조정하고 하려면 술도 마셔야 하는데 그 돈은 내 스스로 조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짐을 동만이가 맡아 해결하였다. 다동의 고기집 한 곳과 맥주집 한 곳을 정해 내가 먹고 동만이 앞으로 외상을 달아 놓으면 동만이가 월급날 갚는 식이었다. 유시민을 비롯한 많은 후배들이 알게 모르게 동만이 신세를 졌다.
복교 대책위 싸움은 관제 여론의 거센 여론몰이에도 불구하고 큰 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몇 번 감옥 갈 고비가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모처럼의 유화 조치를 또 다시 구속이라는 강수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로서도 복교를 둘러싼 제적생들 내부의 여러 가지 의견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복교보다는 민주화가 먼저라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성과가 있었다. 나는 서울 나들이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인천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복교 대책위 싸움이 대강 마무리된 5월 이후 나는 인천에서의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84년 11월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을 창립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동만이는 명동에 있는 유네스코로 직장을 옮겼다. 마이니찌는 정식 직원이 아닌 관계로 아무래도 계속 일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에는 75학번 동기들이 몇 있었다. 그 중 철학과 이창호와 동만이와 같은 경기고 출신으로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이채욱이 동만이와 자주 어울렸다. 나도 간혹 서울에 올라갈 때면 동만이에게 들러 그들과 함께 어울리곤 했다. 그러나 인사연 일 때문에 자주 올라갈 수는 없었다. 82년, 83년 거의 붙어 다닐 정도로 어울려 다니는 바람에 쟤네들 사귀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이제는 자기의 일에 바빠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85년 6월 나는 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한 이후에는 동만이와의 만남이 더욱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런 게 인생이었다.
내가 결혼하던 날 동만이는 정말 엄청나게 술을 먹었다. 결혼식 피로연을 마치고 가까운 선후배들끼리 우리 집에서 한 잔 더했는데, 나는 동만이와 지내면서 동만이가 그렇게 술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동만이는 거의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오죽 했으면 내가 너 많이 취했으니 잠깐 눈 좀 붙이라면서 우리 부부 신혼 방에 눕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결국 동만이는 그날 우리 부부 신혼 방에 결혼 선물로 토사물을 남겼다. 얼마나 격렬하게 토했던지 천정에까지 그 건더기가 붙어 있었다.
동만이가 왜 그렇게 많이 술을 먹었는지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동만이는 나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무렵 일본으로 유학 갈 결심을 굳히고 그 준비를 해 가고 있었다. 동만이 마음에 운동판의 한복판에 나만 남겨두고 저 혼자 유학 가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민이 아마 폭주로 이어졌으리라.
얼마 후 동만이가 보자 해서 만났더니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였다. 순간 멍했다. 동만이가 투사보다는 학자가 더 맞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이미 운동판은 죽기살기의 싸움판이 되고 말았고, 그 판에 동만이 같은 군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동만이가 유학을 간다고 하니 이제 이별이구나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아직 한창의 나이였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절이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이 살벌한 판에 나만 남겨놓고 떠나는 동만이가 야속도 했다. 그러나 “그래 잘 생각했어, 그게 너한테는 더 잘 어울려, 내가 네 몫까지 싸울 테니까 너는 여기 일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같은 판에 박은 소리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애꿎은 술만 진탕 먹었다.
85년 8월 동만이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동만이가 떠나기 전날 나는 동만이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쓰라고 만년필을 하나 포장해 들고 동만이 집으로 갔다. 그리고 잠깐 마음에도 없는 의례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동만이네 집을 나왔다.
재회
동만이가 일본에 유학 가 있는 동안 국내 정세는 점점 더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나도 결국 86년 5월 인천 5/3사태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지명수배되고 말았다. 정처없는 도망 생활에 힘들고 지칠 때면 가끔은 이럴 때 동만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곤 하였다. 그러나 그건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이건 내 인생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지만 동만이가 옆에 없다는 허전함을 수배 생활하는 내내 지울 수는 없었다.
