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2.12 사건과 인연이 깊다. 1987년 9월호 月刊朝鮮에 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을 처음으로 인터뷰한 이후, 이 역사적 사건의 내막에 관한 기사를 많이 썼고 책도 두 권 냈다. 1995년엔 12.12 사건 당시 지휘관들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입수하여, 10월호 부록으로 냈다. 내가 쓴 기사가 수사, 재판, 청문회에서 많이 인용되었다. 취재가 계기가 되어 이 사건의 主役들과도 친해졌다. 鄭昇和측 사람들과 全斗煥측 사람들을 두루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12.12 사건으로 全斗煥, 盧泰愚 정권이 탄생하였다. 광주사태는 그 과정의 사건이다.
역사적 영향력에서 12.12 사건은 광주사태보다 더 크다. 이틀 뒤가 되면 12.12 사건 30주년이다.
우선 12.12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된 鄭昇和 장군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한국의 현대사를 변혁시킨 10·26정변과 12·12사태의 현장 한가운데 있던 사람, 그 비밀을 간직하고 조용하게 살아온 鄭昇和 전 계엄사령관이 7년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 우리 군대를「민주국가의 군」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고
주장하는 鄭씨는 그 운명적 밤에 회오리친 역사의
증언자로 나섰다. <1987년 9월호 月刊朝鮮> 제1부 車智澈의 횡포와 釜馬사태 鄭昇和, 드디어 입을 열다 「인간으로서, 또 전술가로서 鄭昇和 전육군참모총장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다.
10·26뒤 그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노력했던
자취도 부인할 수 없다. 鄭장군은 그러나 張勉총리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와 역사의 무대에서 패자에게 돌아갈 것이라?
경멸뿐이다. 鄭총장이 그토록 군의 정치적 중립화를 신념으로 삼았다면 그는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야 했다. 그는 그럴 만한 힘도 갖고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느 쪽의 선의(善意)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듯, 그의 생각이 아무리 고결했다고 해도 힘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없었을 때 그런 신념은 하나의 감상에 불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鄭昇和씨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감정은 10·26∼12·12사이 온 국민들이 가졌던 그 부푼 희망을 그가 지키지 못했다는 데 대한 좌절감, 배신감, 경멸, 그리고 동정인 것이다.」 이 글은 기자가 1985년 7월호 월간조선의 기사에서 쓴 한 대목이다. 기자는 이 대목이 실린 책을 가지고 鄭昇和씨(62)를 만나러 갔다.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쌍룡아파트에서 그는 부인 申有慶씨(60)와 단 둘이서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鄭씨는 안경을 써 더욱 순하게 보였다. 전혀 꾸밈없고과장없는 말투는 기자를 아주 편하게 해주었다. 부인 申씨는 가정부 없이 혼자서 부엌일을 하면서 카피를 날라오고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申씨는 남편보다도 더 「순덕이」형이었고 부끄럼을 타는 편이었다.
지난 8월7일부터 사흘간 기자는 鄭씨와 만나 약 30시간의 인터뷰 취재를 했다. 鄭씨를 만나는 데는 만 2년이 걸렸다. 2년 전 기자는 鄭씨에게 전화를 걸어, 1979년 11월 말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鄭총장이 金大中씨에게 한 인물평에 관련하여 꼬치꼬치 캐물은 적이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기자는 鄭씨의 입을 열게 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자의 집요한 설득에도 최근까지 완강하게 침묵을 고집하던 그는 8월7일에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8년 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듯, 朴熙道 육군참모총장이 金大中씨에게 한 코멘트가 또 정치문제가 된 시점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 여부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리고 군부통치의 종식이 이 시대의 당면과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본 기자가 스스로 「역사의 패배자」라고 가혹한 비판을 가했던 鄭昇和씨와 마주 앉아 10·26정변과 12·12사태와 관련된 「역사적 증언」을 듣게 될 줄은 두 달 전만 해도 몰랐을 일이다. 鄭씨는 온 나라가 열병처럼 앓고 있는 노사 분규를 우려하는 말로써 기나긴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동안 누적된 문제들의 크기를 생각할 때 꼭 겪어야 할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순수한 노동자들을 이용하는 세력의 개입은 피해야 합니다. 정치적 이용만 없다면 노동자와 기업인이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4·19이후의 교훈을 잊어선 안됩니다. 張勉정부에게 너무 과도한 것을 요구하여 사회가 혼란하니까 군심(軍心)이 완전히 돌았고, 그 바탕에서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군의 선거 개입 거부 10·26과 12·12사태의 한복판에 있었던 鄭씨는 4·19와 5·16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다. 그는 『기자한테 비화 하나를 소개할까요』라고 했다. 1960년 4월26일. 그때 鄭昇和대령은 1군 사령관 유재흥(劉載興)중장의 비서실장이었다. 4·19계엄령으로 서울시내에 투입된 1군예하사단의 병력이 시위를 진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위를 방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던 때였다. 3·15부정선거로 민심이 李承晩정권을 떠난 것을 확인한 1군 장교들은 계엄군의 지휘관들에게 『절대로 발포하면 안된다』고 부탁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閔기식부사령관이 劉중장에게 이 사태에 대한 군의 태도를 결정하자고 건의했다. 사령관은 26일 아침 8시에 5개 군단장을 소집, 회의를 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鄭씨는 『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은 대통령이 하야하는 것밖에 없다는 결의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사령관과 부사령관은 이 결의사항을 미군 수석고문과 金鍾五 육군참모차장에게 통보했다. 이 회의에서는 이 결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 대비한 후보계획도 세웠다. 그것! 일종의 쿠데타였는데 육군대학총장 李鍾贊장군을 옹립한다는 것이었다. 李장군을 데리러 갈 경비행기를 鄭대령이 직접 준비시켰다는 것이다. 이럴 때 육군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매카나기 미대사와 金貞烈 국방장관이 오전 10시에 경무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중대조치를 협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오 무렵 李대통령의 하야성명이 나왔다. 鄭씨는 『1군의 결의가 미8군과 육본에 통보된 것이 하야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이렇게 국민 편에 섰던 군이 5·16직전에는 완전히 민주당 정권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선 군 장교들이 위협을 느끼게 됐어요.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지킨 나라인데,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먼저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朴正熙장군을 중심한 쿠데타 계획이 장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추진되었던 것입니다. 소수 병력으로 쿠데타가 성공한 것도 군 장교들의 이런 생각 때문이었어요. 군 장교들이 불안해지면 좋을 것이 없습니다』 志晩생도와 육사 교장 사이 鄭씨는 살아 있는 장군으로서는 韓信예비역대장(전 합참의장)과 함께 실전 지휘 경험이 가장 많은 야전지휘관으로 꼽힌다. 그런 그의 경력에서 어울리지 않는 직책이 있다. 그는 1963년을 전후하여 약 1년반 동안 육군방첩대장으로 있었다. 방첩대는 육군특무대의 후신이고, 국군 보안사령부의 전신이다. 『방첩대장으로서 정치의 추잡한 내면을 보게 되었고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뒤 지휘관 생활을 하면서 군법회의의 선고형량을 확인 결재하는 일을 여러번 했는데, 그때마다 괴롭더군요. 먹고살기 위해서 몇만 원씩 도둑질한 부하들은 감옥으로 보내는 데, 몇 천만원을 도둑질한 정치인들은 조사하고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었거든요. 방첩대장 시절 朴正熙-尹潽善 후보사이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나는 군을 투표부정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약간의 공을 남겼습니다. 그때 군인표는 尹후보 표가 더 많이 나왔어요. 저는 군사정권의 치적을 지휘관이 사병들에게 홍보하는 정도만 허용하고 투개표 부정은 못하게 했습니다. 부정선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는데 부정 부패의 척결을 명분으로 내걸고 5·16을 일으킨 군이 똑같은 죄과를 저지를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저는 상부의 압력을 받아냈습니다. 선거 뒤에 나의 비협조가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朴대통령과 閔기식 육군참모총장이 저를 감싸 주었죠. 민?ㅐ潔瑛? 되는 것과 동시에 저는 일선 사단장으로 나갔어요. 청와대로 신고하러 갔는데 그때 朴대통령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대통령은 鄭준장에게 『鄭장군이 방첩대 일과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 그런 수업을 한 번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맡겼다.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야전지휘관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하게. 내 한번 들리지』라고 했다. 鄭준장은 7사단장으로 부임했다. 朴대통령은 약속대로 鄭준장의 부대를 두 차례나 방문하여 점심을 같이 했다, 이때부터 鄭장군은 자신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9년 무렵 鄭昇和소장은 1군참모총장이었다. 그때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다, 그때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孫모 소장이 鄭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선거지역구에 사는 사병들에게 특별휴가를 실시하라』고 했다. 鄭소장은 『국회의원 한 자리 때문에 군이 동원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 이 지시를 韓信 1군 사령관에게 알리지도 않고 묵살해 버렸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지나치게 개인 충성을 강조, 군이 집권자의 사병화되는 경향을 만든 것은 그분의 실수입니다. 특히 군이 선거에 휘말려들게 된 것은 군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계기가 됐습니다』 1970년대 초 鄭昇和중장은 군단장으로 재직중 당시 감사원장 申斗泳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申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각하께서 鄭중장에게 관련된 불미스러운 보고를 받으시고 나에게 조사를 지시하셨습니다. 내사를 해 보니 그 보고가 완전히 모략이더군요. 각하께 보고했더니, 나중에라도 본인이 알게 되면 서운해 할테니 鄭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 신경쓰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1974년 朴대통령은 군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안보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3군단장이던 鄭昇和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朴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이 되고 보니 임진왜란과 6·26를 당시 지도층이 대비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시더군요. 