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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속의 옛 집
양경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은 2개소이다.
4.3사건으로 인하여 중산간 지역의 마을들 모두가 소개( 疏開)하였으므로 집은 있으면서 처음은 위미에서 . 다음은 신례2리(공천포)와 마을이 복구되었다 하나 바로 우리집은 미복구 상황이었으므로 신례1리에서도 두 장소에서 더 살아야 했다. 꿈에라도 정말이지 꿈에라도 다시 만나 보기 싫은 지긋지긋한 4.3사건이있고. 우리 도민들을 삶이었다. 그 당시 떠돌이 생활은 제외하고 나면 동리의1210번지와 지금의 초등학교 앞664번지 2개 장소가 된다. 1210번지는 부모님이 결혼한 후 나와 여 동생이 태어나서 다섯 살 될 때 그 사건 발생한1948년 12월11일 까지 매우 오래 살았고, 후기 장소는 1950년 초반에서 부터 거주하기 시작한 옛집에서 우리 3남과 2여를 낳았고, 농사도 부지런히 잘 지으며 살았었다.집 주변의 우영 밭은 그리 넓지 못한 소위 난전 밭이어서 대농 축에는 들지 못하지만 절기에 맞게 조와 보리, 산두, 메밀,콩,팟,녹두,고구마, 참깨를 고루 지었고 이런 일이 끝나면 마소를 먹일 촐(건초)과 지붕을 새(新)로 덮을 새(새)와 각단(지붕의 줄을 놓는 새보다 짧은 새)을 해오는 전형적인 제주의 농가였다.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우리들 5남매를 배움 터에는 모두 보내주시었다.
이제는 제법 초등학교 아동의 티를 벗어나고 새까만 교복을 입은 한 아이가 가릿 길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인 (래)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에 약간 앞서 그리 넓지 않은 수리 대 왓(족 대 밭)을 먼저 거릿 길에서 담 넘어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모물 찍(메밀 짚)이 내동뎅이 쳐서 있었는데, 이 모물 찍은 대나무에 매우 좋은 거름이 되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근처에선 밥쭈리(참새)들과 돔박 생이 (동박 새)들이 5-6마리 뛰는 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애는 더 걸어갔데 거기에는 그리 높지 않은 베케(주로 밭 구석 쪽에밭을 정리하며 쌓은 자갈 덤이)가 보였고,그 옆에는 별로 크지않은 폭 낭 (팽 나무) 하나도 어김없이 등장했다.거릿 길에서 이제는 커브를 좌로 돌아 남쪽으로 향했지만, 담 넘어 서녘 밭의 소나무로 그늘지고 있었다.
검정 교복을 입은 아이는 계속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집 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정면 남쪽에 ㅁ,쿠실 낭 (말 구술 나무=마주목(馬珠木)이 높이 서 있었다. 그 나무의 모든 잎들은 이미 낙엽이 되어 떨어졌지만 열매는 여전히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그 열매를 다먹으면서 암수 한 작인 양 비취(직박구리) 두마리가 보였고,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다정하게 서로 짖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들어 왔다. 높직한 담 넘어로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한 여름이면 무성한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지만, 그 때는 열매가 달리지 않았었다. 그가 걷는 장소는 약간 넓직한 곳이어서 과거에는 거기에서 돗 거름(돼지 우리에서 꺼내어 우마로 발리고 보리, 파종 시에 사용함) 을 내고 발리던 기억을 해보았다. 그런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에, 올레와 마당의 경계를 이루는 것이 눈에 띄어었다.
