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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입장에서 그리고 위대한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통한 그러한 시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고 보고 배우고 느끼고 그렇게 알고 있다.
여기서는 같은 시대 같은 사건에 대해서 가해자인 일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어떻게 기술하고 알고 있는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왜???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 신문같은 미디어나 어떤 다른 경로로도 그러한 것들을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직접 확인해 본다. 자료나 부족한 역사적 상식으로 정확한 내용인지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잇으나 이 때문에 불 필요한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그들이 전개해 놓은 자료를 일부 입수 하는대로 특별한 주관적인 내용의 삽입 없이 그대로 번역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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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禄・慶長の役 (문록·경장의 역)은 1592년(일본문록원년, 명 및 조선 만력 20년)부터 1598년(일본 경장 3년, 명 및 조선 만력 26년)에 걸쳐 행해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하는 원정군과 이씨 조선 및 명의 군과의 사이에 교섭을 병행하면서 한반도를 전장으로 해 싸워진 전쟁이다.
文禄の役=임진왜란 慶長の役=정유재란 1 명칭에 따라
도요토미 정권 시부터 에도 시대 후기에 이를 때까지는, 이 전쟁이 일본이 명의 정복을 목표로 하는 도상의 한반도에서 행해진 것인 것으로부터, 고려진·조선진의 호칭과 함께 당방문·당진등의 호칭이 이용되고 있었다.
에도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있어서는 조선 정벌, 정한 등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1910년(메이지 43년)의 한일합방 이후는 조선인이 일본국민이 된 것으로부터 조선 정벌의 표현은 피할 수 있어 대신해 제1차 출병을 문녹의 역 , 제2차 출병을 경장의 역 , 아울러 문녹·경장의 역이라고 하는 호칭이 정착했다 (그 밖에도 한국 출병이나 조선역이라고 하는 부르는 법도 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에 침공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근래에는 「진구 고고의 삼한 정벌」과「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라고 하는 황국 사관에 의해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가 조장·정당화 되었다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전후 반성의 필요성을 담아, 조선측이 받은 피해에 관심을 가지는 입장의 연구자를 중심으로 조선 침략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문녹의 역은 1592년(문녹 원년)에 시작해 다음 1593년(문녹 2년)에 휴전했다. 또, 경장의 역은 1597년(경장 2년) 강화 교섭 결렬에 의해 시작되어, 1598년(경장 3년)의 히데요시의 죽음을 맞아 일본군의 후퇴로 종결되었다. ·
한국 북한 에서는 문녹의 역을 임진왜란(전쟁 총칭으로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경장의 역을 정유재란이라고 부르고 있고 (북한에서는 임진조국 전쟁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는 만력 한국 전쟁 혹은 조선임진형국전쟁 (조임진국쟁)으로 불린다.
덧붙여 문녹 원년에의 개원은 12월 8일(태양력
2 경위 전쟁전의 상황
1590년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아제국에 복속을 명하고 있었지만, 명의 정복도 기도 해, 대마도의 영주 소시를 통해서 「이씨 조선의 복속과
원래 조선과의 무역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던 소시는 이을 대응하는데에 고심해, 조선에 일본 통일을 축하 하는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해 원만하게 끝내려고 했지만, 결국 히데요시는 명에의 원정을 결정해 문녹원년(1592년) 4월(일본력.