전쟁이 임박했다는 말을 하면 국민이 우선 싫어하기 때문에, 또 전쟁에 대비하는 데 고생을 하기 때문에, 전쟁을 예고하면 인기가 떨어지고 위정자와 국민 모두가 전쟁이 없으리라는 방향으로 믿고 싶어지고, 그래서 설마 설마하다가 당했다는 말씀이었어요.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설마하다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설마설마하며 엉뚱한데 한 눈 팔다가는 본분을 지키지 못하니까요』 鄭장군은 1975년 9월∼1977년 12월 사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朴대통령의 외아들 志晩군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왔다. 어느날 예고 없이 대통령이 사관학교에 나타났다. 鄭장군에게 『오늘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학부형 자격으로 왔어. 지만이를 면회할 수 있겠나』라고 했다. 교장 공관에서 면회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부동자세로 서 있는 아들을 보고 『오늘은 사관생도 같구먼』이라고 흐믓해 했다. 식사를 하는데 대통령이 志晩군에게 맥주를 권했다. 志晩군이 머뭇거렸다. 대통령은 鄭중장에게 『나 오늘 청이 하나 있어』라고 말했다. 『생도에게는 금주인 줄 아는데 오늘은 맥주 한 잔을 허가해주게』 대통령은 아들을 향해 『자, 봤지. 교장께서도 허가했어』라면서 잔을 받도록 하더란 것이다. 육참총장으로 車智澈과 대결 순수한 군인으로, 또 야전지휘관으로서가 적성에 맞는 鄭昇和장군이 중앙의 정치권력권 속으로 휩쓸려 든 것은, 1979년 2월1일자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뒤부터였다. 1군사령관이던 그는 1월30일에 사전 임명통보를 받았다. 노재현(盧載鉉)국방장관이 공식으로 통보를 해주기 5분 전에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축하 전화를 걸어 주었다. 한 30분 뒤 車智澈 경호실장이 마침 1군사령부를 방문중이던 경호실 차장 李在田중장을 통해서 鄭장군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李중장은 『車실장이 이 점 꼭 전해달라고 저에게 당부하셨다』면서 車실장의 이야기를 옮겼다. 『어느 모로 보나 후임총장은 鄭장군이 되어야 하는데, 盧국방이 鄭장군을 빼고 자기 동기생인 朴熙東장군을 추천했답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친히 인사기록카드를 뽑아 鄭장군을 지명했답니다. 車실장은, 장관이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십디다』 이 말을 듣고 鄭장군은 대통령 주변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단박에 車실장의 이야기는 나와 盧국방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이간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장관이 한 사람만 추천할 수는 없어요. 나중에 정보를 수집해보니 저와 朴장군과 金鍾煥장군이 후보로 추천되었더군요.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사이가 나빠지면 나라가 망하는데, 경호실장이란 자가 없는 말을 꾸며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고는 아찔합디다. 취임식을 마치고 金載圭부장에게 인사차 들렀더니, 이 사람은 또 자기가 밀어준 준 같이 말해요. 그것 참…』 車실장에게 기분 나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자꾸만 생겼다. 취임 뒤 인사차 가겠다고 연락하니 『실장님이 바쁘셔서 추후에 일정을 알려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車실장이 자신을 기죽여 수중에 넣으려는 수작을 부린다고 판단한 鄭총장은 들어오라는 연락이 경호실에서 왔을 때는 『이번에 내가 바쁘다』고 퇴짜를 놓기도 했다. 그 얼마 뒤 3군 총장을 청와대에서 불렀다. 대통령이 부른 줄 알고 달려갔더니 車실장이 맞았다. 車실장은 경호휘장이란 것을 달아주었다. 鄭총장은 속으로 『이런 것은 대통령이 직접 달아주어야 하는데···』라면서 언짢게 생각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휘장증을 읽어보고 그는 경악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준 것이 아니라 경호실장이 수여자로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청와대 출입시에 꼭 달도록 부탁을 받았지만 鄭총장은 휘장을 달지 않았다. 車실장의 눈초리가 이상해지기도 했다. 車실장이 자신이 관리하는 모 군부대를 방문할 때 鄭총장더러 같이 가자고 한 적도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이 경호실장을 수행할 수야 있나』라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한! . 鄭총장의 기본자세를 알고부터는 車실장으로부터 인사부탁이 일체 없더란 것이다. 鄭장군은 총장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대통령에 의해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경호목적상 경호실장이 지휘할 수 있다」고 고쳐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도대체 민간인이 어떻게 군을 지휘할 수 있느냐』고 흥분한 그는 언젠가는 이 「언어도단의 규정」을 고쳐야겠다고 벼르던 중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鄭총장은 金載圭부장과도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金載圭의 후임으로 3군단장이 되었는데 전임자가 도처에 「金載圭」란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보고는 명예욕이 지나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1979년 3월에 鄭총장과 盧載鉉국방장관은 현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인사를 했다. 진종채 국군보안사령관의 후임으로 全斗煥소장을 추천, 대통령의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저와 장관은 車智澈 경호실장의 발호로부터 군을 지키고, 대통령에게 용이하게 접근, 군의 권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全소장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부마사태 때 공수단 투입 지시 1979년 10월17일 밤 9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공관에 있던 鄭총장은 청와대로 빨리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날 盧국방장관은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미국 국방장관 브라운을 접대하고 있었으므로 鄭총장이 불려간 것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朴대통령, 金載圭, 金桂元비서실장, 車智澈, 신직수(申稙秀) 법무담당특보가 앉아 있었다. 대통령은 鄭총장에게 앉으라고 하더니 金載圭에게 『부산상황을 총장에게 설명해 주라』고 지시했다. 설명이 끝나자 朴대통령은 침착하게 말했다. 『정장군, 현행법에는, 육군참모총장이 치안유지를 경찰이 할 수 없다고 감지했을 때 직접 계엄선포를 한 뒤 추인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어. 지금 각의를 소집하자니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그러니 정총장이 부산지역에 계엄을 선포한 뒤 추인을 요청해 주게』 대통령은 지역계엄사령관으로는 누가 적당하냐고 물었다. 鄭총장은 박찬경(朴贊競)군수사령관을 추천, 허가를 받았다. 車智澈이 그 자리에서 전화로 박사령관을 불러내더니 鄭장군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鄭총장이 朴사령관에게 계엄선포 사실을 알리고 병력배치를 지시하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정장군, 잠깐 기다려』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시계를 보더니 『11시에 국무회의를 할 수 있겠는데 …. 정장군 계엄준비만 해 둬!』라고 말했다. 朴사령관은 부산에는 실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鄭총장에게 말했다. 朴대통령은 『어느 부대를 신속히 투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鄭총장은 가장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부대는 공수여단이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차 실장! 1개 여단을 징발해!』라고 했다. 깜짝 놀란 鄭총장은 『각하! 공수단은 실장이 명령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대통령은 『그런가?』라면서 씩 웃었다. 『그날 밤 1개 여단이 부산으로 공수 되었습니다. 며칠뒤 공수단이 부산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시정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를 동원한 것은 신속한 투입을 생각해서 취한 조치였는데, 나중 광주사태 때도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특수 부대를 시위진압에 동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마사태 진압에 공수부대를 동원한 것은 車실장의 월권행위의 결과였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나돌고 있는데 鄭장군은 『그것은 나의 결정이었다』고 못박은 셈이다. 鄭총장은 부마사태의 원인에 대해서는,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으로부터 분석보고를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확한 보고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정부의 부정 부패, 말단 공무원의 고압적인 대민자세, 특히 경찰의 횡포, 김영삼씨 제명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이 문제들이 시급하게 시정되지 않으면 사태가 악화될 것 같다는 보고였는데 대통령께도 올라간 줄 압니다.』 제2부 10·26밤중의 육본 벙커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1979년 10월26일 오후 5시가 거의 가까운 시각이었다고 鄭씨는 기억한다. 부관인 黃대령이 정부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집무실 책상 위의 전화기를 들었다. 『정총장, 바쁘시오』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읍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오늘 저녁이나 같이 들면서 시국에 대해 이야기나 좀 나눕시다』 『그럽시다』 『저녁 7시까지 궁정동으로 오시죠』 鄭총장은 金부장이 3군 총장들을 초대하여 술을 대접했던 연희동 요정으로 착각했다. 鄭총장은 「궁정동」이란 이름에 생소했던 것이다. 부관이 『궁정동은 정보부장의 별채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고 알려주었을 때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에 아직 계엄령이 펴져 있고, 대통령이 삽교천으로 출타중인 때琯? 서울의 안보를 책임진 사람들이 술집에서 만난다는 것이 좀 꺼림칙했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 저는 대통령께서 이미 서울로 돌아오신 것을 몰랐어요. 대통령께서 삽교천에 가셨다는 것도 그날 정오 라디오 뉴스를 듣고 처음 알았습니다. 車실장이 대통령의 행방을 저한테도 알려주지 않는구나고 생각하니 화가 나더군요』 鄭총장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저녁7시 조금 못 된 시각에 승용차 편으로 궁정동 사무실에 도착했다. 현관에서 한 사나이가 鄭총장을 맞았다. 그 사나이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가려는데 차 소리가 뒤에서 들리더니 한 중년신사가 내렸다. 그는 鄭총장을 따라 들어왔다. 안내하던 사나이가 『총장님, 모르십니까』하면서 뒤따라 들어온 신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가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로서 국내정치담당을 하고 있던 김정섭(金正燮)씨였다.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안내된 방의 소파에 앉았다. 『오늘 김부장께서 갑자기 대통령 각하의 초대를 事맒챨?