돌을 일직선으로 박거나 심은 것이었다. "이런 것은 곡 나타나지 안해도 좋은데....... ."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때 마당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텅비어 있었다.몇 번이고 두리번거렸으나,역시 허사였으므로, 짐작이라도 한 듯 사람을 불러보지도 안했다. 과거의 사실과 만찬가기로 안, 밖 두채의 초가와 동쪽에는 서향의 외양간은 여전하였다. 그러면서도 궁금증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때 항시 아버님이 잘 깔아두는 마당의 검질(마른풀이 운에 띄는데, 하필 그 때는 비나 아니면 눈에 젖어 축축해 있었다. 전 같으면 그렇게 새로
깔아놓은 마른풀이 단 하루만에 글 읽던 아이들이 모두 뭉개놓고 만다. 모든 아이들 하나 하나 개인 교수형(?)으로 글을 익히고, 아버님은 우영 밭을 한 번 돌아보셨다. 글을 익던 아이들은 "바로 이 때다!" 마음으로 외치면서 밖으로 솓아져 나온다. 그리고 이런 시간에 그들은 일 (?)을 꼭 만들어 내고 만다. 뛰놀기를 좋아 아는 아이들은 가까운 학교 운동장엔 가지고 않고, 바로 여기 이마당에서 정개 씨름(닭 싸움)이 벌어진다. 어떤 경우는 복수전도 있었고, 호기심이 있어 처음으로 대결 해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했으니 마당의 검질은 그리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이쯤은 매우 좋은 경우의 일이었다. 부엌에선 어머님이 감저(고구마)를 때때로 찧어두셨다. 이런 시간을 이용하여 죄우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수년간 연기로 끄을려 까맣고 어두운 부엌에서 소리 하나 없이 솥을 열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감저를 손에 가득 갖고 나온다. 그들은 얼나나 맛있게 서로 나누어 먹었을까? 그 후에 나에게는 자백(?)을 했지만 우리 식구가 점심에 먹을 밥까지도 배도 곺았겠지만 호기심으로 하기도 하였단다. 그 뿐이 아니었다. 글 방 겸 삼방(마루 방)과 부엌뒷문은 언제나 잘 닫아 두었다. 그 문들을 열면 거기는장독들과 크나큰 복숭개(복숭아) 낭이 하나 있었지만, 꽃이 피면 화사한 얼굴을 뽑내게 되고, 그 열매가 점점 커지면서 이내 과육 부분과 내부의 씨가 분리가 가능해진다. "이를 복숭개 씨 갈른다" 라고 하였었다. 공부하던 아이들이 이 시기를 놓치지 아니한다. 조금씩 익기 시작할 시기에 나 자신도 토요일 날 집으로 왔었다. 오자마자 뒷문을 열어보았으나 때아닌 시기에 싱싱한 잎들만 수두룩 떨어져 있었고, 위를 아무리 찾아보았으나 열매는 하나도 안보였던 때가 있었다. 아무튼 부모님 모두가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복숭개 낭이었다. 마당의 검질, 정개. 씨름,감저,밥, 복숭개 열매등등을 이 때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생각 저련 생각을 하다가 밖거리(바깥 채)리를 돌아 우영 채소밭을 돌아보기로 한다. 하기는 매우 신기한 일이었지만 복장은 그대로인데 제법 체구가 성장한 모습이었다. 절기는 일년중에 초가을로 나타났다. 돌아가자마자 앞 담에 붙어 서있는 한 그루 의 비파나무가 보였다. 그 나무의 잎은 여전히 무성하지만, 나무의 열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채소밭에는 무와 뱉추가 잘자라 있었고, 여기저기 곧게 잘 자란 파 포기가 파릇파릇 너무도 뚜렷하다. 이들 여러 가지 채소들을 조심조심 밟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 밖 거리 집안을 들여다보았으나 거기에도 사람이라곤 아무고 없었다. "글세 예전엔 여기에 초등학교의 관사처럼 부임해온 선생님들리 계속해서 살았었는데..... ."약간의 놀라움과 의문을 남기고 있었다. 분명 이 밖 거리는 그분들에게 그 당시 방세가 전혀 없는 셋집이었다. 좁다란 채소밭이 서쪽 돌담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담 옆에는 잎 술이 부릎뜨거나 상처에 껍질을 바른다는 약용나무(황베삐 낭 ) 한 그루가 그대로 자라고 있었으며, 그 낭의 근처에는 깊지는 않지만 구덩이 하나가 있었다. 이런 구덩이는 가을철 밭에서 거둬온 감저를 저장하는 장소이다. 밭이 많은 부자 집에는 여럿이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두 개만 있었다. 