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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2월 26일 10:00-11:00시, 용인시 문화회관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
저를 아는 분들 중엔 늘 과거 이야기만 한다고 등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의 김진하 회장님께선 과거를 모르면 그 과거가 반복될 수 있으니, ‘4.3사건’의 핵심을 정리하여 회원님들께 이야기해 달라는 특별 주문을 주셨습니다. 저는 사기가 올라 약속을 해 놓고는 꽤 여러 날 고심을 해야 했습니다. 제한된 시간에 무엇을 어디까지 어떻게?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왜 위험한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어 준비한 내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주신 회장님과 용인시지회의 회원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 대한민국은 분명히 성공한 국가
2차 대전 이후에 지구상에는 147개 국가가 새로 태어났는데 그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뿐입니다. 우리는 10년 전에 이미 국민소득 20,000$에 도달했고 나머지 146개국은 아직 2,000$에도 미달입니다. 북한의 오늘은 어떤 형편입니까?
금년 11월에 대한민국이 주최하는 G-20 정상회의는 우리나라의 대 성공을 세계의 경제 강국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며, 금번 뱅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어린 선수들은 대한민국 발전의 놀라운 일면을 온 세계에 떨치는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출전했던 모든 선수들에게 박수한번!
한반도의 5,000년 역사 속에서 지난 100년만을 돌아봅시다. 36년의 일본 식민지 수탈이 있었고 광복 직후의 혼란과 국토분단에 이어 그 반쪽에서나마 기적적인 대한민국의 건국이 있었으나 북한의 6.25불법 남침으로 남은 것은 폐허의 황무지였습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그 폐허의 땅위에, 우리는 미국과 영국이 2-300년 동안에, 그리고 일본이 100년 동안에 이룩했던 산업화와 민주화의 근대화 혁명을 불과 50년으로 단축하는 기록을 세웠던 것입니다. 5,000년 역사를 통해 우리가 중국보다 잘 살고 최근 100년을 통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때가 있었습니까?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었고, 북의 남침을 맨주먹 붉은 피로 막으셨던 6.25참전 용사 선배님들의 투지가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웅지가 있었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성실성을 독일국민들에게 알림으로서 서독정부의 차관기회를 열 수 있게 했던 서독 파견의 광산 근로자와 간호사들의 땀이 있었고, 그리고 베트남 전선에서 생명을 바쳐 국방 현대화와 산업화의 초석을 쌓았던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피와 땀이 섞인 애국심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보리 고개를 넘기며 각자의 가정과 학교와 다양한 직장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땀 흘리며 일했던 절대 다수 국민들의 말없는 모범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6.25전쟁터에서 그리고 베트남까지 가서 대한민국 국방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시다가 영광의 훈장까지 받으시고 평생을 나라위해 노심초사하셨으니 여러분들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절대적 공헌을 해 오신 최고의 영웅들이십니다. 존경의 거수경례를 올립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엔 북한의 6.25기습남침 때 UN깃발 아래 참전했던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국가들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쯤은 우리 국민들이 크게 뭉쳐서 서로 높이 인정도 하고 격려하며 살면서,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가국민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했는데 지난 10여 년의 좌파정권 시절에 어떤 현상들이 발생하였습니까?
대한민국의 국방력 강화는 물론 월남특수와 중동특수의 파생으로 조국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베트남 참전 용사들을 양민학살의 용병으로 몰아갔고, 대통령 노무현은 제주 4.3사건과 관련해서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함으로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손상시키면서 전교조의 선생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체제를 부정하는 교육을 하게 하는 구실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2.대한민국은 왜 위험한가?
역사상의 모든 국가는 외부의 위협보다는 내부의 붕괴로 무너졌습니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내 외로부터의 위협이 공존합니다. 무엇보다 큰 위협은 대한민국을 통째로 부정하는 북한이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은 채 집요한 대남공작을 계속하는 데 있으며 우리 국민들 중에서 특히 젊은이들의 일부가 북한의 거짓말 선전과 선동에 쉽게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면 미국의 식민지입니까? 독일에도 일본에도 프랑스에도 미국군대는 주준하고 있지 않습니까? 빈부의 차이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까? 미국과 중국 일본에도 있으며 북한의 빈부 격차는 세계에 그 유례조차 없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과거에 독재로 인한 희생이 있었다지만 북한에는 지난 60년간의 부자 세습독재 하에 어떤 희생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까?
