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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각론
오나라에서 형주를 지키던 사람들은 계보를 이어 왔다. 주유, 노숙, 여몽, 육손, 제갈각, 그리고 육항 등의 장수들은 형주와 국가를 지키면서, 오나라를 삼국 중 가장 장수 시키는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명장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명장들 속에서 평가가 절하되는 인물이 있다면 이는 제갈각이다. 위의 육인 중에 태부라는 가장 높은 직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인의 명장들 중에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 제갈가의 재주는 분명 위의 육인에 뒤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자신감과 과신은 그를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게 되었다.
1. 손권 궁전의 어릿광대
제갈각은 제갈근의 장남이며 제갈량의 조카이다. 제갈가문의 사람으로서 당시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던지, 오, 위, 촉의 삼국으로 분열된 시점에서 삼국에서 모두 높은 관직에 있었다.1) 제갈가문이 특유의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호학하는 분위기의 조성은 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제갈각은 약간의 재능으로서 이러한 분위기에 어울려서 뛰어난 재주를 가지게 되었다. 제갈각은 외양적 성격이 강하여, 어려서부터 자신의 이러한 재주를 자랑하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그를 내적으로 인덕을 가지게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명성을 높이는 데에는 도움을 크게 주었다. 이로 인하여 어린 나이로 기도위2)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면서 제갈각은 당시 태자였던 손등의 빈객이자 친구가 되어서, 도리와 육예3)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제갈각이 보인 행동을 보았을 때에, 제갈각이 실질적으로 이러한 도리와 육예를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대표적인 사례들은 삼국지 제갈각전에 나와 있는 제갈각과 손권 그리고 장소사이에 있었던 일 들 이다.
손권은 제갈각에게 다니면서 술을 권하도록 명했다. 제갈각이 장소 앞까지 이르렀을 때, 장소는 벌써 취기가 있어 마실 수 없었으므로 제갈각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노인을 공양하는 예의가 아니다.”
손권이 말했다.
“그대가 장공(張公)으로 하여금 말을 굽힐 수 있으면, 응당 마실 것이다.”
제갈각은 장소를 반박하여 말했다.
“옛날 사상보(師尙父)는 90세 때도 깃발을 잡고 월(鉞)을 가지고는 여전히 아직 늙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는 장군은 후방에 있지만, 술 마시고 밥 먹는 일에 있어서는 앞에 있으면서 어찌 노인을 공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까?”
장소는 끝내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술잔 가득 마시게 되었다. <삼국지 제갈각전>
“일찍이 머리가 흰 새가 궁전 앞 정원으로 모여들었다. 손권이 “이것이 무슨 새인가?”라고 묻지, 제갈각이 “백두옹(白頭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장소(張昭)는 그 자리에 있는 자들 가운데 자신이 가장 늙었으므로 제갈각이 새로써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제갈각은 폐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백두옹이라는 새 이름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갈각에게 백두모(白頭母)라는 새를 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제갈각은 “앵모(鸚母)라는 이름의 새가 있는데, 이것과 대(對)를 이루는 새가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오(輔吳 : 장소)에게 앵부(鸚父)를 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장소는 대답할 수 없었고, 좌중에 있던 자들은 모두 웃었다.“ <삼국지 제갈각전 배송지 주>
위와 같은 일화를 보았을 때에, 제갈각은 자신 보다 한참 높은 장소에게 무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육예와 도리를 강연한다면, 머릿속에 이에 대한 지식은 많은 것이 분명하다. 제갈각이 장소를 창피 줄 때 마다 사용한 그의 언변들은 그러한 지식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제갈각이 예를 알고 도리를 안다면,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창피주는 일 자체가 잘 못 된 것이다. 제갈각의 이러한 성격은 그의 외향적인 성격 외에도 가지고 있던 자존심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제갈각의 아버지 제갈근은 얼굴이 마치 당나귀처럼 길었다. 손권은 많은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사람을 시켜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들어와 그 당나귀의 얼굴에 긴 봉투를 붙이고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쓰도록 했다. 제갈각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붓으로 두 글자를 더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서 손권은 이것을 허락하고 붓을 주었다. 제갈각은 그 아래에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지려(之驪)’
그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즐겁게 웃었다.“<삼국지 제갈각전>
“그대의 부친과 숙부 중에서 누가 현명한가?”
