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1898년 7월에 우라늄의 330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새로운 물질 ‘폴로늄’을 발견한데 이어 12월 26일에도 새로운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희망과 절망의 시대를 동시에 열었다. 라듐은 ‘광선(光線)’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폴로늄은 마리 퀴리의 조국인 폴란드에서 땄다. 두 사람은 이 업적으로 190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프랑스 학술원이 노벨상 후보를 추천할 때 마리 퀴리는 제외하고 남편만 추천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폴란드 여성이자 유태인이었던 그를 차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 이어 이들 부부의 딸도 193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퀴리 가(家)는 한 집안에서 노벨상을 3개나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마리 퀴리는 강한 방사선을 내는 동위원소들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얻은 백혈병으로 1934년 숨졌지만, 사후 그에겐 또 다른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후 61년만인 1995년에 파리의 팡테옹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다.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 프랑스를 빛낸 60여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곳, 나폴레옹이나 드골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이곳에 마리 퀴리가 영면하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저명인사 중에서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며 퀴리를 추모했다.
퀴리 [Pierre Curie, 1859.5.15~1906.4.19]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조 전기 현상’, ‘퀴리의 법칙’ 등을 발견하고, 결정물리학, 자성물리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부인 마리 퀴리와 함께 방사능 연구를 하여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였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물리학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수상 프란테상(1895), 루카스상(1901), 노벨물리학상(1903)
파리 출생. 주로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16세에 대학 입학자격을 얻어 소르본대학에 들어가 수학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처음에는 이학부의 실험조수로 열(熱)을 연구하였는데, 후에 광물학을 전공한 형과 함께 결정(結晶) 연구를 시작, ‘피에조 전기(電氣)현상’을 발견하고(1880), 그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전기계(퀴리전기계)를 고안하였다. /1883년부터 파리 물리화학 학교의 실험주임, 후에 교수로서 결정물리학(結晶物理學) 연구에 전념하여, 결정의 대칭성(對稱性)에 관한 이론적 고찰을 전개하였다. /그 후 실험연구로 되돌아가, 비주기정밀천칭 등에서부터 얼마 후에는 물질의 자기적(磁氣的) 성질의 연구를 하였다. 상온에서 1400 ℃ 정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화가 온도에 역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하고, 퀴리온도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磁性物理學)의 기초를 확립, 발전에 공헌하였다./1895년 마리 스크로도프스카(마리 퀴리)와 결혼 후, 결정 성장(成長)에 관한 문제 등을 다루던 중 방사능 연구에 흥미를 느껴 아내와 공동으로 우라늄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탐구에 노력하였다. 이 공동연구로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였다. /유기방사능 문제, 방사능에 의해 전매용액(電媒溶液)에 생기는 전도성(電導性)의 문제, 열의 발생, 생리작용 등도 연구하였다. 1903년 아내 및 H.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후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06년 교통사고로 급사하였다. 프란테상(1895) ·루카스상(1901)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1972년]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사망
해리 투르먼 前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72년 12월 26일 오랜 투병 끝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동안 제33대 미국대통령을 지냈으며 한국전쟁에 미군참전을 결정했고 2차대전 말기에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을 승인하는 등 그 생애에 많은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대전 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해 미국의 냉전정책에 기조를 마련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급서로 부통령에서 전쟁중의 미국을 맡은 트루먼은 1948년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의 듀이 후보를 물리치고 재선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심장과 신장의 병발증으로 중상에 빠져 있었으며 이날 밤 캔사스시 메디컬센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트루먼 [Harry Shippe Truman, 1884.5.8~1972.12.26]
미국 제33대 대통령. 각종 위원회 위원과 국방계획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고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반소·반공을 내세운 트루먼독트린으로 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정치의 방향을 결정하였고 6·25전쟁으로 인한 한국 파병에 이르기까지 내정 ·외교를 지도하였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미국 미주리주 주요저서 《회고록》(1955∼1956)
트루먼 / 미국 제33대 대통령. 1950년 12월 16일 당시 미국대통령트루먼이 백악관에서 결재를 하고 있는 모습.