길 것만 같았던 전두환의 독재도 결국 온 국민의 저항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6월 항쟁의 결과로 6/29가 발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수배에서 해제되었으나,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두환정권이 나를 악질로 봤는지 몇 안 되는 수배자 명단에는 계속 내 이름이 남아 있었다(나는 결국 88년 다시 징역을 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울한 여름이 계속되는 중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동만이가 결혼 때문에 일시 귀국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시 인편을 통해 동만이에게 연락을 넣었다.
87년 8월 어느 날 여의도의 일식집에서 집사람과 함께 동만이를 만났다. 실로 2년 만이었다. 동만이도 처 될 사람을 데리고 나왔는데, 알고 보니 서양사학과 79학번 후배 강옥초였다. 우리 넷은 우선 술부터 마셨다. 얘기가 별 필요 없었다. 서로의 사정이야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다 들어 알고 있었고, 막상 만나고 보니 감정이 앞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결혼 축하한다”, “언제 건너가느냐, 건너가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등의 의례적인 이야기를 건넸고, “고생이 많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등의 의례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낮부터 마신 술이 거나해지면서 노래도 불렀다.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한다는데, 평상 같으면 함도 지고, 결혼식 사회도 보고 해야 할 내가 참석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집사람과 나는 그 자리가 결혼식 피로연인 양 축가를 불렀고, 동만이와 강옥초가 답가를 불렀다(그날 강옥초는 박은옥의 봉숭아를 불렀다. 집사람은 그때 왜 하필이면 봉숭아 같이 슬픈 노래를 부르는지 이해가 안 됐다고 했다. 2004년 강옥초가 세상을 떠난 후 집사람이 내게 한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는 또 헤어졌다.
그 후 동만이를 다시 만난 것은 동만이가 유학을 마치고 완전히 귀국한 다음이었다.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던 지긋지긋하던 군사독재도 끝이 나고 민간 정권이 들어서서 오천 년만의 개혁을 한다느니 하며 떠들 때였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이미 운동을 정리한 다음이었다.
87년과 92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내가 몸담았던 운동권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운동권의 김대중 추종자들은 운동권을 마치 포도 먹듯이 맛있는 알맹이만 빼 먹고 껍질은 씹어 내뱉었다. 이미 너덜너덜 걸레 신세가 된 그 운동권에서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시는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그런 운동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징역도 세 번이나 살았으면 됐다. 나는 나의 청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던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을 해산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박혀 술만 마셨다. 그런 판국에 동만이가 귀국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동만이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20대가 아니었다. 서로가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는 동안에 이미 곧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었고, 그 인생의 고비에서 온갖 쓴 맛, 단 맛을 다 겪은 처지였다. 뿐만 아니라 동만이나 나나 이미 돌봐야 할 가정이 있었다. 그러니 술자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양도 예전만 못 했고, 밤새도록 이차 삼차 다닐 기운도 없었으며, 또 집안 눈치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시절의 그 패기가 빠진 술자리는 이미 그 옛날의 술자리가 아니었다.
국정원 시절
동만이가 노무현 정권의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동만이가 노무현 선거 캠프에서 한 역할로 미루어 볼 때 요직에 기용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통일부나 외교부 또는 청와대에서 남북관계 일을 맡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만이가 그간 걸어온 길로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그런데 그 옛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정원의 제2인자 자리로 갈 줄이야… 그것은 정보부라면 그 옛날 끌려가 고문당한 기억 밖에 없던 우리들에게는 정말 충격이었다.
운동권 출신인 나에게 노무현 정권은 한편으로는 자랑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려의 대상이기도 했다. 같이 민주화운동에 섰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 또 동만이와 같은 수많은 동지들이 요직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마치 나 자신이 권력을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이면에는 과연 잘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몇 번에 걸쳐 도망 다니고, 감옥 가고 하면서 현실이 얼마나 녹녹치 않은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섣부른 낭만과 기대는 금물이었다. 한 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참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그간의 역사적 경험이 여실히 보여준 바였다.