제갈각이 대답했다.
“신의 부친이 뛰어납니다.”
손권이 그 까닭을 묻자, 제갈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의 부친은 일을 맡을 만한 자를 알지만 숙부는 모르기 때문에 뛰어난 것입니다.” <삼국지 제갈각전>
제갈각은 자신이나 자신의 부친을 욕보이지 않게 하려는 심상 외에도 지지 않으려는 강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당시 제갈각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위와 같은 재간은 고위층의 입장에서 귀엽게 봐줄 수 있을 만한 것 들 이었다. 이러했던 제갈각의 모습은 유럽의 궁전의 어릿광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릿광대들은 재치와 재간으로서, 왕을 즐겁게 하며 왕을 어렵게 만드는 신하들을 조롱하였다. 제갈각은 이와 마찬가지고 장소를 조롱하고, 손권에게 아첨하면서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비록 제갈각이 의도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던 외향적인 성격과 강한 자존심은 오나라 궁전에서 제갈각을 이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하였다.
2. 제갈각 관직 앞에 서서
제갈각이 실질적으로 관직에서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어릿광대 행동을 통하여 손권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난 후 부터이다. 제갈각이 제일 처음으로 담당한 업무는 절도(節度)의 업무를 대리한 것 이었다. 위 관직은 군대의 식량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문서 업무가 복잡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제갈각전은 제갈각이 이러한 유의 업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살펴보면 촉한의 제갈량이 유비가 살아있을 당시 했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가 이러한 군대의 식량을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위 직책은 특히나 난세였던 당시 각국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군대의 식량을 관리하는 직위인 만큼 중요도가 높았다. 손권이 제갈각에게 이 업무를 맡긴 것은 그를 분명 중용하기 위해서 그의 능력을 알아보려 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업무를 제갈각이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외향적인 성격 때문에 보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업무를 좋아했으며, 일률적인 일을 하는 업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위와 같은 특성은 자유분방하며,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제갈각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책이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제갈량은 제갈각이 이 업무를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과 같은 서신을 육손에게 보냈다.
“손권은 오왕이 되자 처음으로 절도(節度)라는 관직을 두어 군량미를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한 왕조의 제도에는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중이며 편장군이었던 서상(徐詳)을 이 직책에 임용했었고, 서상이 죽자 제갈각을 대신 임명했다. 제갈량은 제갈각이 서상의 뒤를 잇는다고 전해 듣게 되자,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형(제갈근)은 연로하고, 그의 아들인 제갈각은 거친 성격을 갖고 있는데, 오늘 그에게 식량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식량은 군사적인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먼 곳에 있지만, 사사로이 불안을 느낍니다. 당신이 특별히 폐하에게 알려 그의 임무를 바꾸도록 하십시오.“ 육손이 손권에게 아뢰자, 즉시 제갈각에게 병사를 지휘하는 관직으로 바꾸도록 했다.”<삼국지 제갈각전 배송지 주>
비록 업무 자체는 중요하지만 제갈량은 제갈각이 위와 같은 일을 하는 것에는 마땅하지 않았음을 육손에게 전했으며, 이에 제갈각은 관직을 옮기게 되었다.
제갈각이 표면적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단양군을 평정하면서부터이다. 대부분의 오나라의 변경이 그러하였지만, 한나라 당시 큰 현을 중심으로는 한인들이 살았지만, 작은 부락과 산속에는 산월인들이 살고 있었다. 오나라가 이 지역을 평정하면서, 산월인들에게도 오나라의 행정력을 적용하려고 하였는데, 이들 산월인들이 오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이러한 산월인들의 편입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육손이었다.
