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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딜롱 (베르트랑-장) 르동 (Odilon (Bertrand-Jean) Redon, 1840-1916)은 독특하고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상징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화가이다. 르동은 모네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인상파의 시대를 살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 당대의 일상을 재현하는 데 몰두했던 인상주의자들과는 관심사가 정반대였다. 그에게 의미 있었던 것은 ‘보이는’ 실재가 아니라 ‘느껴진’ 실재였다. 그는 ‘눈’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일상’이 아니라 악몽이나 유토피아 등 화가의 내면 세계의 ‘비전’을, ‘묘사’를 통해 ‘재현’하기보다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미술이 지향할 바라고 생각했다.
르동보다 한 세대 앞서 활동한 귀스타브 모로 역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를 연결하고, 사실주의적 미술에 반대되는 경향을 선도한 화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르동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두 화가의 작품 세계는 큰 차이가 있다. 모로가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신화나 전설, 역사 관련 주제를 그림에 담았던 데 반해, 르동의 주제는 그의 기질과 취향이 창조한 ‘주관적’인 것으로,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한 모호함을 특징으로 한다. 모로의 그림에는 늘 내러티브가 있고 그 화면이 연극 무대와 같은 공간감을 갖는 데 반해, 르동의 그림은 컨텍스트가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려진 대상 또한 전후경이 없는 막연한 공간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 |
검은 색, 낭만주의의 검은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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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The Spider], 1881년 종이에 목탄, 49.5cm×39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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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기구와 같은 눈이 무한을 향해 간다 The Eye, like a strange balloon, moves towards infinity], 1882년 종이에 석판화, 43.8cm×31.1cm,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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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동은 1870년 보불전쟁 참전 이후 본격적인 자기 작업을 시작했는데, 첫 20여년간인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목탄과 석판화만을 사용하여, 스스로 ‘검은 색(Noirs)’이라고 부른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한 이 ‘검은 색’의 원천과 의미는 그의 개인사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르동은 1840년에 프랑스 남부 보르도에서 출생했으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메독(Médoc) 지방 페이를르바드(Peyrelebade)의 가족 소유 농장으로 보내져, 11살 때까지 외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이렇게 오랜 동안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부모의 불화, 르동의 지병, 모친의 질병 등 여러 설이 있다. 자신을 자주 찾지 않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던 르동에게 이곳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두움, 침묵, 상상의 시간으로 기억되었다. 후에 화가는 그 기억이 자신의 ‘슬픈 미술의 근원’이자 ‘검은 색 회화의 원천’이라고 했다.
1851년에 보르도로 돌아와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나 바이올린 연주를 비롯한 음악과 미술, 문학 외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5세가 되는 1855년에 그는 낭만주의를 선호했던 수채화가 스타니슬라스 고랭(Stanislas Gorin)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자기 예술의 아버지라고 생각한 들라크루아를 알게 되었고, 이 시기에 접한 ‘낭만주의의 검은 연기’도 그의 검은 색 회와의 일부를 이루었다. 1857년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에콜 데 보자르의 건축과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를 했으나 실패하고 파리에서 보르도에 돌아와, 식물학자이자 사상가인 아르망 클라보(Armand Clavaud)와 친교를 나누었다. 클라보를 통해 그는 1862년에 불어판이 나온 다윈의 [종의 기원]을 접하고 동식물의 중간 상태, 미생물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의 검은 색 시기 회화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브가 된다. 클라보는 그에게 보들레르, 플로베르, 에드가 앨런 포 등의 문학도 소개했는데 이들의 작품은 검은 색 시기 회화를 만든 영감의 원천이 된다.