이렇게 밖거리와 채소밭을 돌아보았고, 그 다음으론 담 넘어 이어진 농작물 경작지인 알녁(남쪽의)밭과 동녘은 아니었지만, 바로 그 때는 감저를 재배했고, 지상에는 무서한 넝쿨과 그 잎들로 덮여있었다. 물론 사이사이에는 참깨가 적당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보아야 하는데..... ." 그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밭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상야릇한 생각을 하면서 동녘 밭읋 넘어갔다. 그 밭의 맨 위 쪽 도로변 담밑에는 채자라지 않은 돔박 낭과 키가 큰 ㅊ. 낭(떡갈나무)들이 몇 구루 보이는데. 낙엽 활엽수여서 절반은 낙엽 진 모습으로 높이 솟아있었다. 그 동녘밭도 우리 밭인데도 그 밭은 돌아보고 싶지 않는다. 더 더울 어릴적에 그 무더운 여름철 더위에 시달리고 무진장 땀을 흘리면서 주 밭 검질(김) 을 메었던 밭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했기 때문에 다시금 내다보기도 싫었는지 모른다. 다시금 그 올레를 걸러 마당에 들어섰다. 이 번에는 먼저 쳐다본 곳이 안 거리 굴묵(구둘. 온돌 때게 만든 아궁이와 그 부속품을 두는 주택의 일부분)이다.. 옛날에 보던 굴묵 그대로였다. 굴묵은 역할은 넘어가도록 하고. 그 굴묵에서 잠을 붙이는 닭이 첫째이고, 둘째는 역시 야간 침실(?) 로 이용하는 개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를 심금을 울리게 하였던 검은 털을 어미 개가 하나 있었다. 그 어미개가 지극한 모성의 사연이 있어서 언젠가 " 마지막 모성애 " 로 수필 졸작 한 편을 낸 바가 있어서 이것이 나의 뇌리(腦裏)에 남아있었기에 다시 그 곳을 찾았는지 모른다. 이 모두가 흘러간 옛날의 추억이었고, 깨고 보니 허무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다. 이리저리 머리와 몸을 돌리면서 두리번거렸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릴적에 꿈(상상, 또는 이상)에도 고래등같은 크나큰 기와집이다.휘황(輝煌)찬란(燦爛)한 궁궐같은 집은 마음속에서도 그려보지 아니했다. 그 것은 분명히 덧없는 미몽(迷夢)이거나, 공상적인 바람에서만은 아니었다. 앞에 그린초가(草家)또는 모옥(茅屋), 모사(茅舍)에만 묻혀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집이 과거의 현실이었던 나의 집이었고, 그 집은 진실한 나의 고향중에서도 집약된 고향이다. 나으 온 정신과, 아니면 영혼가지 영원히 깃들인, 그리고 깃들일사실 그대로의 장소이며 집이다. 그리고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에 어느날 밤에 우연히, 그러나 뚜렷히 나타나 "꿈속의 예집"이다. 그속에 살면서 이런 삶이 그렇게도 각박해서 현실을 탈피하고저 하는 몸부림치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희망이나 이상만큼은 그렇게 가져야지." 하고 나에게 나무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 꿈은 굼으로 끝낸" 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그 사람에게 암시하거나 지도하고, 또는 교훈적인 사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볼려고 애를 써 본다.
다시금 가만히 다른 생각도 해본다. 여기에서의 집들을 말이다. 어릴적의 것들과 자숙방처럼 단시일의 것은 꿈속(夢中)에서는 출력을 할 수가 없었다. "출력이 가능한 것은 그렇게 하기게 알맞은 나이와 기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물론이는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꿈은 내가 아니어서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꿈속의 나의 옛집은 다시는 현실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볼 수가 없다. 그 장소에는 구조와 재료가 다른 집이 서 있기는 하다. 아무리 허전하고 아쉬워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꿈속에서라도 잘 볼 수가 있었으니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그 곳에서의 아름다운 다른 추억들을 다시금 더듬어 본다.
2) 그리운 추억의 영실에서.