‘그 당시 오군. 회계군. 단양군에는 숲속에 숨어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육손은 손권에게 지금 해야 할 일을 진술하고 이런 사람들을 소집시킬 것을 요청했다. 회계군에 있는 산적의 우두머리 반림(般臨)은 오랫동안 이 지역의 독으로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체포되지 않았다. 육손은 새로 수집한 수하의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험준한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 토벌하자,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했다. 육손 수하의 병사는 이미 2천여 명이 되었다.’<삼국지 육손전>
제갈각이 당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생각한 것도 육손이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성과는 더욱 컸다. 제갈각이 다시 한 번 이러한 산월에 대한 정리를 하려하자, 사람들이 반대를 한 것은 실질적인 이러한 산월을 평정해야 된다는 마음가짐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산월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오나라의 대신들은 그 동안 산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이를 실패하자, 이에 대한 제어가 힘들 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라 보인다.
‘단양은 지세가 험준하며, 오군, 회계, 신도, 파양 네 군과 인접해 있고, 면적이 수천리 이며 산과 계곡이 무수히 포개져 있고, 외지고 깊은 산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성읍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장리를 보지도 못하고 모두들 들녘에서 무기를 쥐고 있으며 최후에는 수풀속에서 늙어 죽습니다. 도망자나 오랫동안 사악한 행위를 한 자는 모두 함께 이곳으로 달아나 숨어 있습니다. 산속에서는 구리와 철이 생산되므로 직접 병기를 주조합니다. 그곳의 습속은 무예를 좋아하고 싸움을 익히며 기력(氣力)을 높이 숭상합니다. 그들이 산을 오르고 험난한 곳을 넘으며 가시덤불을 뚫고 지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질주하고,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틈을 살펴 나와서 소란을 일으키고 약탈하여, 매번 병사들이 출정하여 토벌하려고 그들이 숨어있는 소굴을 찾습니다. 그들이 싸울 때는 벌이 이르는 것처럼 하고, 패배하면 새처럼 사방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그래서 이전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삼국지 제갈각전>
아버지인 제갈근까지 이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을 공식적으로 보인 것이 제갈근의 속마음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세간의 평이 제갈각의 이러한 진언에 반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제갈각은 젊은 패기로, 산월 토벌을 끝까지 주장하고 결국 손권의 허락을 받게 되었다. 제갈각은 임지에 도착하여, 그 동안 사용하였던 무력 토벌을 버리고, 회유를 하기 시작하였다. 오나라 자체적으로는 매우 획기적인 방편을 사용한 것 이다. 송나라 때 범중엄이 서하의 백성들에 대한 회유 정책을 펼친 것도 이러한 제갈각의 정책에서 유래한 것 이다. 제갈각이나 범중엄이나 정착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도록 힘써서, 이를 바탕으로, 도망한 자들이 다시 영지에 돌아 올 수 있도록 힘썼다.
이러한 생각은 유가의 가장 기본적인 통치 사상인, 정치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과도 일치한다. 제갈각은 어렸을 때에 육예와 도리를 입으로만 말하면서, 실천을 하지 않았지만, 정책적으로는 커다란 효과를 얻게 되었다. 백성들이 범죄를 일으키고 도망하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한 정치로 오는 가난에 엄격한 법률을 적용하게 되면서 생기는 것이다. 제갈각은 도망하고 범죄를 일으킨 자들에게 까지 채포를 가능하지 않게 하면서, 이러한 백성들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도와주었다.
“산속의 백성들은 악을 버리고 복종하여 교화 되었으니 모두 응당 위로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밖의 현으로 옮겨 살도록 하고 의심하여 잡아다 구금하지 말라.”