따라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체제와 가치를 부정하며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이 땅의 일부 좌파세력은 북한의 선동에 눈을 감은 채 박자를 맞추는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으며 공무집행 중의 경찰을 납치 감금하고 동료를 구출하려는 경찰들을 불태워 죽인 살인방화범들에게 민주화 국가 유공자의 호칭을 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이들이 진정한 민주화 유공자였다면 북의 부자세습 독재 권력에 대하여 더 크게 진노하고 질타해야 했으며 그 굴레 속에서 현재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주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의 과거사만을 공격함으로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많은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민주화의 달성은 산업화 이후에나 가능한 것임으로 오늘의 이 나라 민주화 달성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화염병으로 국법질서를 파괴했던 거리의 투사들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차라리 대한민국의 진정한 참 민주화 유공자는 오히려 독일의 지하탄광과 병원에서 삽과 주사기를 들었던 광산 근로자와 병원의 간호사들이었고,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켰던 6.25 참전용사 선배님들과 베트남 참전 용사였으며 그리고 국내의 산업 현장과 중동지역의 건설현장에서 묵묵히 땀을 흘렸던 산업화 역군들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 년간,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공에는 눈을 감은 채 과거에 있었던 작은 과오와 실수만을 찾아내어 대한민국의 정통성 부정에 나섰던 각종 과거사 위원회가 지금도 유사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지혜를 모아 국정을 미래 지향적으로 선도해야 할 국회의원들마저 본분을 망각한 채 끝없는 정쟁에 함몰하고 있으니 통탄할 지경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의 정국은 광복직후의 혼란을 방불케 하고 있으며 북한의 6.25 남침 당시의 상황에 근접함으로서 잠자리가 편치 않은 밤이 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인들도 놀라는 당당한 발전을 이룩해 낸 오늘의 대한민국에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갈등과 혼란이 조성되고 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지 않습니까?
3. 4.3사건과 6.25 전쟁의 불가사의
저는 2,000년 8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국무총리 직속의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에서 3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국방부의 위촉을 받았던 저는 당시 5.10 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고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 밖으로부터의 지령이 분명히 작동했던 4.3 무장 폭동을 제주도 주민들만의 순수한 봉기로 해석하면서, 계엄령 하에서 진압임무를 수행했던 국군의 선배들을 양민학살자로 몰아가는 현상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4.3폭동이 진압되지 않고 확대되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의 군정기간 중에 무장 폭도들의 경찰지서 공격으로 시작된 4.3 사건은, 대한민국의 탄생이전에 발생하였음으로, 초기에는 공산주의 지향세력과 자유민주주의 지향세력간의 대등한 쌍방의 충돌로 단순하게 바라볼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48년의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로 대한민국이 탄생된 1948년 8월 15일 이후에도 한라산에 인공기를 올리고 확대되었든 무장 폭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반란으로서 진압이 불가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계엄령 하에서 군의 임무수행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를 국군의 양민학살 쪽으로 몰아 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군과 경찰을 대변하는 3명의 4.3위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불가사의의 극치였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은 2003년 4월 2일, 4.3위원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하였습니다. 저는 모처럼의 기회를 포착하여 4.3사건의 배경에 관련한 다음 내용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1)4.3폭동의 배경으로 작동된 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비밀지령이 1993년에 발견되었고 (2)소련군의 정치부사령관이 남노당 당수 박헌영에게 지침을 내리고 공작자금을 제공한 기록이 나타난 스티코프 비망록이 발견되었고 (3)4.3폭동의 주동자 김달삼이 폭동 발발 4개월 후, 북한 해주의 민족 대표자회의에 참석, 4.3사건 전과를 보고하며 말미에 스탈린과 김일성 만세를 부른 연설문이 발견되었고 (4) 그의 가묘가 북한의 애국 열사능에 남조선 혁명가로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 등을 두 번의 발언기회를 얻어 설명했고 일체의 이의 제기도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당시의 국무총리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6개월 후인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씨는 4.3사건의 진압과 관련하여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의 군 통수권 행사에 관해 5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과를 하는 불가사의가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란 말을 들어 본분 계십니까? 이 말은 6.25 정전 직후에 육군참모 총장을 역임하신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회고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1. 일선부대의 남침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
2. 6.25발발 2주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3. 6월 13-20일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4. 6월 11일부터 발령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이 6월 24일 0시에 해제.
5.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외출외박을 허용
6. 6월 24일 저녁에 개최된 육군 장교 클럽에서의 고급장교 댄스 파티
7. 서울 북방으로의 축차적 병력투입으로 불필요한 희생 발생초래
8. 6월 25-27일간의 국군후퇴를 반격, 북진 중으로 허위 보도한 중앙방송
9. 한강교의 조기 폭파단행
10.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
이 형근 장군께서는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의혹들을 풀 것이며 이것이 풀려야만 국가의 백년 대계가 보장될 것이란 요지의 기록을 그의 회고록에 남기셨습니다. 혹시 국군의 후퇴를 북진으로 허위 보도했던 중앙방송의 아나운서가 누구였다는 조사결과를 들어 본 계십니까?
