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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제주여성1호 강평국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성격의 항일운동가 강평국, 원칙을 가지고 후학들에게
민족의식 길러냈던 제주최초의 여성교사이기도 하다.
- 1919년 3월 3․1운동 참여, 경성여자보통학교(현 경기여고)사번과 졸업
- 1919년 4월 대정공립보통학교 부임
- 1921~1922년 여수원 명신학교 교사 역임
-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의학전문의에 입학
-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
- 1928년 근우회 도쿄지회의 의장단에 선임
불꽃의 여인 강평국(姜平國)
<허영선>
“이 사회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가득차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여자라고 반드시 남성들에게 뒤지란 법이 없지 않은가. 결코 뒤질 수 없다.”
“나라에 봉사하는 길은 여성도 공부하는 길이다.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라. 이 나라는 기필코 독립이 되어야 한다. 독립을 위해서 몸을 바쳐야 한다.”
시대의 선각자 강평국(세레명 아가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공통적으로 그녀가 좌우명처럼 토하던 이 말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치하 불꽃처럼 살다간 `전사‘ 강평국. 제주 여성으로 서울유학과 해외유학 1호를 기록한 여성.
그러나 화려한 학벌보다는 일제 강점기 아래서 몸으로 부딪치며 치열하게 살다간 33년의 짧은 그의 삶은 독립운동과 여성운동, 문맹퇴치운동으로 더욱 빛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이지적인 외모 외에도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달변이 되는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로 기억하고 있다.
100년전 제주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집안에 `일 벗‘ 하나를 더 늘이는 일과 다름없던 그 시절, 탕건․양태뜨기를 하지 않거나 물질을 못하면 집에서 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그는 나고 자랐다.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바로 그해, 1900년 6월 17일 제주읍 일도리 1390번지에서 아버지 강두훈과 어머니 홍소사(세례명 유리안나)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포교를 위해 1900년 파견된 구마슬 신부가 교육하는 천주교에 귀의 했던 아버지는 이재수란 때의 순교자로 기록된다. 당시 이 나라는 서구열강의 강탈에 무력했고, 이웃 일본은 이땅을 샅샅이 짓밟고 있었다. 암울한 시대였다.
제주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마슬 신부로 대표되는 초기 카톨릭 세력과 일부 봉세관의 부당한 착취에 맞서 이듬해인 1901년에 제주민중들이 들고 일어선 이른바 `이재수란'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수백명의 가톨릭 교도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희생되고, 프랑스 함대가 들어오는 한편 중앙정부에서 관리가 파견될 정도로 이목을 모았다. 이 사건을 일으킨 이재수와 오대현, 강우백은 서울로 압송돼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근대식 재판의 희생양이 되야 했고, 도민들은 프랑스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금세기 제주섬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이런 시기에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구나 생활에 시달렸던 여성들에게 있어 학문이란 얼마나 호사스런 이름이었는지, 당시를 살았던 여인들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강평국은 일찍 개화한 가문에서 태어난 덕분에 여자도 동등하게 학문을 해야한다는 데 별다른 갈등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몸에 밴 사상이 훗날 남녀평등과 여성운동을 벌이게 된 단초가 된 것 같다.
그는 독신으로 살다 갔다. 33살. 짧은 생애였다. 하지만 그 생애 속에서 그는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한 그릇에 다 담을 수 없는 넘치는 삶을 살았다. 정말, 그는 어떠한 뜻을 갖고 살았으며, 어떠한 일을 하다 갔는지, 그 일들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시대의 우리에게 어떤 울림이 되고 있는 걸까.
그가 생의 열기를 불태웠던 부분은 일직이 학문의 시혜를 누렸던 만큼 그것을 되돌려 주는데 있었다. 그것이 제주여성들의 여권신장을 위한 운동가로, 민족독립 운동가로, 투철한 자신의 신념과 이념을 갖고 살다가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이러한 마음으로 처음 강평국을 접근한 것은 1989년. 제주에서는 아쉽게도 그의 생애를 말해줄 가까운 이로 유일하게 외조카 최봉조씨(96년작고․당시 초등학교 교장)만이 생존해 있었다. 그리고 후배와 지인들이 몇 명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당시의 후배․지인들은 거의 세상을 떴다. 다른 사람들처럼 강평국 스스로 직접 남긴 육필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
따라서 그의 삶의 자국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쩔수 없이 외조카 최봉조, 후배․지인들에 의한 파편적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생생한 증언과 역사적인 기록을 토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앞으로 그에 대한 새로운 족적이 발견되기를 바랄 뿐이다.
