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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입문 - 5. 의지처
II. 의지처와 연기
지난 글에서... 신심은 앎이며 조건이기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의지할 수 있는 무엇이 될 수 있어 의지처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위의 말을 보면... 신심이라는 무엇에 의지처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를 그럴 듯 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의외로... 그럴 듯 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 그럴 듯 하다 >는 표현은 반드시 진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럴 듯 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럴 듯 할수록 그 말을 듣는 이가 신뢰를 형성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럴 듯 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신뢰를 형성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럴 듯 하든 그럴 듯 하지 않든 별 상관이 없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하다.
그 신뢰가 바로 신심이다.
신심은... 그럴 듯 한 이유에서 형성된 것이든... 진실에서 형성된 것이든... 말도 안되고 근거 없는 것에서 형성된 것이든... 신심이라는 사실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신심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이 그에 따라 일어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말에 따라 무엇을 기꺼이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다를 바가 없다. 즉 신뢰의 대상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꺼이 무엇을 하기에 그것은 진실이 된다. 일상생활의 많은 경우에 있어 진실은 형성되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은 불자이든 아니든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즉 기독교인, 불자등등을 나누는 기준은... 신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신심의 내용 즉 < 무엇을 기꺼이 하게 하는가? >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무리 비이성적 믿음을 요구하더라도 불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의 경우... 불자라면 이러한 사실과 이치를 마음에 잘 담아 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불자의 신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왜 보통의 경우인가?
내가 잘 모르는 불법의 드러난 형태 중... 위의 이치를 행자가 따져서 아는 경우... 길을 가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최소한 우리나라에선 일반인에게 친숙한 불교의 경우 위의 이치를 마음에 잘 담아 두지 않는 것이 길을 가는데 지장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불자라는 이름의 출발점부터 알아 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알기만 하면 된다.
이상을 읽어 보면... 나 역시 분명 어떤 조건하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건을 떠나 그 무엇이든 드러나는 것은 없기에 신심이라는 것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생각을 해 보라.
신심...
딱 두 음절의 단어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광장에서 < 신심~ 신심~~ 신심~~~ !!! >이라고 외친다고 해 보자.
그럴 경우 신심은 그냥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신심이 아니다.
신심은 조건 속으로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신심이 되며... 신심이 조건 속으로 들어갈 때 그 이름을 의지처라고 한다. 즉 조건과 함께 하기에 신심은 의지처이다.
자... 이 글 처음의 표현을 가져와 위의 표현과 비교해 보자.
ⓐ 신심은 조건이 되기에 의지처이다.
ⓑ 조건과 함께 하기에 신심은 의지처이다.
위의 두 표현을 동시에 만족시킬 때... 신심과 조건 그리고 의지처라는 세가지 개념 사이에 원인과 결과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세가지 개념 중 무엇이 보다 근원적인지 말할 수가 없다.
무슨 뜻인가?
신심과 조건 그리고 의지처는 동시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또한 조건속에 있을 때 신심을 의지처라고 하므로... 신심이 드러나게 하는 조건이 되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건, 신심(의지처), 무엇은 동시에 드러날 것이며... 신심(의지처)과 무엇은 상호간에 조건이 됨을 알 수 있다.
조건, 신심, 무엇이 동시에 드러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은 신심의 의지처라는 말이다.
의지처란 조건을 구성하는 한쪽의 입장에서 다른 쪽을 향해 붙이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상호간에 조건을 구성하는 무엇들은 서로가 서로의 의지처이다.
조건...
이 조건에 붙은 이름이 바로 < 연기 >이다.
그 무엇이 의지처라는 말은 바로 그 무엇은 연기에 따른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의지처를 자각한다는 뜻은 연기를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자는 의지처라는 말을 애용한다.
봉팔이의 사례로 한번 돌아가 보자.
저번 글에서... 봉팔이는 담배를 피는 행복의 조건은 갈등의 순간에도 분명 있지만 갈등의 조건에만 집중한다고 하였다.
