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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로에 선 미술(5세기~13세기)..
3)오직 신과 함께, 중세 봉건 시대의 전개(9~11세기)
카룰로스 대제가 쪼무래기들을 평정하며 만들어낸 "카롱링거 르네상스"는 손자들의 욕심으로 제국이 분리되었어도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고 9세기까지 이어진다.
카룰로스로는 통치수단 그리고 정통권 수립 차원에서 기독교에 기반한 하나의 통일된 문명을 의도하며 엄청난 대역사를 기획합니다.
본인은 업적, 백성들은 노역..ㅠㅠ
앞서 언급한 아헨대성당등 교회와 수도원을 통치 권역 곳곳에 건설하고, 궁정학교를 세웠으며, 도서관을 건립하고 학자들을 모아 중세 교육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한편 예술을 후원하면서 아헨을 과거 로마로 만들기를 꿈꾸었다..
확실한 권력을 휘어 잡은 것도 아닌데 꿈은 원대하였네요! 꿈깨~~
기껏 문예부흥운동이라고 펼친것이 그리스 로마 문명을 계승할 문화 동력은 오랜 과도기로 턱없이 부족하여 성경의 필사와 보존이 주요 활동이었다..
라틴어 성경을 수집하여 신자들이 라틴어도 모르고 신생 왕국들도 문자가 교육을 통하여 겨우 정립되던 시절이라 문맹이 수두룩하였기에
성경의 사건과 스토리를 말보다는
알기쉬운 삽화를 삽입하는 것이 필사하여 대중들이 기독교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역할~~
오늘날로 언급하면 책과 신문에 글대신 일러스트(삽화)를 넣는 것으로 예술가라고 하기 보다는 필사를 도우는 장인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면 서구의 교인들이 대다수 성경을 읽게된 시절은?
중세 봉건시대는 노예나 다름없던 농노 시대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여 꿈깨..ㅠ
1522년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과 1526년 윌리암 틴테일의 영어 번역본이 출판된 이후이니 무려 7백년 이후의 일입니다..
달리 중세 암흑기이겠어요?
미술사이니 그래도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대표 예술품을 언급하라면 쪽팔리게도 현존하는 작품은 <위트레흐트>시편집..
보잘 것 없는 시대의 대표작답게 인터넷의 소개는 짱짱합니다..
스토리보다 삽화 위주의 위트레흐트 시편집..
책에는 라틴어의 그림으로 구성~~
아동용 그림책인지 시편인지 헷갈라지 않나요?
*위트레흐트 시편집..
채식 사본(彩飾寫本) 가운데 『위트레흐트 시편집(Utrecht Psalter)』만큼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던 책은 별로 없을 것이다. 후기 로마 시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특징적인 『위트레흐트 시편집』에는 시편(詩篇, Psalm) 150편과 찬가(讚歌, canticle) 16편에 딸린 166점의 도해(圖解)가 가히 혁신적이고 역동적 스타일로 표현되어 있으며, 올바른 통치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시각적 메시지로 표현한 필사본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제작 시기가 카롤링거 문화의 절정기라는 특징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만들어진 시기는 후기 로마 예술이 카롤링거 양식의 예술로 ‘전환’되는 중요한 연결고리 해당한다. 초창기에 만들어진 현전하는 다른 사본들과 비교할 때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풍성한 모티프는 압권이라 할만하다.
책 속의 도해는 당대에 치러진 전쟁과 폭력을 미화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분명히 (미래의) 왕에게 가르칠 도덕적 교훈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최초의 시각적인 ‘군주의 거울(本, 본보기)’이었던 셈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이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약 830년경 당시 서방 문명의 중심지였던 프랑크왕국(Francia) 북부, 랭스(Reims) 인근에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의 스타일과 도해는 9세기에는 북부 프랑크왕국에 영향을 미쳤고 1000년부터 1200년 사이에는 캔터베리(Canterbury)에서 제작된 수많은 채식 사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채식 사본 가운데 『위트레흐트 시편집』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그토록 깊은 예술적 영향을 끼친 책은 없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기독교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필사본으로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더 궁금하신 분을 위해서 링크..
https://naver.me/5UG1oTFC
카룰로스 사후 3개로 쪼개진 왕국중 1짱은 동프랑크 오토 1세~~
962년 신성로마제국을 교황을 꼬셔서 인증받아 수립하고, 서유럽 기독교 수호자를 자처하며 황제(Kaiser) 왕관을 쓴다!
