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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대팀, 1월 7일 정상 올라 만세삼창 후 일장기 게양
드라마 속 그 장면, 사실일까?
백두산 천지로 이어지는 마지막 고비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2m 가량 쌓인 눈은 한 걸음 한 걸음을 막아섰고, 칼바람에 체감온도가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고산 등반이었다. 당시 KBS는 고려 광종(光宗)조를 다룬 대하사극 ‘제국의 아침’을 준비 중이었고, 최재성씨는 왕건의 둘째 아들(정종), 김상중씨는 셋째 아들(광종)역을 맡은 상태였다.
<白頭山-京都帝國大學白頭山遠征隊報告>
힘겹게 찍어온 백두산 신은 물론 인상적이었다. 제국의 아침 첫 회(2002.3.2)에 방영되었던 이 장면은 큰 화제가 되었고, 서기 943년 신생 국가 고려의 왕자 형제들이 백두산에 올라 새로운 제국의 원대한 미래를 구상한다는 설정은 시청자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일본 교토대 백두산 원정대. 발라클라바로 얼굴을 둘렀다. 함경도의 조선인 소년들이 트럭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이 실제로 가능했을까? 꼭 고려시대 광종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역사 속의 위인들 중 한두 명은 겨울 백두산에 올라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친 광풍을 맞으며 민족의 독립이나 번영 등을 놓고 고뇌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사람이 백두산에 오른 첫 번째 기록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나온다. 조선 세종(世宗)이 역관(歷官) 윤사웅 등을 백두산에 오르게 하여 산높이와 위치를 조사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겨울철이 아닌 여름에 있었던 일이며, 이는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과 관련된 지리적 탐사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려 초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될 두 왕자들이 ‘겨울철’ 백두산에 올랐다는 드라마 속의 상상은 크게 3가지 이유로 비현실적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첫째 당시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가 아닌 거란의 세력권이었기에 평범한 백성도 아닌 왕자들이 아무런 호위병도 없이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했을 리 만무하고, 둘째 백두산이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라는 개념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왕건의 아들들이 굳이 그 높고 험한 산에 올라 고려의 미래를 고민할 특별한 유인이 없었다. 셋째, 설령 왕자들이 굳게 마음 먹었다고 아무런 장비나 전문적인 훈련, 체계적인 등반대의 조직력 없이 휘적휘적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엄동기 백두산이 물리적으로 그렇게 만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항령에 세워진 총 3동의 중계 텐트. 적설량을 짐작할 수 있다.
1934년, 겨울 백두산을 꿈꾼 사람들 그렇다면 백두산 동계초등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우리땅 백두산(白頭山)이 이름 그대로 백설에 덮여 가장 희게 빛나고, 등반 난이도 역시 가장 높아지는 겨울철에 누군가에 의해 최초로 등반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꽤 흥미롭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역사적 사실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학술적·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치밀하게 조명된 바가 없다.
기록에 따르면 엄동기 백두산은 ‘제국의 아침’에서 그려낸 고려 초가 아닌, 이로부터 1000년쯤 후인 1935년 1월 7일 오전 11시 30분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錦司) 등 7인에 의해 최초로 등정된 것으로 되어 있다. (손경석(1999)<북한의 명산>107~108p, 山と溪谷社(2005)<日本登山史年表>220p, 山と溪谷社(2005)<目で見る日本登山史>216p.)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6년 전인 1934년 12월에서 다음해 1월에 걸쳐 일본 ‘교토대 학사산악회(京都大學士山岳會 AACK ; Academic Alpine Club Kyoto)’가 동계 백두산 초등을 목표로 대한해협을 건너왔으며, 당시 교토대 팀은 12월 29일 허항령에서 등반을 시작해 무려 9일 만인 1935년 1월 7일 오전 해발 2,744m 백두산 장군봉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좌)중계 텐트에서 짐을 정리하는 광경. 짐에 영어로 표시를 해 놓았다. 보고서에도 현대적인 영어가 난무한다. 우)조선인 인부들이 소로 원정대의 짐을 나르고 있다. 원정대는 조선인 인부들에게 417원 50전을 지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부들은 베이스캠프 기준 24명이 동원되었으니 1인당 17원 정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교토대 팀이 백두산 동계 초등을 시도한 1934년은 세계 등산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30년대는 세계 등산 역사에서 가장 큰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일으키는 마지막 낭만의 시대였다. 이제 유럽 알프스의 첨봉들에는 구석구석 인간의 발길이 닿았으나, 아직 미지의 땅인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14개의 고봉은 사람들의 발길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3의 극지(極地)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 14봉은 1950년 안나푸르나로 시작해 1964년 시샤팡마를 끝으로 초등이 완결되며 등정(登頂)주의에서 등로(登路)주의로 진화하게 된다.