만찬장으로 떠나셨습니다. 만찬이 끝나면 여기로 오신다고 합니다. 그 동안 제가 총장님을 모시겠습니다. 저도 시내에서 누구와 만나고 있다가 갑자기 불려오는 길입니다』 金차장보의 설명을 들으니 鄭총장은 기분이 나빠지더란 것이다. 「취소할 시간도 있었는데 기다리게 하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어설까 하는데 金차장보가 『부장께서 총장님과 시국 이야기를 나눌 계획인 것 같으니 꼭 좀 기다려 달라』고 졸랐다. 金차장보는 ! 봉駭 대구출신인데 총장님을 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면서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고 한다. 김차장보는 鄭총장을 옆방의 식탁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걸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한 7시20분쯤 되었을까, 金載圭가 나타났다. 시끄럽고 수다스럽게 사과의 말을 하는데 술이 좀 들어간 듯했다. 『총장, 이것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시국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대통령 각하께서 부르시니 거역할 수도 없고…. 금방 끝날 것 같은데 곧 오겠습니다. (金차장보를 가리키며) 사실은 이 사람이 더 잘 알고 있으니 시국 이야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김차장보! 자세히 말씀드려. 나, 이거 참, 김영삼이도 만세 부를 수 있도록 공작해 놓았는데, 차지철이 때문에 다 망했어…』 金부장은 몇 번 너털웃음을 웃더니 사라졌다. (그 뒤 金載圭는 2층 집무실로 올라가 권총을 꺼내 뒷 호주머니에 넣고 마당으로 나와 박선호(朴善浩)와 박흥주(朴興柱)를 불러 거사준비를 지시했었다. 두 부하에게 金載圭는 『육군참모총장과 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돼 있겠지』라고 했다. 마치 육군참모총장이 이 거사 때문에 와 있는 듯 말했던 것이다). 『외부 소행인가, 내부 소행인가』 金차장보는 鄭총장에게 부마사태를 설명하면서 『내년 봄에는 학생시위가 더욱 격화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울에도 계엄을 선포해야 할지 모릅니다』고 했다고 한다. 鄭총장은 포도주를 서너 잔 마셨다. 물론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다닥』 『탕탕』 총성이었다. 6·25를 전후하여 피의 산야를 4년간 누빈 鄭씨는 『총성에 대한 나의 판단은 정확한 법이다』면서 당시를 회상한다. 『두 번 연발 총성이 울렸어요. 수십발이 아니라 10여 발이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그때 내가 있던 방의 유리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총성은 바로 앞은 아니고 약간 먼데서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궁정동에 그런 밀실 식당이 있고, 그 식당이 같은 경내에 있으며, 金載圭가 그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이 난 뒤 李在田 경호실차장도 그런 밀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하더군요』 鄭총장은 金차장보에게 『이것 총소리 같은데, 한 번 알아보시오』라고 했다. 차장보는 나갔다가 오더니 『파출소에 알아보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고 말했다. 『저는 총성이 경호실이 경비책임을 맡고 있는 청와대 외곽에서 난 것이라고 판단하여, 또 누가 신경과민 상태에서 위협사격을 했구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경호실 요원 이외에는 이 근방에서 총질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금방 총성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마지막 남은 포도주 잔을 마실 찰나였습니다』 鄭총장은 머리 뒤로 인기척을 느꼈다. 앞에서 시중을 듣던 식당 종업원이 물주전자를 들고 복도로 뛰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정총장, 크, 큰일 났습니다. 빨리 갑시다』 鄭총장은 그 목소리가 나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金載圭였다. 물주전자를 받아 주전자 꼭지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鄭총장을 붙들고 『큰일났습니다. 빨리 갑시다』고 끌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여튼 빨리 갑시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그 일이 아까 제가 들었던 총성과 관계가 있다고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김재규에게 이끌려 현관 밖으로 나가 승용차 뒷자리에 탔지요. 오른쪽에 김재규, 왼쪽이 김정섭, 나는 가운데였어요. 앞 자리에 탄 사람이 박흥주 대령이란 것은 그 뒤에 알았고. 궁정동을 나선 승용차가 왼쪽으로 돌아요. 나는 오른쪽으로 돌아 청와대로 갈 줄 짐작했는데 이상하게 생각해서 김부장에게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다그쳤지요』 金載圭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펴더니 밑으로 몇번 돌린 뒤 『각하께서 저격당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내부 소행입니까, 외부 소행입니까』 鄭총장이 말한 「내부」는 청와대 경호실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신이 없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께서 돌아가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鄭총장은 金載圭가 맨발로 허둥대며 물을 들이키고 당황하는 모습에서 『정신이 없어 잘 모를』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정총장, 북괴가 알면 큰일입니다. 국가의 운명이 정총장의 양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육본 벙커에서 군 수뇌 호출 6·25때는 백골부대 대대장으로서 수십 번이나 사선을 넘었던 鄭씨는 『내가 이때 정신을 안 차리면 나라가 망하겠구나』하는 생각이 그때 들더라고 회상한? 『순간적으로 북괴의 남침이 걱정되더군요. 朴대통령을 시해한 측이 북괴와 연결돼 있다면 전선에서 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범인은 차지철이 아닐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지더군요. 그에 대한 나의 좋지 않던 감정이 그런 생각을 하도록 했을지도 모르죠. 차실장이 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해 왔고, 경호실에다가 육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일선부대장에게 연락할 수 있는 시설을 해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지방으로 나가실 때는 군에 알리지도 않았고, 국회의 요직 임명이나 정치자금에도 손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큰일 낼 놈」이란 인상이 뇌리에 박혀 있었거든요. 더구나 대통령이 경호실의 관할지역에서 저격당했다고 하니 차지철이가 범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뒤에 들으니 盧載鉉 국방장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답니다. 차지철이 그런 짓을 했다면 서울 부근의 군 지휘관들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크다, 잘못하다간 내란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金載圭가 『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 선포하면 서울로 군 병력이 빨리 들어올 수 있읍니까』하고 물었다. 鄭총장은 『3개 사단이 즉각 출동할 수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라고 했다. 승용차가 삼일고가도로로 접어 들었을때 鄭총장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金載圭가 『정보부로 가자』고 했다. 鄭총장은 군의 장악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본부로 가자』고 했다. 앞자리에 탄 朴대령도 이에 찬성하여 승용차는 미 8군 영내를 지나 육군본부 지하 벙커 앞에 도착했다. 밤 8시15분경이었다. 먼저 金載圭가 내리고 鄭총장도 따라 내렸다. 벙커쪽으로 다가가니 보초가 M16을 겨누며 『손들어!』라고 고함쳤다. 『나 총장이다!』면서 鄭총장이 계속 걸어가자 보초병은 막무가내로 『손 들어! 서! 안 서면 쏜다!』고 소리쳤다. 차마 손을 들 수는 없어 鄭총장은 『총장이다, 급하다!』고 말했다. 이때 벙커에서 한 대령이 나왔다. 鄭총장은 대령을 불러 『나 총장인데, 내 얼굴 알겠지?』라고 물어 확인을 시킨 뒤 뒤에 서있는 金載圭를 가리키며 『저 분을 (벙커내) 총장실로 안내하라』고 지시하고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벙커 내 상황실에서 鄭총장은 우선 국방장관과 군 수뇌들을 소집하고 육본내 병력을 비상소집, 실탄을 지급하여 경비를 서게 했다. 그는 군 수뇌들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그는 군 수뇌들에게 전화를 걸게 하여 직접 육성으로 『큰일이 생겼으니 빨리 육본 벙커로 나오라』고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당직 장교들이 이 전화, 저 전화를 붙들고 『총장님, 전화 나왔습니다』고 외치는 등 분위기가 부산해졌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것은 盧載鉉 국방장관이었다. 청와대를 포위하라! 盧장관은 鄭총장이 벙커 안에서 전화를 건다고 하니까 감을 빨리 잡고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곧 가지요』라고 했다. 이어서 金鍾煥합참의장, 유병현(柳炳賢)연합사 부사령관, 해군참모차장(총장은 지방출장중), 공군총장 등과 연락이 닿았다. 다음에 鄭총장은 1, 3군 사령관을 전화로 불러내 『중요한 사태가 발생했으니 비상대기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침투 공비를 수색하던 부대까지 본대로 귀환시켜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실제상황이다』고 鄭총장은 강조했다. 鄭총장은 수도권의 군 부대지휘관들과 통화할 때 신경을 곤두세웠다. 車실장이 변란을 일으키려 했다면 수도권 부대와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도경비사령관 전성각(全成珏)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鄭炳宙)소장,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중장, 그리고 사단장들과 통화할 때 鄭총장은 신문하듯 했다는 것이다. 『너의 부대는 이상없나?』 『이상없습니다』 『정말 이상없나』 『정말 이상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읍니까』 『중요한 사태가 발생했다. 부대를 잘 장악하라. 어떤 경우에도 나의 직접 명령 없이는 부대를 이동시켜선 안돼!』 鄭총장은 『저는 통화중에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낌새를 알아내려고 신경을 썼지만 수도권 부대가 동요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일단 안심을 했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즉시 벙커로 들어오라고 지시했지요』라고 했다. 鄭총장은 벙커로 출두한 수도경비사령관을 벙커내 총장실로 불러 『대통령께서 만찬중 저격을 받아 돌아가셨다. 내부소행인 것 같다』고 귀뜸한 뒤 『수경사 병력을 완전 장악하고 청와대를 포위하라』고 지시했다. 全사령관은 『저도 경호실 생리를 잘아는데 근접 포위하면 상호 충돌의 위험이 있습니다. 원거리로 포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鄭총장은 경호실차장 李在田중장과 全사령관이 동기생으로서 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어 『두 사람끼리 협조하여 충돌이 없도록 하고 원거리로 포위하라』고 지시했다. 『벙커 안에서 지침을 내리느라고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입구에서 金載圭와 苡沮?뒤에는 그를 만난 적도 없었고 이희성(李熺成) 육군참모차장은 소집되어 나온 뒤 내 옆에 줄곧 있었습니다. 제가 분주하게 내리는 지침을 차장이 정리하여 문서화하도록 한 것입니다』 「보안유지」싸고 실랑이 잠시 숨을 돌릴 때가 있어 鄭총장이 벙커내 총장실로 갔더니 盧국방과 金載圭가 침대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군 수뇌급 장성들도 있었다. 