당시 화가들이 그린 황제의 초상화 수준..
*오토 1세
오토 대제는 독일 왕국의 국왕이자 이탈리아 국왕이며,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증조부가 개창한 류돌핑 가문에 속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오토 왕조를 출범시켰다. 아버지 하인리히 1세가 전통적인 분할상속제 대신 적자상속제를 적용하면서 독일 왕국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변경국의 도발로 원조 요청이 들어오자 원정군을 이끌고 가 반란을 제압하고 이탈리아 국왕에 올랐다. 재원정에서는 교황을 구출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을 받았다.
군소왕국들의 동맹에 가까운 제국이지만
제법 짱짱하게 다스렸습니다..
라인강 서쪽의 서프랑크는 위그카페(940~966년)가 띨띨한 손자를 몰아내고 987년 카페왕조를 수립하면서 오토의 절대 과제는 할배 카룰로스의 영광 회복~~
별 타당성은 느껴지지 않는 망구 지혼자 욕심이지만!
오토3세는 위쪽 선와의 급사로 3세때 보위에 오르는데 수렴청정 비스므리하게 정사를 돌보던 재상인 "베른바르트 주교"는 지금까지 미술사에 전해지는 뽀사시한 작품을 남깁니다..
중세 봉건시대는 왕족과 교회의 권력이 찬란 삐까뻔쩍해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는 "개털"입니다..ㅠㅠ
힐데스하임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만들어진 청동문!
<베른바르트 청동문>은 단하나의 청동으로 제작되고 창세기와 예수의 생애를 주물로 표현~~
성 미카엘 수도원교회(St. Michaelis), 1010~1022, 독일 힐데스하임
초창기에 청동문은 여기 보관되었다가 추후 대성당이 건립되며 이전합니다.
대성당(Dom), 852~872/960/1000, 독일 힐데스하임
베른바르트 주교는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성 미카엘 수도원교회에 청동문을 그리고 힐데스하임 대성당에 청동기둥을 설치한다. (원래 성 미카엘교회에 있던 청동문은 현재는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고 건축물을 제외한 대표적인 유물이라 조금 소상하게 설명~~
형평성에 어긋나죠? 망구 제맘 입니다..
농담이고 그냥 암흑기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중세 미술사도 짚고 가려고~~
*베른바르트의 문(Bernwards Tür, 1015)으로 불리는 청동문에는 좌우 양쪽에 각각 8개씩 모두 16개의 패널(Panel) 위에 좌측에는 창조와 타락, 낙원 추방, 가인과 아벨 등 구약 이야기 8개 그리고 우측에는 십자가와 부활, 예수의 생애 등 신약 이야기 8개 모두 열여섯 장면을 담은 부조가 신구약 성경의 유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원리에 근거해 새겨져 있다.
어떻게 전반적인 플롯은 로뎅의 지옥문이나 가우디의 사그리다 파밀리아의 파사다 느낌이지 않나요?
어찌보면 예술은 과거의 모방에서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니 모티브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세 예술이 시덥잖은 시절이라 엄지척을 받는 작품이니 소상하게 소개~~
베른바르트의 문, 1015년, 청동, 높이 4,7m, 너비 각각 1,2m, 무게 1,8톤, 대성당
베른바르트의 문, 도상학적 해설(Iconograpy)
좌우 양쪽의 패널은 서로 대응하는데, 예를 들어 왼쪽 세 번째 패널의 ‘인간의 타락’은 오른쪽 열네 번째(아래로부터 번호 매김) 패널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대구를 이룸으로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좌우 대응만이 아니라 좌측 상단 첫 번째 패널의 ‘인간 창조’는 우측 아래 아홉 번째 패널의 ‘수태고지’ 장면으로 대각선 방향으로도 대응한다.