위의 말은 봉팔이의 집중이 봉팔이의 갈등의 의지처라는 말이다. 그리고 집중은 갈애로서 하나의 의도라고 하였다. 의도는 하나의 의지처이다. 이처럼 의도가 의지처인 조건을 특별히 업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업보는 조건이기에 업과 보는 동시에 드러난다. ( 또한 이러한 경우 그 업보를 특별히 인연이라고 이름한다. ) 즉 봉팔이의 갈등은 그 갈등의 조건에 대한 집중이라는 의도가 없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동시에 그 집중은 갈등과 함께 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만약 봉팔이가 갈등을 회피하고 싶다면 그 집중을 흐트러 뜨리면 된다. 이를 실현하는 방법의 예가 <왼쪽을 보는 규칙>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냥 일관되게 연기라고 이름하지 않고 업보라고 이름하게 되었을까?
간단하다.
봉팔이는 갈등을 일으키는 조건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 집중이 의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집중 즉 갈애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지난 글에서 눈 멀었다 하여 맹목적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결국 봉팔이의 갈등은 봉팔이가 갈등을 하고 싶어하기에 있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그 갈등을 추구하기에 있는 것이다.
이를 < 괴로움은 괴로움 내부에서 일어난다 >고 말한다.
만약 봉팔이가 의지처를 자각하고 있다면 봉팔이는 의지처에 작용을 가하거나 새로운 조건을 형성하여 그 갈등을 회피할 수 있다.
봉팔이의 갈등은 봉팔이의 갈등 그 자체는 그대로 놓아 두고 그 의지처만 건드려도 스러진다. 이를 두고 봉팔이의 갈등은 < 자성이 없다 >고 말한다.
봉팔이의 집중 그 자체는 그대로 놓아 두고 <왼쪽을 보는 규칙>과 같이 다른 의도를 형성하여도 봉팔이의 집중은 스러진다. 이를 두고 봉팔이의 집중은 < 무상하다 >고 말한다.
봉팔이의 갈등과 봉팔이의 집중은 함께 하기에 둘 다 자성이 없고 무상하다.
왜 의지처만 건드려도 스러지는가?
갈등과 갈등의 의지처는 조건속에 있기에 즉 연기에 따르기에...
연기에 따르는 것은 자성이 없다.
왜 의지처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스러지는가?
갈등과 갈등의 의지처는 조건속에 있기에 즉 연기에 따르기에...
연기에 따르는 것은 무상하다.
불교에 관한 글을 보면 무상하다는 말을 설명할 때... 주로 시간과 관련시켜 설명하는데... 이는 틀린 접근만은 아니지만 바람직한 접근은 아니다. 불교는 마음을 보는 것이지 시간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상하다는 말을 설명할 때 시간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도 모자라서 무상하다를 변화한다는 뜻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전적으로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지는 않다. 또 삼법인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 더 좋다. 따라서 이후 삼법인에 대해 적게 되면 보다 자세히 적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 무상하다 >는 < 조건은 해체되기 마련 >이라는 뜻이라고 알아 두기만 하자.
수행 즉 공부를 제대로 하면 어불성설을 하지는 않는다. 수행을 제대로 해야 한다. 백날 외워 봤자... 그것은 씨앗심기의 효과는 있을지언정 제대로된 어떤 이치를 알지는 못한다.(씨앗심기에 대해서도 이후의 글에서 다룰 것이다.) 그런데... 수행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보다 바른 앎을 말해도 지식에 묻혔다느니 헛소리를 하며... 부처 행세는 신물나게 하려고 한다. 뭔 놈의 한소식한 사람이 그다지도 많은가? 지식을 모르는 한소식은 있을지 몰라도 이치를 모르는 한소식은 없다. 불교는 뽕맞은 황홀경등을 추구하지 않는다. 차라리 명철함을 추구한다.
다시 논지로 돌아가서...
위에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의지처를 자각하지 않을 때... 그 조건을 업보라고 이름하며...
의지처를 자각할 때... 그 조건을 연기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봉팔이의 갈등은 의지처를 자각할 때 스러진다. 즉 업보가 연기로 드러날 때... 봉팔이의 갈등은 스러지는 것이다.
>>
바로 <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는 가르침 > 즉 < 멸성제 >이다.
괴로움은 자성이 없기에 스러지며 무상하기에 스러진다...
