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 1786~1856 정조 10∼철종 7)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 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병조참판인 김로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로영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더 재주가 뛰어나 연암 박지원의 제자로 고증학의 신봉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09년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 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의정 조인영의 소언으로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1840년(헌종6년) 9월 27일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 제주에서는 대정 교리 송계순의 집에 적소를 정하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9년이란 짧지않은 세월동안 추사는 지방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가르쳐 주었다.
1848년(헌종 14년) 풀려나왔고, 조정에 복귀한지 2년만인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니 말년 들어 도합 11년을 귀양살이로 지샌 셈이다.
59세 때인 1844년 추사의 제주에서 그린 작품 중 가장 알려진 것은 "세한도(歲寒圖)" 이다.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추사는 '우연사출란도(偶然寫出蘭圖)' 등 여러 폭의 난초 그림과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등 대여섯 폭의 산수화를 그렸지만 역시 가장 걸작은 겨울 소나무와 빈집을 그린 "세한도(歲寒圖)" 이다.
이 그림은 문자의 향기 [문자향(文字香)]과 서권의 기 [서권기(書卷氣)]가 넘치고 공자의 말씀인 "추운 겨울을 당한 후에야 송백(松柏)이 다른 나무보다 뒤에 시드는 것을 알게 되니라."를 따서 자기의 불우한 처지를 위로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필선은 마르고 담박, 즉 고담하며 간결한 아름다움이 마치 뜻이 높은 선비인 고사의 인격을 대하는 듯하여 심품이라 할 만하다. 참으로 그의 유배 생활의 참담한 환경을 가장 잘 묘사한 그림 같기도 하다. 넓은 공간, 비쩍 마른 고목, 텅 비어 쓸쓸한 오두막집은 차라리 선(禪)의 지극한 경지이기도 하다. 이 '세한도'는 제주에 귀양 와있는 추사에게 꾸준히 귀중한 책들을 보내 준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에게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답신으로 그려 서울로 부친 그림이다. 오위경을 비롯한 청나라의 명류 16명의 제발(題跋)을 받아 그림에 이어 붙인 것으로 더 유명하다.
이후 과천(果川) 관악산 및 선친의 묘역에서 수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경학·음운학·천산학· 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통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祭日通儒)>라고 칭찬하였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에게는 추사가 외8촌 형님이었고 청년 대원군은 추사로부터 난을 치는 수업을 받은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한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혀 그 전까지의 잘못을 시정하였다.
그의 서체는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에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초기에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을, 후기에는 송나라 소식(蘇軾)과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書風)을 본받았다. 그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이 밖에 전각(篆刻)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는데, 별호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 서화의 낙관에 사용하였고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풍기는 높은 경지의 문인화만을 높게 평가하고, 당시 화단에 만연해 있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등을 낮게 평가하였다. 이로써 모처럼 일어난 민족적인 화풍의 세가 꺾이고 다시금 전통적인 문인화풍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예명(藝名) 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김정희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 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제체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제집(潭연濟集)》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와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등이 있다.
추사체 (秋史體 )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독특한 글씨체. 학문에 뛰어났던 김정희는 20세 전후 이미 백가(百家)의 서를 통달하였고 13경(經)에 전력하였고 특히 주역(周易)에 깊었다고 한다. 금석(金石)·도서(圖書)·시문(詩文)·전례(篆隷)의 학(學)에 그 근원을 캐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서법(書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24살 때 부친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갔다가 당시의 유명한 석학들과 널리 사귀며, 한례(漢隷)의 필법을 연구, 해서에 응용하여 , 그들의 장점을 모아 독특한 자기만의 서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추사체이다. 처음에는 중국 학자 옹방강(翁方綱)에 심취하였고, 만년에 대성한 뒤의 서체는 구양순(歐陽詢)의 서체를 기본으로 하여 저수량·안진경(顔眞卿)·미불·유석암(劉石庵)과 왕희지(王羲之)의 필법까지 고루 받아 들였으며, 무서운 패기를 더하여 강하고 부드러움을 겸비하였다. 예서법(隷書法)은 서법의 조가(祖家)로 서도에 뜻을 두려면 예서를 모르고서는 안되며, 또 예법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한 뜻이 없이는 쓸 수 없다. 청고·고아한 뜻은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없이는 능히 손가락 끝에 나타내지 못한다. 평범한 해서와는 비할 바도 아니며 먼저 문자향·서권기를 가슴 속에 갖춤으로써 예법의 장본(張本)이 되며 사예(寫隸)의 신결(神訣)이 된다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