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원짜리
빈 병의 위력
빈 병 하나로 시작된 이 시책이 ‘6시 내 고향’, ‘고향은 지금’, ‘생방송 전국
시대’ 등 전국방송을 타면서 다방도 하나 없고 변변한 식당도 하나 없는
산골짜기 적성면을 전국에 알릴 수 있었으며, 오늘날 전국적으로 유행하
고 있는 ‘가옥수리 봉사단’이 출범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1997년 1월 공무원에 임용된 지 13년 만에 6급 직무대리로 승진
했다.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같이 들어
간 동료보다 빨랐으며 2~3년 일찍 들어간 사람들보다도 빨랐다.
공무원이 승진하는 데는 근무성적 평정 점수도 좋아야지만 길
(인사규정)도 알아야 하고 운도 따라 주어야 한다. 남들보다 승
진이 느린 사람은 위 3가지 중에서 뭔가 한 가지가 안 따라 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운이 좋은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승진해서 적성면 계
장 요원으로 나갔다.
내가 공무원 시작할 때는 고졸이 대부분이었는데 13년이 지난
1997년에는 대부분의 신규 임용자들 학력이 최소 전문대졸이었
다. 고졸 계장이나 과장 말을 대졸 하위직원들은 잘 들을까? 안
들을까? 혹 무시나 하지 않을까? 여러 생각 끝에 방송통신대를
입학하여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하급직원일 때 내가 본 계장님은 그저 밑에서 올라가는 서류에 결
재나 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흔히 하위직들은 그것을 ‘볼펜
을 꺾는다’라고 말했다. 나는 계장이 되면 절대로 볼펜은 꺾지 말
아야지, 계장은 월급도 더 많이 받고 경험도 많으니까 일도 더 많
이 해야 한다는 게 나의 소신이었다. 4월이 되자 인사이동이 있
어서 나는 직무대리 꼬리표를 떼고 총무계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초임 6급이 주무계장을 한다는 건 부러움과 동시에 경계의 대상
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무 분장표에 계장의 담당업무는 ‘○○계 업무
총괄’이었다. 그러나 나는 계의 업무 일부를 떼어 맡았다.
면의 주무계장으로 뭔가 좀 튀고 싶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전 직원을 모아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을
시도해 보았다. 그때 마침 신규로 갓 들어온 A 주사가 빈 병 모
으기를 제안했다. 빈 병을 모아 팔아서 그것으로 불우이웃 돕기
를 하자는 것이었다.
키가 크고 호남형인 A 주사는 원래 행정학과 출신이나 건축직 시
험을 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었는데, 자기 말로 건축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늘 진담처럼 농담을 하는 친구였다.
매주 월요일 출근 때 1인당 빈 병 20개씩 모아 오기로 하고 청소
차량 운행 시 수집되는 빈 병도 모두 모아두기로 하였다. 그 당시
만 해도 재활용이란 용어가 생소하고 청소차가 수집해온 고물이
나 빈 병들은 미화 요원들이 별도로 관리하고 있었다. 미움을 사
는 건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3개월을 모았더니 면사무소 옆에 산더미같이 빈 병들이 쌓였다.
고물상을 불러서 팔았더니 184,500원을 주었다. 부피에 비해 적
은 액수였지만 쓰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궁리 끝에 이 돈으로
독거노인 가구를 방문하여 도배와 장판 그리고 전기배선 등을 손
봐주는 작업을 하는 게 가장 낫다 싶었다.
대상 가구를 선정하고 치수를 재어서 자재들을 구매했는데도 돈
이 남았다. 남은 돈으로는 전화카드를 제작해서 주민등록을 전입
해오는 가구에 전입 기념품으로 주자, 작은 것이지만 기분은 좋
을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군청에 주간업무보고를 했더니 신문이며 방송국에
서 난리를 쳤다. ‘삶의 현장 체험의 날 운영’ 제목이 그럴듯해서인
지 반응이 뜻밖에 좋았다. 당일 아침 직원조회에서 조 편성을 했
다. 도배·장판조, 전기배선조, 청소조, 민원처리 필수인력을 제
외하고 3명씩 배정하니 딱 맞았다.
첫 시도는 상리에 사시는 할머니 댁이었다. 비가 새고 쥐가 오
줌을 싸서 지도를 그려 놓은 천정부터 제거하고 도배를 시작하
자 전기조가 배선교체와 형광등을 교체하고 밖에선 청소조가 설
거지에, 다른 한편에선 땔감을 자르고 패고 요란스러웠다. 점심
은 가지고 간 라면과 김치로 대충 해결하고 나자 충주 MBC 방
송 카메라가 도착하여 촬영에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는 딸이 다
섯이나 있는데도 못 해준 일을 해줘서 고맙다 하시며 연신 눈물
을 흘리셨다.
그날 저녁 지역 TV 뉴스에,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에 온통 도배
를 하였다. 이후 사업은 3달에 한 번씩 계속되었다.
이렇게 해서 30원짜리 빈 병 하나로 시작된 이 시책이 ‘6시 내 고
향’, ‘고향은 지금’, ‘생방송 전국 시대’ 등 중앙 TV 방송을 타면서
다방도 하나 없고 술집도 하나 없는 산골짜기 적성면을 전국에 알
릴 수 있었으며, 오늘날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가옥수리 봉
사단’이 출범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빈 병 버리지 말고 모아서 저에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