鄭총장이 들어서니 주인자리가 비어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아무나 내 자리에 앉았을 것인데, 상황이 바뀌니까 모두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청와대에서 金桂元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盧국방장관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옆에서, 이리로 오시라고 하라고 국방장관에게 재촉했습니다. 청와대로 갈 경우에 납치될 위험성이나 상황이 뒤집어질 가증성도 배제할 수 없는 때였죠. 盧장관이 전화기를 놓더니, 총리 이하 장관들이 이리로 오기로 했다고 말합디다. 안심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저도 일단 안도했습니다. 청와대가 불순세력의 장악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범행이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는 판단이 섰으니까요. 저는 부관을 시켜 李在田경호실 차장을 찾게 했습니다』 곧 李차장이 전화에 나왔다. 鄭총장이 먼저 말했다. 『당신, 지금 어디서 전화 받고 있오?』 『청와대 안입니다』 『아무일 없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총장님 무슨 일입나까?』 『경호실은 어떻소?』 『조용합니다』 『알았오. 지금 긴급사태가 발행했으니 경호실 병력을 장악하시오. 수경사 병력으로 하여금 청와대 외곽을 차단하게 했으니 서로 충돌이 없도록 하시오. 내 명령 없이는 병력을 움직이면 안되오!』 대강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밤 9시30분쯤 崔圭夏국무총리, 金桂元비서실장, 具滋春내무장관, 金致烈법무장관, 朴東鎭외부장관 등이 벙커내 鄭총장 사무실로 들어왔다. 『좁은 방안에서 둘러앉아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나는 옆에서 듣기만 했오. 김재규는 보안유지를 계속 주장하고, 국민이 알면 안된다, 북괴가 알면 큰일난다고 말하고, 김치열 법무장관 등 일부 각료들은 그런 보안유지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하더군요. 양쪽이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했어요.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시점을 선포시간으로 정했고,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지요. 벙커는 너무 좁아서 국방부 상황실에서 비상국무회의를 밤11시에 열기로 결정했고, 총리 이하 장관들과 김재규는 거기로 옮겨 갔습니다. 나는 벙커에 남아 계엄령 선포에 따른 업무 지침을 시달하고 있었습니다. 계엄령 선포에 따른 작전계획은 미리 짜둔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북괴의 동향이 아직 걱정되므로 서부전선의 병력은 빼지 않고 다른 사단을 빼내 서울로 불러들이기로 했지요. 부대 이동은 일반시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통행금지시간내에 완료, 새벽 4시까지는 목표지점에 도달하도록 했습니다. 밤11시 조금 지나서, 이희성 차장이 남은 일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 ! ♣피求 데 올라가 보시지요, 라고 권했습니다』 金載圭를 체포하라 鄭총장이 국방부상황실에 가니 아직 국무회의는 열리지 않고 있었다. 육사5기 동기생인 崔澤元총무처차관이 소집책임자였는데 『아직 장관들이 다 모이지 않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鄭총장은 국방장관실로 들어 가려고 부속실을 지나가는데 金桂元비서실장이 장관실에서 나오다가 마주쳤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金실장이 鄭총장을 끌었다. 이때 부속실에 있던 국방장관 보좌관 조약래(趙若來)준장이 『제방이 조용합니다』면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盧국방장관도 뒤따라 그 방으로 들어 왔다. 金실장이 상좌에, 장관과 총장이 양쪽에 마주 앉자 金실장이 입을 뗐다. 『여보, 김재규와 차지철이가 다투다가 김재규의 총에 각하께서 돌아가셨어』 鄭씨는 『金실장이 그때도 김재규가 각하를 쏘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金실당은 말을 이었다. 『김재규를 체포해야 하겠는데 저게 눈이 시퍼렇게 되어 나만 노려 보고 있으니…』 鄭총장이 체포지시를 하려고 일어서는데 金실장이 『여보 조심하시오. 김재규가 아직 권총을 갖고 있어』라고 말했다. 『저는 육본 벙커로 내려가 김진기 헌병감(준장)을 불러 체포를 지시했습니다. 내가 찾는다고 김재규를 불러내어 복도에서 체포하라고 했지요.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불러들였습니다. 헌병감이 체포한 김재규의 수사는 보안사에서 맡도록 지시했지요. 계엄이 선포되면 헌병감은 계엄사 치안처장이 되므로 보안사령관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할 계획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방첩대장을 지냈으므로 시내에 안가(安家)가 있는 것을 알고 있어, 김재규를 안가로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조심해서 다루라고 지시했어요. 대통령 시해범이라고 지시했어요. 대통령 시해범이라고 너무 거칠게 다룰 때 사고가 날까 걱정해서 한 말이지 정중하게 모시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鄭총장은 李희성차장과 함께 벙커내 총장실에서 앉아 체포보고를 기다렸다. 굉장히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그때도 鄭총장은 朴대통령이 일종의 오발사고 비슷한 걸로 죽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金載圭가 살의를 가지고 쏘았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金桂元비서실장이 내려오더니『어떻게 됐나?』고 물었다. 鄭총장은 헌병감을 찾았으나 직접 연락이 닿지 않았다. 『곧 실행한다』는 보고가 간접으로 올라왔다. 金실장은 리볼버권총을 한 자루 鄭총장에게 건네주면서 『현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총장에게 맡길테니 수사에 참고하라』고 했다. 李희성차장이 만져보더니『아직 탄피가 들어 있군요』라고 했다. 그 총에는 소지자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었다. 27일 새벽 0시 30분쯤 金晉基헌병감이 오더니 김재규를 체포, 권총을 빼앗고 보안사에 인계하였다고 보고했다. 金載圭를 유인하는데 조마조마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한 시간도 안돼 全斗煥보안사령관이 1차 보고를 해 왔다. 『진범이 틀림없다고 하더군요. 김재규가 차중에서, 또 수사받을 때, 이제 새 세상이 온다고 큰소리를 치더랍니다. 전두환 사령관은 또 현장에 수사팀을 보내야겠는데 무장경비원이 지키는 곳인 만큼 병력이 필요하다면서 경호실에 소속된 1개 헌병중대를 지휘할 후 있게 해달라고 해서 허가했지요. 그 뒤 현장약도가 보고되어서 비로소 그곳이 내가 김정섭 차장보와 식사를 같이 했던 정보부장 집무실에서 가까운 데 있고, 내가 들었던 간밤의 총성이 대통령과 경호원을 쏜 총성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제가 전두환 사령관에게, 아니, 이런 데가 있는 것 몰랐어, 하고 물었더니, 「저도 경호실차장보로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고 말하더군요』 수사에 간여 안해 鄭총장이 국방부 상황실에서 열리고 있던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한 것은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이때 처음으로 盧국방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펴자고 제안한 것을 알았다. 제주도를 빼면 부분계엄이 되어 계엄사령관은 국방부장관의 지시를 받고, 全國계엄이 되면 대통령의 지시를 받게된다. 鄭총장은 盧장관의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국무회의는 계엄령 선포 뒤에 정부가 취할 조치에 관해 왈가왈부하고 있었으나 결론이 쉽사리 나지 않았다. 鄭총장은 혼자서 육본벙커로 내려와 평시에 계획이 돼 있던 포고문안을 가져왔다. 발언을 요청한 그는 『포고문이 준비된 것이 있으니 읽겠습니다』고 했다. 金致烈 법무장관이 『정치활동의 금지는 국회의 활동까지 포함하느냐, 집회금지는 옥외만 대상으로 해야 될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鄭총장은 『옥내집회는 허용되며 국회활동도 제한받지 않는다』고 했다. 박찬현 문교부장관은 『고교까지 휴교 시킬 필요는 없다』고 하여 대학교만 휴교시키기로 했다. 두 장관만 이의를 제기할 뿐이어서 포고문은 쉽게 통과되었다. </! SPAN> 鄭昇和씨는 『대통령이 시해된 사건인 만큼 그 수사는 누구도 가리지 않고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여 합수단이 하자는 대로 하게 했다. 특히 내가 현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점과 관련하여 말이 많아 신경도 쓰이고 해서, 나는 수사에 전혀 간여하지 않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다음날 全斗煥합수단장은 鄭총장에게 金桂元실장을 연행하도록 해달라고 건의, 이를 허락했다. 金실장은 鄭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관들이 와서 가자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다. 鄭총장은 『워낙 사안이 중대하므로 협조해 주셔야 하겠습니다』고 했다. 3일 뒤 金실장은 구속되었다. 全斗煥사령관은 또 鄭총장에게 『정보부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을 조사해야겠는데 우리가 가면 시비가 예상되니 육군본부로 소집해 주십시오』라고 건의 했다. 鄭총장은 全在德차장에게 『27일 오전 8시까지 국장급 이상을 육군본부에 집합시켜 달라』고 지시했다. 27일 오전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발표, 합동수사본부의 발족을 알리면서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즉 중앙정보부의 모든 기능을 합동수사본부에서 흡수하도록 한 것이다. 국군 보안사가 주축이 된 합수단은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지휘할 수 있는 자리로 격상되었다. 계엄업무라고 해 보았자 거의 전부가 朴대통령 살해사건 수사였으므로 자연히 합수단으로 일과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유순한 성격의 鄭昇和계엄사령관은 천성적으로 비정치적인 인물인데다가 10·26사건에서 자신의 결벽성이 의심받고 있다는데 신경을 써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합수단에게 재량권을 많이 주었다. 11월1일 鄭昇和총장은 합수단이 보낸 정경식(鄭京稙)검사에게 참고인 진술을 하기로 했다. 10·26 이후 국정은 거의 매일 열린 시국대책회의가 이끌어 갔다. 참석자는 崔圭夏대통령권한대행, 申현확부총리, 朴東鎭외무, 具滋春내무, 金致烈법무, 盧載鉉국방, 金聖鎭문공, 金鍾煥합참의장, 鄭昇和 계엄사령관이었다. 이들은 金鍾泌씨와는 거리가 있고, 9명중 5명이 경북사람들로서 朴대통령의 개인적 신임을 많이 받아온 인물들이었다. 장관회의에선 발언 삼가 鄭昇和씨는 시국대책회의에서도 거의 발언을 하지 않고 조심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회의에는 노 국방장관이 참석하여 군을 대표한 발언은 장관이 먼저 하니까 저는 따로 할말이 없읍디다. 제가 이야기를 많이 하면 군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오해를 받을까해서 스스로 발언을 삼갔어요. 11월초인가, 그날도 시국대책회의에 참석차 가는데 노 국방과 같이 탄 차중에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시국대책회의에 제가 항상 참석하는 것은 그만두어야겠다고 했어요. 군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국방장관이 참석하는데 계엄사령관까지 나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했어요. 노 국방도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날 회의에서 제가 최규하 대행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집디다. 그래서 제가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고 부르면 언제든지 참석하겠다고 안심을 시켰지요. 그러나 그 뒤로도 나를 부르는 날이 많아 결국은 계속해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鄭씨는 『청와대 비서실과 정보부 등 권력의 핵심이 무력화되니까 정부 부처에서 계엄사의 눈치를 보는데, 자기들 고유 업무까지도 이쪽에 물어 처리하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국방장관에게, 과거의 타성을 버리고 줏대 있게 업무를 처리하도록 최규하 대행에게 건의해 달라고 했습니다. 