아들이 인정받는 대가에게서 제대로 교육받기 원했던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24살이 된 1864년에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 제롬(Jean Léon Gérôme)의 화실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아카데미 미술에 대한 혐오감만을 얻고 몇 개월만에 낙향을 하게 된다. 보르도에서 만난 판화가 로돌프 브레스댕(Rodolphe Bresdin)은 그의 회화를 만든 진정한 스승이었다. 동시대의 미술 흐름과 동떨어진 채 사적인 꿈과 강박을 표현한 브레스댕의 동판화는 르동의 ‘검은 색’의 직접적인 근원이 되었다. 그는 판화의 위대한 스승들인 뒤러, 렘브란트, 고야를 르동에게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고, 과격 공화주의 활동을 하다 현실의 유토피아를 찾아 캐나다로 홀연히 이주한, 자유롭고 낭만적인 예술가의 산 모델이기도 했다. 르동은 1865년에 처음으로 제작한 동판화에 자기 이름과 함께 ‘브레스댕의 제자’라고 서명하여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당대의 과학과 문화에서 만들어낸 신비의 세계
 18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르동은 바르비종에서 코로와 밀레를 만났다. 르동에게 바르비종 화가들의 낭만적인 풍경화는 본 것만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상상력을 더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관찰과 느낌을 혼합하고자 했던 그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밀레의 시적인 드로잉이 보여주는 부드럽고 깊은 농담 처리는, 브레스댕의 영향으로 그가 구사하던 세밀하고 날카로운 펜 드로잉 대신, 풍요로운 색조의 흑백 그림을 낳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에게 목탄 드로잉과 판화는 자유로운 매체이기도 했고, 그 검은 색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전달하기에 적합한 순수한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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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학습기를 거쳐 탄생한 르동 고유의 미술 양식, 그의 ‘검은 색’의 원형은 1879년부터 출판된 석판화집에 등장한다. [꿈 속에서], [에드가 포에게], [기원], [고야에의 경의], [밤], [성 안트완의 유혹], [귀스타브 플로베르에게] 등으로 이어지는 판화집에는 2백여점의 석판화가 실려 있다. 이 판화집에는 아무런 배경이나 설명적인 중간 과정 없이 잘린 머리, 안구, 귀대신 박쥐의 날개를 단 사람, 여러 동물의 부분을 혼합한 생물체나 동물과 식물이 혼합된 형상 등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의 생명체와 물건들이 등장한다. 이러 이미지들은 화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긴 하나 그 원천은 동시대의 과학, 사상, 대중 문화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르동의 이런 ‘근대성’은 고대와 이국의 세계에 침잠했던 모로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면모이기도 하다.
미술사에서 잘린 머리 모티브는 세례 요한이나 오르페우스 주제 그림에서 등장해왔는데 19세기 들어서는 많은 화가와 문학인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르동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모로의 그림에 등장한 세례 요한의 머리다. 모로와 달리 르동의 머리와 눈은 이야기와 관련된 의미를 갖기보다 물질에서 해방된 정신, 지성의 상승, 영혼의 불멸 등을 상징한다.
석판화집 [에드가 포에게]에 실린 그림 [이상한 기구와 같은 눈이 무한을 향해 간다 The Eye, like a strange balloon, moves towards infinity]에 등장하는 접시에 놓인 머리와 그것을 이끌고 떠가는 거대한 안구가 상징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구라는 소재는 [한스 팔의 환상 여행 The Unparalleled Adventure of one Hans Pfaal] 등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들에 등장하기는 하나, 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르동의 많은 그림이 그렇듯이, 소설과는 별 관련이 없는 화가의 개인적인 상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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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The Spider]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거미를 닮았으나 실제 거미라고는 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동물의 형상이다. 여러 동물의 부분을 조합한 기이한 생물체는 히에로니무스 보쉬, 브뢰헬 등이 그린 지옥의 괴물 형상에 미술사적 연원을 두고 있으나, 이와 함께 르동이 참고한 것은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활발히 진행된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인종학, 인상학, 기형학(teratology) 등과 같은 과학 혹은 유사 과학 연구들과 대중 매체들이 선보인 캐리커처, 풍자화들이다. 이런 그림들이 환기하는 꿈과 같은 분위기, 인간의 의식보다 무의식을 닮은 것 같은 느낌 역시 세기말 사회의 분위기와 연관이 있다. 1861년에 알프레드 모리가 쓴 [잠과 꿈], 1877년에 불어 번역본이 나온 폰 하르트만의 [무의식의 철학], 1870년대 신경학자 샤르코의 최면에 대한 연구 등은 세기말 프랑스의 지성인 사이에 퍼진 이성과 실증주의에 대한 반감, 인간의 비합리적인 면에 대한 관심의 산물이었고, 이런 이론은 르동의 작품에 영감과 지지를 제공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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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그리스도 Christ in Silence], 1895년경 패널에 붙인 종이에 파스텔과 목탄, 59.5cm×47.5cm, 프티 팔레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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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Buddha], 1906~1907년경 종이에 파스텔, 90cm×73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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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의 상징주의는 하나의 화파라고 할 수는 없으나, 19세기 마지막 20여년 동안 북유럽 전역을 휩쓴 강력한 문화적 흐름의 일부였고, 르네상스 이래로 4백년간 지속되어온 ‘모방(mimesis)’ 개념에 근거한 재현 전통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상징주의 미술은 미술사의 어떤 사조보다 다른 예술 장르 특히 문학과의 관련성이 강했는데, 화가와 문학인들은 서로 영향과 영감을 주고 받았을 뿐 아니라 문학인들이 미술 비평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무명이었던 르동을 발견해 문화계의 주목을 받게 한 것도 안느캥(Emile Hennequin),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와 같은 문학인들이었다. ‘회화의 말라르메’라고도 불렸던 르동이 문학에 재능과 관심이 많았고, 문학 작품에서 영감을 자주 얻었고, 문학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위한 작업도 했고, 그림에 문학적인 장황한 부제를 붙이곤 했다는 면에서 그를 문학적인 화가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제에 대한 과도한 주목이 작품의 조형적인 성과를 가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화가라기보다 일러스트레이터로 본 것은 화가 자신도 불만으로 여겼던 심각한 문제이다.
