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이면 나는 금천구청엘 간다. 국내에 들어와 일하는 중국동포의 생활상담을 위해 출근을 한다. 1시부터 4시까지의 짧은 근무, 1년이 됐다.
출근에는 매번 아내가 동행한다. 게다가 도시락까지 마련한다. 처음 출근할 무렵 매식을 한 게 탈이 나 심하게 고생한 뒤로 아내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고, 그걸 들고 함께 집을 나선다. 긴 출근 시간이 지루할 거라며 함께 차를 타는 아내의 심지가 매양 가슴을 짠하게 한다.
처음엔 출퇴근이 조금 고단하기도 했지만 몇 차례 다니는 사이 시나브로 익숙해져 지금은 오히려 목요일을 기다리고, 시간과 일을 즐기는 편이 됐다. 우리는 이를 ‘도시락 데이트’라 부르며 하루를 오붓하게 보낸다.
4월 셋째 목요일, 수원역에서 갈아 탄 전철은 군포역을 지나기까지도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일 정도로 객실 안이 한산했다. 열차가 막 금정역을 출발했을 때, 보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드는 내게 건너편 좌석에 앉아 가던 60 중반의 남자가 느닷없이 말을 건네 왔다.
“두 분 다 참 건강해 보여 좋습니다.”
“?”
뜬금없는 찬사에 어리둥절해져 쳐다보자 그가 이어 생뚱맞게 넋두리를 한다.
“난 괜찮은데 집사람이 몸이 안 좋아요. 지금도 침을 맞고 오는 길이거든요.” 하며 곁에 앉은 부인을 가리킨다. 푸석한 얼굴에 병색이 짙다.
얼마나 답답하고 애가 탔으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전철 안 앞에 앉았을 뿐인 사람에게 하소연하듯 말할까. 대꾸라도 하는 게 도리일 듯싶어 병세를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우리 자리로 오더니 길게 병세를 설명한다.
“집사람이 풍을 맞았어요. 뇌졸중이래요. 다행히 꾸준히 혈압약을 먹어 온 덕에 그나마 가볍게 왔대요. 아 그런데 그 담부턴 냄새를 못 맡는 거예요. 그러더니 식욕까지 잃더라고요. 통 먹지를 못해요. 병원에서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대요.”
이야기하는 사이 전철이 석수역에 닿았다. 다음이 목적지인 금천구청역, 문득 D대 병원 이비인후과 주임으로 있는 친구 생각이 났다. 혹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쪽지에 병원과 L 교수 이름을 적어 건네줬다.
역에 내리며 올려다 본 플랫폼 전광판이 11시 1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은 넉넉했다. 천천히 걸어 역사 건너 안양천 변으로 갔다.
천변엔 봄기운이 만 가득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둑 아래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그 위 길 따라 줄지어 선 플러터너스의 연둣빛 더불어 푸른 하늘 아래 한 폭 화사한 수채화를 이루고, 햇살 따사롭게 내려 반짝이는 너른 냇물에선 지난해 깐 검둥오리들이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봄이었다. 공터 농구코트에선 웃통을 벗어젖힌 소년들이 땀을 흘리며 공을 튕기고, 잘 정비된 천변 자전거 길에는 자전거들이 쌩쌩 날렵하게 달렸다. 평화로웠다. 봄이 가득히 생동하고 있었다.
아내가 자전거길 옆 빈터 야외용 탁자에 도시락을 펼쳤다. 보온도시락과 따로 싸 온 두 개의 찬합에는 가짓수가 열은 됨직 많은 찬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마늘장아찌, 명란젓, 계란말이, 깍두기, 풋고추···. 오늘은 새로 두릅 샐러드가 추가됐다. 처음 대하는 찬이었다. 하나를 집어 맛을 봤다. 입에 딱 맞았다. 봄이 향긋하게 씹혔다. 내 눈치를 보며 아내가 속을 뜬다.
“장에 마침 울릉도 땅 두릅이 나왔기에···. 생새우를 넣고 잣을 갈아 소스로 묻혀봤는데, 간이 맞을지 모르겠네.”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아내는. 잘 만든 음식을 놓고 칭찬이 듣고 싶어 역으로 겸양을 떠는 건가 아니면 뭉긋거리며 얼른 평가하지 않는 내 속이 궁금했던 걸까. 은근슬쩍 에두르는 아내가 새삼 살갑다.
“오리들이 여기서 겨울은 났나 봐요.”
대답 없는 내가 은연 서운한 듯 고개를 비끼며 아내가 딴청을 한다.
염색한 자분치 뿌리가 하얗게 돋아난 옆얼굴, 아내는 지금 지난해와 저지난해처럼 여전히 건강한가. 이제 함께 할 날이 얼마나 더 남았을지 예측 못 할 서로의 나이. 언제 어떤 질병이 불쑥 건강을 앗아갈지 모를 노경. 주어진 오늘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 이 한번 한 번의 도시락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지가 새삼 절절하다. 벚꽃 잎 하나, 아내의 어깨 위에 곱게 떨어져 얹힌다.
첫댓글 선생님 글을 다 읽고 나니 저도 봄이 향긋 씹히는 듯 합니다. 그동안 선생님의 다른 몇 편의 글보다도 소박하고 편안하게 읽힙니다. 선생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듯 합니다. 사모님께 곧 바로 두릅 샐러드에 대한 칭찬을 하셨더면 좋았을 텐데요. (물론 나중에라도 하셨겠지요.). 선생님 글 읽으며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지는 어린이날입니다^^
훈훈하고 자상한 현장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부인과의 따뜻한 사랑이 공감이 갑니다. 좋은글 잘 일었습니다.
이번 주 수업 빠지게 되어 숙제를 올렸지요.
좋게 봐 주시니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평화롭고 수채화 같은 풍경이 그려집니다. 행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