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마일> 2002년, 미국, 드라마, 커티스 핸슨
미국 최고의 래퍼 애미넴의 전기 영화이며 애미넴이 직접 주연 연기를 해 유명한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1995년 겨울 디트로이트 빈민가. 출구 없는 빈민가 흑인들이 모이는 클럽에서는 45초씩 랩퍼들이 관객 앞에서 펼치는 격렬한 힙합 대결이 펼쳐지고, 별명이 래빗인 애미넴은 첫 대결에서 입을 열지 못하고 내려오는 창피를 당한 뒤 더욱 절망감을 느낀다.
8번가는 디트로이트의 도로 이름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사는 경계는 물론 주인공 래빗의 가난과 심리적 수렁이 된다. 디트로이트 빈민 흑인들에게 힙합은 유일의 탈출구다. 백인인 래빗도 재능 있는 래퍼지만 자신감이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자기 학교 동창이었던 남자와 동거하는 알콜 중독자인 어머니의 트레일러에 얹혀사는 래빗에겐 그의 친구들, 카리스마적인 퓨쳐, 낙천적인 솔, 행동파 DJ IZ, 느리지만 꾸준한 체다 밥이 있다. 모두들 탈출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쉽지도 않다.
래빗은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하며 알렉스라는 금발의 여자를 만나고 그녀도 래빗의 실력을 알아보지만 래빗에게는 아직 폭발하는 분노와 자신감이 부족하다. 그녀는 래빗에게 트레일러에서 사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사랑하는 알렉스가 다른 흑인와 성관계를 맺는 걸 보고 분노한 래빗은 폭력을 휘두르지만, 도리어 잘나가는 흑인 힙합그룹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결국 실력으로 복수를 하고자 결심한 래빗은 클럽에 가 45초의 즉흥 힙합대결을 벌여 하나 하나 물리치고 우승자로 등극하게 된다.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욕! 욕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즐거움! 옛날 패닉 같은 그룹의 가사를 보고 이런 게 나중엔 시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절망한 자들이 그들의 절망과 증오를 그대로 풀어낼 때 그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자 예술의 형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나친 수다와 대안 부재의 무력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억눌린 자들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랩은 서구 시와 음악의 전통에서 화려하게 꽃핀 흑인 문화임에 틀림없다. 위악적이면서 공격적인 욕의 노래!
더구나 힙합 경연 장면은 전율적이다. 즉흥적으로 두 사람의 래퍼가 대결을 벌이며 가사를 뱉어내는데 그것의 생생함은 살아 있는 문화 그대로다. 재즈 등의 즉흥 연주 문화가 살아 있는 대중음악의 본고장답다. 우리 민요나 시나위 등도 그런 즉흥성을 풍부하게 가졌었는데 지금은 통 그런 문화가 없어 아쉽고 부럽다. 흡사 두 명의 복서가 링에서 대결하듯 무대에서 대결하는 게 흥미롭다. 래빗이 자동차 공장의 휴식시간에 흑인들과 즉흥랩으로 대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는 자기긍정의 힘이다. 마지막 경연에서 래빗이 우승자가 될 때 그는 자신의 불행을 모두 노래가사로 활용했다. 그 동안 부끄러워서 숨기려고 했던 것을 노래로 부르니 그것이 오히려 가장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힘이 되고, 전혀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 극복되는 것이었다. 자기를 인정하기 전과 인정한 후 자신은 완전히 다르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역설적으로 쉬운지 또 중요한 것인지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나의 약점이 오히려 나의 힘이다.
음악가가 주인공인 영화로 <레이>가 있었다. 블루스 소울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경쾌한 음악과 스토리 연결이 무난해 보는 재미는 더 있었다. 하지만 미국식 성공신화가 강조되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반면 이 영화는 비록 화려하게 성공한 음악가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불우했던 과거와 정신적 극복 자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어서 오히려 깔끔한 인상을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