이를 바로 알았다면... 이제 괴로움을 측은하게 보아라. 그것은 자성이 없어... 의지처를 여의면 스러지는 것이다.
왜 그대는 괴로움에 집중하였던가?
괴로움은 있고 싶어 한다. 존재를 주장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성이 없기에 갈애를 뿌리며 집중을 소망한다. 존재에의 주장 그 갈애는 맹목적이라 스스로를 불태운다. 갈애는 중생의 속삭임이다.
그대가 기꺼이 수용한 괴로움... 그것이 그대의 자비이다.
그러니 죽이려고만 하지 말아라. 그 외침을 외면하지 말아라.
차라리 마음을 내어라. 그 중생이 편안히 쉴수 있게 마음을 내어라.
이러한 까닭으로 왼쪽을 보라고 권한 것이다.
다음은 내가 곧잘 흥얼거리는 노래이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나른한 몸을 누일 때... 속삭임이 전해 준 곳...
무지개 저편... 저 멀리 어딘가...
맑은 하늘...
현실이 가로 막은 꿈이 펼쳐지는...
무지개 너머...
Some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빛이 잦아들 때... 기억하세요...
뭉게구름이 한없이 피어나는 꿈...
눈물이 시큼하지만 달콤한 이슬로 맺혀지는 곳...
이 세계의 흔적 너머 어딘가 있는...
그곳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If happy little bluebirds fly beyond the rainbow... Why... Oh... why can't I?
꿈이 자라는... 무지개 저편...
꿈을 전하는 파랑새처럼 무지개를 넘어...
노란 벽돌길을 함께 걸어요...
첫댓글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무지개 저편으로 파랑새는 나는데 왜 난 날지 못할까..... 젤로 맘에 와닿아요...
노래가 떠오르네요.
"괴로움은 자성이 없기에 스러지며 무상하기에 스러진다."
이것만 잘 익혀도 보다 행복하게 살수 있겠네요.
삶속에서 익힌 괴로움을 견디는 방법은 그 괴로움에 힘, 에너지를 더 가하지 않고 일정기간 아프고 나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지는데...
그러니 일정기간 아플 때 너무 난리칠 필요 없다고 보고, 오히려 평상시 보다 더 조용히 있는게 괴로움을 좀 더 잘견더내는 방법인것 같아요.
노래 가사 변역은 방문객님 마음대로 하셧네요....특히 "노란 벽돌을 함께 걸어요" 가 제일 재미있네요. 왜 하피 노란 벽돌....노란색이 행복,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왜 의지처만 건드려도 스러지는가?
갈등과 갈등의 의지처는 조건속에 있기에 즉 연기에 따르기에...
연기에 따르는 것은 자성이 없다.
왜 의지처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스러지는가?
갈등과 갈등의 의지처는 조건속에 있기에 즉 연기에 따르기에...
연기에 따르는 것은 무상하다.
네, 줄리님
또 방문객님의 말이 떠오르네요
'' 행복할 때 행복한 줄 알아 취하지만은 않으며
불행할 때 불행한 줄 알아 밀어내지만은 않는다''
가만히 보면, 알면! 불행하고 행복한 가운데 평안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불행과 행복이 물러간 뒤에 평안한 것이 아니라 ..
차라리 마음을 낼 수도 있겠고 ..
'견딤'이 무엇일까? 견디는 것일까? 견뎌지는 것일까? 견뎌내는 것일까? ..
이렇듯 모든 것이 의문으로 화해, 하나의 점을 향합니다. 아미타불
건강하세요. 줄리님
잊지않기님, 요즘 어머님 때문에 바쁘세요?
아무래도 난 영어로 쓰여진 글을 보면 마음이 더 편해요.
방문객님이 영어로 불법 말하시면 더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ㅎ
네, 줄리님
엄마에게 좀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아무래도 영어가 편하시겠죠. 평안하세요.
멋대로 번역이긴 한데, 뜻은 통할거라 본다는... 그리고 노란 벽돌길인 까닭은...노란벽돌길을 따라가면,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궁전이 나오기 때문이죠...
잊지않기님, 떡국드시고 남은 시간있으시면 다음 두편 올려주실래요?
Strike while the iron is hot...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