각각의 패널은 개별적으로 제작해 접합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문에 고부조를 새겨 넣는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두 쪽 여닫이로 된 청동문은 높이가 4,7m, 양쪽 문의 너비가 각각 1,2m이며 각각의 무게가 1,8톤인 대형 작품이다.
특별히 왼쪽 문 네 번째 패널(눈높이에 가장 부합되는 곳)에는 원죄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책임을 회피하는 아담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와 역시 뱀을 가리키며 변명하고 있다. 결국 그 아래 다섯 번째 패널에서 아담과 하와의 변명하는 손가락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는 그룹의 손가락으로 귀결된다. 추방될 때 뒤돌아보는 하와의 시선과 낙원의 닫힌 문을 붙잡는 아담의 손은 미련과 아쉬움, 회복에 대한 갈망을 의미한다.
베른바르트의 문, 세부, 아담과 하와의 변명, 1015년, 대성당, 힐데스하임
베른바르트의 문, 세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1015년, 대성당, 힐데스하임
두 번째 패널 ‘아담과 하와의 만남’에서의 생동감 있는 몸짓, 표정과 달리 네 번째 패널 ‘아담과 하와의 변명’에서는 오그라들듯 몸을 움츠리고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식물도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를 반영해 둘째 패널과 넷째 패널의 식물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세 번째 패널 ‘타락’에서 식물에 달린 일곱 개의 열매는 교만에서 비롯된 일곱 가지 죄를 의미한다. 인간의 죄에 대한 주제가 분명히 표현되고 있어서 인물과 식물의 모습이 자연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기독교 교리와 교훈적인 내용의 분명한 전달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종일관 변명으로 일관함으로 결국 낙원에서 추방되는 인간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독일 로마네스크 조각 특유의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묘사되고 있다.
베른바르트의 문, 세부, 아담과 하와의 만남 / 원죄, 1015, 대성당, 힐데스하임
이는 ‘그림은 (글을 모르는) 평신도의 문자이다(pictura est laicorum literatura)’는 그레고리 대교황(Gregor der Große, c.540~604)의 가르침을 조각 분야에서 완벽하게 구현한 예이다.
고상한 말만 할것이 아니라 교육에 대한 청사진을 수립하고 시행하시쥐~~
베른바르트의 문에 새겨진 청동 부조상은 오토왕조 미술의 진수로 등장인물의 묘사가 미적으로 부족하다 할지라도 인간 내면의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죄인의 모습을 묘사한 불후의 명작이다. 이 작품은 고전미술이 취한 사실적 묘사와 비례감 대신에 메시지 전달력을 중시한 중세미술의 목적을 잘 드러낸다.
등장인물의 묘사가 부족한 것은 모든 초점이 종교 그리고 신이 중심인 봉건 사회있기에
헬레니즘에서 신과 동급으로 묘사된 인간의 교만을 반성하고 신에 귀의하는 구차한 인간의 형상을 표한 것이라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요?
망구 만자로식 "꿈과 해몽"인가요?
그럼 말구..ㅎ
베른바르트 주교는 교회의 문을 신학적인 메시지를 담은 부조로 장식함으로써 이 문이 단순히 내외 공간을 연결하는 물리적인 문이 아니라 신자들이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죄와 불신앙, 이기심과 책임회피를 회개하게 하는 구원의 문, 좁은 문, 천국의 문이 되게 하였다.