나는 동만이와 만나면서 의도적으로 동만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곤 했다. 내 생각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만큼 근본 입장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동만이 주변은 내가 보기에 낭만적인 진보주의자들이 너무 많았다.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서 힘의 관계를 잘 파악해 대처하는 것인데, 강단에서 자란 낭만적 진보주의자들은 현실의 역학 관계를 무시하는 폐단이 있었다. 동만이 주변이 한 쪽으로 너무 쏠렸다면 나는 그 반대쪽에 서야지 하는 것이 당시 나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동만이는 그런 내가 상당히 서운했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자는 나의 이야기를 수긍하는 것 같더니 갈수록 서로 간에 의견 충돌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말다툼을 벌이다가 서로 감정이 상하여 말도 안하고 술만 마시다 가기도 하였다.
동만이는 내가 노무현 정권에 대해 너무 냉정하다고 보았다. 그건 숨김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한 20여 년 운동을 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노무현과는 옷깃 한 번 스치지 않았다. 나는 김근태, 장기표는 알았어도 노무현은 몰랐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특별한 개인적인 애정이 있을 리 없었다. 또 내가 보기에 노무현은 낭만주의자였다. 그 주변의 인물들도 상당수가 그랬다. 어쩌면 그것이 대통령 노무현을 만든 힘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강단주의자, 낭만주의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 내가 보기에 노무현정권은 너무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마치 제 세상 만난 듯이 설치고 있었다. 만일 노무현정권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대재앙이었다. 노무현은 대통령 한 번 했으니 물러나면 그뿐이지만, 남은 우리는 뒤이어 밀려올 그 엄청난 반동의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자기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었다. 민주화운동을 노무현과 그 주변 사람들이 다 한 것도 아니었고, 또 똥은 자기들이 쌌는데 그 뒤치다꺼리를 남은 우리가 맡아야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노무현정권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면서 동만이와의 만남도 점차 줄어들었다. 다 잘 되자고 하는 것인데 굳이 친구와 의를 상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논어에도 나오는 말이었다. “벗에게 너무 자주 충고하면 오히려 소원해진다(朋友數 斯疏矣)”고. 그리고 만나도 정치 이야기는 안했다. 나까지 굳이 동만이를 기운 빠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술만 마실 뿐이었다. 동만이와 함께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때만큼 서로 서먹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청와대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하다 나온 선배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가 청와대 수석들 회의에 우연히 배석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당시 노무현의 오른팔인지 왼팔인지 하는 자가 자기보다 20년 가까운 선배들도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충성심이다”라고. 기가 막혔다. 속말로 운동권 군번으로 따지면 서울역에서 줄서기 시작하면 저기 논산에도 못 미칠 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새까만 후배가 자기 오야붕이 대통령이 됐다고 대선배들 군기를 잡으려 들다니… 노무현 정권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기대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동만이가 저런 판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국정원 인사 문제를 놓고 동만이가 고영구 원장과 갈등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있어 동만이가 해임이 되고, 그 후임으로 김만복인가 하는 자가 임명된 것이다. 김만복이란 자의 전력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자는 박정희 독재가 마지막 패악을 일삼던 1970년대 말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서울대에 파견되어 서울대 학생운동을 최일선에서 탄압하던 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런 자를, 그것도 다름 아닌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것을 최고의 경력으로 내세우는 노무현 정권 하에서, 당시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으로 감옥을 갔던 동만이의 후임으로 임명하다니…
우리 모두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것은 동만이 뿐만 아니라 당시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모두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요, 모독이었다. 친구들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공개 서명운동이라도 벌이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동만이의 의사가 제일 중요했다. 내가 동만이를 만나 보았다. 우리가 나서도 되겠느냐고. 동만이는 자기 문제로 친구들에게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노무현정권에 타격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었다. 당사자인 동만이가 가만있겠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나 같으면 그런 모욕을 당했다면 사생결단을 하고 붙었을 텐데, 동만이의 참을성이 대단하기만 하였다. 나중에 모 선배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김만복을 동만이의 후임으로 적극 추천한 자는 바로 그 오른팔인지 왼팔인지였다고 한다.