최봉조씨는 어릴 때부터 다소곳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모 강평국의 성격이 그 집안의 분위기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는 이모 강평국과 같이 자랐다.
최씨는 갗평국의 집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정 모록밭 민란이 일어나자 향교에서 목사가 선비를 불러 누가 이 난리를 막아볼 사람이 없느냐고 하자 그의 증조부인 강철현은 내가 나서서 막아보겠다고 자청해 나섰다고 해요. 그러자 목사가 `군졸 몇 명을 채워 보내주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강철현이 `필요 없습니다.’고 외치며 혼자서 백마를 타고 있는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금을 내라 하고 곡식을 거두라 하니 납세가 너무 벅차다. 감면해 달라‘고 요구하자 강철현이 `다 들어 줄테니 물러가라’고 해 가까스로 난리를 막았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증조부는 좌수라는 큰 벼슬을 하게 됐습니다..”
그의 증조부인 강철현은 제주선비로 이름난 명하사였다고 한다.
증조부는 글도 좋고 문장도 좋았다. 소년 좌수라 해서 제주도 `명하사‘하면 `강 좌수’로 통했다고 한다.
강좌수의 아들이면서 강평국의 아버지 강두훈. 그는 옛날 제주시 노형동 월랑마을 근처에서 학문선생을 했다. 딸 강평국이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버려 강평국은 아버지란 존재를 모르고 자랐다.
강평국의 굽힘없는 강한 기개와 활달함은 아마 어머니 홍소사의 교육열에 지대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게 최봉조씨의 증언이다.
그는 학령기에 이르자 대정공립보통학교 교사였던 오빠 강세독의 영향 때문에 성내 신성여학교와 대정공립보통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1913년 당시 신성여학교의 1회 졸업생이 된 이는 강평국과 최정숙(해방뒤 초대 교육감, 독립운동가) 고수선(의사, 독립운동가)등 단 5명뿐이었다. 열여섯살, 신성여학교를 마칠 즈음에 강평국은 고수선과 처음으로 연락선을 타고 목포를 거쳐 서울 유학길을 떠날 수 있었다. 훗날 숨질 때까지 평생 동지직 관계를 맺었던 최정숙보다 출생이 2년 빨랐던 강평국은 이때 경성관립 여자보통학교의 사범과에 진학한다.
그의 서울 유학은 당시 제주 출신 선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했다. 조국의 독립을 고뇌하는 청년들을 만나면서 그도 자연스럽게 눈 뜨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다시 경성여고보로 진학한다.
그의 서울 유학은 당시 제주 출신 선각자들이 드랬던 것처럼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조국의 독립을 고뇌하는 청년들을 만나면서 그도 자연스럽게 눈 뜨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다시 경성여고보로 진학한 최정숙, 같은 반이었던 고수선과 함께 박희도(민족대표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훗날 친일시비에 휘말리게 된다)가 이끄는 학생 결사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최은희(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의 〈조국의 길을 찾아서〉21장 `3․1운동편‘(90쪽)에는 “경성여고보는 전국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라 일찍부터 민족운동자들의 관심이 컸었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실패를 산 증거로 보여주기 위해 33인측에서 직접 지도를 하였다고 한다. 경성여고보 3․1만세운동은 1917년부터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의 지도로 학생들의 비밀 서클이 조직되어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고 우선 교내에서 항일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고 적고 있다.
경성여고보 본과 졸업반인 최은희 등과 사범과 졸업반이었던 이 세명의 제주여성이 중추멤버로 이 모임은 구성됐다.
