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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필 |
서사수필 |
①경(輕)수필로 가볍다. ②글의 소재가 신변잡사이거나 과거사이다.③따뜻하고 친근감이 있다. ④정적이다. ⑤봄과 가을이다. ⑥여성적이다. ⑦예술성과 문학성이 있다. |
①중(重)수필로 묵직하다. ②사회적 문제이고 미래지향적이다. ③차고 싸늘하다. ④동적이다. ⑤여름과 겨울이다. ⑥남성적이다. ⑦예술성과 문학성이 있다. |
다) 실험수필
1) 수필의 문학성을 제고하려고 실험수필을 시도하는 작가가 나타났으나 처음에는 서정을 박제한 개념수필이라는 평을 받았다.
하나, 비는 아름답다.
둘, 비는 다소 색시하다.
셋, 비는 혼란스럽다.
넷, 비는 기다리게 한다.
다섯, 비는 차분한 유혹이다.
-권현옥 「비. 다섯 개의 이미지」전문
2) 지금은 많이 발전하여 그런 평은 사라지고 수필 발전에 공을 세우길 바라고 있다. 우리달구벌수필문학회의 문우들도 《창작문예수필》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김귀선 작가는「통증」이라는 작품으로 《창작문예수필》9호에 이달의 대표작으로 실렸다.
라) 신서정 수필
1) 지금까지 써온 수필을 감상적(感傷的) 서정수필이라면 지성미가 풍기는 수필을 지성적 수필이라 하고, 지성적 수필을 신서정 수필이라 하겠다. (하길남)
2) 윤재천은 서정수필을 정적수필이라 하고 에세이를 비롯한 철학수필과 중수필을 지적수필로 분류하고 있다. 지성적 수필과 지적 수필이란 용어는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3. 감성적 서정수필
가) 예문
나는 아빠입니다. 지금은 늙은 아빠입니다.
엄마 노릇을 해보지 못한 것이 언제나 서운합니다. 그리고 엄마들을 부러워합니다. 특히 젖먹이 아기를 가진 젊고 예쁜 엄마들이 부럽습니다.
연한 파란빛이 도는 까만 눈동자에 고운 물기가 젖은 아기의 눈, 아기의 눈을 보석이나 별같이 찬란한 것에 비긴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어떤 화가도 그 고운 밫을 색으로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아기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다가 그 작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기도 합니다.
입에 젖꼭지를 갖다 대주면 아기는 그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젖을 힘겹게 빱니다. 그 때 예쁜 손가락들이 엄마의 또 하나의 젖을 만지기도 합니다. 엄마의 젖이 둘이 있다는 것은 아기에게도 엄마에게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그 작은 손가락 끝에 아주 작은 손톱들이 있습니다.
나는 젖먹는 아기를 바라다볼 때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기가 눈을 감고 잠깐 젖을 빨지 않으면 엄마는 아기 입에서 젖을 떼려 듭니다.
이때 엄마는 웃으면서 아기를 살며시 누입니다. 엄마는 이때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큰 회사 사장 부인도, 유명한 여자들도, 아무도 부럽지 않습니다. 여학교 때 자기보다 공부 잘하던 동무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기의 엄마같이 뽐내기 좋은 지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의 아기같이 소중한 것이 다시없기 때문입니다. 아기 뺨을 가만히 만져보면 아실 것입니다. 아기의 머리칼을 만져보면 아실 것입니다. 그 아기는 엄마가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젖을 먹여 기르고 있습니다. 아기는 커가고 있습니다. 자라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 딸에게 사다 준 인형이 있습니다. 돌을 바라다보는 아기만한 인형입니다. 눈이 파랗고 머리는 금빛입니다. 소위 '블론드'입니다. 얼굴은 둥근 편, 눈이 그다지 크지 않아 약간 동양적인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웃는 낯입니다 인형은 뉘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자다가도 금방 눈을 뜹니다. 배를 누르면 웁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프게 해서 울리는 때는 별로 없었습니다.
나는 이 인형을 사느라고 여러 백화점을 여러 날 돌아다녔습니다. 인형은 처음에는 백화점에 같이 나란히 앉아 있는 친구들을 떠나 낯선 나하고 가는 것이 좀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상자에 들어 있는 저를 들고 오지 않고 안고 왔기 때문에 좀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귀국할 때도 짐 속에 넣어 부치지 않고 안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떠나오기 전에 난영(蘭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살테니까 서양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 서영(瑞英)이가 난영이를 처음 안을 때의 광경을 영리한 엄마들은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아기는 큽니다. 자랍니다. 서영이는 초등학교를, 중고등학교를, 그리고 대학을, 그리고 시집 갈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난영이를 두고 떠났습니다. 그것도 난영이 고향인 바로 뉴욕입니다. 난영이는 언니 따라 자기 고향에 얼마나 가고 싶었겠습니까.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냉정한 이별을 할 수 있나봅니다. 난영이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른스러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아기입니다.