구양(臼陽)의 장 호항(胡伉)이 항복한 백성 주유(周遺)를 체포했다. 주유는 과거 사악한 백성으로 상황이 곤란해져 핍박을 받게 되자, 잠시 산을 나왔지만, 속으로는 반역을 꾀하고 있었다. 호항은 그를 체포하여 제갈각의 관소로 보내왔다. 제갈각은 호항이 명령을 어긴 것이므로 참수하여 사람들에게 돌려 보이고는 표를 만들어 이 일을 조정에 보고했다. 백성들은 호항이 사람을 체포하는 죄를 범하여 주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에서 산의 백성들을 나오도록 하려는 것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나오게 되었다. 1년이 지나자, 사람들의 수는 모두 제갈각이 원래 생각했던 것과 같이 되었다. <삼국지 제갈각전>
제갈각의 산월의 회유는, 오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로 인하여 손권은 설종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위북장군에 봉했다. 제갈각은 분명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하였다. 하지만, 그가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갈각은 창의력과 문장력이 뛰어난 것은 분명한 일이다.
3. 손권 이후의 제갈각
주유, 노숙, 여몽의 계보를 이은 동오의 명장 육손이 죽으면서, 제갈각은 그 계보를 이어서, 대장군 겸 형주자사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육손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손권도 세상을 떠나면서, 후사를 부탁받게 된다. 당시 제갈각은 손권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나, 손권이 그를 믿음직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제갈각의 외향적인 성격은 어떻게 보면 그를 조금 경박하게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 보다 손권은 제갈각이 일을 처리 하는 데에 있어서 독단적으로 처리함을 경계하였다. 이것은 하지만, 당시의 중론과 반대로 가는 제갈각의 창의적인 생각 때문에 보인 두드러짐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후에 보여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나아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제갈각이 손권의 사후 그의 동생인 제갈융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을 볼 수 있다.
제갈각은 손권이 죽은 이후, 의외로 신중한 모습을 보이며, 침착하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하면서, 세간의 평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사사로이 헤아려 보면 재능은 박육(博陸 : 霍光)에 미치지 못하는데 희공(姬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제후들의 알현을 받는 것 같은 중임을 받아 승상이 한왕조를 보좌한 효과를 더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선제께서 중임을 맡긴 영명함을 손상시키게 될 것이 두렵다. 이 때문에 걱정하며 두려워 매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위에 있는 자를 싫어하여 행동하면 주시를 받게 되는데, 언제나 이것을 바꾸겠는가? 현재 어리석고 노둔한 자질로 군주를 보좌하는 고관의 위치에 있으면서 어려움은 많고 지모는 부족하고, 임무는 무겁고 모략은 얕으니 누가 입술과 치아처럼 되어 돕겠는가? 가까이로는 한왕조의 시대에 연왕(燕王) 단(旦)과 개장공주(蓋長公主)가 결탁하여 상관걸(上官桀)이 곽광을 살해하려고 했던 변란이 있었다. 현재 나의 처지는 그 때와 거의 같은데, 어찌 감히 편안히 머뭇거리고 있겠는가?’ <삼국지 제갈각 전 제갈융에게 보낸 편지 중>
제갈각은 이와 같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한 위치임을 잘 느끼고 있었다. 그가 인덕으로서 백성들에게 명성을 얻은 것도, 이러한 자신의 위험한 상황을 실감하고서, 있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제갈각의 이러한 처신은 분명 훌륭하였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동탁과 같이 미오의 성을 구축할 수 도 있었겠지만, 인덕을 베푼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오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도 이득이었다. 그 후 252년 제갈각은 동흥에 제방과 성을 건설하면서 다시 한 번 수춘 방면으로 나아가면서, 위나라의 신경을 건드렸다.