실제로 1909년 피어리(Robert Peary)가 북극점에 성조기를 꽂고(실제로는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논란이 있음), 남극점이 1911년 아문센(Roald Amundsen)에 의해 정복된 후 인류에게 남은 지구상의 마지막 탐험의 목표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중심으로 한 히말라야뿐이었다. 특히 1930년대는 제국주의가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였기에 히말라야 등정은 단순히 등반가들만의 관심사가 아닌 국가적인 자존심 경쟁으로까지 격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朝鮮の山人夫’란 설명이 붙은 사진.
1924년 영국 조지 말로리의 전설적인 에베레스트 등정 시도 이후, 1933년에는 티베트 쪽에서의 등정이 시도되었다. 1934년 7월에는 빌리 메르클이 이끄는 독일 등반대가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을 시도하는데, 악천후로 능선에서 16명이 고립되어 결국 9명이 사망하고 마는 대참사로 귀결되었다. 당시 독일 등반대는 나치체제의 우수성을 등산에서도 입증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너선 닐(2006)<셰르파, 히말라야의 전설>190~193p. )
1930년대 중반 히말라야를 놓고 벌어지는 이와 같은 열강의 각축은 제국주의 신흥 강국인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도 교토대학이 중심이 되어 1931년 창설된 ‘교토대 학사산악회(AACK)’는 이름과는 달리 해당 대학 출신이 아니라도 참가할 수 있었고, 애초부터 히말라야 등 해외 고봉 등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1931~1932년의 겨울에 우선 일본 본토의 최고봉인 후지산(富士山·3,776m)을 극지법(極地法)으로 오르는 것으로 준비를 시작한다.
극지법(polar-method)은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 캠프1, 캠프2식으로 고도를 올려 텐트를 설치하며 단계적으로 정상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1934~1935년 겨울의 목표로 백두산을 택한 것은 등정코스나 기후가 히말라야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도시 지역과 상대적으로 가까우면서 경사도가 급한 일본의 산과 달리 백두산은 개마고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순상화산(楯狀火山)인지라 등정 코스가 수십 km에 달하고 기온 역시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히말라야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위도상으로는 홋카이도나 사할린이 백두산보다 북쪽이지만, 산의 높이, 겨울철 최저 기온 등을 놓고 비교하였을 때 백두산은 당시 이른바 대일본제국의 최한지(最寒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일본을 넘어 히말라야 등 세계로 진출하고자 했던 일본 산악계로서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위해 뚫고 나가야 할 필연적인 마지막 관문이 백두산 동계 등반이었던 것이다.
교토대 백두산원정대의 구성 교토대학 백두산원정대는 총 18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대장이었던 이마니시(今西錦司) 등 7명은 학부를 졸업하고 교토대학의 강사 등으로 재직 중이었고, 학부 학생은 6명이었다. 아울러 기자가 2명, 일본 산악지역의 안내인 3명이 이른바 셰르파 역할을 위해 동참하였다. 기자로 참여했던 후지키(藤木九三)는 당시 이미 몽블랑·마터호른을 섭렵한 특급 클라이머였고, 의학박사와 의대생도 포함시켜 의료 측면까지 고려한 당시 일본 최강의 지덕체를 갖춘 드림팀이었다
무선전신전화송수신기 3조. 허항령에서 포태리까지는 유선전화가 가설되었다. 심지어 군용 전서구(傳書鳩) 8마리, 신호용 화약 3종, 건전지·축전지도 준비했다.
소가 끄는 달구지에 짐 싣고 캐러밴
이틀 뒤인 22일 오전 7시 경성(서울)역에 도착했고, 조선스키클럽·조선산악회 등과 성대한 환영만찬을 갖는다. 23일 오후 3시 경성역을 떠나 함경도 지역을 거쳐 혜산진에 도착한 것은 25일 저녁 6시였다. 이때 선발진에 이어 본대도 일본을 출발하여 백두산으로 접근하고 있었고, 모든 원정대가 합쳐져 이동을 시작한 것은 27일에서였다.