시국대책회의에 참석해 보니까 국민 편에 서서 소신 있게 일을 하려는 분으로는 申현확부총리와 金致烈 법무장관이 두드러지더군요』 이 무렵 국무회의에서는 각부 차관들을 모아 실무대책반을 구성하여 국방차관을 위원장으로 삼고, 국방장관 아래에 두기로 합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鄭총장은 盧국방에게 부당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런 기구는 총리 직속으로 두어야지 국방부 밑에 두면 군이 정치에 간여한다는 오해를 부르게 된다』는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崔대행이 통대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뒤, 내각을 짤 때 어느 정치인이 그에게 『각하께서 계엄사령관이 장관을 한, 두 명 추천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을 전해 왔을 때도 『나는 그런일 못한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군 지휘관들에게 정치중립 강조 朴대통령 국장에 참석하러 온 베시 전 유엔군 사령관(당시 미 육군참모차장)이 鄭총장을 예방, 한국군의 생각을 물었을 때도 鄭총장은 『우리는 국토방위에만 전념할 것이다』고 말했다고한다. 유신헌법을 개정한다는 방침을 국무회의가 정했다는 소식을, 鄭총장은 盧載鉉국방장관으로 부터 들었다고 했다. 『당장 새 헌법을 만들어 새 대통령을 뽑기에는 너무 시간이 걸리니까, 일단 현행헌법에 의해 과도수반격인 대통령을 뽑은 다음 그의 책임하에 헌법을 개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면서 내 의견을 물어요. 새 대통령으로는 최규하 대행을 추대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죠. 나는 물론 찬성했는데 과도정권의 기간을 2년으로 잡는 것은 너무 길다, 1년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어요. 노 장관은 2년은 최장으로 잡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나서서 정부의 그같은 방침을 군인들에게도 잘 납득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군단장 이상급 군 지휘관들을 육군회관으로 초청, 식사를 하면서 정부의 방침을 전해주었습니다. 저는 이번이 군과 국민이 친밀해져 정치발전을 도모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또 앞으로는 군이 절대로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 나도 정치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는 국방장관을 통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육군본부에서 사단장급 이상 군 지휘관을 소집, 정부의 방침을 설명한 적도 있는데 李建榮 3군사령관이 곤혹스럽다는 말을 하더군요. 군인들에게 그때까지는 유신헌법이 최고라고 교육해왔는데 이걸 바꾼다면 또 어떻게 홍보를 해야 하느냐고. 제가 이렇게 말했지요. 유신헌법이 그 상황에서는 최고였지만 그 주체이던 朴대통령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더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 될 게 아닌가 …』 79년 11월8일 뉴욕타임즈는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군부의 고위장성들이 10월 29, 30일 양일간 국방부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유신헌법을 폐기하기로 비공식 합의를 봤다. 朴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全斗煥장군 등 일부 젊은 장성들은 빠른 시일 안에 이 헌법을 폐기하는 것에는 반대했다」고 보도했다. 鄭씨는 『그런 비밀모임이나 결의는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이즈음의 鄭昇和 계엄사령관에 대해 金致烈 당시 법무장관은 최근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시국대책회의에서 그를 자주 만나면서, 이런 장군이야말로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순수한 군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주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정치적인 야심 같은 것은 엿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민간 각료들의 결정에 간여도 하지 않았고 우리의 결정은 받들어 실천하겠다는 문민우위의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정총장이 10월26일 밤 육본 벙커에서 한 행동을 잘 아는 나는 그가 김재규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치장교 숙청 여론 무마에 애썼다 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은 그해 11월10일 담화문을 발표, 「현행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되 선출된 새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지 아니하고 빠른 기간내에를 실시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온 국민들이 민주화의 꿈에 들뜬 순간이었다. 鄭昇和총장은 이무렵 1, 2, 3군 및 군수사령부를 돌면서 모두 여섯 차례(1군과 3군에서 각 2회, 2군과 군수사에서 각 1회)에 걸쳐서 대령이상 군지휘관들에게 특별훈시를 했다. 그 내용은 거의 전부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鄭씨는 말했다. 『약 한시간씩 연설했어요. 저는 우선 10·26이 혁명도 변혁도 아닌 하나의 사고라고 규정했어요. 5·16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5·16때는 군이 사회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치에 개입할 수가 있었다. 능력면에서도 그때의 군은 민간부문을 리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국민들은 충분히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숙되어 있고, 군보다 민간부문이 훨씬 더 발전해 있다. 군의 능력이 가장 뒤떨어져 있다. 경제도 발전하여 선진국의 문턱에 있다. 이럴 때 또 다시 군이 정치판에 뛰어들면 경제는 퇴보하고 정부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이다. 우리는 국방에만 전념해도 벅차다. 한눈을 팔 여유가 없다. 미군의 도움이 있어야 겨우 북괴와 군사력 균형을 유지할 수가 있을 정도다. 군이 국방이 이외에 참견하면 군도, 나라도 그르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군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내 자신이 참모총장으로 있는 한 절대로 군의 정치간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대강 이런 요지의 연설을 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숙연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훈시한 뒤에는 다과회를 갖고 장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들도 저와 같은 의견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鄭昇和씨는 기자를 상대로 8년 전의 연설을 다시 하듯 열띤 말투로 이야기하였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鄭장군에게 반대한 장교들은 없었나요?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치간여 반대가 군의 여론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민주주의국가의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여론이었어요. 군에서 밀어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주로 청와대 경호실과 정보부 등에 파견되었던 장교들을 겨냥한 여론이었는데, 이런 문제로 군의 단결이 약화되어선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제가 나섰습니다. 3개 군사령부에서 장교들을 모아놓고 제가 설득했습니다. 우리 군인들이 보직을 명령대로 받지 언제 자기 희망대로 선택하는 거냐. 청와대서 근무했건 정보부에서 일했건 명령에 따라 복무한 장교를 매도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장교를 쫓아 낸다면 누가 명령대로 가겠는가. 다만 그가 어디에서 근무했건 장교로서의 자질을 잃었던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심사하여 처리할 일이다. 절대로 일괄처리는 안된다. 이렇게 연설했는데, 저는 현정부가 안정된 다음, 즉 80년 봄쯤에는 군에서 지탄받는 장교들을 처리할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군 생활을 하면서 국민의 군대여야 할 국군이 집권자의 사병으로 취급되는 것을 보고 실망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그무렵 鄭총장께서 육사 11기의 핵심인물인 金復東대통령경호실차장보(소장)를 부군단장으로 보내고, 수경사령관을 교체하셨는데, 이것은 정치장교의 정리 방침과 관련이 있었읍니까? 『전혀 관계없는 인사였습니다. 저는 김소장 같은 장교를 정치장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김 소장을 수도군단 부군단장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안 받겠다고 해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군단으로 보냈어요. 金成珏 수경사령관은 그때 계급정년이 임박해 있었는데, 朴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에 全장군의 진급을 저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全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3군단장으로 보내고 3군단장이던 尹誠敏중장을 참모차장으로 데리고 왔었지요. 李희성차장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고, 교육참모부 차장이던 張泰玩소장을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한 겁니다』 ―鄭炳宙사령관을 특전사령관으로 계속해서 붙들어 둔 것은 鄭총장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뜻이 아니었읍니까? 『그렇지 않아요. 鄭사령관은 5년이나 그 자리에 있었는데 계급정년의 시한인 80년 봄에 승진시켜 다른 데로 보내려고 했어요. 후임으로는 특전사 출신으로 소장인 鄭鎬溶사단장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직접 그를 모르지만 주변에서 좋게 이야기 하더군요』 김종필의 대통령후보사퇴 배경 鄭昇和씨는 합수단장이 부정축재자 수사를 건의한 것도 묵살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내가 국민의 영웅이 된다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어요. 국방장관과 그 문제를 의논했는데 저와 의견이 일치했어요. 지금이 그런 수사를 할 단계도 아니고, 군이 정치에 간여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고는 그런 수사를 못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부정축재자 명단을 일단 만들어 두라고만 지시해 두었오』 79년 11월12일 공화당은 당무회의와 의원총회를 잇달아 열고 金鍾泌상임고문을 총재로 선출했다. 공화당은 15일 저녁에도 의원총회와 당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보선에 金총재를 후보로 내세우기로 결의했다. 鄭昇和씨의 증언을 듣는다. 『15일 아침 시국대책회의가 있어 갔더니 申현확부총리, 具滋春내무, 金致烈법무장관 등이 낭패한 표정으로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에서, 특히 吳致成씨 같은 사람들이 주동이 돼 가지고 金鍾泌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밀기로 했다는 거에요. 이쪽에선 崔대행을 추대하기로 결정해 놓았거든요. 저는 이렇게 돼선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사무실로 돌아와 평소부터 잘 아는 길전식(吉典稙) 공화당 전 사무총장을 전화로 불러내 물어보았지요. 吉의원은, 金총재가 내일 대통령출마 권고를 거절하기로 되어 있다고 말하더군요. 당에서는 그런 결의를 하고 총재는 이를 거절하여, 일종의 정치적 쇼로써 金총재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런다고 해 놓고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면 큰일 나오, 라고 했더니, 吉의원은, 안심하라고 말하더군요. 이것 이상의 압력은 없었습니다』 이 무렵 시중에서는 鄭昇和 계엄사령관의 「정치적 언동」이 새 나와 그가 어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렀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金大中씨에 대한 발언이었다. 