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왜 그런지 부모님 중에서 유독 어머니를 먼저 생각합니다. 애정이 각별하고 남다르다는 말이 되겠지요. 어머니는 우리의 어린 시절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의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삶의 향수입니다. 오늘 설교는 어머니에 대한 설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용서를 구할 것은 혹시 부모님이 살아 계시지 않은 분들이 있게 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도 잠깐이지만 우리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머니를 이야기지만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의 십자가”, 지금은 그것이 우리의 자랑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본인에게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지요.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내 나를 버리셨냐?”고 최치셨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은 새벽에 고문을 당하시면서 시작된 죽음을 향한 행진에서 그 수난의 막바지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권력자의 바람에, 죽음의 위협에 제자들은 초겨울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다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쓸쓸히 죽음과 싸우시는 예수님......,
그렇게 외롭게 십자가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계시는 주님 곁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25절을 다시 한 번 같이 볼까요?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오직 비난 하는 사람만 있는 그 자리, 동조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지 모르는 그 순간에 어머니는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에 체포 되었다는 소식은 어느 제자에 의해서 어머니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이시면서 어머니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경황없이 예수님 계신 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어미니,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벌써 눈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채찍에 맞아 살점에 떨어지고 피방울이 튈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서도 피방울이 튑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걸어가실 때마다 어머니도 동일하게 걸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하며 헤어지고, 갈기갈기 찌기는 어머니의 마음, 아들의 고통이 어머니의 가슴에 저며 옵니다. 그 고통을 부여잡고 하염없는 눈물로 예수님을 따르는 어머니......,
여러분 아십니까? 그 어머니는 바로 우리의 삶의 뒤안길에서 우리가 생사의 순간을 넘나들 때마다, 수많은 실패 앞에서 절망하며 몸부림 칠 때마다 우리 옆에서 묵묵히 우리를 지켜보시는 우리보다 더욱 처절하게 마음으로 우시는 바로 우리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렇게 아들 예수의 고난이 고통스럽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분이 이런 고난을 당할 분이 아니시기에 더욱 마음이 저린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의 마지막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아들 옆에 있음으로 당해야하는 고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기는 고사하고 차라리, 차라리 말입니다. 아들 예수 대신 내가 그 고난을 당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했겠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 보모님의 마음아니겠습니까?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가 힘들 때에 항상 옆에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지탄의 대상이 될 때에도 유일하게 우리를 두둔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은 분명 우리의 부모님들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잘 잘못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아들, 딸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그 사명감입니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끔 부모님이 창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결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창피해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안쓰러울 뿐입니다.
부모님께 막 대하지 마십시오. 그 분들 우리에게 그런 대우 받으실 분들이 아닙니다.
사랑한 것이 죄입니까?
여러분 잘되라고 잔소리한 것이 죄입니까?
우리들 위하여 남루한 옷 입으신 것이 죄입니까?
그것이 챙피한 일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병원 제대에 가지고 못해서 지금 아파서 고생하시는 것이 어디 부모님들의 죄입니까?
나실제(3절) - 한철 집사님
다같이 - 나실제
평생 자녀들 눈치 보며 사셨던 그분들, 이제 우리 그분들의 삶 속에 편안함을 돌려 드리십시다. 말 한마디라도 곱게 해 드립시다. 연로하셔서 미쳐 모든 것을 판단하지 못하시고 조금 엉뚱한 말씀하셔도 우리 이렇게 말씀하십시다. “예! 맞습니다. 어머님” 우리 이곳에 부모님 모시고, 한 달 만이라도 진짜 잘 모십시다.
여자여 보소서
지금 예수님은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전에는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미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미 기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점점 기운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이런 경우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보셨습니다. 26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에수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합니다. 27절을 볼까요?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그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최후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좋을 때만 모시는 것 아닙니다. 내가 할 수있을 때만, 여유가 있을 때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관계없이, 힘들던지, 어렵던지 관계없이 우리가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리의 자녀같이 비싼 옷을 요구하겠습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렇게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대해드리고,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이 잘해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사랑하는 제자, 그는 얼떨결에 혹 하나 붙인 격입니다. 다른 제자는 다 도망가는 그 상황 속에서 그곳에 있다가 어머니를 한 분 더 모셔야 하는 독박을 썼습니다.
이래서 세상은 참 야속한 것입니다. 충직한 사람이, 우직한 사람이 일 더하게 되어 있습니다. 야비한 사람들이, 얍삽한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가고 신실한 사람들이 잔일 다하고, 뒷치닫거리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화날 수 도있습니다. 우직한 사람이 얍삽한 짓을 한 번 해보려하면 들통하고 맙니다. 그래서 모든 누명을 다 써야 합니다. 분명히 제가 했는데 내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처신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밉습니다. 나만 그럴 줄 알았더니 내 아내도 그렇고, 내 남편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얍샵해야 살아가는데 화가 납니다. “왜 당신만 그렇게 사냐구” 윽박질러봅니다. 그 가정 참 지지리 궁상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은 생긴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하고 왜 내가 모셔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27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시 집에 모시니라”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습니다(27절). 성경은 그 제자의 행동에 군더더기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깔금합니다. 깨끗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토 달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억울합니까? 화가 납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주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보고 두시냐고 항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을 보시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장수한 제자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가 요한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다른 제자들의 이름은 기록했지만 자신의 이름 만큼은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라고 썼습니다.
제자 중에서 가장 장수한 제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요한입니다.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바로 이 본문에서 찾습니다. 어머니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신5:16절).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축복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살아서 천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살아서 천국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어느 누구도 요한처럼 천국을 확실하게 본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님 공경하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복된 일을 발로 차내지 마십시오. 부모님 공경하는 것 복된 일입니다. 바보처런 뒷치닫거리 하는 일 복된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알아주는 사람 없는데 고생스럽게 힘들일 다하는 것, 복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공경하시면 공경하신 만큼 복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복 누리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제부터라도 우리 그 복 누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