4.3 사건의 배후와 배경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에 대해서는 규명된 바가 없었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4. 불가사의를 풀어 주는 열쇠 하나
노무현씨의 4.3사건 관련 정부차원 공식사과에 대한 항의로 4.3위원을 사퇴했던 저는 4년 후인 2007년 10월, 한 북한 전문가로부터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풀어주는 열쇠하나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10년 전의 북한 노동신문 기사였는데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는 제목아래 상상도 못했던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스케이트 선수와 이름이 같아, 혼돈이 됩니다만, 성시백이란 사람이 1947년 초(4.3무장폭동 발발 1년 전), 평양에 올라가 김일성으로부터 회중 금시계를 받는 장면으로부터 서울에 돌아와 활동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육군의 ‘사단’ 예하 ‘대대’는 물론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까지 ‘조직선’을 늘려 국군의 와해공작을 했고 당시 서울에서 활동했던 ‘유엔 림시조선위원단’ 조직의 와해 및 방해공작은 물론, 김구 선생에게 김일성의 특사임을 스스로 밝히고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하고 참가하게 하는 등등의 성과를 올리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성시백이가 남한의 각 정당과 산하단체를 정당협의회로 묶는 통일전선 형성과 ‘선전공작’을 하면서 ‘조선중앙일보’와 ‘광명일보’등의 10여개 신문사를 경영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4.3사건 당시 특히 많은 4.3관련 기사를 냈던 ‘조선중앙일보’가 오늘의 ‘중앙일보’ 전신으로 알고 매우 황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조선중앙일보’를 성시백이가 운영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무릎을 쳐야했습니다.
성시백이 운영했던 ‘조선중앙일보’의 당시 기사를 기타의 신문들과 비교만 해도 김일성의 비밀 공작원이 4.3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 때 부터 “10년전 노동신문 특집보도”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다해 왔으나 별 반응이 없어 늘 외로울 수밖에 없었는데 3년 만에 김진하 회장님께서 저를 이처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제가 줄 곳 갖고 있는 의문은, 6.25를 북침으로, 88년의 KAL기 폭파도 남쪽의 자작극으로 오리발을 내밀던 북한이 왜? 김대중 대통령 선거를 앞두었던 97년 5월에 숨겨왔던 대남 공작 비밀을 특집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렸을 것인가? 이며, 그 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 노 두 전직 대통령은 그 특집보도의 내용을 근거로 김정일에게 대남공작의 중단을 공식 요청했는가?에 있어 왔습니다. 만약 알고도 눈을 감아 주었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재앙입니다. 앞으로 있을 수도 있는 세 번째의 정상회담에서도 다시 침묵을 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망국과 직결될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특집보도 1년 전에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가 북송되어 공화국 영웅이 되었고 그 4년 후인 김대중 정권 시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집단 북송되어 모두 성시백의 뒤를 잇는 공화국 영웅대접을 받게 됨으로써 그 후의 남쪽과 북쪽에 어떤 영향이 있었으리라고 보십니까? 남쪽에서 암약하던 북한 공작원들의 사기는 하늘로 솟았을 것이고 이들을 체포하고 수사했던 대한민국 대공수사 요원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국사모’의 송영인 회장이 최근의 동영상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1998년 4월에 국정원에서는 그간 양성되었던 간첩 잡는 전문인력 581명이 집단해고 되었고 경찰에도 대공요원 2,500여명, 기무사에도 대공요원 600여명, 그리고 검찰에도 공안검사 40여명이 감축되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대공전선은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는 1997년 5월 26일로부터 1년 후에 있었던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5. 성시백 그는 누구인가?
성시백의 등장 배경까지 아셔야만 문제의 심각성이 보입니다.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당시, 장개석 정부의 ‘수도경비사령관’에 해당되는 胡宗南 장군의 유능한 참모로 알려졌었으나 실제는 모택동의 첩자였다고 하며, 서울복귀 후에는 조선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조석으로 만났다는 기록이 상해 임시정부시절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태윤기 선생의 “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 회상의 황하”(갑인출판사 1975년 발행)에 나타나 있습니다.
기무부대의 최근 참고자료에는, 김일성이 해방 후 대남공작 적임자의 물색 중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성시백이 조선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인편을 보내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다는 것이며 북한공작원으로 활동할 것을 약속한 성시백은 일본을 거쳐 남한에 입국하여 무역회사 대표로 위장하여 대남 간첩활동을 하다가 50년 5월에 피검되어 6.25발발 이틀후인 6월 27일에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시백은 대북 무역회사 대표로 활동하면서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장개석의 부하였다는 명성까지 이용하여 이승만 정부의 요인들을 자유롭게 만나며 10개의 신문사를 운영했다고 하니 영향력의 끝이 어디였을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 집니다.