「조선에 명에의 길을 빌린다 (가도입명)」라고 하는 명목으로 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16만의 대군을 보냈다. 덧붙여 전력에 자신이 있던 일본군은 상륙 후도 전국의 상식에 따라 몇 번이나 이씨 조선에의 교섭에 의한 복속을 시도하고 있어 조선의 무력 제압이 기정 노선일 것 같은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전술 레벨에 있어서도 공성전의 개시전과 낙성 직전의 장면에서 항복 권고를 실시하고 있어 자군 피해도 저감 할 수 있는 무혈 개성의 교섭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전쟁을 위해 명·조선의 지휘관은 민중을 말려들게 한 칩거를 끝까지 실시해, 수장의 항복에 의한 무혈 개성보다 민중을 말려들게 한 낙성을 선택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이씨 조선 왕조로는 일본에 파견한 사절이 귀국해, 그 보고가 서인파(정사의 문녹의 역 4월 12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다음날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침공에 대응이 늦은 조선군은 연전 연패나 무혈 후퇴하거나 도망가기에 바빴다. 부산진의 싸움(정발전사), 동래성의 싸움(
일본군은 제일 대(고니시유키나가, 외), 2번대(가토 기요마사, 외), 3번대(쿠로다 나가마사, 외)를 선봉에 3로로 나누어져 급진해, 한성에 일본군이 다가오자 조선 국왕인 선조는 평양으로 천도해 피난, 다음 5월에는 수도한성(한양;·현재의 서울)을 일본군이 점령한다. 용이하게 이씨 조선의 왕도인 한성이 함락 하자, 일본의 여러 장군은 5월에 한성에서 군사회의를 실시해, 각 방면 군에 의한 팔도로 나누어 부르는 제압 목표를 결정했다 (헤이안 미치카즈번대 고니시유키나가 외, 함경도 2번대 가토 기요마사외, 황해도 3번대 쿠로다 나가마사 외, 강원도 4번대 모우리 요시나리 외, 충청도 5번대 후쿠시마 마사노리 외, 전라도 6번 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외, 경상도 7번대 모리 데루모토 외, 경기도 8번대우키타수가 외).
일본군의 진격이 평양에 강요하자, 선조는 요녕성과의 국경인 북단의 평안도 의주로 도망해서, 책봉을 근거로 명에 구원을 요청하지만, 그 사이에 한층 더 북상한 일본의 제1군과 제3군은 평양을 점령해 진격을 정지했다.
덧붙여 개성 공략까지 행동을 모두 하고 있던 제2군은 함경도에 진로를 바꾸어 일본군은 북서부의 평안도의 평양보다 북방과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 전 국토를 제압해, 가토 기요마사의 일대는 위력 정찰을 위해 국경을 넘어 명의 영역인 오랑캐에 쳐들어갔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임진5월 조」에 의하면, 이 때 조선의 민중은 이미 왕이나 대신을 단념해, 일본군에 협력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것은, 앞에 언급한 실록의 「人心怨叛,與倭同心耳」, 「 我民亦曰:倭亦人也,吾等何必棄家而避也?」와 같이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명의 조선 지원군이 진구해 보니, 근처에 흩어져 있는 목의 대부분이 조선의 백성이었다고 쓰여져 있다. 경복궁은, 히데요시군의 입성 전에는 벌써 잿더미가 되어 있어 노비(노예의 일종)는, 히데요시군을 해방군으로서 맞이해 노비의 신분 대장을 보관하고 있던 장례원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일본군에 크게 뒤진 이씨 조선을 맞아, 부산을 기점으로서 지배 영역을 펼치고 있던 일본 후방부대 중 해안 이동을 실시하고 있던 선단에 대해서
해상 전투용의 수군이나 조선 연안을 서진하는 작전을 가지지 않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육전 부대나 후방에서 수송 임무를 맡고 있던 부대로 급거 수군을 편성해 대항했다. 이렇게 해 편성된 수군은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주력이 한산도 해전에서 패배, 계속적인 원호를 위해 진출한 가토 요시아키와 쿠키 요시타카의 수군이, 이순신의 정박지 공격에 견디기 힘들어 후퇴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이 불리한 것을 깨달아 적극적인 출격 전술로부터 소극적인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했다.
이것은 오랜 세월의 화구대책으로 선체 파괴를 위한 원전 지향의 조선수군에 대해서, 선원 제압을 위한 근전 지향의 일본수군에서는 장비나 전술의 낙차도 있어 정면충돌의 해전을 하면 일본수군이 불리하다는 것에 의한다. 그러나 당시의 배는 항해력도 공격력도 미숙하고, 육상에의 의존이 강하기 때문에 수륙 공동 방어 전술은 유효하게 기능해, 이후의 이순신의 공격은 피해가 증대해 전과가 오르지 못하고 생동감이 없게 되어, 출격도 막히게 되었다. 7월, 원군에 온 명군의 부대가 최전선의 평양을 급습했다. 이것은 고니시유키나가에 의해 격퇴하지만, 명의 구원으로 교섭 우선의 상황이 되어 전황은 교착하게 된다.