미주리주(州) 출생.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06∼1917년 가족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였으며, 1917∼1918년 야전포병학교 교육을 받고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 소위로 참전하였다. 전후에는 법률학교를 나와 잭슨군 재판소 판사를 거쳐 1926년 수석판사가 되었다. 1934년 미주리주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0년 재선되어 각종 위원회 위원과 국방계획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44년 대통령 F.D.루스벨트 때 부통령에 선출되었고 1945년 루스벨트의 급서(急逝)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47년 반소·반공을 내세운 트루먼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정치의 방향을 결정한 것으로서 중요하다. 1948년 대통령에 재선되어 6·25전쟁으로 인한 한국 파병에 이르기까지 내정 ·외교를 지도하였다. 그의 재임 중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D.맥아더를 해임시킨 일은 세계여론을 모은 큰 사건이다. 저서에 《회고록》(2권, 1955∼1956)이 있다.
◆ 마오쩌둥 毛澤東 1893년 12월 26일 태어남 / 1976년 9월 9일 죽음
마오쩌둥(1966) "우리 민족은 지금부터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여러 민족이 이루는 대가정의 일원이 되어, 용감하고 근면하게 스스로의 문명과 행복을 창조함과 동시에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촉진하기 위하여 일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더 이상 모욕당하는 민족이 아니다."-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선언연설>(1949)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1949년부터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1959년 물러날 때까지 국가 주석을 지낸 중국의 군인·정치가이다. 사임 이후 중국공산당 주석으로 지도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은 1920년대 후반 도시지역에서 봉기가 실패한 후 주더[朱德]와 함께 중국 동남부 장시 성[江西省]에서 장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온건한 농지 개혁과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1930~34년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마오쩌둥과 그가 이끄는 홍군은 우수한 군비와 화력을 앞세운 국민당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전술로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70만 군사가 동원된 5번째 대대적인 공세 앞에서는 궤멸 직전에 이르렀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은 살아 남은 8만 5,000명의 전투원, 1만 5,000명의 후방요원, 그리고 임신 중이던 자신의 부인을 포함한 35명의 여성을 이끌고, 추격해오는 국민당군과 계속 싸우면서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너는 1만 5,000㎞에 이르는 대장정을 감행하여 서북지방의 산시 성[陝西省]으로 이동했다. 1년이 넘는 장정에서 불과 수천 명만이 살아남았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공산당에서 지도력을 확립했고, 국민당의 지배력이 닿지 않는 근거지에서 홍군의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옌안[延安]을 근거지로 힘을 키운 결과 제2차 세계대전 후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마오쩌둥 [毛澤東(모택동), Mao Zedong, 1893.12.26~1976.9.9]
중국의 정치가·공산주의 이론가. 중국공산당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으며 장제스와의 내전에 승리하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웠다.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1949~1959)으로서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다.
별칭 자 룬즈[潤之]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공산주의 이론
출생지 중국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
주요저서 《지구전론(持久戰論)》,《신단계론》,《신민주주의론》
↑ 1954년 달라이라마와 마오쩌둥 /
자 룬즈[潤之].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四書)》 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둥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長沙]의 샹샹[湘鄕]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民立報)》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反淸論)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그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1957년 반우파(反右派)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마오쩌둥(모택동, 중국어 간체: 毛??, 정체: 毛澤東, 병음: Mao Zed?ng,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다. 정치가일뿐만 아니라 사상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고, 시인이나 서예가로서도 유명하다. 자는 룬즈(潤之)이다.마오쩌둥은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의 평가에 대해 논쟁이 분분하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짜뚱에 대해 장제스를 격파하고 중국을 강대국으로 이끈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그의 급진적인 정책이 불러온 중국의 문화, 사회, 경제, 외교관계에 입힌 피해 및 광대한 인명피해는 비판받기도 한다.