4. 제갈각의 패퇴
위 제방은 손권시대에 건설된 것으로서, 강 건너편에 안전한 병력의 운송과 항구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제방을 252년까지 수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오나라가 소극적으로 위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사마의와 제갈각과의 신경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나라는 오나라가 강 건너편을 건드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제갈각은 이 제방을 중축하고, 양 옆에 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위나라에 대한 도발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즉 이 제방을 쌓을 때부터 제갈각은 위나라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갈각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오나라에 대한 그의 생각과도 이어 졌는데, 제갈각은 오나라가 강국의 위치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갈각의 이러한 도발에 위나라는 즉각 반응하여서, 호준과 제갈탄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제갈각은 위나라가 공격하기만을 기다리다가, 이들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갈각은 크게 자신감을 얻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갈각은 이에 다시 한번 출전하여서, 양주를 수복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당시 반대하던 여론들을 잠제우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물론 오나라의 대부분 사람들은, 천하 통일 보다는 오나라에서의 수성과 안주를 바라고 있었다. 이것은 오나라가 가진 호족 정권의 한계성이었다. 육손도 어떻게 생각하면, 이러한 수성의 이치를 크게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에 비하여 제갈각은 오나라의 자체적인 호족도 아니었으며, 오나라가 강성해 지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북벌을 그가 결심한 것은 이와 같은 취지였다고 생각된다.
‘무릇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없다. 왕 된 자가 천하를 겸병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그 자리만을 후세에게 남기려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었다. 옛날 전국시대의 각 제후들은 스스로 강력한 병사와 광범위한 영토에 의지하여 서로 구원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권은 충분히 대대로 전할 수 있고 사람들이 위태롭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방종하게 되고 노고를 꺼려하여 진(秦)나라로 하여금 점점 강대하게 하면 결국에는 그들을 병탄시키는데, 이것은 과거의 사실이다. 근래에는 유경승(劉景升)이 형주에서 병사 1만 명을 갖고 있고 재물과 곡식은 산만큼 있지만, 조조는 아직 미미하여 그와 힘을 다투지 않고 그의 세력이 강대해져 여러 원씨를 병탄하여 멸망시키는 것을 좌시하고 있었다. 북방이 전부 평정된 후, 조조는 30만 병사를 이끌고 형주를 향해 왔다. 그 당시는 지혜로운 자가 있었지만 또 계획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유경승의 아들이 어깨를 교차시켜 투항을 요청해 결국 포로가 되었다. 적대 국가가 서로 병탄하려고 하는 것은 원수가 서로 제거하려는 것과 같다. 원수가 있다고 하여 힘을 축적한다면 화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에게 있게 되니, 멀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오자서(伍子胥)가 말하기를, ‘월(越)나라가 10년 간 백성들을 양육하여 모으고, 10년 간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20년 후에는 오나라가 전쟁에서 패하여 소택지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부차(夫差)는 오나라의 강대함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이 말을 들었는데, 이 때문에 오자서를 주살시키고 월나라에 대비하는 망므이 없었다. 싸움에 패하여 후회함에 이르러서는 어찌 미치는 것이 있었겠는가? 월나라는 오나라에 비해 작았지만 여전히 오나라의 화근이 되었으니, 하물며 월나라보다 강대한 나라는 어떠하겠는가? 옛날 진나라는 단지 관서(關西)만을 갖고 있었을 뿐인데 오히려 육국(六國)을 병탄했으며, 현재 적들이 모두 진(秦), 조(趙), 한(韓), 위(魏), 연(燕), 제(齊) 등 아홉 주의 땅을 얻었다. 이 땅은 모두 전쟁용 말이 생산되는 곳이며 유능한 인재를 배출시킨 지역이다. 지금 위나라를 옛날 진나라와 비교하면, 토지의 수는 배나 되고, 오와 촉을 육국과 비교하면 절반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위나라를 대적할 수 있는 까닭은, 단지 조조 시대의 병사들은 오늘 마침 힘을 다했고 이후에 출생한 자는 아직 성장하지 않아 바로 적군이 쇠약해지고 수가 적으며 아직 왕성해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마의는 이전에 왕릉을 주살했고 이어서 그 자신도 죽었고, 그의 아들은 어리고 약한데 독자적으로 대임을 맡고 있으므로, 비록 지혜와 계책이 있는 선비가 있을 지라도 임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응당 오늘 정벌하러 가야하며, 바로 그들이 액운을 만날 때이다. 