조선에 파견된 여러 장군은 팔도국 분할을 목표로 요충을 제압해 갔지만, 전술대로 고니시유키나가는 당초는 이씨 조선, 후에는 명과의 평화교섭을 우선해 평양에서 북진을 정지, 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충청도 방면으로부터 전라도에 침입했지만
일본군은 부산 서방의 제압을 기획해, 제1차 진주성 전투(1592년 9월, 호소카와 다다오키 지휘의 일본군 대 김시민지휘의 조선군)를 발생시키지만 고전한 뒤, 성을 공격하는데 실패했다.
아울러, 이 전투는 한산도 해전(1592년 7월, 와키사카 야스하루 지휘의 일본군 대 다음 문녹 2년(1593년) 1월, 명군이 새로운 대군으로 평양에 진공해 탈환.그러나 일본군은 한성교외의 벽제관의 싸워 승리한다. 이 단계에서 양자의 전선이 막혀, 평화교섭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점령 각지에서는 의병의 궐기가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무기·자금 부족에 골치를 썩였다. 이 의병은 유랑민도 많아, 조선의 민중이나 군대도 덮치는 일도 있었다.
한성에 집결해 평화교섭을 시작하고 있던 일본군이지만, 본토에서 부산까지의 해로의 보급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부산으로부터 한성까지의 육로의 치안이 악화되어 식량 등의 보급이 막히기 십상이어서, 가토 기요마사가 포로로 한 이씨 조선의 2 왕자의 반환과 교환에 부산 주변의 남부에 4월 무렵까지 진지를 이동하였다.
그에 의해 병력과 보급에 여유가 생겨, 조선 남부의 지배를 기정 사실과 하기 위해, 조선 남부에 포진한 여러 장군을 동원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공략 (당초는 한성전선을 유지한 채로 본토로부터 새로운 전력을 투입할 계획인), 더욱 전라도를 엿보려 한 것도 명군의 진출로 전선이 교착하여, 긴 휴전기에 들어갔다
휴전기의 평화교섭
이 시기, 히데요시는 명이 항복했다고 하는 보고를 받고 반대로 명의 조정은 히데요시가 항복했다고 하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명 쌍방의 강화 담당자가 원만하게 강화를 실시하기 위해서 각각 거짓으로 보고를 한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평화에 이르기 위해, 명의 황녀를 천황에게 시집가게 하는 일이나 조선 남부의 할양 등, 도저히 명 측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강화 조건을 제시해, 명의 항복 사절의 방일을 요구했다. 한편, 명의 조정도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증거를 요구했지만, 이것도 히데요시에 있어서는 도저히 받아들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일본의 교섭 담당자는 「관백강표」라고 하는 거짓의 항복문서를 작성해, 명 측에는 히데요시의 평화 조건은 「감합 무역의 재개」라고 하는 조건뿐이다라고 전해졌다. 「히데요시의 항복」을 확인한 명은 조의의 결과 「봉은 허락하지만 공은 허락하지 않는다」(명의 책봉 체제하에 들어가는 일은 인정하지만 감합 무역은 인정하지 않는다)로 결정해 히데요시에 대해 일본왕에게 금으로 만든 인장을 하사하기 위해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다.