영원한 이별
담배도 안 피는 동만이가 폐암에 걸린 데는 아무래도 국정원에서 모욕적으로 해임된 것과 처인 강옥초의 죽음의 영향이 컸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풀지 못 하고 안으로 쌓기만 해 암이 걸리기 쉬운 체질이었다고는 하지만, 워낙 군자다운 인품이라 남과 특별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아무리 동만이라도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만이 처 강옥초의 죽음을 들은 것은 내가 중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 베이징에 유학 가 있을 때였다. 한 밤 중에 박관석으로부터 전화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였다. 나는 가끔 여의도에서 동만이와 만나 술을 먹을 때면 일부러 대교아파트 동만이네 집에 들러 안주를 내라, 술을 내라 하며 강옥초를 귀찮게 하곤 했다. 그런 강옥초가 죽다니, 그것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 끝에. 다음 주가 시험이었지만 도저히 베이징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그냥 공항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대기 끝에 그날 저녁 장례식장에 얼굴을 내밀 수가 있었다.
동만이는 그냥 멍한 상태였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동만이를 끌어안았다. 더 무슨 말이 필요 있으랴. 그리고 어찌하여 동만이에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이제 겨우 국정원에서 쫓겨난 충격에서 벗어날 만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옥초는 어찌하여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단 말인가? 망할 놈의 벼슬이 두 사람을 죽이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억수로 쏟아지는 가을 비 속에서 강옥초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계속 국내에 머물며 동만이와 술도 마시면서 위로해주는 것이 도리였겠지만, 내게도 나의 일이 있었고, 어차피 동만이에게는 시간만이 약이었다.
2008년 12월인가 동만이가 재혼한다고 불렀을 때 나는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했다. 생전 처음 가는 평창동 산비탈이라 찾아가는 데 무진장 애를 먹고, 음식이라곤 모두 양식 일색이라 하나도 입에 맞지 않아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셔댔지만 정말 기분 좋은 자리였다. 더군다나 지난 번 결혼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못 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나는 동만이에게 이제 지난 악몽들은 말끔히 사라져버리고 장밋빛 앞날만 있기를 정말 간절히 기원했다.
그런데 동만이가 폐암에 걸리다니… 30여 년을 줄담배 피었던 나도 아직 멀쩡한데 담배라고는 근처에도 안 갔던 동만이가 폐암에 걸리다니… 그리고 이제 막 다시 결혼했는데 지 처는 어쩌라고… 그리고 딸 화열이는 어쩌고… 아무 생각이 안 떠올랐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친구가 저런 위험에 처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친구라면서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나는 동만이가 암과 싸우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암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할 말도 없었고, 또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마디 하는 것이 본인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나까지 동만이를 정신 사납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가끔 전화 걸어 힘내라, 낙천적으로 생각해라는 등의 상식적인 말을 건네는 것 이외에, 단지 십 년 이상 묵은 장생도라지가 폐에 좋다는 소리가 생각나 지리산 일대의 후배들에게 부탁하여 장생도라지를 구해 준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가끔 지리산에서 감식초나 고로쇠물을 구해 전해주고. 그러나 그런 것들은 동만이의 치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동만이는 초창기 약물 치료로 많은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천추의 한을 부를 줄이야. 약물 치료의 효과를 보면서 동만이는 2008년 5월 19일인가 신혼 집들이까지 하였다. 우리 모두는 동만이 병세가 많이 호전되는 줄 알았고, 그러면서 동만이의 병에 대해 낙관했고, 또한 점점 무관심해졌다. 그러나 암세포는 약물에 대한 내성을 키우면서 반격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약물 치료의 효과가 떨어지면서 동만이의 병세는 심각해져 갔다. 그러나 동만이 본인과 주변의 누구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술도 할 수 없을 지경이라던 폐암 치료가 효과를 보아 동만이 병세가 나아지고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에만 젖어 있었다. 다만 새로이 동만이와 평생의 반려가 된 김진영씨만 상황을 심각히 우려하고 있었다. 결국 동만이는 약물 치료를 중단하고 방사선 치료에 들어갔다.