성인은 시기를 긴급히 붙잡는데, 진실로 오늘을 말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감정에 순응하여 편안함을 훔치려는 계획을 품고 있으면서 장강은 험난하여 대대로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위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논의하지 않고 오늘의 상황으로써 그 이후의 변화를 경시한다면, 이것이 내가 길게 탄식하는 까닭일 것이다. 고대 이래로 위정자들은 사람을 낳아 기르는 일에 힘썼는데, 현재 적의 백성은 해마다 달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나이가 작아 아직 사용할 수 없을 뿐이다. 만일 또 10년 이후가 되면 위나라의 백성은 틀림없이 현재의 배가 될 것이고, 우리 나라의 강인한 병사가 주둔해 잇는 곳은 모두 이미 공허하게 되어 오직 이런 사람들이 대사를 정함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만일 그들을 일찍 사용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늙게 하여 또 10년이 지난다면 대략 절반으로 감소할 것이며 이들 자제의 수가 부족함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적의 인구가 배로 증가하고 우리 병사가 절반으로 손실된다면, 비록 또 이윤이나 관중이 계획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오늘 멀리 생각하는 데 이르지 못하는 자는 틀림없이 나의 이런 말을 실지와 멀어 어두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환이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걱정하는 것, 이것이 진실로 사람들이 어둡다고 보는 것이다. 어려움이 이르게 된 연후에 머리를 땅에 닿도록 굽혀 절하는 것은 비록 지혜가 있는 자일지라도 또한 방법을 도모할 수 없다. 이것은 고금의 병폐이지 유독 한 시대의 상황만은 아니다. 과거 오나라는 처음에 오자서의 견해를 어두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려움에 이르자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경승은 10년 뒤의 일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을 남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 나 제갈각은 신하의 재능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위대한 오에서 소하와 곽광의 임무를 받았으며, 지혜는 일반 사람들과 같고 생각하는 것은 먼 곳까지 가지 못하지만, 만일 오늘 국가를 위해 변방지역을 개척하지 않는 다면 순식간에 나이가 먹을 것이고, 그때 원수와 적은 더욱 강대해져 목을 잘라 잘못을 사죄하려고 해도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 사람들은 간혹 백성들이 여전히 빈곤하였으므로 휴식에 힘쓰도록 하려 하는데, 이것은 크나큰 위험을 걱정할 줄 모르고 작은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과거 한고조는 다행히도 삼진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함곡관을 폐쇄시키고 요충지를 지키며 직접 오락을 즐기지 않고, 오히려 근거지를 나와 초나라를 공격하려다가 몸에 상처를 입고 갑옷에는 이가 새였으며 장수와 백성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견뎠겠는가? 어찌 예리한 칼날이 부딪치는 것을 좋아하고 안녕을 잊었겠는가? 이것은 적과 우리가 끝까지 오랫동안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한 것일 뿐이다! 나는 언제나 형한(刑邯)이 공손술에게 출병하여 천하를 취하는 계책을 보고 있으며, 근래에는 집안의 숙부가 표를 올려 적과 천하를 다투는 계책에 관해 진술한 것을 보았는데, 일찍이 탄식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다. 나는 밤이 되면 몸을 뒤척이며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생각을 적어 여러 군자들 곁으로 보낸다. 만일 하루아침에 내가 죽는다면 지향하고 계획한 것은 실현될 수 없으므로 후대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걱정한 일을 알게 하여 훗일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삼국지 제갈각전>
물론 제갈각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촉과 오의 정치인들이 언제나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위는 강하고 촉과 오는 약하다. 기다리면 병탄당할 뿐이다. 따라서 이를 이기기 위해서는 세력을 확장시킬 절대적 필요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당시의 여론이 반대를 했었지만, 이것은 위에서 말한 호족 주의적 성격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갈각이 군사를 일으켜서, 양주로 향하였을 때 제갈각은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서 공격을 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에 장수들이 환성을 취할 것을 권하고, 예전에 동흥 전투에서와 같은 유인책을 쓸 것을 권하자 제갈각은 이를 받아들였다. 제갈각은 2개월 동안 환성을 공략하였는데, 3개월 동안 작은 성 하나를 공략하지 못했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 제갈각은 부하의 진언에 따라 구원병에 대한 공격을 하기 위해서, 좀 더 느리게 공략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지나친 시일이 지나면서도 환성이 함락되지 않자, 제갈각은 조바심을 내면서 다시 맹공을 하였으나, 장특의 계책에 빠지면서 이를 실패하게 되었다.