문녹 5년(1596년) 9월, 히데요시는 입궐한 명의 사절을 알현. 히데요시는 항복 사절이 왔다고 당초는 기뻐했지만, 사절의 진짜 목적을 알고는 격노. 사자를 되돌려 보내고 조선에의 재차 출병을 결정했다
아래는 같은 문록의 역이지만, 또 다른 출처의 것을 인용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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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새벽에는 조선을 안내역으로 해 대륙(=중국, 당시는 명국)에까지 쳐들어가자」라고 하는 의사를 표명한 것은, 아직 시코쿠나 큐슈도 통일하고 있지 않은 단계의 덴쇼(연호) 13년(1585)의 일이었다。 덴쇼(연호) 15년(1587)의 큐슈 정벌 때, 대마도의 교의지가 복속을 신청해 왔다. 히데요시는 그 귀순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서 조선 국왕으로부터 인질을 취해, 조선 국왕이 히데요시에 근위대 노릇을 하듯이 교섭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대마도의 소시는, 말하자면 조선국과의 중개 무역의 창구에서 만났다. 일찌기 왜구 진압에 공이 있어, 그 포상으로 해서 조선 국왕으로부터 무역의 독점권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한 예외를 제외해서는, 소시의 인가가 없으면 조선국과의 교역은 불가능했다。 조선통인 의지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엄명에 옷없는 것에도 가지 않고, 어쨌든 조선 왕조에 통신사(외교관)의 파견을 요청하는 것도, 이것은 거부되었다. 그러나 의지 스스로 한성에 가서 호소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으로 조선 왕조의 통신사는 덴쇼(연호) 18년(1590) 7월 하순, 쿄토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 무렵의 히데요시는 이미 시코쿠·큐슈의 평정을 끝내 오다와라 정벌을 진행 중이었다. 호조씨를 끌어 내려 관동을 장악, 그대로 오우슈 제국의 처분을 명해 개선 한 것은 9월이 되고 나서이다. 히데요시는 이 조선의 통신사와의 회견을 대궐에서, 라고 바라고 있던 것 같지만, 조정이 이것에 동의 하지 않았던 것 등도 있어, 히데요시와 통신사의 회견을 한 것은 11월 7일이 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이 때 통신사에 의해 보고된 국서의 내용은, 히데요시의 천하(일본내)의 통일을 축하 하는 것으로, 우호를 두껍게 하자, 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바라는, 쿄우준의 뜻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히데요시가 여러 장군에게 한국 출병을 의논하는 것은, 그 2개월 후이다。 한편의 조선 통신사들이지만, 조선에 귀국 후, 일본 내에 있어서의 정세를 보고했다.일본의 정세를 정찰해 온다고 하는 사명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정사는 「일본군이 침략해 오는 것은 농후하다」취지를 전했지만, 부사는 완전히 반대로 「그러한 징조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받아 조선 왕조로는 최고회의가 열렸지만, 결국은 「일본군의 침공은 없다」라고 판단되었다.이 결의에는 왕조내의 파벌 싸움이 관련되고 있었다고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일단은 조선 남부의 연안 지역의 방비를 증강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해부터 「당 방문」을 위한 근거지로서 히젠국에 나고야성의 축성 공사를 시작했다.이 축성을 담당한 것은 축성의 명인과 칭해지는 가토 기요마사로, 10월 10일에 착공되어 12 월 중순에 일응의 완성을 했다고 하는, 놀랄 만한 속도이다. 또, 야마노우치 가즈토요 등에 명해 군함의 건조를 서두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덴쇼 20년(=문녹원년:1592), 구체적으로 대륙 침공을 개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1월 5일, 히데요시는 큐슈· 시코쿠· 츄고쿠 지방의 그 편성은, 제1군이 교의사토시· 고니시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오무라희전· 5시마순현으로 1만 8천 7백명, 제2군이 가토 기요마사·나베시마직 시게루·사가라뢰방의 2만 2천 8백명, 제3군이 쿠로다 나가마사·오토모의통으로 1만 1천명, 제4군이 모우리 요시나리·시마즈 요시히로·타카하시 원료·아키즈키종장·이토우병·시마즈 토요히사에서 1만 4천명, 제5군이 후쿠시마 마사노리·토다 마사루륭·쵸우쇼카베모토치카·하치스카 이에마사·이코마 지카마사·와 시마 토루지와 와 시마 토루총으로 2만 5천 1백명, 제6군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모리 히데카네·다치바나 무네시게·타카하시 나오지·치쿠시광문으로 1만 5천 7백명, 제7군이 모리 데루모토로 3만명, 제8군이 우키타수가로 1만명, 제9군이 우시히데카츠·호소카와 다다오키로 1만 1천 5백명, 합계 15만 8천 8백명의 대군이었다. 