1. 어린시절
후난 성 샹탄 현의 부유한 농가에서 셋째로 태어났으나, 위의 형제 두명이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맏이였다. 집안이 상대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 그는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풍습대로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시키려고 하자 그는 집을 나와 창사의 주성중학에 입학했고, 신해혁명이 터지자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후 학교로 돌아와 1912년 수석의 성적으로 후난성공립고등중학교에 들어갔다. 1913년에는 후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1918년 "신민학회"를 창립하고, 이해 사범학교를 졸업후, 스승이자 훗날 장인이 되는 양창지와 함께 베이징으로 왔다. 1919년 양은 베이징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마오는 도서관의 사서로 일할 수 있었다. 마오는 한편으로는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천두슈, 후스, 첸쉬엔퉁과 같은 당시 중국의 대사상가들의 강의를 접하고 수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이때의 학습으로 훗날 마오사상의 기초가 다져졌다.1920년 고향으로 돌아와 잡지 《상강평론》를 창간했지만 성정부의 조처로 폐간되었다. 이후 천두슈, 리다자오와 만나고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학교창립을 주도, 창샤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아버지의 유산까지 물려받아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양창지의 딸이자 동급생이었던 양카이휘와 결혼했다.
2. 중국공산당 창립과 국공합작시절
이때부터 마오는 공산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1921년 8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에 창립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참석한 멤버중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마오와 둥비우 두사람 뿐이었다. 나머지는 혁명운동중에 죽거나 혹은 변절하여 중국 국민당이나 대일본제국 측으로 전향하였다. 이 대회에서 마오는 회의서기를 맡아 보았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0월에는 중국 공산당 후난성 지부를 창립하고 서기로 취임하였다. 1923년에는 제3차 전당대회에 출석하여 5명의 책임비서중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1924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중앙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제4차 당대회에 참석하였으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는데 실패하였다. 1925년 10월에는 국민당 선전부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후난성 농민운동의 동향을 관찰하고 그 혁명성을 주목한 《후난농민운동고찰보고》를 발표했다. 혁명의 동력으로 농민을 주목한 마오사상의 특징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3. 장시 소비에트 시절
1927년 마오는 창샤에서 추수 봉기를 이끌었다. 여기서 그는 "중국공농혁명군"이라고 이름붙은 무장병력을 이끌었지만, 토벌군에게 패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장시 성의 싼완으로 도주했다. 여기서 병력을 재편성하고 다시 장시 성의 징강 산으로 옮겼다. 마오의 군대에 지역 토비와, 또다른 공산당 지도자인 주더의 군대가 합류하여 "중국공농홍군"(약칭 홍군) 제4방면군을 구성하였다.1931년에서 1934년까지 홍군은 영향력을 넓혀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埃共和?)을 건설하고 마오는 소비에트공화국 주석겸 중국공산당 중앙집회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1930년 추수 봉기 이후 떨어져 지냈던 양카이휘가 국민당에 잡혀 처형되었고, 마오는 이곳에서 허쯔전과 재혼하였다. 마오는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던 주더의 도움을 받아 매우 효율적인 부대를 조직하였으며, 특히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정한 군율로 농민을 지지세력으로 삼아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게릴라전략으로 계속되는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분쇄하였다.국민당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장개석)는 이러한 소비에트를 분쇄하기 위해 4번의 토벌전을 펼쳤으나, 번번히 홍군에 패했고, 국민당군이 버리고 도주한 군사물자는 오히려 홍군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1932년 6월까지 홍군은 45만병의 정규병력과 보조병력으로 20만명의 민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불법화된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의 체포와 탄압을 피해 이곳 장시 소비에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시 소비에트로 피난해온 중국공산당 고위급들이 많아지면서 마오의 지도력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옛소련에서 정통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고 돌아온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아 당권을 장악하였고, 그들은 유격전을 중심으로 한 마오의 전략을 버리고 정규전을 결정했다
4. 대장정과 옌안시절