‘당시 신성은 양주아문장 장특이 지키고 있었다. 오나라의 공격이 수개월간 지속되자 성안의 군사는 모두 3천뿐이었는데 그중 절반이상이 질병과 전투로 죽게되엇다. 이를 틈타 제갈각이 성밖에 토산을 만들어 맹렬히 공격하자 성벽이 곧 무너지려 하는데도이를 보수할길이 없엇다. 이에 장특이 오나라 군사에게 항복을 가장하여 말했다. "지금 나는 싸울맘이 없소, 위나라 군령에 따르면 공격을 당한치 1백일이 넘도록 구원병이 오지않으면 투항할지라도 가속이 연루되지 않게되있소. 지금 포위 된지 90여일이나 된데다가 이 성의 병사들은 본디 4천여명에 불과하오. 그런데 전사자가 이미 반을 넘고 있는데도 나머지 병사들도 모두 성이 함락될지라도 투항하지않고 죽기로 싸우려고 하고 있소. 내가 그들에게 이해를 논하여 투항을 권할 생각이니 내일 일찍 군사명부를 보내도록 하겠소. 잠시 내 인수를 가지고 가 신표로 삼도록 하시오" 이에 인수를 오나라 군사들에게 주자 오나라 군사들이 그의 말을 믿고 이를 받지않았다. 장특이 이를 기회로 밤을 새워 건물의 고재를 뜯어다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여 두겹으로 방어벽을 쌓은뒤 다음 날 오나라 군사들에게 말했다."나는 오직 죽기로 싸울뿐이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에 대노하여 맹공을 퍼부었으나 결국 공략치못했다.’<자치통감>
당시 물론 위나라에서 대군이 와서, 이를 동흥 전투에서와 같이 유인을 하여 공략하는 것도 불가능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각의 생각은 이미 한번 쓰여진 것, 다시 한번 통하지는 않았다. 당시 사마사와 그의 모사인 우송은 이를 예측하고, 관구검 외 수춘에 주둔하던 병력들의 급한 구원을 막았다.
‘지금 동서 양쪽에 급한 일이 생겨 모두 급하게 되자 제장들이 의기 소치해 있으니 어찌 하면 좋소?
우송이 헌책하여 말했다.
“예전에 주아부는 창읍의 성루를 견수해 오초가 스스로 실패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사 형세란 사약이강의 경우가 많으니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제갈각은 정예병을 전부 끌고 와 예기가 성하기 때문에 신성을 미끼로 우리의 주력을 끌어들여 일전을 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성에 실패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와 일전을 겨루고자 할 것이니 그때 우리는 응전치 않고 저들이 세가 지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자치통감>
‘사마사는 이에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 등으로 제갈각을 막게 했다. 관구검과 문흠이 싸우기를 청하자 사마사가 말했다. “제갈각이 궁노병과 갑병을 이끌고 아국 영토 깊숙이 들어왔고 그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으니 그 예봉은 아직 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오. 또한 신성은 작지만 견고하니 적이 공격한다고 해도 쉽게 함몰되지 않을 것이오.” 마침내 제장들에게 명을 내려 성벽을 높여 적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과연) 서로 대치한지 수개월이 지나자 제갈각이 공성전을 편 것이 오히려 힘을 꺾어 오나라 군대의 사상자가 태반에 이르렀다.’ <진서 사마 경제기>
위와 같이 제갈각의 작전은 이미 파악이 되었다. 제갈각이 동흥 전투에서 승리한 요인은, 수비적 입장에서 위군을 유인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갈각과 그의 부장들은 그때의 승리만을 생각하고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빠르게 공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제갈각의 병력은 예기를 잃고, 결국 퇴각하게 되니 북벌이 실패하게 되었다.