그 외에, 항해는 하지 않지만 나고야성에 후힐로서 주둔 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관동·오우 제국의 병원이 10만 1천 4백명, 수군이 9천 5백명, 총계에서는 27만명에 달하는 동원으로 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4월 12일, 코니시· 종등의 제1군이 병선 7백여 소로 대마도 오우라를 출발해, 조선의 부산포에 들어갔다. 다음 13일에는 상륙,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정발을 불과 3시간의 전투로 토벌해 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후, 차례차례로 상륙한 히데요시군은 3개의 길로 나누어져 수도·한성으로 향한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무인의 들을 가는 것과 같이 진군 해, 5월 3일에는 제1군· 제2군이 한성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군세도 많아, 장비면에서도 이기고 있었던 것이 이 쾌진격의 요인이었다.당시의 조선군의 주력 부대는 기마대였지만, 일본군은 사정에 우수한 총대를 껴안아, 이것을 많이 깨었다. 또 백병전에 있어서의 일본도의 예리함은 날카롭고, 이 주력 병기의 전에 조선군은 죄다 괴멸 당했던 것이다. 한층 더 덧붙인다면, 일본은 바로 지난번까지 쟁란의 시대였다. 항해한 군세는 그 중을 살아 남아 온,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 집단이었다고 하는 일도 한 요인일 것이다。 이러한 파죽의 진격 안에 있어도, 고니시유키나가는 강화의 길을 찾고 있었다. 유키나가의 출자는 상인이며, 해외 무역에 대해도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원래 해외 침공에는 반대였고, 평화가 유지되어 무역이 재개하면, 실리도 오르는 것이다. 한성함락에 앞서는 4월 30일, 조선 국왕은 피난을 위해서 한성을 떠났다. 목적지는 평양이다. 이 후, 한성시내의 하층민 등이 약탈· 방화 등의 랑자에 이르렀다. 이것에 의해 조선이 왕조 200년에 축적되어 온 역대의 재보나 서적, 귀중한 역사 기록 등이 잿더미에 돌아갔다고 한다. 한성을 점령한 후, 고니시유키나가는 국왕을 한층 더 쫓아 평양으로 향해,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함골드) 방면으로 진군。 고니시유키나가는 평양에 도달하기 직전, 재차 강화를 시도했다. 일본측은 「길을 피해 랴오둥(명국)으로 향하는 길을 열도록 하라고 주장했지만, 조선측은 「명은 조선에 있어 부모에게도 동일한 나라. 일본에 따를 수는 없다」라고 철저 항전을 주장, 강화는 결과가 나게 끝났다. 그러나, 점령지에 있어서의 통치는 좋지 않았다.어쨌든,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통역이나 말이 통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인 채로 진군을 계속했기 때문에, 점령한 토지도 거점으로서 충분히 기능하지 않는다. 병참선이 늘어나 갈 뿐이다. 점령지의 주민은 일본병을 무서워해 취락을 떠나거나 산 안에 숨겨 했다. 그것을 위무하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주민은 게릴라적인 활동을 시작해 일본군은 무력으로 그것을 진압하려고 한다. 대립은 깊어질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점령지에서는 농경을 하지 않고, 식량 결핍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의 병사에도 약탈을 실시하는 사람도 증가해, 취락은 몹시 황폐해질 뿐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육로에서 진격하는 군세의 보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해상권의 장악에도 나서고 있었다. 일본군의 수군을 인솔하는 것은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등이다. 서전의 거제도 부근의 다도해에서의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우세했지만, 5월이 되어 조선 전라도 수군의 5월의 한성이 함락했다는 보고는, 그 반달 후에는 명국의 북경에까지 도착해 있었다. 