“…그날밤 제주에서 유학하는 두 남학생이 비밀리 제주 학생 최정숙 고수선 강평국을 만나고 갔다…”(96쪽) “경성여고보는 남학생의 연락으로 기숙생 전원 70명이 5일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하여 남대문 역 앞으로 나가서 데모에 참가하였다. 그날 검속된 盧順烈, 李南載, 姜平國, 兪在龍, 李錦子, 와 정신학교 임충실 박남인 김경순 숙명여고보 조경민 등이 함께 있게 되었고, 동경 유학생 황애덕이 최종 5일간 같이 있어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104쪽)
동기생 고수선 여사가 작고하기 전, 노트에 기록하다만 자필 기록을 보면 3․1운동 당시 강평국 등의 활동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돌연히 순종이 붕어하셨다는 소문이 민간에 유포되었다. 우리가 심문 호외로서 알기는 이튿날 오전 열시였다. 전교생의 울음 소리로 (학교는) 바다가 됐다. 학교가 왈칵 뒤집히니 교장도 도리가 없어 전교생을 학교 강당에 모이게 하고 각 반에서 일인씩 대표로 대한문 앞에 (참배에) 참가하도록 하고 아른 학생들은 그대로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수업종을 친 뒤에도 한 사람도 교실에 안 들어갔다. 일본 선생들이 말하기를 조선여자같이 지독한 여자는 없다고 탄복했다.
강평국과 나는 외부 연락을 했다. 박규훈씨가 창으로 상황설명을 하고 우리는 끝까지 종로 경찰서 앞까지 갔다. 서울역에 당도, 용산서 총을 쏘아대자 바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피신. 4인이 약속키를 우리는 끝까지 계속 일할 것을 약속, 제동 유철경 선생댁에서 등사, 머리동이를 만들어 박규훈씨에게 전달. 최선생은 종로로 가다 대중에 휩쓸렸다가 체포. 수고는 강선생이 많이 했다..“
이 기록은 고수선이 3․1운동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구기 위해 말년에 기억을 더듬어 썼던 듯하다. 고수선이 세상을 뜨던해, 입수했던 그의 공책 맨뒷장에 자필로 쓰다만 내용이다.
당시 강평국의 제자로 서울 유학을 갔던 김서옥씨(89년 당시 81세 작고․제주최초의 여성 초등학교 교장)는 만세운동 때의 그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 했다.
“3․1운동 당시 만세를 불렀는데 최정숙은 종로로 나가다 붙잡혔고 강평국은 일본 기마병에 쫓길 때 어느 집에 들어가 병풍을 치고 앉아 머리를 쪽지고 앉아버렸다 해요, 그래서 색시처럼 보여 붙잡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조카 최봉조씨는 이모 강평국을 보면서 외할머니가 늘 걱정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 여성다움과 거리가 멀었던 데 있었던 듯하다. 최씨가 제주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의 기억이다.
“외숙(강세독)도 서울가서 공부할 때였다. 외숙이 동생이 만세 부르다 잡혀갔다”며 근심하는 것을 들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사회의 주시와 기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에 최정숙과 함께 참가했던 강평국은 그해 3월 25일 있을 졸업식에서 일본인들이 일본국가를 부르며 졸업식장에 참석한다는 것이 치욕이라고 생각해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제주로 낙향한다.
나중에 졸업장은 우송되어 왔다. 그렇게 학문의 세례를 받은 만큼 강평국은 그가 가진 이념을 이 땅에 쏟아부을 줄 알았던 실천적 삶을 산 운동가였다.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한 그는 20살 되던 해 전라남도 도서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학생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투옥된다. 이처럼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기록부재가 훗날 그가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당시 22살의 나이였던 한여택씨(진명여고보졸․조산원경력․89년 당시 91세․92년 작고). 그는 강평국보다 2살 위로 양태를 자고 있었는데, “강선생이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며 그를 목포로 데리고 가 그와 함께 살면서 공부를 했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때 1학년 담당이었던 강선생이 너희들은 훌륭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일깨워줬지요. 그러던 어느날 나와 함께 공부하러 갔던 김소제가 와서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났다며 울음을 터뜨렸어요. 학생들에게 조선글을 알아야 한다며 <유년필독>을 가르치던 강선생이 같은 학교 직원의 밀고로 잡혀갔던 것이지요”
그 후 강평국은 제주로 내려와 최정숙과 함께 1921년 ‘여수원(女修園)’이라는 야학을 설립했다. 당시 돈 2원씩 내고 다니던 그 야학은 강평국․최정숙이 앞장 서 제주여성들의 문맹을 틔워주는 학습관으로서의 역학을 했다. 제주지역에서의 여성운동의 시초였다.