서영이를 떠나보내고 마음을 잡을 수 없는 나는 난영이를 보살펴주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낯을 씻겨주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목욕을 시키고 머리에 빗질도 하여줍니다. 여름이면 엷은 옷, 겨울이면 털옷을 갈아 입혀줍니다. 데리고 놀지는 아니하지만 음악은 들려줍니다. 여름이면 일찍 재웁니다. 어쩌다 내가 늦게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난영이를 재우는 것을 잊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난영이는 앉은 채 뜬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는 참 미안합니다.
내 곁에서 자는 것을 가끔 들여다봅니다.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난영이 얼굴에는 아무 불안이 없습니다. 젊은 엄마들이 부러운 나는 난영이 엄마 노릇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 피천득의 「서영이와 난영이」전문
나) 위 작품의 장점
1) 문장이 아름답다.~유리그릇 위의 피리 소리 같다.
2) 때 묻지 않은 천사와 같은 天心이다.
3) 한 때, 수필가들이 '수필은 문장'이라며 피천득 선생의 문장을 본받으려는 작가가 많은 적도 있었다.
다) 감성적 서정수필의 한계
1) 가볍고 주관적이다. 생활수필이나 자전수필로 신변잡사라는 지적을 받는다.
2) 자연예찬, 음풍농월, 신변잡사로 과거에 매여 있다.
3) 철학적 사상이 결여된다.
4 지성적 서정수필
가) 예문
무심(無心)은 의식의 탈락이다. 의식을 빼면 남는 것은 육체뿐이다. 육체는 껍데기다. 그래서 땅 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고, 길가에 서 있는 나무와도 같다.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생각 없이 그대로 동작만으로 살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자는 말을 곧잘 한다. 마음 비우기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스님, 신부, 목사 같은 수도인이다. 그들은 신념과 자신과 초월을 손아귀 속에 넣고 사는 사람이다.
잡념이 마음 안에 들끓고 있으면 고통이 온다. 돈을 많이 가지고 싶은 생각, 남을 앞질러서 이기고 싶은 생각 등 많다. 그것을 쉽게 얻는 사람도 있지만 얻지 못할 때 좌절과 비탄과 열등감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설사 얻었다 해도 다음 단계를 또 소원한다. 그래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말한다. '지족(知足)'이라는 한자말을 벽에 걸어놓고 사는 사람을 보았다. 글자 그대로 '족함을 알자'인데, 어느 정도에서 욕심을 끊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어느 날 '로댕조각전시회' 구경을 갔다. 입장료를 주고 전시장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선 곳에 <지옥의 문>이라는 커다란 작품이 나왔다. 기와집 대문짝보다도 더 컸다. 사람 키의 두 갑절은 되었으리라. 그 넓이 속에 온갖 고통의 양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서 표정을 한껏 찡그린 사람, 위를 쳐다보면서 무엇을 열심히 갈구하는 사람, 사랑의 사슬에 걸려서 손을 놓지 못하는 사람 등, 인간 세상의 고통은 거기 다 있었다. 그리고 작품의 상층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은 조각이 따로 붙어 있었다. 아래쪽의 그 고통의 상황을 내려다보면서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표정이 바로 로댕 자신이다" 하는 직감이 내게 왔다. 로댕도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각에 전력투구했을 것이다. 동양 사람이 즐겨하는 무심 공부는 해 보지도 않았을까. 대상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으면 잡생각에서 떠날 수 있다. 그 많은 조각품을 만들면서 로댕은 생각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가 무성하게 선 가로수의 잎가지를 바라볼 때가 있다. 하늘을 향해 발돋움을 하고 있는 나무에는 생각이 없다. 그냥 그대로 무심의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나뭇잎이 바람에 살래살래 고개를 젓고 있는 동작을 보고 어느 시인은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고 표현하였다. 나뭇잎끼리의 은밀한 대화가 귀에 들릴 정도라면 지극한 고요 속에 있어야 한다. '절대 고요'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그 시인은 지극한 절대 고요의 경지에 있었을 것이다.