베이스캠프의 야경. 베이스캠프에는 원정대 이외에도 비적을 막기 위한 일본군 수비대, 조선인 인부들도 머물렀다.
자동차 3대에, 길이 험해진 이후에는 소가 끄는 달구지에 짐을 싣고 캐러밴을 해서 삼지연(三池淵) 인근 허항령(虛項嶺)에 대형 중계(中繼) 텐트 3동을 설치한 것은 29일이었다. 이때 1개 텐트에는 백두산 일대에서 출몰하곤 하던 비적(匪賊)의 출현을 방어하기 위해 수비대 경찰이 거주하고, 등반대는 다른 텐트를 쓰며, 세 번째 텐트에는 짐의 운반을 담당하는 24명의 조선인 인부들이 머물게 되었다. 결국 교토를 떠난 지 무려 9일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야영 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허항령에서 10km를 전진하여 간백산(間白山) 동편에 베이스캠프(B.C.)용 중형텐트 2동을 설치하는 작업은 해를 바꿔 1935년 1월 3일에야 완료되었다. 등반 대원뿐만 아니라 인부 20여 명도 닷새간 부지런히 중계 텐트와 B.C.를 오고 가며 작업한 결과였다. 특히 1월 3일에는 백두산 정상(당시에는 다이쇼 천황의 이름을 따서 大正峰이라 불림)을 공략하기 위한 3조의 돌격대를 편성하는데, 제1조는 오쿠(奧貞雄)를 리더로 7인, 제2조는 이마니시(今西錦司)를 리더로 5인, 제3조는 리더인 미야자키(宮崎武夫) 이하 6인으로 구성된다.
베이스캠프까지의 구축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으나, 이후 제1캠프(1,700m)는 1월 4일, 제2캠프는 6일에 설치되어 신속한 진행이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제2캠프가 유명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1931년 일본이 철거)’의 설치 장소 바로 아래쪽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좌)대원 한 명이 관측을 하고 있다. 한란계, 기압계, 습도계, 청우계, 풍속계 등이 활용되었다. 우)‘휴식(休息)’.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었는지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없고, 설원에 모여 삭풍을 피하고 있다.
백두산정계비는 청나라와의 국경획정을 위해 조선측 접반사(接伴使)인 참판 박권(朴權)과 청측의 총관(總管) 목극등(穆克登)이 대표로 설치한 비석인데, 백두산 정상의 동남방 4km 아래쪽(2,200m)에 위치해 있다. 당시 조선측 대표였던 박권 및 함경도 순찰사인 이선박은 고령이라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다 하여 목극등이 조선인 실무자들만 데리고 올라가 임의로 세웠기에, 훗날 최남선이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 ‘통분의 망국적 직무유기’라 평가한 사건이다. (손경석(1999)<북한의 명산>133~135p.)
1월 7일 아침 대장 이마니시(今西) 등 7인은 텐트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9시반에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정상공격조는 농학사인 히라요시(平吉)와 산악안내원인 사에키(佐伯) 이외에 호리(堀), 가토(加藤), 코지마(兒島), 타니(谷)는 모두 학부학생들로 구성되어 정상 초등의 영광을 학생들 위주로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마니시 등은 2시간 만인 오전 11시30분 정상에 올라 일본·만주 양국의 만세삼창을 하고 일장기를 게양하였다.
원정대는 백두산 정상 등정으로 일정을 끝낸 것이 아니었다. 1월 8일에는 폭풍설이 휘몰아쳐서 모든 대원들이 텐트에 틀어박혀 간신히 하루를 버텼으나, 9일에는 제2돌격대 위주의 멤버들이 완전결빙된 천지를 횡단하여 종덕사(宗德寺)를 방문하여 이곳에서 1박을 하게 된다.
종덕사는 천지에서 중국 송화강(松花江) 쪽에 위치한 라마교 사찰인데, 올해 북한의 월간화보 ‘조선’ 9월호가 종덕사의 옛 사진을 공개하고, 우리나라 일부 언론도 이 사진을 인용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사실 ‘조선’ 9월호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종덕사의 옛 사진 자체가 바로 교토대 백두산 원정보고서에 실려 있는 1935년에 촬영된 사진 중 한 컷이다.