이때 제자들로는 김서옥․김창제 등이 있다. 이때는 제주북교가 4년제로 , 5학년에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강평국과 최정숙은 집집마다 집접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모집했다. 정식 절차라 할 것도 없었다. 아는 선생이 누구 누구 조카다,누이다 해서 입학이 됐던 시절이었다.
이때를 기억하는 제자들은 “최정숙 선생은 성격이 온순하고 온화한 반면 강평국 선생의 성격은 날카롭고 불 같았다”고 말한다.
기미년 만세운동 후, 우선 민중의식을 일개우고자 제주에도 명신학교가 설립된다. 교장에는 김등두가 취임하였으나 1924년 1월에 폐교돼 갑자의숙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 의숙마저 이해 말에 폐숙되고 제주 보통학교가 흡수된 상황이었다.
그러자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강평국 최정숙 등은 많은 제주의 여성들이 공부할 기회를 놓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다.
“1909년 구마슬 신부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제주 여성 교육 기관이었던 신성여학교는 1916년 폐교되었다. 일제의 탄압과 경영난으로 재학생 1백50명을 남겨둔 채, 불란서인 구마슬 신부가 전주로 전근되자 기회를 노리던 일본 관헌들이 탄압을 가한 것”이라고 최정숙은 그의 회고록에서 적고 있다.
강평국과 최정숙은 1920년 모교의 복구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그 대응책으로 여수원을 설립한 것이다.
최정숙은 “천주교 수녀원 자리에 이름만 바꾸어 낮에는 국민학교 과정 50~60명을 , 밤에는 문맹자와 부녀자들을 가르치고 시간이 날때마다 학생들 모집하는데 나섰다. 이때 보통학교에서 남녀 공학에 참여한 학생은 20면 내외로 여성교육을 위한 여학교 신설을 절실히 느껴 다시 동지를 규합해 2백여 명을 모집하는데 성공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때 뿌린 교육의 씨앗이 제주의 신성여들을 배움의 길로 인도해 주는 길잡이가 되게 한 것이다. 뭍으로 유학을 가는 여성들이 차츰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수원도 1922년 주간에 국민학교 과정,야간에 성인반과 학령 초과자 등주야 2백 명을 무보수로 가르치는 명신학교가 설립된 뒤에는 여기에 흡수된다. 명신학교의 모태가 된 셈이다.
강평국은 그의 툭 터진 성격과 강단 때문에 많은 일화를 남겨 선후배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서울 유학시절에 주로 뾰족집(명동천주교) 수녀 기숙사에 기숙하고 있었습니다. 숙식에 동료 여학생들이 뒤설거지를 제각기 부지런히 하는데도 여사는 시치미를 떼고 들여다 보지도 않았어요. 이 때문에 게르름뱅이라는 별명이 붙어버렸습니다. 모든 가정살이는 남자도 여자와 반반씩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지론이었지요. 남자는 처첩을 몇 명씩 두면서도 이렇다 하는 말이 없는데 여자는 한 번 개가한다 하여도 수군덕거리고 손가락질을 하고 다니 도대체 되먹지 못한 세상이라고 흥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남자 후배이며 일본에서 같이 활동하던 김정순(98년93세․일본거주) 의 육필증언이다. 그는 이렇게 강평국의 성격을 감지하게 하는 일화를 묘사한 다음, 다시 그와 겪었던 짧은 일화 한 도막을 소개 했다.
“1922년말 어느 눈보라치는 날이었습니다.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 억류된 고 송산 김명식 선생(북제주군 조천 출신․조선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을 받은 언론인)을 면회하기 위해 현저동으로 가는 길에 누하동 운덕영별장 앞을 터벅터벅 걸어가 때였습니다. 가다보니 강 여사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습니다. ‘너 잘 만났구나. 아무개한테 편지 하여서?’하고 조용히 말을 꺼냈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질문에 말문이 막혀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망설였지요. 실은 내가 얼마전 ○○여고에 다니는 아무개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보낸적이 있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아무개가 강 여사에게 고자질을 한 겁니다. 여사는 이쪽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곁눈으로 흘겨보면서 ‘좋으면 학교 졸업허영 결혼허여, 아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거여’ 하고 말한 뒤 갈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1920년대, 우리새대는 여전히 전통적인 윤리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때문에 이 시대를 살던 여성의 이러한 사상은 상당한 파격에 속한다.
