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용산구에 있는 서울 성남교회 전경. 해방 후 신학과 목회의 병행을 다짐하며 같은 날 창립 예배를 드렸던 영락, 경동, 성남 중 영락을 제외한 교회들은 1980년대부터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신학이 없어야 성장한다는 역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진 제공 미주뉴스앤조이) |
그들은 왜 성공에 집착하는가?
이어령은 오래 전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통해 작은 것을 지향하는 일본 문화를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 낸 적이 있다. 저자는 일본이 확대 지향적이었을 때는 항상 실패했다며 일본이 큰 나라가 되고 싶으면 더욱 작아지라고 충고한다. 그의 비교 중에 기억이 남는 것은 한국어에는 확대를 의미하는 접두어는 있지만 축소를 나타내는 것은 없다는 내용이다. 일본어는 그 반대라고 한다. 우리 문화에 확대 접두어만 있기 때문일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확대 지향의 중병에 걸려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어령의 책 제목을 빌린 <확대 지향의 한국교회>라는 책이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대형 교회는 영락교회다. 1945년 10월에 월남한 한경직 목사는 일본 신도의 일파인 천리교 건물 몇 채를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받은 조선신학교 설립자 김재준 목사의 요청에 따라 서울 영락동에서 조선신학교 산하 여성신학교를 시작한다. 동작동에 있는 천리교 본부 건물은 조선 신학교가 사용하고 교내에 성남교회(송창근 목사)를 세우고, 장충동 건물에는 경동교회(김재준 목사)가 들어선다. 한경직 역시 여성신학교를 맡았다가 그해 11월 베다니전도교회를 시작한다. (당시 베다니교회에 있던 여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교회 터를 김재준 목사가 소개한 것인데 1954년 기독교 장로교와 예수교 장로교 분립 당시 한경직 목사가 영락교회 소유로 만들었다고 분개한다. 건물에 얽힌 법적인 관계는 알 수 없으므로 노 여전도사들 기억의 진위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영락교회가 조선신학교 여신학교를 모태로 한 것은 맞다.)
해방 후 한국교회 리더들이 신학교를 먼저 시작하고 그 안에 교회를 세운 시도는 신학과 목회의 공존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조선신학교–한신학대학–한신대를 거치면서 기독교 장로교 교단이 다른 교단에 비해 교단 대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해방 직후 신학과 목회를 병행하려 했던 초기 리더들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신학과 결별하고, 상식과 결별하고, 사회와 결별하고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과 이북 출신의 피난자들이 급증하면서 영락교회는 '신학'과 결별하고 대형 교회의 길을 걷는다. 1934년 출판된 아빙돈 주석 사건은 한국교회사에서 유명한 사건이다. 자유주의 신학을 소개했다고 해서 아빙돈 단권 주석은 1935년 24차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서의 낙인을 받는다. 번역에 참여했던 신진 신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출판 잡지인 <신학 지남>에 시말서 형식의 반성문을 '울며 겨자 먹기'로 쓴다. 이때 송창근, 김재준과 함께 번역에 참여했던 '신학자' 한경직의 패기는 영락교회의 대형화와 더불어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기에 '신학과 결별'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한경직은 대형 교회를 지향했다기 보다는 밀려오는 월남자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형 교회의 목사가 된 경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교회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신학을 멀리 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후 조용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여의도로 교회를 옮겨 70년식 대형 교회의 모델이 된다. 한경직이 신학과 결별했다면 조용기는 상식과 결별한다. 이른바 삼박자 축복이라는 비상식적 물질 축복 신앙은 용어만 다를 뿐 오늘 거의 모든 목사들의 설교에 포함되어 있다. 1980년대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잡은 후 교회는 본격적인 대형화의 길에 들어선다. 이들은 사회 문제와 결별하며 교회의 내적 발전에 몰두한다. 게다가 대형 교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중원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들은 각종 프로그램들을 양산하며 자기 과시에 모든 것을 건다.
▲ 조선신학교에서 한국신학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후 첫 졸업 사진. 이 사진에 있는 여신학생 중 3명이 LA의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중 2명이 별세했다. 이분들은 생전에 영락교회 터가 본래 자신들의 모교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사진 제공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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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맛을 알다 – 불안의 출발
이승만 정권하에서 교회는 대통령을 배출한 종교였기에 '가만있어도 중간은 가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 미국은 고마운 나라였고 미국의 헌법과 상관없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는 미국의 국교였다. 따라서 특별히 권력화를 추구하지 않아도 교회는 강한 집단이었다. 당시 교회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외면하기는 했지만 교회가 앞서서 권력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원조를 받은 교회는 고아원을 비롯한 사회사업에 눈을 돌려 적어도 지탄의 대상은 아니었다.