스키를 신고 제2캠프로 나아가고 있다.
원정대는 10일 만주 쪽 장백폭포 좌우의 층암(層岩)과 백암(白岩)까지 올라 천지 주위의 다양한 지형들을 치밀하게 탐사하고서야 철수를 시작하여 11일 제2캠프, 12일 제1캠프를 접고, 14~15일에는 베이스캠프와 허항령의 중계캠프까지 종료시켜 포태리(胞胎里)로 하산한다.
16일에는 수비대, 경찰대와 함께 5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혜산진으로 이동하였다. 정오에 잠시 들른 보천보(普天堡) 농사시험소에서 원정대장인 이마니시 등의 강연이 있었고, 지역 유지들과 오찬을 가진 후, 오후에 도착한 혜산진에서는 메이지(明治) 회관에서 대규모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원정대는 18일에 경성에 도착하는데, 이때에는 조선총독부 관저에까지 초대되어 다과회를 갖게 된다.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宇垣一成, 1931~1936)가 직접 원정대를 만나 두 시간이나 환담하며 원정대를 격려하였다. 원정대의 숙소 역시 조선 최초의 근대식 호텔인 조선호텔이 제공될 정도의 환영 일색의 분위기였다. 원정대는 이후 경성에서 몇 차례의 강연 및 환영식 등을 마친 후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2캠프는 해발 2,200m, 백두산정계비 부근에 설치되었다. 정상이 가깝다.
당시 언론의 보도 훗날 교토대 팀의 백두산 동계초등은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되거나 상세하게 거론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지만, 사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부 산악인 외에는 ‘동계 초등’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지극히 낯선 상황이었다.
실제 당시 교토대 팀의 백두산 등정을 3차례에 걸쳐 보도한 동아일보는 식민시기 언론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눈 덮인 민족의 성산(聖山)이 일본인에게 초등되는 것을 우려하는 불편한 기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춘원단을 백두산서 맞어-교토제대의 캠핑대”동아일보, 1934.12.12. “백두산등산대 강풍으로 주저”동아일보, 1935.1.13. “백두산 탐험의 교토대원정대 귀경”동아일보, 1935.1.19)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등반은 “신년원단을 가장 씩씩하고 신선하게 맞이하는” 등반으로서 “동설의 백두산을 정복한 경도제대원정대”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동계초등’이라는 의미부여조차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반면 교토대 원정대는 이번 등반이 백두산 동계 초등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京都大學校(1935)<白頭山>8p. )
정상에 일장기가 설치되었다. 당시 정상은 다이쇼(大正)봉이라 불렸다. 현재는 장군봉이라 불린다. 북한의 김씨 일가와는 상관없고, 최남선도 <백두산근참기>(1926)에서 장군봉이라 불렀다. ‘백두산’이나 ‘장군봉’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자리를 잡았고, 다른 이름도 많다.
보고서 1935년 1월 7일 교토대원정대가 백두산 정상에 섰을 때는 영하 41도의 추위에 강한 바람으로 사진기의 삼각대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정상 주위의 바위에 일장기를 꽁꽁 묶어 놓고 천지 주변 풍경이 잘 드러나도록 촬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당시 원정대는 캠프1에서 일장기를 가져오는 것을 빠뜨렸기에, 대장인 이마니시가 자신의 침낭에서 흰 천을 네모나게 자르고, 신호용 붉은 깃발을 원모양으로 잘라 바느질하여 직접 수제 일장기를 만들 정도로 등반의 의미와 상징성, 빈틈없는 기록을 중시하였다. 또한 1935년 9월 <白頭山, 京都帝國大學白頭山遠征隊報告>라는 견실한 보고서도 냈다.
백두산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토대원정대원들. 원정대원들은 스키에 능숙했다. 수목한계선이 낮고 개활지가 많은 동계 백두산에서 스키는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1933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보고서를 참고한 이 책은 본문 148쪽, 사진 40장, 등반도·행정표(行程表) 각 1장으로 이루어졌으며 훗날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등반보고서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일본 산악계에서도 대표적인 명보고서로 평가되어 1978 ‘일본의 산악명저’ 시리즈로 선정되어 복각(覆刻) 재출판된 바 있다.