한편 국민당군은 100만의 병력을 동원해 제5차 토벌전을 시작하였다. 독일군사고문단의 조언으로 진지와 토치카를 구축하면서 천천히 진격했고, 이에 1931년부터 마오를 대신해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보구는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다가 커다란 인명손실을 내었다. 또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배후 촌락이 모두 국민당의 손에 넘어가 소비에트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4년 10월 가을, 공산당 지도부는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산시 성에 있는 근거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만킬로미터를 걸어 결국 산시에 도착하였다. 대장정 도중 1935년 1월 열린 쭌이 회의에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붕괴하고, 마오에게 공산당의 절대적인 지도권이 넘어왔다. 1935년 10월, 마오가 이끄는 부대는 티베트와 같은 소수민족 지역을 거쳐 목적지에 도달했고, 1936년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피해 이동을 개시한 나머지 부대들도 이곳에 합류하였다.1936년 장제스는 만주사변이후 일본군에게 근거지를 잃고 근처에 주둔한 장쉐량(장학량)의 군대에게 도주해온 공산군의 토벌을 명령했다. 토벌전을 독전하기 위해 장제스는 장쉐량이 주둔해 있던 시안을 방문하였다. 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장쉐량은 대일본제국의 침략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도 공산군 토벌만 주장하는 장제스에 불만을 품고 도리어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 사태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풀려나는 조건으로 항일을 위한 공산당과의 휴전과 제2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형식상 국민당군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이후 공산당은 일본군이 점령한 화북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1942년부터 마오는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에서 정풍운동을 개시하였다. 이는 마오의 당에 대한 지도권을 재확인하고 당에 남아있던 마오의 반대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왕밍등 한때 마오에 반기를 들었던 당내 주요인사들은 대중앞에서 스스로 과오를 인정하는 자아비판을 할수밖에 없었으며, 보안조직을 이끌었던 캉셩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힌 몇몇인사들은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한편 마오는 1937년 허쯔전과 이혼하고 다시 배우 출신 장칭과 재혼하였다.
5.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5년 대일본제국의 항복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미국의 중재로 공동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어 본격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초기국면에서 국민당군은 병력수에 있어서 공산군측에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초기에 유리한 국면을 선점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는 후쫑난 지휘하의 20만명의 병력이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이션로 인한 경제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양쯔강을 건너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5월에는 최대도시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0월에는 국민당손에 남아있던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마저 함락되어 장제스과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도피하였다.1949년 10월 1일 마오는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6. 대약진운동과 백화제방
마오는 건국선포직후 소련을 방문하여 원조를 청하고,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에는 지주계급의 숙청이 전제조건이었으므로 수많은 지주들이 집회에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지에 수용되었다. 이는 새로운 정권에 위협이 될만한 반혁명세력을 뿌리뽑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여 막대한 전비때문에 신국가 건설이 잠시 지체되지만, 1953년부터 소련의 차관과 기술의 원조를 받아 소련을 본뜬 제1차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특히 농업생산에서 커다란 진전을 보였고, 공업발전을 위한 기초산업을 건설하였다. 결과에 고무된 마오는 제2차 5개년계획을 발표하였고, 농업을 집단화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집단농장이라고 할수 있는 인민공사가 마을마다 구성되어 농민들은 여기에 수용되었다. 또한 체제가 어느정도 안정된 1956년에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放百家??)" 방침을 내놓았지만, 이후 사태가 통제불가능에 이르자 돌연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1957년에는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반우파운동"을 전개하여 반체제인사의 숙청에 나섰다.마오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수년안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이의 지표라고 할수 있는 철생산량을 늘려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대약진운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기술의 미비와 농업의 경시, 게다가 기우이상으로 인한 나쁜 작황으로 말미암아 대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아사하였다. 1959년에 열린 루샨 회의에서 국방부장을 맡고 있던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한 마오를 비판하지만, 도리어 자신이 해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샤오치는 대약진운동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덩샤오핑과 함께 경제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한편 스탈린의 뒤를 이어 집권한 흐루시쵸프가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자, 마오는 이를 규탄하여 중소간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2년에는 티베트를 둘러싸고 인도 공화국과 국경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안보적 위협이 증가하자 중국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실시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7. 문화대혁명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각각 국가주석과 당서기를 맡아 파멸적 결과를 초래한 대약진운동의 뒷수습을 하면서 점점 마오를 제치고 실권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마오는 점점 이름뿐이고 상징적인 위치로 몰려갔다. 그러자 마오는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다시한번 실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다. 전국에서 마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홍위병들이 일어났고, 이들은 "공산주의의 적"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사회원로와 종교인등에 무자비한 폭행과 조리돌림을 행했다. 이러한 혼란하에서 마오의 의도대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다시한번 마오는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특히 류샤오치에 맞서 마오를 지지한 국방부장 린뱌오는 일약 마오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8. 린뱌오의 쿠데타 음모