대성당에 세워진 ‘베른바르트의 기념주’(Bernwards Säule)는 고대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황제의 전승기념주(Trajanssäule)를 본떠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기둥이다. 이교적인 로마제국에서의 황제의 공적을 칭송하는 대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구원의 서사가 찬양되고 있다. 어떻게 저의 해몽을 구현하고 있는 듯~~ㅎ
대성당(Dom), 내부, 852~872/960/1000년, 독일 힐데스하임
베른바르트의 기념주(Bernwards Säule), c.1020, 대성당, 힐데스하임
사진10 베른바르트의 기념주, 세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그리스도, 1020년 경
엉성하기는 하지만 예수는 근엄하게 인간은 가능한 나약하고 신에 귀의하는 모습으로~~
나름대로 저는 확고한 원칙은 보이는 듯~~
사진11 트라야누스황제 전승 기념주(Trajanssäule, 110~113), 로마
(전반부에 소개했으니 사진만~~
기억나시지 않으면 앞쪽의 로마 미술사로 Go)
한편 대성당 부근에 세워진 성 미카엘 수도원교회(St. Michaelis, 1110~1133)는 성과 속의 통합을 지향한 신성로마제국의 이상을 동서 양단에 내진이 있는 독일 특유의 이중내진(Doppelchor) 평면으로 구현한 건축물이다. 이러한 이중내진은 베른바르트 주교의 신학적 구상에 의한 것이다.
동쪽 내진에는 주 제단이 위치하고 서쪽 내진에는 반지하에 납골당을 두었다. 그럼으로써 동서 양쪽의 내진(choir)은 각각 동쪽은 영적인 세계와 교회의 권위를, 서쪽은 세속의 세계와 국가의 권위를 상징함으로 두 권력의 통합을 추구한 신성로마제국의 이상을 나타내었다. 서임권 논쟁(Investiturstreit) 이후 이중내진은 교황권과 황제권, 교회권과 세속권의 긴장 관계를 반영하였다.
이후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완성인 슈파이어 대성당(Speyer I, 1030~61/Speyer II, 1090~1106)이 교황권 집중을 건축언어로 표현한 브루고뉴의 클뤼니수도원(Cluny II, 948~980/Cluny III, 1088~1131)과는 상이한 반(反) 클뤼니의 입장을 대변하였듯이 신성로마제국의 제국교회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사진12 성 미카엘 수도원교회(St. Michaelis), 내부, 1010~1022, 독일 힐데스하임
사진13 성 미카엘 수도원교회(St. Michaelis), 평면도, 1010~1022, 독일 힐데스하임
사진14 슈퍼이어 대성당(Speyerer Dom), 1030~61/1090~1106), 독일 슈파이어
설명이 너무 장황했죠!
교회의 왕권의 공존 그리고 은연중에 펼쳐진 알력을 묘사하려다보니 길었습니다..
저도 긴글 정리하려니 애로 사항이 있었습니다.
결국 중세의 예술가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창작을 하던 직업인이 아니라
종교 또는 왕국의 권력자의 의도된 지시와 명령이 내포된 의뢰에 따라 오직 신과 왕권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주는 숙련된 장인의 역할을 했던 기능을 수행했던 것 같다!
수공업 공동체 길드의 일원으로 공공 목적을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 작품에 개인적 서명을 남길수도 없었으며 의뢰인의 지위와 장소에 따라 작업의 가치가 평가되어 익명성이 강조되는 것도 일반적인 풍속으로 볼수 있다..
별 내세울 것 없는 중세~~
처음에는 간략하게 마치려고 의도하였는데 동서로마의 분리, 현재의 유럽의 시작점이 중세 봉건시대가 되다보니 의도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동서로마의 분리부터 르네상스까지 거의 천년에 가까운 세원을 돌아보는 것이니 이후에도 두단락 정도더 언급해보려고 합니다..
곰브리치는 "기로에 선 미술"이란 목차로 간단하게 마무리했는데 저는 미린이 아마추어 수준이라 "간단"이 아주 어렵습니다..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