그저 잘 되고 있으려니 하고만 생각하고 있던 내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2009년 3월 16일 부윤경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진영씨가 전화를 했는데, 동만이 병세가 심각해져 이제 남은 것은 기 치료 밖에 없는데, 동만이가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안 받으려고 한다, 그러니 친한 친구들이 나서서 동만이 기 치료 좀 받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다음 날 놀라 정한식 목사에게 부탁해 차를 얻어 타고 평창동 동만이네 집에 쫓아 올라가니 동만이 누나들과 동생도 와 있었다. 그런데 동만이는 말도 많이 어눌해 있고, 무엇보다 걷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다. 진영씨는 울먹이고 있었고, 모두들 나보고 충주에 있는 기 치료원에 동만이 좀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동만이는 별 거 아니라고 버티고 있었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싶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동만이에게도 나에게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동만아 충주에 가자”, “내가 데리고 가겠다”, “정목사 미안한데 차 좀 부탁해야겠어”
결과적으로 동만이와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 되고 말았지만 충주로 가는 길은 그래도 즐거웠다. 오랜만에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영씨는 마치 소풍이라도 다녀오라는 듯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챙겨 주었다. 3월 중순이라 따뜻한 남쪽으로 가는 길목에는 푸릇푸릇 새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으로는 이게 어쩌면 동만이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충주에 가서 확인되었다. 동만이가 계단을 오르는데 몸이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 왼쪽으로 쏠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걷는 자세도 곧 넘어질 듯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집에서 봤을 때는 많이 걷지를 않아 잘 몰랐는데, 좀 오래 걸으니 금방 표가 나는 것이었다. 아 암세포가 운동신경에까지 파고들었구나, 이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동만이를 기 치료원에 남겨 놓고 올라오는 데 정 목사가 말했다. “형, 동만이형 얼마 못 갈 것 같은데 차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운전해 줄게”라고. 그날 인천으로 올라 온 나는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버릴 때까지 술을 마셨고, 남이 보거나 말거나 꺼이꺼이 울었다.
결국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동만이는 대변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기 치료원에 간 지 삼 일만에 일산 국립 암센터에 입원했고, 다시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정목사의 도움을 받아 일산의 동만이를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찾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정목사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야 평생의 친구여서 그랬다 하지만 정목사는 나 때문에 알게 된 동만이를 위해 그 굳은 일을 마다 않고 맡아 주었다. 그 고마움을 내가 어찌 다 갚을지…
일산으로 가는 길은 날이 갈수록 신록이 짙어만 갔다. 그러나 동만이는 갈수록 생명의 기운을 잃어갔다. 입원 초기에는 그래도 가까운 공원까지 산보도 하였건만, 좀 지나자 이제 병원 건물 밖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이어서는 병실, 그리고 마침내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3월 하순만 하여도 나와 옛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점점 말에 조리를 잃고 횡설수설하더니, 아예 의미 있는 대화가 불가능해진 채 혼자만의 말을 중얼거리다가, 마침내는 진영씨와 친한 친구 몇 이외에는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동만이의 생명의 빛에 대비되어 짙어만 가는 봄날의 푸르름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어떤 때는 인천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떤 때는 술집에서, 어떤 때는 혼자 방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인생이 본래 허망하고, 또 후회투성이라지만, 왜 이리 삶이 허망한지, 그리고 왜 진작에 동만이를 더 열심히 챙기지 못했는지, 그랬으면 혹시 동만이를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3월 말인가는 동만이가 고로쇠물이 좋다고 하길래 그 길로 지리산으로 내려가 고로쇠물을 구해다 줘 보기도 하였고, 지리산의 후배에게 부탁해 온갖 산나물을 구해다 줘 보기도 하였으며, 동만이가 게장을 좋아하는 것이 생각나 단골 술집에 부탁해 게장을 구해다 줘도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런 하찮은 것들뿐이었다.