무심은 가슴 안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느덧 유심(有心)으로 돌아간다. 본래의 마음은 무심인가, 유심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무심은 잠시의 휴식을 줄 뿐 곧 유심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그 무심을 자기 안에 오래도록 머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밀려오는 생각의 물결을 정지시키고 고요 속에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이승에서 극락을 얻은 사람이다.
무심은 만병통치약이다. 학자도 무심을 말하고 정치가도 무심을 말한다.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사람이다. 새것이 나오자면 낡은 것을 버려야 한다. 그 버려지는 곳이 곧 무심이다. 무심으로 돌아가서 무에서 유를 찾아내는 사람으로 예술가도 있지만 철학가도 있다.
낡은 것을 어떻게 버리느냐? 어떤 사람은 낡은 것을 보물로 끌어안고 놓기를 싫어한다. 그것 아니면 빈껍데기가 될까 봐 불안해한다. 그리하여 전통을 말하고, 혈통을 말하고, 고집과 완고를 자기의 방패로 삼는다. 방패막에 싸여 사는 사람은 그 나름의 평안이 있기는 하다. 방패막이 자기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무심으로 돌아가 볼일이다. 무심은 영(零)에로의 환원이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면, 자신을 묶고 있는 그 방패막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깨달아야 제거할 수가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버리면서 얻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도 때로 무심 연습을 한다. 때로 뿐 아니고 몇 십 년을 그 노력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단 십 분도 완전 무심을 얻기가 어렵다. 어느덧 잡념이 가시처럼 날아와서 고요한 수면에 물결을 일으킨다. 무심은 창조주의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하라고 만들어 놓은 인간의 능력인데 왜 버리느냐고 호통이라도 칠 것 같다. 그러나 포기할 수가 없다. 그 안에 휴식이 있고, 평안이 있고, 영원에의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시헌의 「무심 연습」전문
나) 지성적 서정수필의 장점
1) 객관적이고 지혜가 번쩍이고 무게가 있는 글이다.
2) 작가의 철학과 서정이 드러난다.
3) 미래지향적이다.
다) 지성적 수필의 단점
1) 딱딱하고 재미가 적으나 독자를 묶어두는 지성미는 있다.
2) 작가의 풍부한 식견과 철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3) 작품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4) 하여 많은 수필가들이 감성적 서정수필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라) 示唆點
1) 우리 작가들이 더 노력하여 지성적 수필을 쓴다면 수필의 질은 높아지겠다는 생각을 한다.
2) 서정수필이 신변잡사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정서와 시대에 맞는 서정의 창출이 필요하다.(정목일)
3) 우리 서정수필의 고유한 정신을 잃지 않되 서구의 지성수필과 합류하여 배양될 때 우리 수필은 보다 격조 있은 문학으로 발전할 것이다.(윤재천)
5. 결언
금방 수필공부를 시작한 회원에게 지성수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 줄 안다. 그러나 생활수필을 쓰면서도 지성미가 가미되는 글을 쓰도록 노력할 일이다. 수필을 쓴 지 오래된 회원은 지성수필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감성적 서정수필을 쓰던 버릇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더라도 감성과 지성이 융합된 글을 쓰다가 보면 지적수필을 쓰는 작가가 되리라 믿는다.
수필은 문학이다. 우리가 쓰는 수필에 문학성이 결여된다는 지적을 받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참고문헌>
고동주 『수필의 맛과 향기』,도서출판 진실한 사람들 2009
하길남 「한국 서정수필의 현주소」,『수필학』제19집, 한국수필학회 2011.
윤재천 「서정수필의 한계」,『윤재천수필론』,문학관 2010
이정림 『인생의 재발견 수필쓰기』,블로그 수필등산 2013
정목일 「수필의 서정성과 계승」,카페 행촌수필문학회 2007
김귀선 「통증」,《창작문예수필》작품과 작법9 2013
한상렬 「서정수필과 서사수필의 문학성」, 카페 행촌수필 문학회 2007
윤재근 「수필의 서정, 묘사, 서사」블루벨리 게시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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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선생님! 자료 준비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고 작품의 전문을 게재하였다. 글 공부는 문장을 통해 공부하라는 장의원리가 있다. 처음 배우는 분들이 작품 전체를 보면서 글의 구성과 문장을 배우게 하기 위합이다.
문장을 개조식으로 쓴 까닭은 긴 글 속에서 핵심을 찾는 번거로움을 들어주고, 원고량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다.
참말로~~ 참고문헌에 제 이름도 있었네요~~
지금에사 봤습니다~
졸작을 참고해 주신 원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