이때부터 그는 강 선생을 친누나처럼 생각하고 존경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성여고보에 김정순은 그 당시 14세의 소년으로서 서울과 제주에서 3․1독립만세를 선창한 동지적인 관계보다 더 신뢰와 이해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강평국은 1920년 말 한때 조천 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당시에는 허용되지 않던 가슴아린 연정의 추억도 갖게 되었다 한다. 같은 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H라는 이성과 로맨스 관계를 가지면서도 대처한 대상이어서 결혼을 못한 채 일본유학을 결심한다.”
는 내용도 김정순은 적고 있다.
또 옳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실천하고 마는 쾌활한 분이어서 문호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를 연상케 했다고 한다.
이운방씨(98년 89세․대저읍 거주)는 대정 공립보통학교 1학년 시절 강평국의 제자였다. 당시 모슬포에서도 독립만세가 있었다. 강평국이 독립만세에 간여했기 때문에 전근 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그는 또 그후 고학년 학업을 위해 제주북초등학교로 옮겨 왔을 때 이곳에서 다시 강 성생을 만났으며, 그를 정겹게 맞아 주었다고 기억한다.
어쨌든 이러한 성격을 형성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 홍소사였으리라.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 깨인 여성이었다. 또 너그러운 인품의 여성이었다.
“내가 어릴 때 보니까 양태를 뜨면서 외할머니(강평국의 어머니)가 이모님에게 물을 길어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모님은 물을 긷고 오다가 조그만 물항아리를 그만 7~8개나 깨뜨려버렸어요. 나중에 남은 것 하나가 있었는데 ‘이번엔 안 깨뜨렸수다’ 하면서 가지고 왔지요. 그런데 물팡아래 놓는 순간 그만 다시 왕창 깨뜨려 버리고 만것이지요. 그러자 외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잘했져게’였어요. 그렇게 너그러이 말했던게 기억이 나요”
최봉조씨의 기억에 남아있는 모녀의 삽화이다. 그는 강평국이 하고 싶었던 사회운동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고, 자유롭게 살았던 것은 그런 어머니의 이해심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우려고 했던 강한 의협심이 오래 각인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기질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왜그럴까. 그를 짧게 만났던 이나 인연을 맺엇던 여러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했다, 이웃에 살던 강평국의 그림자를 집요하게 밟아야 했던 한여택, 그는 강평국의 영향과 도움을 받아 늦깎이지만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틈만나면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다 결국 어머니가 손을 들었어요. 하고 싶다면 공부하러 가라고 말이지요”
김서옥(89년 당시 81세)․김창제(89년 당시 80세)씨도 그녀에 대한 일화를 갖고 있다. 그들은 그의 성격이 워낙 강단지고 칼칼해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어 했다고 말한다. 오빠 강세독 마저 꼼짝할 수 없을 정도였다한다.
이런 성격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외조카 최봉조는 그가 얼마나 일본인에 대한 저항의지로 불타 있었는지, 일인을 야만족이라면서 끝까지 성씨도 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흠모하면 무엇이든 닮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조천 학교시절, 강평국은 시내 동문통의 백 아무개라는 여성을 데리고 가서 침식도 함께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백씨가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는날, 가마를 타지 않고 위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시집을 갔다는 것이다. 그 당시 제주시내가 떠들썩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는 최봉조는 백씨 성을 가진 그 여성은 아마 강평국의 모든 성품에 반했었다고 회상한다.