5월에 들어서면서 동만이가 완전히 거동을 못하게 되자, 진영씨와 나, 정목사는 병원 측 몰래 동만이를 침대에 눕힌 채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와 바깥 구경을 시키기도 하였다. 첫째는 봄날의 생명의 기운을 받아 동만이가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고, 또 온종일 병실에만 누워 있는 동만이가 불쌍해 봄날 소풍이라도 나가자는 기분에서였다. 그러나 동만이는 이미 5월의 햇살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화창한 햇살을 피해 그늘에서 그저 잠이나 잘 뿐이었다. 5월은 정말 눈부시게 잔인한 계절이었다.
5월 12일 진영씨와 윤경이, 나, 정목사는 병원에서 알았으면 기절초풍했겠지만, 마침내 동만이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잔치를 벌였다. 저녁에 고기를 구워 먹다가, 동만이가 그렇게 술을 좋아했는데, 에잇 까짓것 동만이에게 술 한 잔 먹이자, 설사 문제가 생긴다고 해 봤자, 저러고 누워 있다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에, 먹던 고기 몇 점을, 그것도 포장이 안 된다고 하기에 종이컵에 담아, 청하 몇 병과 함께 들고 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동만이와 평소 즐겨 듣던 김추자 노래를 틀어 놓고 이미 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동만이에게 빨대를 물려가며 술을 마셨다. 차돌백이 한 점을 동만이 입에 넣어주고, 우리도 컵에 술을 한 잔씩 따라 든 다음, 동만이 입에 빨대를 물리고는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쳤다. 테이프레코너에서는 김추자의 “무인도”와 “님은 먼 곳에”가 흘러 나왔고, 우리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취해 갔다. 이미 정신이 거의 다 나간 동만이였지만 연신 맛있다 하면서 입을 다셔댔고, 그럴수록 우리는 엉망으로 취해갔다. 그날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말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고, 윤경이도, 진영씨도 그랬다고 했다. 그것이 내가 동만이와 나눈 마지막 술이었다.
그리고 6월 4일 동만이는 우리 곁을 떠났다.
저 달은 이 세상 모든 강을 비춘다는데
동만아 네가 있는 곳에도 달이 있니
그러면 저 달을 바라보며 술이나 한 잔 하자
노래는 내가 부를게
그리고 너를 살리지 못해 정말 미안해
꽃밭 속의 술 한 동이 친구도 없이 혼자 마신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잔을 들어 달을 보니 그림자와 더불어 셋이로다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달은 술을 모르고 그림자는 헛되이 나만 따라 다닐 뿐이지만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잠시 저 달, 그림자와 더불어 이 봄날의 즐거움을 즐겨보자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내가 노래를 부르면 달도 따라 배회하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또한 따라 춘다
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
깨어 있을 때는 같이 즐겼지만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지고 말 뿐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영원히 함께 놀고자 하면 저 먼 은하수 건너서 만날 수밖에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李白의 月下獨酌에서)
첫댓글 장편의 글, 글씨가 작아 워드 파일로 복사해서 다 읽었는데 해피 엔딩으로 끝났으면 참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떠나게 될 터요, 단지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이니 조금 일찍 갔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만은 없겠지요? 억겁의 세월 속에 몇 십 년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테니 다만 사는 동안 얼마나 가치있게, 의미있게 살았는지가 중요할 뿐이겠죠. 이렇듯 애절하게 기억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친구분께서는 의미있는 삶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형 이제야 이 사이트를 알아서 들어왔습니다.
형의 글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잘 사시는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