명의 조정에서는, 일본의 진격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조선이 일본에 협력하고 있는 것은, 이라고 의심하는 소리도 있던 것 같지만, 어쨌든 5천정도의 군세를 파견해 조선의 구원으로 향하게 하기로 했다. 6월 하순에 랴오둥을 발향 한 명의 군세는 7월 19일부터 평양에 주둔하는 일본군에 대해서 공격을 개시했다. 전황은 일본군이 우세했던 것이다. 8월이 되자 강화 교섭이 부상해, 그 사이는 일시 휴전이라는 것이 되었다。 11월에 이르러, 명국 황제에서의 회답이 초래되었다. 그 내용은 「점령한 토지나 성, 잡은 2명의 왕자를 해방해 철병해」라는 일이었다. 동시에 명국부터 새롭게 군세가 파견되어 여기에 명도 일본과의 싸워 참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문녹 2년(1593) 1월 7일, 명의 리여송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군이 평양을 포위했다. 명군은 4만의 군사를 껴안아, 대포를 가지고 격렬하게 공격해댄다. 그것에 비교해, 평양을 지키는 코니시대는 1만이다.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깨어져 평양을 버려 한성에 향하여 동이라고 붙은 대동강을 건너 패주 했다。 명군의 새로운 남하를 식 쏘아 죽일 수 있도록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한성북편의 벽체관에 포진, 26일에는 명군을 깨었다. 유명한 「벽체관의 싸움」이다。 3월, 전황 시찰을 위해서 이시다 미쓰나리· 마시타 나가모리· 오오타니 요시쓰구가 한성에 도착했다.이 때의 한성의 상황은 예상 이상으로 심각했다.초이시다등은 독전 할 생각에서 만났지만, 비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을 눈앞으로 해, 즉시 철퇴를 향한 협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본격적으로 평화교섭을 하게 되어, 4월 중 무렵, 일본군은 한성으로부터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부 방면으로 철병 했다. 이것과 아울러 명국의 강화 사절과 이시다 등이 히젠 5월 15일, 명국의 사절이 나고야에 도착해, 23일에는 히데요시와 회견, 구체적인 강화 교섭에 들어갔다. 28일에 히데요시는 화해의 조건으로서 명국의 황녀를 일본의 천황의 황후로 하는, 감합 무역을 부활시키는,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하는, 조선 남부의 4도를 일본의 것으로 하는, 등의 7조를 아키라 국사절에 나타냈던 것이다。 아키라 국사절은 6월 하순에는 나고야를 떨어져 갔다. 히데요시가 가리킨 강화 조건은, 현지 원정군의 고생이나 고전을 알지 못하고, 완전히 강경한 것이었다. 그리고 명국· 조선 측에 매우 도저히 승낙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은 아니다. 명국 측은 이미 일본군을 조선 남부에 몰아넣고 있다고 하는 배경으로부터 강했지만 , 그 한편으로 억지로 쳐들어가면 퇴로가 없는 일본군의 필사의 반격을 받는 것을 우려해, 교섭은 결렬시키지 않고 계속하기로 했다。 아키라 국사절이 귀국을 위해서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건너 오자, 고니시유키나가는 가신의 나이토 조안을 명국 강화 사절과 동행 시켜 한성에 파견했다. 7월 8일에 한성에 도착한 여안은, 명군의 총 사령과의 회견에 대해 「조선을 다녀 명국에 조공 하려고 했다」라고 변명했지만, 도저히 그런 변명이 통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8월말에 한 시로를 출발한 여안은 한층 더 북경을 목표로 했지만, 이번은 랴오둥에 대해 「강화를 정리하려면 히데요시의 항복문서가 필요하다」라고 유치되었다. 이것을 받은 유키나가는 명의 외교관과 협의의 끝, 가짜의 항복문서를 만들어, 그것을 명국 조정에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이시다 미쓰나리 등군감도, 이것을 인정했다.그 배경에는, 어쨌든 강화 해 철병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명국이 맹공을 더하면 일본군은 괴멸 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한편, 히데요시는 위장 문서가 제출되는 것 등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것과 믿어 버리고 있었다. 거기서 명· 조선에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조선 남쪽 4도 할양의 기성 사실을 만들기 위해, 경상도의 진주성을 공격하게 하고 있었다. 강화 사절이 조선 들어가는 무렵의 일로이다. 