『언론인들과의 모임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전에 金大中씨에 대한 정보보고서철을 제가 다 읽어 두었어요. 어느 언론인이 金大中씨가 대통령으로 뽑히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국민이 뽑으면 할 수 없지만, 국민들이 그에 대해서 잘 안다면 뽑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우리 언론이 金씨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국민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회의원 정도이면 몰라도 북괴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적으로 불투명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도 말했어요. 金씨에 대한 견해는 나의 사견이었고,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金大中씨는 부패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셨다는데…. 『꼭 그런 표현을 쓴 것은 아니지만 부인은 하지 않겠습니다』 세 金씨와의 균형상 盧泰愚 민정당총재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육군방첩대장일 때 노 대위가 내 밑에서 정보과 근무를 했지요. 그 뒤로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은 없으나 그가 가끔 나를 찾아온 기억은 납니다. 그때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죠』 공개·공정 재판 지시 10·26사건은 쿠데타도, 혁명도 아닌 살인사건이었다. 따라서 계엄업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사와 재판진행이었다. 수사와 재판에서 鄭총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려 했고 공정을 기하려 했다는 것은 굳이 그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여러 자료로써 뒷받침되고 있다. 『제가 김재규와 합세하여 쿠데타를 꾀했다는 루머 때문에 상당한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에 있던 아들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서, 정말 김재규와 관련이 없느냐고 묻습디다. 제가 그랬어요. 네가 평소에 아버지를 어떻게 보았길래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요. 이런 의혹은 공정한 재판을 통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합수단장이 10·26사건의 전모를 발표할 때 「재판은 공개로 할 것이다」는 말을 꼭 넣도록 지시했습니다. 합수단장은 그 말을 안 넣어도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라고 했지만, 나는 굳이 공개재판이란 낱말을 넣도록 지시했던 겁니다』 재판장으로는 金永先중장(당시 3사관학교장)이 임명되었다. 『金중장은 군에서 한번도 나와 함께 근무한 적이 없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였습니다. 金載圭와도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서 적임자로 선정된 겁니다. 金재판장이 나에게 지침을 받으러 왔을 때 제가 한 말은, 「법대로 공정하게 진행하라」는 부탁뿐이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변호사들은 朴대통령의 사생활이나 부정적인 측면을 노출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못마땅했지만 제한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루는 金재판장이 찾아와서 아무래도 제한을 가해야겠다고 하기에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돌아가신 朴대통령에게는 다소 미안하지만 이 사건과 관계가 있다면 사사로운 일이라도 법정에서 다루어지도록 허용해야 한다. 다만 국가기밀일 경우에는 제한하라. 부하들이 내 방에다가 수신 시설을 해 놓고 재판정에서 이뤄지는 진술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저는 듣지 않았습니다. 녹음기로 진술내용을 녹음해 와서 주어도 듣지 않았지요. 괜한 오해를 사고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재판이 빨리 끝나야 한다는데는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재판계획에 따르면 12월12일에 사실심리를 끝내고, 13일에 최후진술을 들은 뒤 15일에 선고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계엄사의 12·12사태에 대한 발표문은 이렇게 지적했다. 「김재규 일당의 공판이 진행되면서 범행 미화 발언의 무절제한 방임 등으로 국민 여론이 오도되어 이를 구실로 범행관련자에 대한 관용조치 징후 등 관할관으로서 부당한 권리행사 가능성이 점증하여 더 이상 방관하고 조사를 지연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 鄭총장은 『계엄을 빨리 해제하고 싶었다. 金載圭의 사형을 집행하는 시점을 계엄해제 시기로 생각하여 참모들에게 연구시켰다. 참모들은 봄이 되면 학생시위가 격화될 것 같다고 해서 계엄기간이 길어질까 걱정도 했다』고 한다. 제3부 12.12 사건 1979년 12월 12일, 한국의 현대사가 크게 한번 요동친 날, 鄭昇和계엄사령관은 金載圭재판에서 사실심리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후4시 그는 全斗煥합수단장을 불렀다. 『제가 합수단장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내일 김재규가 최후진술을 한다는데 그 최후진술에 이런 내용을 좀 넣을 수 없을까. 즉, 우리 국민들이 공산주의자와 불순분자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도록 당부하는 말을 김재규가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대공업무의 총책임자가 죽기 전에 하는 말이니까 대단히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합수단장은, 지금 재판이 진행중인데 우리가 그런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보겠습니다고 하더군요』 그보다 사흘 전인 12월9일은 일요일이었다. 鄭총장은 골프장에서 盧載鉉국방장관과 단 둘이서 만나 全斗煥합수단장의 인사문제를 논의했다. 鄭총장은 『김재규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당장 바꾸었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盧국방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하여 鄭총장도 그 문제를 일단 보류했다는 것이다. 12일 저녁 7시, 겨울이라 암흑은 빨리 왔다. 한남동에 있는 육군참모총장공관에서 鄭昇和·申有慶부부는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날 장군승진자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에는 鄭총장의 처남인 申모 대령(육사15기)의 이름이 끼여 있었다. 鄭총장의 장모는 그때 앓고 있었다. 鄭총장은 처남의 승진 소식을 알려주어 장모를 기쁘게 해 드릴 생각으로 찾아뵙기로 했던 것이다. 鄭총장 부부의 거실은 2층에 있었다. 나오려는데 텔리비전에서 7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鄭총장은 뉴스를 듣고 나가려 했다. 그때 부관인 李在千소령이 올라오더니 『보안사 처장이 보고하러 왔습니다』고 했다. 李소령은 鄭총장 부부의 외출때 수행하기 위해 1층 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층에서 기다리라고 해! 뉴스 보고 내려갈테니』 뉴스가 끝나자 鄭총장은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순간부터의 진행상황을 鄭昇和씨는 기자에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 증언을 정리해 본다. 「사복한 대령 2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 대령은 국방부조사대장, 다른 대령은 보안사 처장이라고 소개했다(기자주:국방부 조사대장이라는 대령은 우경윤(禹慶允)대령으로서 당시에 육군본부 범죄 수사단장이었고 합수단의 제2국장으로 파견 나가 있었다. 보안사처장이라고 한 대령은 許三守보안사 인사처장). 『그런데 급한 보고가 있다는데 뭔가?』 許대령이 말했다. 『총장님, 김재규한테서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김재규가 그랬나?』 『예, 참고로 진술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녹음도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럼 녹음기 준비됐나?』 『아닙니다. 녹음시설이 돼 있는 저의 부대로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때 나는 퍼뜩 뭔가 오해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金載圭가 나를 물고 들어갔고, 崔圭夏대통령권한대행이 나를 오해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놈아, 계엄사령관이야! 내가 어떻게 거기로 가겠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같으니. 너희들 최규하 대행에게 허가를 받았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왜 연락이 없었나. 어이, 부관! 총리공관에 전화 걸어! 총리가 안 계시면 국방장관을 찾아서 전화를 연결해 줘!』 李在千소령은『예』하면서 현관 왼쪽에 있는 부관실로 뛰어들어 갔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유리창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권총 소리였다. 나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사격중지…』라고 외쳤다. 공관경비병과 합수단 수사관 사이에 총격전에 벌어진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두 대령은 나를 양쪽에서 팔장을 끼더니 『총장님 갑시다』고 일으켜 세웠다. 『그래, 가자!』 내가 일어섰다. 찻잔을 들고 온 당번병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와장창! 현관 창문을 깨고 누가 뛰쳐 들어 왔다. M16을 든 곤색 야전잠바차림의 나이 든 군인이었다. 그는 홀로 뛰어들면서 공포를 몇 방 쏘고는 총구를 내 가슴에 갖다 대 몇번 쿡쿡 쑤셨다. 총구가 내 뺨을 스쳐갔다. 그 군인의 인상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현관 앞에는 그들이 몰고 온 세단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뒷자리에 탔다. 양쪽에 두 수사관들이 동승했다. 공관 정문을 빠져 나가는데 보초병은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내가 상부의 명령으로 체포돼 가는 줄 믿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차중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 했다.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崔圭夏대행의 오해가 풀리면 모든게 잘 되겠지 하는 희망을 한 가닥 갖고 있었다」 鄭昇和씨는 연행된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목격자가 못된다. 부인 신유경(申有慶) 여사가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 제가 뛰어내려 갔지요. 저분은 끌려간 뒤였어요. 현관 옆에 있는 부관실로 들어가 보았더니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습디다. 바닥은 피바다였어요. 저는 부관을 찾으러 주방까지 가 보았는데 없어요. 그때 2층에 있는 제 아들 생각이 나서 죽어도 그 아이와 같이 있어야겠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총소리가 났어요. 저를 향해 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허겁지겁 올라갔지요. 2층에서 떨고 있다가 조용해진 것 같아 1층으로 내려가 보니까 아주 덩치 큰 사나이가 현관쪽에서 열 십자로 뻗어 있더군요』 「열 십자로 뻗어 있었던 큰 사람」은 鄭총장을 연행하러 왔던 禹慶允 대령이었다. 12·12사태에 대한 계엄사 발표문과 盧泰愚민정당 총재의 공개적 발언에 따르면 禹慶允대령은 총장공관 경비대의 총격으로 다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鄭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을 총장 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려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지금, 그 총상을 입은 당사자는 하반신을 못쓰고 있어요』(1985년 4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가 한 말). 