빛나는 색채, 고요한 서정성
 1890년대에 들어서 르동은 유화와 파스텔의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색채를 사용해 그려진 그림에는 ‘검은 색’ 시절보다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종교, 신화의 도상이 등장했다. 그림의 분위기 역시 ‘검은 색’의 공격적이고 부자연스러우며 그로테스크한 악몽과 우울에서, 보다 평온하고 고요한 서정성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것은 1886년 마지막 인상파 전시에서 고갱을 만나 그의 반자연주의적이고 독자적인 채색법을 보고 색채의 역할을 재발견한 점과, 49세였던 1889년에 아들을 얻고 가정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은 점 등이 있다.
[감은 눈 Closed Eyes]은 이런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듯한 사람의 얼굴이다. 1890년에 출판된 펠라당의 [앙드로진 Androgyne] 등이 보여주듯, 세기말 프랑스 문화계에서 양성적 인간은 곧 이상적인 인간이었는데, 르동의 이 인물 역시 양성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색채를 사용하고 분위기는 평온하게 바뀌었지만, 외부보다는 내면을 향한 시선, 외양보다는 본질에 대한 관심, 자연을 그리되 꿈과 같이 신비롭고 모호하고 암시적인 이미지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그의 근본적인 미학은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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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의 전차], 1905~1914년경 종이에 파스텔, 91.5cm×77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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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긴 화병 속 들꽃 다발], 1912년경 종이에 파스텔, 57cm×35cm, 루브르 박물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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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동은 특정 신앙을 가졌던 적은 없지만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고, 그가 그린 나무와 같은 자연물은 범신론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물로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1890년대 이후에는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과 관련된 도상들이 그림에 등장하는데, 이는 모든 종교 사상이 유사하다고 본 쉬레(Edouard Schuré)의 제설혼합주의(syncretism)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르동이 그린 [침묵하는 그리스도 Christ in Silence]나 [부처 Buddha]는 각 종교의 교리나 전통적인 도상과는 별 관련이 없고, 르동 특유의 침묵과 내성, 내면의 신성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과 [아폴론의 전차]와 같이 그가 즐겨 그린 신화 주제 그림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색채이다. 보색을 병치하여 각각의 색들이 밝게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화려한 색채는 얼핏 보아 인상파의 점묘를 닮았으나 그 의도와 효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이런 색채 속에서 일상의 물리적인 거리감과 방향 감각이 상실되고 그림 자체가 하나의 움직이는 환영(phantasmagoria)과 같아 보이기를 바랬다. 그의 독특한 색채 감각은 색채화 시기에 처음 등장한 주제인 꽃그림에서, 가장 흔하고 단순한 주제로 강렬한 리듬감을 가진 비현실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많은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와 달리 르동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생활을 했고 말년에는 젊은 작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들이 일차대전에 참전한 1916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가족과 친구들이 출판한 [스스로에게 A soi-même]에는 자서전, 일기, 미술비평, 일반적인 성찰 등이 포함되어 있고, 그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줄 뿐 아니라, 그의 문필가로서의 재능도 보여준다. 대부분의 작품 크기가 작고, 과도하게 문학과 관련되어 평가되어온데다, 집단적인 미술 운동과도 거리를 두었던 화가 르동을 미술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대가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와도 달랐던 그의 작품이, 당대와 후대의 화가에게 미친 영향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크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80년대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이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는 분위기에서 그는 새롭고 대안적인 미술의 선구자로 인식되었고 고갱과 나비파 화가들에게 그는 상징주의를 선취한 거장이었다. 그가 펼쳐보인 무의식의 세계는 곧바로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색채의 가능성을 넓힌 점에서는 마티스를 포함한 야수파(Fauves) 일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1913년에 미국에서 열린 아모리 쇼(Armory Show)를 통해 그의 명성은 대서양 너머로도 퍼졌다. ‘망막적인(retinal)’ 미술에 반해 개념적인 작업을 한 마르셀 뒤샹 역시 “나의 출발점은 르동의 미술”이라는 말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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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발행일 2011.03.04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