염전 기분이 높아지고 있던 명군은 방관에 시종, 일본군의 맹공에 의해 1주간 정도로 성은 함락, 장병· 민중 아울러 6 일만여가 학살되었다고 한다. 이 진주는 의민병의 거점이기도 해, 그것을 미워한 히데요시의 엄명에 의해 근절로 되었던 것이다。 나이토 조안이 한성이나 랴오둥에서 금족 된 것은, 그러한 일본군의 공세 자세를 근거로 하고 있던 적도 있을 것이다. 고니시유키나가 등이 추진하는 「강화」라고 현지에서의 「전투」상태가 앞뒤를 맞추기 위해서는, 히데요시가 항복하는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일본군은 철퇴를 개시했다. 해전에 있어서의 대패로 많은 배를 잃고 있었기 때문에, 배편의 준비도 어려움을 느껴, 승선의 차례를 첨인 나무로 결정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 제1차 한국 출병, 즉 문녹의 역은, 고니시유키나가 등의 강화 교섭에 모든 것을 맡기는 형태로 자연 휴전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철병을 개시했다고는 말해도, 완전하게 인상 익살떨고가 아니고, 한반도에 남는 장사도 있었다。 가짜의 항복문서를 가지고 간 명국의 강화 사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 문녹 3년(1594) 1월 하순, 다양한 우여곡절이나 협의의 끝에 여안이 북경에 들어가는 것이 용서되었던 것이, 그 해도 다가온 12월이 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또 이 해, 조선 재진 중의 결국, 이 문녹의 역으로 불리는 해외 침공에 대해, 얻는 것은 없었다고 해야 하자.조선에 건넌 일본군 15 일만여중 5만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말해지고 있다.또 그 이상으로, 전장이 된 조선에 있어 병사 뿐만 아니라 민중에게까지 막대한 희생자를 내, 국토는 황폐 했다.이것이 히데요시의 생각해 그린 「꿈」의 결과이다. 이미 「꿈」등이라고 하는 차원은 아니고 「과대 망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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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의 역
게이쵸 2년(1597년) 2월, 평화교섭으로 무시된 조선 남부의 일본에의 할양을 실력으로 완수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히데요시는 14만의 군을 다시 조선에 보냈다. 이씨 조선 왕조로는 부산에 집결중의 일본군을 조선수군에서 공격하도록 명령했지만, 거듭되는 명령을 무시 했기 때문에 3도 수군통제사의
조선수군을 계승한 원균도 공격을 꺼렸지만, 마침내 7월에 출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일본측의 방어에 의해 공격은 실패해, 귀로에 거제도에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수륙으로부터 공격받아 조선수군은 간부 지휘관의 전사와 함께 괴멸적 타격을 감쌌다。
계속되어 8월, 일본군은 우군과 좌군(및 수군)의 2대에게 이별 경상도로부터 전라도로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대하는 명· 조선군은 도 경부근의 황스 산성과 남원성에서 방비를 굳혔지만, 일본의 우군은 황스 산성을,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 금새 2성을 함락 시키고 전주성을 무혈 점령했다。
일본의 여러 장군은 전주에서 군의를 실시해, 우군, 중군, 좌군, 수군에 이별 여러 장군의 진격로와 제압하는 지방의 분담을 실시해 수비 담당을 결정 전라도· 충청도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북상한 일본군에 한때는 한성의 방폐도 생각한 명군이었지만, 결국 남하 항전을 결의해 9월에 선견대의 명장해생과 쿠로다 나가마사의 부대가 직산으로 조우전을 실시해 쌍방이 후퇴했다。
같은 9월에는 남원 성으로부터 남하한 후에 겨울을 앞에 두고 명군과 조선 군이 남하하는 것을 알자 일본군은 경상도에 철퇴해 축성 포진 해 대항했다. 일본군의 철퇴에 의해 전라도에 명군과 조선 군은 재 진출했다.
방어로 돈 일본군에 대해서 12월에는 완성 직전의 울산 야마토성(일본식 성곽)에 명과 조선의 대군이 밀어닥쳐 급거 입성 한 가토 기요마사를 처음 식료 준비를 할 수 없는 채 포위 중(안)에서의 괴로운 칩거전이 되었다.
다음 1598년 1월, 울산성은 낙성 직전까지 몰리지만, 일본군의 원군이 수륙으로부터 명· 조선 군을 공격패주 시키고 울산 성을 끝까지 지켰다(울산성의 싸움). 그러나 노 많이 해 이익의 적은 전쟁에 염전 기분의 만연하고 있던 여러 장군은 적극적인 추격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봉행이나 히데요시에 질책 되고 있다.