다른 자료에 의하면 鄭총장은 두 대령이 강제연행하려 하자 『헌병!』이라고 외쳤고, 이때 경비대원들이 나타나 禹대령을 떼어놓고 권총을 쏴 하복부가 맞았다는 것이다. 부인이 군수뇌에 연락 이에 대해 鄭昇和씨는 『내가 헌병을 부른 적은 없다. 나는 대통령이 연행허가를 했다고 믿었으니까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한 것이다. 禹대령이 총을 맞았다면 내가 끌려간 뒤일 것이다.』 申여사는 『남편이 끌려간 뒤 공관관리장교인 반 준위가 해병대에게 연락을 했다』고 증언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반 준위를 향해 수사관들이 총을 쏴 시멘트기둥을 돌면서 피했답니다. 반 준위는 공관을 뛰쳐 나와 한 길도 넘는 축대를 뛰어내려 공관외곽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원들의 막사에 가서 연락을 취했답니다. 해병대원들이 공관으로 달려 와 그 곳에 남아 있던 수사관과 그들이 데리고 온 병력을 포위해 버렸다고 합디다』 申여사는 외부와 연락을 취하려고 전화를 돌렸으나 모두 선이 절단돼 불통이었다. 다만 비상전화 한 대가 살아 있었다. 맨 첨 申여사는 연합사 부사령관 柳炳賢 장군 집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柳장군은 『제가 즉시 나가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엔 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尹차장도 놀란 말투로 『빨리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盧載鉉국방부장관 집엔 두번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李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의 ?틂뺐? 받더라고 한다. 申여사의 신고를 받은 육군수뇌부는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이 이후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는 계엄사 발표문과 盧泰愚씨가 한 인터뷰 및 민정당원에 대한 특강을 통해서 그 일면이 공개된바 있다. 盧泰愚씨의 증언 민정당 盧泰愚총재는 인터뷰에서 12·12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가원수를 시해한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 김재규라는 사람은 그다지 능력도 없는데 박대통령에 의해 성장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을 시해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고 재판함에 있어서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애국 투사나 혁명가인 양 부각시키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군내에도 김재규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습니다. 자칫 수사방향을 오도해서 김재규가 영웅이라는 방향으로 갈 조짐이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 대립되는 듯한 판국이었지요. 만약 이 두 주장이 맞부닥친다면 김일성이가 쳐들어올 수 있는 틈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망쳐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수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셨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그런데 수사가 벽에 부닥쳤습니다. 왜냐하면 합동수사본부장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이 박대통령 시해 당시 그 옆방에 와 있었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양을 보고 또 군의 생리를 보았을 때 우리는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이 모든 직책을 다 내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혹 같이 모의를 한 형사적인 책임은 없다 손치더라도 도의적 책임을 스스로 져야 마땅하다는 거지요. 이런 분이 안 나가고 수사의 방향을 딴 데로 끌고 가려하니까 수사를 공정하게 진행할 수 없었던 거예요. 나는 원래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씨와 친한 사람이었고, 옛날에 그분의 은혜도 입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솔직하게 이런 의견을 계엄사령관에게 건의해서 수사가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존경했던 상관이니까 그분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의 직예를 들면 합참의장 등의 직책을 맡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되어, 종국에 가서 군이 어떤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군대가 나온 것은 아니고 몇 사람의 개인이 나선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을 총장 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러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처음부터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닙니다. 포위가 돼서 극히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었는데, 그런 상황으로 몇 시간 동안 해결하려고 노력 했지만 잘 안됐고, 이런 소식이 우리부대까지 알려지고, 거기서 또 연락이 오고 해서 이를 수습할 수 있는 길이 결국 상대방이 힘으로 장악하고 있으니까 힘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병력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수습이 된 거지요』 「납치라며 병력동원」 12·12사건에 대한 국방부의 발표는 사건의 경위에 대하여 이렇게 밝혔다. 「김재규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정총장의 관련 혐의점이 드러났으며 정이 전3군사령관 이건영,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 추종 세력과 계속 회합 연락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돼 즉각 조사할 필요가 있었으나 국민의 충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김재규 일당 및 추종세력의 반발에 의한 정국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어 대통령 선거후 정국안정 때까지 수사를 미루어 왔다. 정총장이 스스로 깨닫고 양심에 따라 용퇴할 것을 기대했으나 그런 기미가 없고,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월권이 계속돼 조사를 단행키 위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정이 육군총장으로서 군령권의 즉각적인 행사가 불가능한 일과 시간 후에 총장 공관에 체재중 조용히 연행키 위해 12월12일 오후 7시 수사관들이 총장 공관으로 갔다. 수사관들은 자발적으로 출두, 수사에 협조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정총장이 동행을 거부하고 소리를 지르자 경호병들이 즉각 사격을 시작해 공관 경비병과 수사관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전 3군사령관 이건영,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역시 김재규 범해에 관련혐의가 있어 조사하려던 중 이들이 정총장 연행 사실을 알고 휘하조직을 이용, 정총장의 연행을 납치라며 동조자를 규합, 병력을 출동시키고 전차 등 장비를 동원, 무력으로 수사를 거부했다. 이 사태가 발전되면 단순한 저항이 아니고 국가 안녕질서가 파괴되는 사태로 확대될 것이 우려돼 계엄군이 증원 추가배치돼 추종분자들을 검거했다」 발표문은 또 이날 밤의 총격전으로 사망 3명, 중상 4명, 경상 16명 등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은 이밖에 「이건영 전 3군사령관은 12·12사건 때는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하면서 병력 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문홍구 전 합참본부장 등과 연락을 취하며 병력을 출동시켜 저항을 했다」「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은 정총장을 구출한다고 전차부대 및 병력을 출동케 하고 발포 명령을 내리는 등 저항을 했다」「문홍구 전 합참본부장은 수경사로 가 장태완과 같이 추종 세력의 단합과 저항을 선동했다」고 했다. 육군본부가 전군에 비상을 걸었고 이에 따라 張泰玩수도경비사령관과 鄭炳宙특전사령관 총장의 측근인 이 두 장군은 그날 밤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뒤늦게 사령부로 돌아갔기 때문에 부대 장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육군본부에선 尹誠敏차장 등이 지휘를 하다가 수경사령부로 옮겼다. 鄭昇和씨는 『비상시에 지휘부가 육본벙커를 포기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실책이다』고 했다. 육본, 수경사, 특전사의 수뇌부는 합수단을 겨냥하여 군병력을 동원했고, 합수단 부근의 모 부대에서는 또다른군 고위 장성들이 모여 합수단측에 서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며, 이들도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총장공관에선 鄭총장을 연행하러 갔던 합수단 병력이 해병대 경비대에 의해 포위되고, 그 바깥에는 합수단병력을 구출하러 간 병력이 포진하는 등 뒤어킨 상태에서 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다. 육군본부와 수경사측에서 동원한 병력이 시내로 접근하고 있는 도중에 합수단측의 공수여단이 먼저 시내로 들어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거의 동시에 수경사에선 자체 헌병단 병력이, 특전사에선 사령관 예하 부대가 내부행동을 개시, 수경사령관과 특전 사령관 등을 체포, 연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육본작전참모부장 河小坤소장과 특전사령관 鄭炳宙소장은 부하들로 부터 총격을 받아 크게 다쳤고, 鄭소장의 비서실장인 金모 소령은 鄭소장을 보호하다가 피격돼 숨졌다. 수경사에 지휘부를 설치했던 육군본부 군 수뇌부도 무력화되었다. 이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는 李희성 장군이, 수경사령관에는 盧泰愚소장이, 특전사령관에는 鄭鎬溶소장이 임명되었다. 바보라는 욕은 들었지만 후회 없다 鄭昇和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수사기관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수사관들이 나를 신문실로 데려가려고 합디다. 제가 고함을 질렀어요. 나는 육군참모총장이다. 총장으로서는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없어. 그러니 종이를 가져와! 사표를 쓰겠어라고 했으나…. 적어도 참모총장을 조사하려면 합수단이 아닌 별도의 고위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유당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왜 이런가, 생각했습니다』 『임명직의 비애를 느꼈습니다. 임명권자가 버리면 그만이더군요. 국방부장관과 대통령권한 대행이 연행을 추인해 버리니 나는 아무 힘도 없는 억울한 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바보라고 욕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 욕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줄 압니다. 12·12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난과, 이왕 그럴 바에야 네가 권력을 잡아버리지 왜 빼앗겼나 하는 비난이 그것인데, 저는 그때 쿠데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군의 여론이 압도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바라고 있었고, 어느 한 부대가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다른 부대가 절대로 호응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쿠데타 모의에 관련된 아무런 정보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보고를 해야 할 사람들이 당사자였으니까….』 鄭昇和씨와 인터뷰를 시작한 둘째 날 그는 자신이 「역사의 패배자」란 평가를 (나로부터)받은 데 대해서 직설적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들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 늙은 아버지를 패배자라고 욕하면, 욕하는 사람은 도대체 뭡니까. 