4.3폭동 초기의 동아일보(48.5.8)에는 ‘인민 해방군’에게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이상 3만원 그리고 경찰 유력자에게는 100만원(당시 쌀 한가마니는 3백원)의 살해 현상금을 걸고 목포에까지 김일성 군이 내도하였으니 안심하라는 선전술로 살인을 독려했다는 기사가 있으니,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당시의 경찰과 군의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저는 성시백의 유령이 활동하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김정일 비밀특사’는 서울에서 어떤 직함으로 위장하여 누구를 만나고 있으며 몇 개의 신문 혹은 방송을 운영할 것인가? 제 자신만의 망상입니다만 여러분들께서도 문제의 특집보도를 읽으시면 온갖 그림을 그리시게 될 것입니다. vietnamwar.co.kr 의 인강칼럼 헤드라인에 올려있는 “10년 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전문”을 찾아 한번 씩 읽으시고 주위에도 많은 전파를 바랍니다.
이 내용이 알려만 지면 대한민국의 애국시민들은 지난 10여 년간의 ‘안보불감증’에서 깨어 나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자세를 갖추게 되고 절대다수의 국회의원들도 망국적 대결을 풀고 건설적인 국정실현에 나섬으로서 대한민국은 정상적으로 튼튼히 지켜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5. 결론
1. 금번 캐나다의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모태범, 이정수, 이상화 등 우리 선수들이 보여주는 높은 정신력과 체력과 기량은 온 국민의 자랑이며 재산입니다. 대한민국과 함께 튼튼히 지켜져야 합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나라밖의 세계도 알고 자유와 창의의 중요성도 압니다. 이들에게는 “반미가 애국이고 친북이 애족”이라는 엉터리 선동구호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미국을 주적으로 알고 있으니 여러분들께선 손자 손녀와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직접 피 땀 흘려 지키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건국사를 올바르게 교육하는데 나서 주셔야 합니다.
2. 대한민국 국민 중에 북한 동포의 자유와 인권을 증진시키고 남북 간의 긴장을 해소하는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거부하거나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화해와 협력을 위해 북의 대남공작까지 허용을 한다면 이는 곧 대한민국의 망국과 직결될 것입니다. 북한의 핵무기보다 훨씬 무서운 것은 대남공작이기 때문입니다.
3.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노동신문 특집보도(“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통일혁명에 기여한 렬사”)의 존재를 알림에는 무공수훈자회 회원 여러분들의 큰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공론화 되고 국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목소리가 클수록 전쟁터에서 받으신 훈장도 빛 날 것이며, 빛나는 것만큼 여러분들은 영원한 대한민국의 청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발표한 내용을 베트남 참전 전우들의 홈페이지인 vietnamwar.co.kr의 “인강칼럼‘에 올릴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복사하여 여러분들의 친지들에게 메일로 알리시거나 다른 인터넷의 게시판에 옮겨 주시면 그것이 곧 목소리가 됩니다. 수고스럽게 멀리 다니지 않아도 큰 목소리를 내실 수 있습니다.
4. 대한민국의 애국시민들이 북한의 대남공작에 경계의 눈만 뜨게 되면 파업 혹은 시위의 현장에도 법질서가 살아날 것이고, 정부 내의 각급 과거사위원회에서도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파괴해 온 불순세력의 목소리가 점차 최소화될 것이며 본분을 망각한 채 끝없는 정쟁에 함몰하고 있는 여야의 국회의원들도 본연의 자세를 되찾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5.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빠르게 정상화되어 현역의 국군장병과 경찰관들에게는 “철경만대”의 정신무장이 촉진 될 것이며 우리들의 신문과 방송도 성시백의 망령이 지금도 살아있다는 관심과 관찰력으로 무장하여 국민들의 알권리 보호에 적극 나서게 될 것을 기대하며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목소리를 내실 수 있도록 한 분 한 분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2010.2.26.
(사단법인) 베트남 참전 유공전우회 부회장
국가 정상화 추진 위원회 자문위원
첫댓글 그토록 엄청난 반역을 한 성시백이 같은 자가 오늘날 얼마나 많이 어디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지 우리 국민들과 위정자들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텐데... 인강 ,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항상 조심하고 건강하세요
인강! 수고많이 했읍니다. 인강과 같은 정열과 실천의 의가 가득한 분들이 있어 마음 든든 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대한 민국의 최고 엘리트요 애국 충정이 누구보다 넘치는듯 행동 하든하던 그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지.외롭게 혼자 투쟁 하시는 인강 항상 건강 조심 하세요!!!!
긴 글 읽어 주신 시내산, 히어로 40,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내용은 특히 지난 3년 전 부터 이야기 해 온 것의 반복일수도 있으나 꽤 여러 날, 입술이 부르터저가며 정리한 내용입니다.
발표하는 동안 꽤 여러 차레 박수도 받았답니다. 글 밑에 000부회장, 000자문위원등을 붙여 본 것은 내 혼자 생각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동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여겨 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