5.16혁명 이후 상황은 급변한다. 개발을 모토로 내건 박정희 장군의 공약에 일부 기독교 인사들은 혁명 초기에는 지지를 보낸다. 함석헌도 그랬고,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했다. 캐나다 선교사로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 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도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에서 군사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쥐어 주는 권력을 누리기만 하던 보수 기독교는 권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끊긴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게다가 함석헌, 장준하 등이 박정희의 실체를 깨닫고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박정희 정권과 불가근불가원의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교회는 권력에 노골적으로 줄을 대지는 않았다. 이 틈새를 이용해 비주류 교단들이 자기들의 세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활동하던 이른바 '미국통' 목사들이 권력과 거리를 둘 즈음 뛰어난 영어 솜씨와 화려한 언변을 갖춘 김장환은 권력과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박정희의 독재가 심각해지면서 주류 교단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던 빈틈을 김장환은 공략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미국과의 가교 역할을 하던 기독교 세력을 옆에 두지 못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도 친미 기독교 인사들이 꼭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교회 – 레저를 대신하다
한국에서 대형 교회를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형 교회가 도시 개발, 성장주의, 교회의 탈사회화, 독재 권력과의 유착이라는 모든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것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1970~1980년대의 시대적 특징이기도 했다. 게다가 경제 호황을 누림과 동시에 다양한 레저 문화가 개발되기 전 돈은 급속도로 교회로 몰려든다. 교회는 돈은 있고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던 이들에게 돈 받는 값을 해야 했고 각종 프로그램을 서둘러 개발했다. 돈과 교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대형 교회 목사들은 권력이 되어 정치적 권력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때로는 선거철에 그들에게 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후보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한다. 1960년대 1970년대 권력을 앞서서 비판은 못했지만 창피해서 권력 지향적이지 못했던 기성 교회와는 달리 신흥 주자들은 창피한 줄 모르고 권력 놀음을 즐기게 된다.
잠깐 한경직 목사를 변명하자면 한경직이 박정희와 전두환을 위해 기도해 준 것은 맞지만 그가 권력이 두려워 마지못해 기도해 준 소심한 목사였다면 1980년대 이후 대형 교회 목사들은 권력의 맛을 즐기던 욕망의 화신들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위해 기도해 준 것보다 바알과 맘몬을 위해 기도해 주는 즉 더 큰 악을 행한 욕망의 화신들이야 말로 우리가 맞서야 할 공적들이다.
그들이 성공에 집착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그들은 권력을 즐기고 싶은 거다. 교인들에게는 낮아지라고, 순종하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권력의 맛을 즐긴다. 좋은 차에, 좋은 집에, 좋은 음식에, 비싼 양복에, 선교지 방문을 빙자한 빈번한 외국 여행에 그들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들의 이중성을 몰라 침묵하는가?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만 약해지는 척할 뿐 사회에 나가 자신들의 문중을 자랑하며 또 다른 갑이 되어, 노론이 되어 완장을 찬다. 나는 사랑의 문중, 나는 온누리 문중, 나는 소망 문중, 나는 순복음 문중하면서.
그리고 중형 교회 목사들은 대형 교회가 되기 위해 그들을 벤치마킹하고 동네 교회 목사들은 중형 교회를 따라 잡으려 한다. 도시 개발과 경제적 호황이라는 호조건 속에서 성장한 대형 교회를 지금 따라잡을 수 없다. 지금은 레저 문화도 발전해서 돈이 쓰일 곳도 많아졌다. 미주 한인교회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얻기 위해 교회로 오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살 집까지 계약해 놓고 이민 올 정도로 새 이민자들은 영리하다. 좋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제발 꿈을 깨야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중형 교회 목사들은 대형 교회를 향한 욕망을 거두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세력, 즉 열심히 하는(?) 부교역자들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교인들, 별로 돈 없는 사람들, 말 많은 사람들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그들은 성공하여 권력을 누리고 싶다. 권력에 저항하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이야기는 귀찮다. 예수는 욕망이라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최소한의 역할만 해 주면 된다. 그래서 대형 교회의 설교는 아주 단순하게 두 가지 주제로 이루어진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받고 죄 용서 받고.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두 가지가 그들의 설교에서 교묘하게 만난다. 재주라면 재주다.
그들은 아프다
"종교에서 생겨난 분파들은 국가나 권력의 서열 구조 내에 편입되기를 바라고, 오래 전에 이미 지배자 사고 방식에 오염되고 장악 당했다." 미국의 진보적 라디오 진행자 톰 하트만의 말이다. 권력 속에 편입된 그들은 자신들을 몰아가는 거대한 힘이 성령인지 착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배자 사고방식일 뿐이다. 결국 그들도 아프다. 누군가가 나서서 치료해야 한다. 그 병이 깊어지면 과도한 성적 욕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장 말고는 어떤 보상도 없는 데서 그들의 영혼은 점점 다급해지고 피폐해진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보상이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병을 경계성 성격장애라고 부른다. 대형 교회 목사들의 열정 하나만은 분명 남다르다. 그런데 휴식을 잊은 자신의 열정에 상응하는 보상(교회 성장, 사회적 대접)이 지연되면 쉽게 좌절하고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막말을 하고, 교회 직원들을 일반 회사보다도 더 가혹하게 다루며 건물과 교인 수로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려 든다.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느껴지는 행복감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지금 게임을 하고 있다. 그들의 확대지향병은 성장 자체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투자에 상응하는 성공이라는 보상으로부터 오는 쾌락감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가 경계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터인데 누가 그들의 병을 치유할까? 그들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비극이고 당사자들의 비극이다.
김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