양경렬
영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한라산의 정상과1100도로 휴게서의 중간지접에서 약간 남쪽애 위치하고 있다. 그 곳 일대의 졍관이 대단히 신기하고 아름다워 옛날부터 영주 10경의 하나로 정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한나산 정상 백록담에서 서(서)남족으로 거리가 멀지 않은3km정도이고, 해발 1400에서1600되는 일대를 영실(기암)이라한다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여기의 지명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데 영실(영실)은 물론이고 영실(靈室)로, 또는 영곡(靈谷)과 천불봉(千佛峯)등도 보인다. 이곳의 지형과 제주의 옛 이름의 한자어들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기둥모양의 바위들과 암석으로 병풍처럼 둘러 있는 곳 우리는 여기를 병풍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곳이다. 그 병풍 바위의 동쪽으로 능선 지형을 이루고있다.이 일대에서 소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중류의 잡목을이 우겨져 있는데 그 사이 사이에 만상의 기암과석들이 하늘을 향해세워 놓은 듯디 서있어서 우리들은 이들을 오백장군(또는 나한)이라 한다. 그러니까 영실은 곧 병풍바위와 오백장군을 합한 이름인 것이다.
나는 이 영실을 무척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사람들마다 다시 보고싶은 장소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한 장소를 고른다면 나는 물론 서슴지 않고 (靈室)이 라고 말한다. 나는 이 영실을 다녀 보기는 한 두 번이 아니다. 여러 번와 볼수록 더 더욱그리워지는 곳이다. 그래서 금년에도 꼭 가 볼려고 벼르고 벼르면서 어떤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왔다. 그러던 참에 길을 나선 것이 10월 중순 절기로는 한로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렸을 적에 연인을 만나려나가는 마음, 그런 기분을 안은 채 ..... . 오는 도중에 명소는 아니지만 어느한 장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 곳에서도 예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 버린것 같다. 1100도로를 따라 오래 달리다가 동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중간에 이제야 한참 시설 중인 한나산국립공원 영실 매표소에서 안내용 인쇄물을얻었다. 이 매펴소는 전에는 없었던 곳인데 아무래도 어떤 필요성이 있는 모양인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를 통과하여 포장길을 따라 꾸불꾸불 꽤나 오래 들어 가야했다. 더 이상 길이 막혔으니 차를 멈취 두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지금처럼 주차시설이나 영실각, 매정이나 불교 신앙인을위한 시설 등은 염두에도 없었다. 오직 석조 대피소 하나 있었는데 점점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잘 갖추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비교적 대견스러웠다. 특히 영실각 서쪽에 지어놓은 사찰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평일이지만 산으로 가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으로 주차장이 모자랄 정도였다. 평일의 사정이 이런데 연휴 또는 주말인 경우에는 신혼 부부들을 위시하여 수 많은 외부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었다. 휴게소 박의 빈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참으로 좋은 날씨였다. 춥지도 않고 덮지도 않은 시기였다. 우리가 "티끌 하나 없이 높고 맑은 하늘"을 자랑하지만 오늘이 하늘이 바로 그런 하늘이었다. 휴게서에서는 주로 500장군의 암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숲을 더 높이 솟아 넘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버티고 서있거나 또 어떤 것들은 작달막하면서도 당돌하고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암석들도 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고명한 옛 시인은