린뱌오가 후계자 자리를 굳히는듯 했으나, 마오는 린뱌오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그를 제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71년 마오가 남중국을 시찰하면서 돌연 린뱌오를 비난했고, 린뱌오는 이를 자신의 제거신호로 보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혹은 린뱌오의 쿠데타 음모를 미리 감지한 마오가 그를 비난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음모는 실패로 끝났고, 린뱌오는 소련으로 망명하던중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9. 4인방의 득세와 사망
린뱌오가 사망한 이후, 노쇠한 마오를 대신하여 정치실권은 혁명원로들을 제치고 장칭등 사인방과 캉셩이 장악하였고, 린뱌오와 공자를 비난하자는 "비공비림"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하려고 하였다. 마오는 이러한 와중에서 파킨슨씨병 또는 운동뉴런장애로 짐작되는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활동을 못했다. 1976년 그는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화장하라는 자신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레닌과 마찬가지로 시신보존되어 베이징의 "마오주석기념관"에 안치되었다
10.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혁명이론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 세력을 농민으로 보아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전파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산업노동자를 혁명의 원동력으로 본 레닌의 입장을 중국의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실례로 그는 엉덩이가 없으면 사람이 서거나 앉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중국 공산당과 농민의 관계는 뗄 수 없다고 보았다.그의 사회주의이론과 군사이론은 각국의 혁명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에 호치민, 폴포트,그리고 체 게바라와 같은 동남아나 중남미의 혁명가들은 그의 전략에 따라 농민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하는 농촌혁명과 게릴라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의 급진적 사상은 같은 서구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1. 마오쩌둥 개인숭배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홍위병에 의해 마오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공공기관에 필수적으로 게시되도록 하였으며, 그의 저작이나 연설에서 발췌한 문장을 모아놓은 수첩크기의 붉은 책인 《모주석어록》은 누구나 휴대하여야만 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공개적인 마오의 개인숭배는 사라졌지만, 중국의 농촌지역에는 관우와 마찬가지로 마오의 사진이나 조각을 사당에 모셔놓고 신의 하나로서 숭배하는 일도 종종 보도되고 있다
김영삼 1996년 12월 26일 당시 집권당이던 신한국당은 새벽 6시에 국회 본회의를 열어 여당의원 155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쟁점인 노동법 개정안, 국가안전기획부법 개정안 등을 기습 처리했다. 노동법 개정안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는 기업주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위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후 노동자들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권영길 위원장을 중심으로 약 2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총파업을 전개하였다. 노동법 파동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한보사태와 김현철파동이 연이어 터졌다. 도덕적 신뢰를 상실한 김영삼 정권은 연이은 대기업의 부도에 흔들리다가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가 한국에 상륙하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면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초연 1944. 12. 26
브로드웨이 1944년 12월 26일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 동물원 The Glass Menagerie>이 시카고 시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의 소용돌이에서 해체되어가는 미국의 하층 가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윌리엄스의 여러 작품들 중 수작으로 손꼽힌다. 시카고에서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이듬해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데 이어 1950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유리 동물원>은 낭만적인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부심 강한 어머니 아만다와 냉소적인 아들 톰이 유리로 만든 동물들을 수집해 놓은 환상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장애인인 여동생 로라를 위해 구혼자를 얻어주려다 실패한다는 이야기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연극평론가상을 4차례 수상했으며, 그의 작품은 전세계에서 널리 번역·공연되었다. 그의 작품은 낭만적인 온화함의 이면에 폭력이 깔려 있는 세계에서 인간이 겪는 좌절을 보여준다.