제주에서 교사 시절을 보내면서 그의 가슴엔 폭넓은 세계에의 동경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아니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제2의 도약을 해야 했다. 조국은 일제의 착취에 더욱 어두워 가고 있었다. 강평국은 제국주의의 본고장에서 그들에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는 현해탄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래도 뭔가 항상 남다른 개성을 추구하던 그는 이대로 생을 보낼 수 없다며 어머니한테 일본 유학을 보낼줄 것을 지극히 간청했다. 가세는 기울어가기 시작할 때였다. 오빠의 만류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결국 그를 떠나 보냈다. 1920년대 말, 제주여성으로선 최초의 해외유학생이 되는 기록을 남기며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의대생이 된 강평국, 그는 이곳에서 학업보다는 가슴 속에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조국 독립에의 열망을 더 강하게 태웠던 듯하다. 시대의 선구적인 자각과 긍지를 품은 그의 활동은 주로 독립과 여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었다.
이때의 추억은 장시우(89년 당시 83세․제주시)씨가 지니고 있다. 장씨는 강평국과 일본의 吳館이란 하숙집에서 함께 공부하며 하숙을 했던 인연으로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반고학을 해야 하다시피 생활이 힘들었던 시절이었지요. 동경여의전엔 바로 이광수의 부인 허정숙도 같이 있었는데 한국여성으로서는 거의 드문 경우였지요. 그런데 강선생은 해부학 강의가 있는 날은 이상하게 집에들어와서 자꾸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았어요. 아마 심장이 안좋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만 생각했지요. 또 적성에 맞지 않았을지도 모르구요. 그때부터 건강이 안좋았을 거예요. 그는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한다기 보다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에 관여를 했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지요.”
여의사가 되겠다는 학업에의 의지보다 빈족의 독립과 여성의 해방을 위한 더 큰 신념의 줄기로 그를 감쌌던 도쿄 유학시절이었다.
이때도 그는 외국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한테 자금을 보내는 일을했고, 감옥에서는 콩 반쪽에도 글씨를 써서 사람들한테 연락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도 그의 활동의 흔적은 뒷받침된다. 근우회와 신간회에 참여했던 기록이 그것이다.
“일본에서의 항일운동으로 강평국은 1927년 신간회 동경지회가 창립되자 부인부 책임자로 선임되어 활약한다. 1928년에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근우회 일본지부를 창설해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동아일보 1928.3.27.일제경찰극비본 고등경찰요사)
근우회는 1927년 5월 우리나라에서 조직된 항일여성단체. 당시는3․1운동 직후에 조직돼 활약하던 대부분의 항일여성단체들이 탄압으로 해체된다. 드 뒤 요성운동은 교육운동 민족경제진흥운동 및 교계 여성단체를 통한 신앙운동이나 생활향상 계몽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여성운동은 1924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된 뒤부터는 민족주의적 방향과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양분 되었다. 분열된 국내외의 항일민족운동을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민족 운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1927년 2월 신간회가 조직되자 여성계도 여성운동의 통합론이 일어났고 마침내 그해 5월에 근우회가 조직된 것이다.
창립 주요인사로 김활란, 유영준,이현경, 유각경, 현신덕, 최은희, 황신덕, 박원희, 정칠성, 정종명 등이었다. 창립 취지는 “과거의 여성운동은 분산적이어서 통일된 조직도 없고 통일된 목표나 지도정신이 없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판단해 여성 전체의 역량을 건실하게 집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당시 여성운동계는 비혁명적 계몽주의와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노선으로 갈라졌다가 신간회 창립을 계기로 분립 분산을 지양하고 통일 단결을 희구하는 움직임이 표면화 됐다. 그리하여 1927년 5월 27일 서울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하고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강령으로 하는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이 근우회의 도쿄지회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1일 도쿄대 기독청년 회관에서 열렸다. 박화성의 개회로 시작된 대회는 격렬한 토론을 별여 아홉 가지 회의 유지를 결의 했다. 이어 역원선출이 있었다. 위원장으로는 박화성이 선출되었고, 그 외 각 부서의 역원들도 선출되었다. 이때 강평국은 정치문화부 소속 역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근우회 도쿄지회는 신간회 등의 단체와 협조하여 활동을 벌였는데,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은 1928년 3월 18일부터 전개한 여성문제 대강연회였다. 이 모임은 재일조선인 대중단체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조에 의해 성황리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근우회 도쿄지회는 1929년 이후에는 실제 활동을 거의 벌이지 못했고 신간회 도쿄지회의 자연해산과 함께 해산되었다.