다음 게이쵸 3년(1598년), 울산성전에서 유기 시체 2만으로 기록한 명· 조선 군에도 염전 기분은 만연해 전선은 교착했다. 일본에서는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해 전쟁을 계속하는 의의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죽음은 은닉 되고 조선에 파견되고 있던 일본군에도 알게 되지 않았다.
9월에 들어가면서 명· 조선 군은 울산, 사 카와, 순천에 총력을 든 공세하러 나왔다. 맞아 싸우는 일본군은 연안부에 쌓아 올린 야마토성의 견고한 방비에 도울 수 있어 제2차 울산성공방전은, 큰 싸움이 되지 않았던[요점 출전]것의 명· 조선 군을 격퇴해 방위에 성공.사천의 싸움은 시마즈군이 반격의 찬스를 파악해 명· 조선 군에 대 타격을 주고 패주시켰다.
쥰텐을 지키고 있던 것은 고니시유키나가였지만, 일본군 최좌익에 위치하기 때문에 새로이 파견된 명수군이 더해져 륙해로부터의 어려운 공격을 받지만 방위에 성공해 명· 조선 군을 후퇴 시켰다(쥰텐성의 싸움). 명·조선군은 쥰텐 야마토성을 멀리서 포위에 감시할 뿐된다.
울산, 사 카와, 순천에의 공세를 치운 일본군이었지만, 이미 히데요시는 8월에 사망하고 있어 전쟁을 계속하는 의의는 없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마침내 10월 15일, 히데요시의 죽음은 은닉 된 채로 오대로에 의한 철퇴 명령이 발령되었다. 철퇴 명령을 수령한 고니시유키나가는, 11 밝은 달빛·조선의 육수 여러 장군과 교섭이나 매수로 무혈 철퇴의 약속을 얻어내지만 실제로는 명· 조선 수군은 후퇴하지 않고 해상 봉쇄를 계속하고 있어, 해로 철퇴를 방해했다.
코니시 군의 탈출이 방해되고 있어 있는 것이 확인되자 사천으로부터 철퇴해 온 시마즈 요시히로의 외, 다치바나 무네시게, 테라사와 마사나리, 교의사토시등의 여러 장군은 구원으로 향하기 위해서 수군을 편성해 진격했다. 시마즈의 구원수군이 가까워지는 것을 알자 명·조선수군은 쥰텐의 해상 봉쇄를 풀어 요격을 실시했다.
이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수군은 큰 손해를 받았지만, 명, 조선 연합군도 명수군의 부장 트우자용이나 조선수군의 3 도 수군통제사의
이렇게 해, 일본의 출정 영주들은 조선을 퇴거해 일본에 귀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획책 한 명 원정, 조선 정복은 성공에 이르지 못한 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따라 종결했다 전쟁 후의 평화 평화교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위임을 받은 대마도의 소시와 조선 당국의 사이에 진행된다.
단절하고 있던 이씨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일본측으로부터 조선 측에 통신사의 파견을 타진했던 것에 시작한다. 정이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조선측의 사절과의 회견이 실현된 것은 일본군철병으로부터 6년 후의 게이쵸 9년(1604년), 에도 막부에 대한 조선 통신사가 파견되어 정식의 평화가 완수해진 것은 게이쵸 12년(1607년)이었다.
명은 국교를 묶지 않고 멸망, 바뀌어 탄생한 청은, 벌써 일본이 쇄국을 취했기 때문에 정식적 국교를 가지지 않고, 무역만을 실시하는 형태에 끝났다 |
첫댓글 잘읽고 한가지 덧붙입니다. "헤이안 미치카즈번대 고니시유키나가 외"라는 구절이 있는데 헤이안은 한자로 '평안'이라고 쓰는데 바로 평안도를 뜻합니다. 그러니 그냥 평안도 1번대 라고 번역하면 됨니다.
한자로 <平安道 一番隊>이겠지요. 이것을 <평안(헤이안) 도일(미쓰카즈)번대>로 보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