당시 제갈각이 북벌을 결심했을때 제갈각의 측근들로서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등윤이 이 중에 한 사람이었다.
‘만일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고 들에서 싸워 수확이 없다면, 이는 이전의 공로를 상실하고 이후의 책임을 초래하게 되는 것 입니다. 병사들을 쉬도록 하고 틈을 보아 움직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전쟁은 중대한 일이며, 이 일은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일 기뻐하지 않는다면, 당신 혼자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등윤전>
사족이란 말의 어원이 무었인가 하면, 다음과 같은 일에서 이다.
‘초(楚)나라의 영윤(令尹) 소양(昭陽)이 위(衛)나라를 치고 다시 제(齊)나라를 치려 할 때, 제나라의 세객(說客) 진진(陳軫)이 소양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설복할 때 나오는 말이다. “여러 사람이 술 한 대접을 놓고 내기를 하였는데, 그것은 땅바닥에 뱀을 먼저 그리는 사람이 그 술을 마시기로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뱀을 제일 먼저 그리고 왼쪽 손으로 술대접을 들면서 오른손으로 뱀의 발까지 그리면서 ‘나는 발까지 그렸다’고 뽐내며 술을 마시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뱀 그림을 끝내고 그 술잔을 빼앗아 들며 ‘뱀에는 원래 발이 없다. 그런데 자네는 발까지 그렸으니 그건 뱀이 아니다’라고 하며 술을 마셔버렸습니다. 장군은 지금 위나라를 치고 다시 제나라를 치려고 하시는데 나라의 최고 벼슬에 계시는 장군이 거기서 더 얻을 것이 무엇이며, 만에 하나라도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실수를 하게 된다면 뱀의 발을 그리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은 과연 옳은 말이라 여겨 군대를 철수시켰다. <전국책>
제갈각의 북벌은 그 명분만큼은 뛰어났으나, 결국 뱀 그림에 다리를 그리면서, 뱀도 아닌것을 그리고 만 것이다. 이 전쟁에서의 실패는 결국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하였으며, 오나라에게도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5. 제갈각
제갈각의 사상은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진다. 공자는 관중의 패도주의적인 입장을 옹호하였는데, 제갈각은 그의 육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펴보면, 조조나 관중과 비슷한 패도주의적 입장을 옹호하고 있었다. 제갈각이 재주가 뛰어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창의적인 생각과 공자의 이론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 제갈각은 분명 백성을 위해서 커다란 도움을 주는 정책을 폈었다. 하지만, 그의 재주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과 지나친 과신은 결국 그에게 패배를 가져다주었다.
제갈각은 사상의학적으로 보았을 때에 소양인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다재다능한 재능과, 외양적인 성격은 전형적인 소양인으로서 제갈각을 분류하게 한다.
첫댓글 다시 봐도 잘 쓴 글이다. ㅋㅋ 웬일이야 삼넷에서 활동을 다 하고. 역시 인물론은 나에겐 어려운 과제인데 너 답다 ㅋ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 실력이 죽었구려 ㅋㅋ 음음 다시 감을 찾아서 더 잘써야지? 안그래? ㅋㅋㅋ 아무튼 이것도 꽤나 걸작이요~
잘쓰셨네요 ~ 한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여러 고전에 나온 구절을 인용하는게 좋죠 >.< 잘봤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