“강평국은 근우회 도쿄지회가 창립되기 이전인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을 역임 했다 강평국은 당시 의대생으로 서울에서 3․1독립운동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은 삼월회의 후계 조직으로 구성원은 40명 전후였는데 민족 사회문제를 남성과 같은 위치에서 했다”(<국외 제주인들의항일운동>편 313쪽)
1927년 서울에서 조직된 국내 민족유일당 운동의 구체적인 죄우합작적 모임인 신간회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났다, 1928년말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 것이다.
“동경에서 근우회 동경지회 설립 준비중에 있다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제반 준비 종료되어 설립대회를 지난 22일 정오부터 본향구 추분 정 제대 기독회관에서 열었는데 각층을 망라한 60여 명이나 되어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먼저 박화성씨의 의미심장한 개회사로 개회하여 의장으로 박화성 강평국 양씨를 선임한 뒤 계속하여 우익단체들로부터 온 축사 및 축문 낭독에 들었갔는 바 제1착으로 일본 부인동맹과 신간회 동경지회를 위시하여 내외국의 각층 단체 약 10여 개소의 열렬한 축사가 있어 만장한 인사의 가슴을 끌리게 하였으며 또 20여장의 축전이 뒤를 이었으며 모두 정성과 우애로 차서 만장의 공기를 극도로 긴장케 한 뒤 의안토의에 들어가 격렬한 이론 투쟁을 장시간 계속한 끝에 아래와 같이 위원과 의결이 선정되었다더라. 결의사항 성언강령규약, 운동방침에 관한 건, 노동부인에 관한 건, 인신매매에 관한 건, 신간회 지회에 관한 건, 일본부인동맹과 제휴의 건, 교양에 관한 건, 대중신문 지지에 관한 건, 회 유지 및 기타”(동경.조선일보 1928년 1월 3일)
조선일보 1928년 1월 3일자는 임원 성명에서 위원장 박화성을 싣고 있고 정치문화부에 강평국, 김일원, 김영애가 쓰여 있어 동아일보의 기사와 약간 다르게 나타났다.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가는 줄도 모른 채 그는 여름방학 때는 제주도로 돌아왔고 학생들을 위해 학예회를 열기도 했다.
다시 한여택의 증언을 들어보자.
“강선생이 유학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서울에서 우연히 강선생을 만났어요. 그때 강선생은 한국의 정세를 알고 싶어서 왔다며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일본에서 공부한 얘기며 어머니한테 돈을 얻어 쓰려니 너무 미안하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의 여성관 민족관은 당시대가 수용하기엔 너무 벅찼던 듯하다. 남성들도 여성으로 쉽게 근접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말한다. 다감한 성품의 휴머니스트로, 제주의 많은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가는데 지침이 되었으며 우상 같은 위치였다고.
여성의 위치를 끌어올리고 독립을 위한 뚜렷한 신념으로 도도했다는게 김정순씨의 회고였다.
그러나 그의 뜻과 육신은 함께 나아갈 수 없었다. 도쿄에서 3학년을 수료하고 고향 제주로 왔을 때, 그는 이미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 폐환(조카는 복막염이 아닌가 했다)에 걸려있었다.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누워 지내며 일으켜 달라고 하면 그의 여든 넘은 어머니가 그를 일으켜주며 간병을 해야했다.
파돗소리 넘나드는 1390번지. 읍내 무근성 오막살이 단칸방에서 그는 홀로 쓸쓸히 한 생애를 접어야 했다. 이 때가 1933년 8월 12일 오후 1시였다.
불꽃처럼 살다 산 짧은 미완의 생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은데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조국의 독립과 모든 여성이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의식은 그때야 자유로원진 것인가.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을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났다.
조카 최봉조씨가 상체를 맡은 그의 장례식은 가톨릭 의식으로 치러졌다. 장지에는 최봉조, 오빠 아들, 작은 외숙, 천주교회에서 여럿이 갔다. 중앙성당에서 고별식을 갖고 황사평 천주교묘지에 안장했다. 이때 너무 어렸던 최봉조는 무덤을 붉은 돌로 표적을 했으나 몇해 지나가서 보니 모든 무덤이 붉은 돌로 표적을 해놓았고 소나무도 베어 없애려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 후 무덤도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던 것이다.