그런 자식을 둔 점에서 아버지의 도덕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그들과 정권 경쟁을 하려다가 패배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군의 중립성을 지키려다가 나의 임무가 중지된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수법을 동원하여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졌다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패배자의 길을 택해야지요. 저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재주가 아니라 정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李厚洛 출국허가의 배경 鄭昇和씨는 金載圭의 내란기도를 방조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합수단과 군검찰측에서는 鄭씨가 10·26 뒤 합수단에 구속된 李在田경호실 차장을 풀어준 사실과 李厚洛씨의 출국을 허가한 사실 및 金載圭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 등을 기소장·발표문 등을 통해 공개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은 우리나라의 법이 보장하는 반론권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옮겨본다. 『李在田차장이 10·26사건 당일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합수단에서 일단 구속수사를 하겠다기에 허락을 했어요. 柳炳賢, 金鍾煥장군 등도 李차장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염려해 주었습니다. 합수단에서 올린 범죄보고서를 보니까 직무유기로 몰았는데 무리가 많았어요. 車실장이 사고를 당한 줄 알고도 차장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정보부를 습격하지도 않는 등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제가 수사책임자에게 말했어요. 여보, 李차장이 얼마나 잘 했오. 무슨 좋은 일이라고 부하들에게 사고를 다 털어놓겠소. 정보부를 습격한다는 것도 감정적인 대응밖에 더 돼오. 그것도 내 판단대로 하지 않고 법무감의 전문적인 의견을 구한 뒤 기소각하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 정권이 그 뒤 李在田씨를 성업공사 사장으로 중용하지 않았오. 李厚洛씨는 그때 무슨 국제불교대회에 참석하려고 여권신청을 했는데 합수단에서 발급을 보류시켰어요. 위장출국인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李씨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이번 출국은 그 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라면서 선처를 요청했어요. 제가 국방장관과 상의해 보니 李씨와 같은 사람에 대한 출국규제의 방침이 정부에는 없다는 걸 확인했어요. 더구나 당시엔 그가 수사대상자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출국시킨 것입니다. 그가 출국한 뒤 귀국이 늦어진 것은 12·12사태로 내가 제거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金載圭당시정보부장이 1979년 10월 추석 전에 사람을 저한테 보내 「중추가절」이라고 적힌 봉투를 주고 간 적이 있었어요. 뜯어보니 10만원짜리 수표 30장이었습니다. 의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 두었습니다. 10·26 뒤 金載圭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밝혀졌어요. 합수단장이 보고한 리스트에 저의 이름은 빠져 있기에 「나한테 3백만 원 준 것은 말하지 않던가?」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진술하기는 했습니다」고 하더군요』 막내 아들은 육군 대위 기자는 다시 한번 『정말 金載圭와는 관련이 없었읍니까』하고 다짐하듯 물어보았다. 『육본벙커에서 그와 헤어진 뒤에는 한번도 만나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김재규는 육본 벙커에서 손님처럼 행동했어요. 그는 시해 뒤의 행동계획이 아무것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김재규 눈치를 본 것처럼 이야기한 사람이 있는데, 그자가 내 눈치를 보았으면 보았지 왜 내가 눈치를 봐! 10·26 밤에 제가 취한 조치는 모두 적절했습니다. 김재규 체포를 지휘한 것, 군 병력의 신속한 배치 등 위기관리는 완벽했었다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법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저는 27일 새벽 4시에 계엄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민간인 金載圭를 체포할 책임이 내무나 법무장관에게 있었던 겁니다 더구나 장관들 중에는, 제가 밤 11시 30분쯤 金桂元 비서실장으로부터 귀뜸을 받기 훨씬 이전에, 그러니까 밤 9시쯤부터 金載圭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나에게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어요』 鄭昇和피고인은 내란방조죄로 구속기소되어 1980년 3월13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구형은15년). 周永福국방부장관은 그달 18일 관할관의 형량확인과정에서 징역 7년으로 감형시켰고 鄭피고인은 항소를 포기, 형이 확정되었다. 鄭씨는 군 교도소의 독방에서 일반 사병 죄수와 꼭 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1980년 6월10일 鄭씨는 옥살이 6개월만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 몸무게가 9kg이 줄어 출옥할때는 59kg이었다. 다음해 3월에는 사면·복권되었다. 3남1녀를 둔 鄭씨의 막내아들(29세)은 지금 육군대위로서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다. 鄭씨가 출옥한 해에 이 아들은 육군사관학교에 재학중이었다. 鄭씨는 아들에게 『괴로우면 퇴교하라』고 권고했으나 아들은 군인의 길을 계속 걷겠다고 하더란 것이다. 나머지 두 아들과 한 사위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의외로 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鄭씨는 『감옥을 나온 뒤 인생을 많이 배우며 살고 있다. 다행히 우리 가정이 화목하여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동사무소, 전화국 등 민원창구를 직접 출입하면서 주민증도 떼 보고 전화신청도 했다. 아들뻘되는 전화국 공무원에게 반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운전면허도 새로 내 로얄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친구들과 군의 선·후배들도 자주 만나지만 국립묘지 등 공식적인 모임이나 장소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12·12때 수령사령관 張泰玩씨(56)는 1980년에 예편당한 뒤 한국증권전산(주)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나 12·12 때 팔에 총상을 입은 당시 특전사령관 鄭炳宙씨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고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연금 못 받은 군인 32년 12·12 뒤 일부에서는 鄭昇和씨가 무능한 군 지휘관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말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이들은 6·25때 鄭昇和씨를 부하(대대장 혹은 부연대장급)로 썼던 퇴역장성들이었다. 柳陽洙씨(동아그룹 부회장)는 『전투중 어려운 임무는 鄭昇和씨에게 맡기곤 했는데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6·25때 8연대의 부대대장이던 鄭대위는 초전의 대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대대를 체계있게 지휘, 장비와 인원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광나루에서 도강, 전사에도 기록돼 있다. 6·25 중에는 공비토벌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6·25 중에는 유명한 백골부대의 대대장으로서 낙동강 전선에서 두만강까지를 누비며 수십번이나 사선을 넘었다. 그는 훈장없는 장교로 유명했다. 『훈장을 타 가라는 증서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비에 젖었기에 다 찢어 버렸다』고 한다. 鄭씨는 자기 자랑에는 좀 서툰 인상을 준다. 기자가 일부러 자랑거리를 찾아 물어도 계면쩍어 하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명령없이 진지를 포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자랑을 했다. 그는 『전쟁을 해보면 평소에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용감하고 평소에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쁘더라』면서 『정치장교들이 전장에서 과연 소용이 있을까』라고 했다. 金昌龍, 元容德 등 이 나라의 유명한 정치장교들이 한결같이 전선을 피해 후방에서 권부의 주변만 맴돈 사실을 예로 들기도 했다. 鄭장군은 부군단장 시절 군단장인 韓信장군과 함께 휴전선의 철책을 고안한 업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鄭씨는 자기 자랑 대신『내가 모셨던 상관들―韓信 임충식(任忠植) 金鍾五장군 등이 모두 잘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곤 한다. 1947년부터 시작된 그의 군생활은 1979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군생활 만32년(전시3년 포함)에 대한 연금혜택을 그는 받지 못하고 있다. 실형선고를 받아 군적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李희성, 尹誠敏 국방부 장관시절에 『현행법상으로는 할 수 없으니 최대한 배려하여 3분의 1을 받도록 하겠다』는 연락이 왔으나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鄭昇和씨의 사진은 지금 자신이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부대에서조차 제거되고 없다고 한다. 『내가 육군참모총장 시절에는 張都暎장군의 사진도 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순수군인이 많다 그래도 그는 기자와 헤어질 때 군인옹호론을 열심히 폈다. 『저는 국민과 군인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픕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이 관계도 개선되겠지요. 저는 일부 정치군인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이고 대다수 군인들은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북괴가 남침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장교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도 순수군인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국민과 군의 친선관계는 남북통일 이후에까지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관계입니다. 통일이 된 뒤에도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해가려면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장교의 신분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도 필요합니다. 장교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그의 평생을, 그리고 유사시에는 그의 생명을 국가에 담보한 사람들입니다. 제대한 뒤에도 예비역으로 남아 전쟁이 터지면 국가는 그들의 봉사를 다시 요구하게 됩니다. 장교가 무조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대신에 국가는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군도 사회를 알고 사회도 군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군이 국민을 지배하겠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군은 국민 품에 안길 때 편안합니다. 지난 6월 사태 때 우리 군이 취한 태도에서 그런 희망을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