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0:34-36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보내러 왔노라.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자기 어머니를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나니 사람의 원수들이 그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리라.
예수님은 평화의 통치자요(사9:6) 살렘왕이며 화평의 왕(히7:2)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보내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때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한 뜻이로다"(눅2:14) 라고 평화를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검을 주시겠다고 하니 어찌된 일일까요? 예수님이 이 사실을 부인하는 걸까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하늘의 왕국 복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검이 아니라 평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 23:27-28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버림받아 너희에게 황폐하게 되었느니라.
마 11:13-14
모든 대언자와 율법은 요한까지 대언하였나니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진대 와야 할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요 5:43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그를 받아들이리라.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들이 먼저 적그리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서 환난 속에서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사10:21-22)
롬 9:27
또한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쳐 이르되,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왕국 복음
예수님은 평화와 화평의 통치자이지만 땅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와 화평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통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5:9절에 화평은 하늘의 왕국 시민이 갖추어야 할 내면의 의식이며 10:34절의 화평은 시대적으로 다른 화평입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도다."(전3:8) 한마디로 화평도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평화나 화평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쟁할 때입니다. 평화나 화평을 위해서 누리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없는 화평은 위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 성경신자들은 비진리와 싸우는 비타협 성경주의' 즉 비타협 분리주의자들이지 화평을 위해서 비진리와 타협하고 전투를 싫어하는 화평의 교회놀이가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을 향하여 검을 보낸다는 것은 창조 때부터 예언된 말씀입니다.
창 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기로 작정하는 순간부터 적들이 생깁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즉각 분리시키시며, 가족이나 친구라는 가장 강력해 보이는 자연적인 연관마저도 진리에 관한한 타협하지 않게 하여 분리하여 광야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질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에 순종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지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적당하게 타협하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적당하게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증인됨을 적당히 부인하면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며 가볍게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자가 적당히 타협하고 살면 세상과 싸우지 않아도 되지만 그 댓가로 예수그리스도와 싸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붙어 전쟁할 자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시면 됩니다.
바른 성경으로 (킹제임스성경)으로 바른 교리를 배우고 믿음을 세우려고 하면 개신교회에서 분리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과 적당하게 타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 5:11
형제들아, 나 곧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핍박을 받겠느냐? 그리하였더라면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쳤으리라.
마 10:37-38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생명을 찾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예수님이 사랑 타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륜을 반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큰 것 안에 모두 들어 있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생명 안에 모두 있음을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버리고 자기 생명을 먼저 찾는 자는 둘다 잃을 것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잃는다면 둘다 찾고 가질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지키며 사는 것은 패배자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죽고 예수님의 유익을 위해 산다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으며 모든 적은 내부에 있다는 사실이며 희생과 전투의 준비가 항상 필요할 것입니다.
마 10:40-42
¶ 너희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며 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느니라.대언자의 이름으로 대언자를 받아들이는 자는 대언자의 보상을 받고 의로운 자의 이름으로 의로운 자를 받아들이는 자는 의로운 자의 보상을 받으며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들 중 하나에게 찬 물 한 잔이라도 주어 마시게 하면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자기 보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영적 전쟁을 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모든 능력을 위임하였기에 왕국 복음을 잘 선포할 것을 명령하고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사역을 잘 수행할 때 받을 보상을 말씀하시며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주께서 우리의 우편에 계시고 참된 복음을 전하는 대리자로서도 보상을 결코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제자도의 길을 걷습니다. 아들과 제자의 길은 다릅니다. 아들은 신분이지만 제자는 직무입니다. 아들은 변하지 않은 신분에 그치지만 제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변화되는 삶입니다. 아들은 질적 수준에서 멈추지만 제자는 양적 풍성함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제자된 삶은 질적 양적 모두 풍성하게 채우는 완전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