보고서는 본문 2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대장인 이마니시 가 백두산 원정의 의미를 설명했고, 니시보리(西堀)가 준비과정을 소개했으며, 미야자키(宮崎)가 일지(日誌)를 기록하였다. 제2부에서는 백두산의 기상(氣象), 식물, 동물, 의학적 측면, 사진 관련 소논문들이 게재되었다. 교토대원정대에 이른바 프로 산악인은 몇 명 참여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전공의 탄탄한 학문적 기반을 갖춘 대원들이 다수 참여함으로써 1930년대 당시의 백두산과 관련한 풍부한 사료와 과학적인 기록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등반의 이모저모 교토대 ‘보고서’는 부록편에서 크게 5가지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첫째 ‘회계보고’, 둘째 ‘장비품목 목록’, 셋째 ‘식량품목 목록’, 넷째 ‘의료용품 목록’, 다섯째 보고서를 쓰기 위한 ‘참고문헌 목록’이 그것이다. 본 보고서보다도 오히려 흥미로운 1935년 당시 등반대의 일상생활 및 등반의 즐거움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선 원정의 예산으로는 총 1만693원(圓)이 준비되었다. 원정에 참여한 대원들이 3,936원을 부담하였는데, 그 중에는 AACK측이 1,900원, 상대적으로 재정능력이 풍부한 아사히신문사 측에서 불과 2명의 기자가 참가했음에도 2,036원을 부담하였다
백두산 정상 중국 측에 있던 종덕사라는 라마교 사찰. 1945년경 철거되었다고 한다.
기부 받은 금액은 예산의 60% 정도에 해당하는 6,053원에 달했다. 이왕가(李王家) 하사금이 200원, AACK 회원이 595원, 일반기부 3,158원, 아사히신문사 2,000원 등이었다. 기타 영화회 및 사진 전람회 등을 통한 수익이 일부 발생하였다.
한편 비용 측면에서는 총 1만333원이 실제로 지출되었다. 장비에 소요된 비용이 4,893원으로 가장 많았고, 식량 833원, 여비 1,406원, 숙박비 594원, 인부비 598원, 운반운송비 513원, 혜산진수비대 등에 경비비보조 400원, 통신인쇄비 174원 등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미 당시에도 등산보험에 가입하여 288원을 지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비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크기의 텐트가 총 9점 사용되었고 침낭 및 방수포 역시 용도별로 몇 가지 종류가 준비되었다. 주목할 것은 무선전신전화송수신기가 3세트 사용되었다는 점인데, 백두산 원정은 이후 히말라야 원정을 대비한 사전 준비였기에 무선전화의 능숙한 활용 연습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기압계·한란계·습도계·풍속계 등의 관측장비들도 다수 포함되었고, 실제로 베이스캠프에서 측정한 매일의 기온변화표 등도 보고서에 상세히 수록되었다
베이스캠프에서 찍은 기념 사진. 교토대원정대는 총 18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사진 속에는 17명의 모습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 실린 총 40장의 사진 중 얼굴이 확인 가능한 유일한 사진이기도 하다. 당시 가장 어린 대학 1학년생이라 해도 1916년생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다면 94세이니 아무리 일본이 장수국가라 해도 이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식량품목을 들여다보면, 1930년대 등반대의 예상보다 풍족한 생활에 놀라게 된다. 쌀은 물론 교토 유명 제과점의 밀크빵이 무려 2300개나 준비되었고, 카레·토마토 케첩·각종 주스·버터·치즈·햄·소시지·양갱·건포도 등 현대의 어지간한 등산·캠핑에서도 빠뜨리기 쉬운 각종 기호품이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 심지어 차와 관련해서도 커피·코코아·홍차·녹차·분말 우유 등 가지각색의 음료들이 제공되었다.