정읍수도서비스센터(단장 이승식)는 24일 송년모임을 반납하고 마련한 성금으로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사랑나눔행사를 펼쳤다. 또 직원들은 불우이웃들에게 연탄을 구입해 전달하고 따뜻한 겨울나기를 기원했다.
이승식 단장은 "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국민기업으로서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적인 봉사활동으로 나눔의 정신을 정착시켜 가겠다"고 말했다.
◆정읍상의 내달6일 신년인사회 2008-12-25 18:07:12
정읍상공회의소(회장 신영길)는 2009년 신년인사회를 내달 6일 11시 아크로웨딩타운에서 각급기관을 비롯한 단체장과 지역 상공인을 대상으로 2009년 신년인사회를 개최한다.정읍=김호일기자 kimhoil@
◆정읍 나눔회원들 봉사활동 펼쳐: 2008-12-25 17:05:22
내장산국립공원사무소(소장 김태경) 직원들로 구성된 나눔회회원 10여명은 연말을 맞아 불우한 이웃위해 300만원 상당의 생필품 지원은 물론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 나눔회원들은 지난 2005년 처음 활동을 시작으로 매월 정기적으로 정읍지역 어려운 이웃을 찾아 봉사활동을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는 사회복지시설의 내장산 봄나들이 실시와 독거노인 주거환경개선사업, 사회복지시설 위문 및 물품지원, 독거노인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등 봉사활동을 꾸준히 실시해오고 있다. 정읍=김호일기자 kimhoil@
◆[정읍]모범고등학생 표창 격려 2008-12-24 정성우기자
정읍시는 시청 5층 회의실에서 지역내 12개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모범학생에 대한 표창 수여식을 가졌다.
이번 표창은 품행이 단정하고 효행을 실천하며 봉사정신이 투철한 모범학생을 발굴, 표창함으로써 학생들의 바른 인성함양 및 향학열 고취를 위해 효행과 봉사, 선행 3개 부문에 걸쳐 34명을 선발, 표창했다. 시관계자는 “이들 중에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과 급우들간의 뜨거운 우정,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되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며 “앞으로 정읍지역의 미래를 이끌어갈 우수한 인재들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날 강 시장은 격려사를 통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사람, 매사에 고마워하고 칭찬하는 사람, 그리고 현재 이 자리에 머물지 말고 부단히 노력하여 자기를 계발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며 “이번 표창은 13만 정읍시민의 인재양성의 염원과 사랑이 담긴 것인 만큼 이를 가슴 깊이 새기고 정읍지역 발전의 탄탄한 토대가 될 수 있는 능력있는 인재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읍시, 내년 예산 60% 상반기 집행 강광 시장 “지역경제 활성화와 서민생활 안정 총력”
정읍시가 경기침체 확산으로 위축된 실물경제 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통한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2009년도 재정 조기집행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정읍시는 지난 23일 각 실과소 주무담당 및 읍면동 총무담당 공무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방재정 조기집행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촉진을 위해 전체예산의 90% 이상을 상반기에 집중 발주하고, 60%이상의 자금을 집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따라 일반회계와 특별회계 및 이월예산 포함한 내년도 전체예산 5513억원의 60%인 3308억원이 상반기 집행된다. 시는 우선 2009년 예산을 금년 12월중에 배정해 발주할 수 있도록 하고, 신규사업의 행정 절차를 대폭 단축하기 위해 내년도 상반기 발주사업은 모두 긴급입찰로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일반적으로 10일 걸리던 것을 5일 이내로 최대한 단축키로 했다.