峨峨岩立將軍列 (높은 돌이 서 있기는 장군들리 열을 선듯)이라고 한시 한구가 나 올만도 하다. 그 수가 500여 개, 자세히 세어 보면 하나가 부족하다는 우리의 전설이 생각난다. 여기 앉아 볼 수 있는 것은 그중 몇 개밖에 되지 안는다. 얼마동안의 휴식을 한 후 병풍바위 쪽으로 향하였다. 경사는 별로 심하지 앉는 편잉고, 가는 길 위에 침목을 사용 계단으로 하여 보행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전 같으면 가는 길 서쪽에 자그만 개울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드렸었지만 지상 기온의 변화에서인지 개울의 밑바닥에서만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얼마쯤 올라가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래도 눈에 익은 장소였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3학년과 함깨 희망학생 전윈이 정상까지 등산을 하게 되었다. 코스는 서귀표를 출발하고 고근산을 뒤로하여 바로 이 지점에 이르렀었다. 이 일대가 우리들의 1박 야영을 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고 눈에 익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 같은 길은 없었고, 억새 밭을 지나며 가시넝쿨을 헤치면서 하루종일 걸어 온 것이다. 산에는 아직도 공비들 2명 또는3명이 남아있었으므로 경비 겸, 길을 안내해 주는 경찰관 2명이 칼빈 소총을 매고 선두에 선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영의 경험을 갖는데 우리는 이것이 처음인 셈이다. 피곤함도 잊어버리고 나무 가지를 주어 모아 저녁을 지었다. 이 때먹었던 밥맛은 꿀맛 그대로였다. 취침은 내일의 산행을 위하여 필수적이었지만 환경의 변화에서인 나무 잎새 넘어 밝게 반겨주는 달빛 때문인지 잠을 청 할 수가 없었다.여기 저기에 하모니카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심지너는 피리소리마저 온 영실 골짝을 울려 퍼진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지금처럼 10월달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10월 달 산속의 밤은 춥다. 이런 여러 가지로 우리의 잠을 멀리 쫓아버리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산행 준비를 완료하여 3학년 학생을 선두로 출발하였다. 바로 지금의 이 길이었을 테지.병풍바위의 바로 앞까지 와서 우리일행은 지금의 등산로가 아닌 동쪽 길로 접어들었다. 동쪽길이라고 하였으나 그 당시는 지금의 등산로도 없었도 동쪽길도 길이 아닌 암벽 틈바구니 같은 급 경사지였다. 그 급경사 동쪽길은 지금까지 세번을 다닌 경헙이 있으나 지금은 통제구역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제 매우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그 길이 어데인지도 모를 지경이니 그 시절 그때만 그리워짐을 재삼 느끼게 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에 중학교 3학년 학생들 등산 계획을 세웠다
. 2박3일의 일정으로 인솔하게 되었다. 당시 중문면 하원리에서 보행으로 수로를 따라 영실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예정대로 진행하여역시 영실까지 그래도 무사히 걸어 온 것이다. 석조로 된 누더기같은 대피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이튼날이다. 이게 웬일인가. 시계는 분명히 5:30분인데 해는 안 보이고 앞이 캄캄하기만 하였다. 짙은 안개가 온 영실과 온 세상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다려보기로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래도 해는 올라오는 모양이데 안개도 더 짙기만 한다. 계획이 무산되어간다. 할 수 없이 그 때 그 대피소에서 1박을 더하기로 했다. 이튿날도 안개는 여전한데 결과적으로 악천후에 의한 학생들의 피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든 것이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악몽같은 추억이 사라지지 안는다. 그 의외에도 이 영실에서 일어난 추억들이 하나 둘씩 계속하여 뇌리를 스쳐 나간다. 인간은 괴로운 때에 일어난 일들이 오래 기억되는 것이고 그런 것이 추억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그리 고되지도 안으니 아마도 추억이 되지 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어 가면서 다달은 곳이 병풍바위 근처였다. 겨우 800m정도를 걸어서 온 것이다. 깍아지른 듯한 그 모습은 언제인가 화산 푹발의 위력을 실증이라도 하고 있음이겠지 . 돌기둥 모양과 암벽이 서로 엉겨 붙어 병풍처럼 빙 둘러져 있다. 언제 보아도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 앞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경사가 완만하지만 움푹 패여 푹발의 중심지로 짐작하게 하고 있다. 어느 누가 이 곳의 경관을 붓이나 입으로 모두 나타낼 수가 있을까? 여기서도 나 자신의 무기력함과 어떤 표현의 부족을 다시금 느껴야되나 보다! 그 동쪽 높은 능선에도 장군석의 군상(群像)들은 우리를 노려보며 속세 인간의 누추함을 질타하고 있듯이 군데군데 서 있다. 이런 장관을 돌아보면서 졸졸 흐르는 맑은 물에 시선이 닿았다. 이처럼 맑은 물을 보면 누구나 한 모금 마시고 싶어한다. 몸과 마음이 티끌하나 없이 섰다 내리는 기분이다. 이렇게지내는 동안에도 젊은 남녀가 짝을 이루어 오르고 내리는 동작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도 이제 출발해야할 때다. 아쉬운 마음이랑 그 자리레 두기로 하고 . 언제 다시 오기로 하여 천천히 되돌아 왔다.
악력
문예사조 수필 등단
제주동서 문학회 회원
제주수필 문학회 회원
저서 : 마음속의 삶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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