의약품 역시 내복약, 외용약, 주사약, 의료용 기구, 생리학 실험용구 등이 풀세트로 준비되었는데, 등반대원 중에 의학박사 및 의대생이 있었기에 의료부문의 전문성 역시 높은 수준이었다. 원정대의 淺井東一 박사는 이 보고서에서 ‘의학적 방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게재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록은 이 원정을 준비하고 보고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서적을 소개하는 ‘문헌’ 목록이다. 근대 이전 40종, 근대 이후 98종, 총 138종의 문헌이 검토되었는다. 이 중에는 중국측의 사서(史書)는 물론 한국인들도 이름만 들었지 한번도 읽어본 적은 없는 <세종실록(世宗實錄)>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지봉유설(芝峯類說)>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30년대 이후 5년간의 저술에만 국한해도 석주명(石宙明)의 <백두산지방산접류채집기(白頭山地方産蝶類採集記)>(1934) 등 무려 27종이 참고문헌으로 소개돼 있고, 원정대 참가자들 역시 원정 직후 자신의 관심분야에서 각각 한 편 정도의 논문을 남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원정대원이 일장기를 치켜들고 있다. 백두산 동계초등이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줄조차 몰랐다는 것도 안쓰럽다.
뒷이야기 교토대학팀이 백두산을 등정할 무렵,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들도 비록 여름철이기는 하나 여러 차례에 걸쳐 백두산에 올랐다. 그 중 춘원 이광수가 1936년 ‘계명’이라는 잡지에 남긴 기고문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필자의 마음에 깊고 쓸쓸한 울림을 남겼다. 그것이 오늘 이 작은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광수‘계명’1936) 심혜숙(1997)<백두산>8p.
<白頭山, 京都帝國大學白頭山遠征報告書>(1935)는 33×36cm의 지도를 삽입하여 원정대의 이동경로 및 노영지(露營地)를 기록하고 있다(붉은 선이 이동경로). 우측 하단 惠山鎭(12.25)에서 虛項嶺 중계캠프(12.29), 베이스캠프(1.3), 제1캠프(1.4), 제2캠프(1.6), 백두산 정상(1.7) 순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축적 1/75,000, 대일본제국 육지측량부 발행)
교토제국대학 백두산 원정대의 주요 멤버
今西錦司(이마니시 킨지, 1902~1992)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일본 영장류 연구의 창시자. 1936년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강사. 1938년 내몽고학술조사대 참여. 1955년 교토대학 카라코람 힌두쿠시 학술탐험대 대장. 50세에 히말라야 줄루봉, 61세에 킬리만자로 등정. 1956년 일본 원숭이센터 설립, 1961~64년 제1~3차 아프리카 유인원학술조사대 대장. 1967년 교토대학 영장류연구소 설립. 1970년대 기후대학, 교토대학 명예교수. 1985년 일본 1,500산 등정 달성. 1992년 사망. 1994년 講談社 「今西錦司 全集」(전14권) 발간
西堀榮三郞(니시보리 에이자부로, 1903~1989) 교토부 출생. 15세 때 학교 선배인 이마니시와 청엽회(靑葉會)를 결성하여 등산활동을 시작했으며, 니시보리는 후에 이마니시의 여동생과 결혼. 1922년 아인슈타인 박사 부부가 일본 교토·나라를 방문했을 때 3일간 안내(영어 능통). 1927년 「설산찬가(雪山讚歌)」작사. 1936년 동경전기(현재의 도시바) 입사. 1939년 미국에 유학하여 남극탐험 준비. 1944년 진공관 ‘소라’ 발명. 1952년 전후(戰後) 일본인 최초로 혼자 네팔에 입국하여 마나슬루 등반허가를 얻어냄으로써 1956년 일본 등반대의 세계 초등 견인. 1956년 교토대학 이학부 교수 취임. 1957~58년 제1차 남극지역관측대 월동대장. 1958년 일본 원자력 연구소 이사. 1973년 칸첸중가 서봉(얄룽캉·8,505m) 세계초등 원정대 대장. 1980년 에베레스트 북동릉·북벽 등정대 총대장. 1989년 사망.
藤木九三(후지키 쿠조우, 1887~1970) 교토부 출생.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 중퇴. 1909년 도쿄 매일신문사 입사. 1915년 아사히 신문사로 이직. 1924년 일본 최초로 암벽 등반을 목적으로 설립된 RCC(Rock Climbing Club) 창설 주도. 1929년 최초의 암벽등반 이론서 「岩登り術」간행. 1930년 몽블랑 및 마터호른 등정. 1935년 백두산 동계초등 이전 이미 10여 권의 등반 전문서적 저술. 1959년 일본 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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