또한 세출 예산 운용도 내년 제1회 추경을 앞당겨서 2월중에 실시하고, 이월 예산을 1월초에 모두 확정하는 등 예산을 조기에 확정하고 집행한다. 이를 위해 정읍시는 부시장을 비상대책 단장으로‘지방재정 조기 집행 비상대책 상황실’을 설치 운영해 매일 추진상황을 점검하고, 집행상 문제점 및 애로사항에 대한 제도개선을 통해 조기집행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강광 시장은“앞으로 상반기 예산집행에 따른 국고 조기지원과 관련규정 개정을 행정안전부와 전북도에 건의, 협의하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와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정읍=김진엽기자
◆강광 시장, 1000만원 시민장학재단 기탁 취임 후 급여 일정액 적립 총 4600만원 지역사회 기부
강광 정읍시장이 시민장학재단에 1000만원을 기탁했다. 정읍시민장학재단 이사장으로서 지역 인재양성을 위해 장학기금 모금에 앞장서온 강 시장은 지난 23일 장학재단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광영 부이사장에게 1000만원을 전달했다. 이는 강 시장이 지난 2006년 민선4기 정읍시장 선거 출마 당시 당선되면 급여의 일정액을 지역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장 취임 후 매월 일정액을 적립해 왔으며, 그 일부를 이번에 시민장학재단에 기탁한 것. 특히 강 시장은 경기침체 등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를 맞아 관내 불우시설 22개소에 2200만원, 저소득계층 200세대에 2000만원(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정기탁)을 비롯 연말연시 경찰서 전.의경 위문 등 총 4600만원을 의연금으로 기탁키로 했다. 강광 시장은“앞으로도 급여의 일정액을 계속 적립해 인정 넘치고 더불어 사는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겠다”며“살아서 행복한 정읍, 시민이 잘사는 새정읍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정읍=김진엽기자
2004년 동남아시아 대지진
1999년 스포츠용품 회사 나이키 설립자 빌 보워먼 사망
1996년 신한국당 노동관계법-안기부법 변칙 개정
1994년 가양대교 착공
1994년 옐친, 체첸 공격 중지 명령
1990년 대법원, 이름에 쓸 수 있는 한자를 2,731자로 제한하는 개정호적법 시행규칙을 확정
1989년 루마니아 구국위원회,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에 선출
1983년 한일경협 2차년도 규모 495억엔으로 합의
1983년 일본 나카소네 2차내각 발족
1980년 입법회의, 언론기본법 대통령선거법 의결
1974년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시작
1972년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사망
1969년 제3한강교 개통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포
1962년 워커힐 준공
1961년 아랍연맹, 예멘과의 연방 해체
1957년 뉴델리에서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亞阿)회의 개최
1950년 맥아더 원수,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에 관한 성명 발표
1949년 아인슈타인 통일자장의 원리 발표
1948년 소련, 북한에서 철수 완료
1945년 국군준비대회 개최
1941년 미국-영국-중국 군사동맹 체결
1934년 일본 최초의 직업야구단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신) 탄생
1932년 중국 칸수 대지진으로 7만명 사망
1916년 인도 국민회의파와 인도 이슬람교도연맹 공동전선 결성
1904년 쿠바 소설가 겸 민속 음악학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출생
1900년 엔리코 카루소 성악가,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프를 불러 밀라노 스칼라좌에 데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