숱한 세월이 흘렀다. 강평국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지팡이에 의지해야하는 노구가 돼 있거나 세상을 뜨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름진 얼굴과 세월도 그들보다 수십 년 일찍 이승과 작별한 강평국을 잊지 못했다.
1981년 11월 10일. 따스한 햇살이 내비치는 만추에 이 황세왓 묘역에서는 ‘아가다 강평국 추모비’ 건립이 있었다. 후배이자 친우로 도쿄에서 같이 하숙을 했던 장시우․김정순씨가 건립하고 동시기를 살던 제주의 선각여성들이 동료․제자 14인의 단성을 모아 제작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할머니들이 노구를 이끌고 나와 이날의 추모비 앞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매우 의미있는 추모비가 새롭게 단장된 것이다.
“슬프다 시대의 선각자요, 여성의 등불인 그는 3․1운동때 피흘려 청춘을 불살랐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품은 이상 이루지 못한 채 애달픈 생애 담고 여기길이 자노니 지나는 길손이여 앞에 발멈춰 전사의 고혼에 명복을 빌지어다. 여기 뜻있는 이 모여 정성들여 하나의 비를 세우노니 구천에 사무친 애로운 영이여 고이 굽어 살피소서”
비문의 내용이다. 비문에는 당시 모두 80~90대의 동료․제자인 할머니들로 한여택 ․고수선․김소아․김계숙․박은표․양병효․고해영․김서옥․김창제․문연실․고인식․오매실․강어영․강순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평국의 무덤이 실묘되자 이를 애통해 하던 후배 김정순씨 등이 마땅히 선배의 업적을 표창하는 것이 도의적인 실마리가 되자 않을까 해서 제작한 것이다. 비록 이날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1981년 12월, 김정순씨는 ‘추모비 건설에 즈음해서’란 비공개 장문의 육필 편지글을 통해 한 시대를 강렬하게 살았던 제주여성 강평국을 개인적으로 재조명했다.
현재 그의 추모비가 서 있는 황사평 천주교공동묘지 입구에는 제주시가 지난 96년 12월 24일자로 김중현 최정숙 이운강 등 3인의 <독립항쟁기>를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황세왓 어딘가에 잠든 강평국에 대한 표석은 없다. 그의 이름은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강평국을 대한 적은 없으나 그를 존경한다는 한 제주의 원로 김형중씨(제주시 ․98년․84세). 그는 96년 당시 황세왓 묘역 확장 때 강평국의 기념비가 방치돼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다. 새로운 묘역을 만들어 그 기념비를 바로 세우기까지 꽤 많은 신경을 썼다. 김형중씨가 심어놓은 장미꽃이 강평국의 묘역에는 피어난다.
“남자한테 지기는 싫다. 구속을 받는게 싫다.” “일본인들은 야만인이다.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며 살자.”고 했던 강평국.
규방에 갇혀있던 제주여성들에게 야학을 통해 공부할 것을 권유했고, 여성의 법적 사회적 윤리적 관이 남성과 동등해야한다는 것을 자신의 사상과 이념으로 실천하려 애쓴 여성.
구습에 젖은 여성과 남성들을 일깨우고 불평등한 여성의 지위를 끌어 올리기 위해 애쓰며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다간 그녀는 현시대를 사는 제주여성들에게 혼불로 살아있다.
그가 추구했던 이념은 무엇이었던가. 한 인간으로서의 당당한 삶, 그리고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으로서 겪는 뜨거운 조국애가 아니었을까. 시대를 앞선 그의 사상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에게 소리없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기록으로는 그를 전부 이야기할 수 없다. 단지 한부분일 뿐이다. 앞으로 그에 대한 기록이 더욱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눈에 띄는 것에 대해서만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인간의 본질과 사상에 영향을 끼친 이가 있다면 그를 되살려야 할 것이다.
숱한 지사와 애국자 사이에 묻혀 잊혀진 강평국, 조국을 위하고 남을 사랑한 치열했던 삶이었지만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지금껏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왔다. 이제 독립운동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그의 발자취는 조명 받아야 한다. 개화기 제주 여성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히 자리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