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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吉祥寺, 백석과 자야 그리고 법정과 길상화의 채취가 묻어있는 봄비가 내리는 고불고불한 성북동 언덕배기길을 돌아 도심 사찰 길상사吉祥寺를 찾은 것은 대단한 불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백석과 자야의 운명 같은 사랑과 법정 스님과의 인연으로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 중에 하나였던 대원각을 보시한 길상화 김영한 님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현장을 직접 찾아보고 싶었던 때문이다. 삼각산 길상사 三角山 吉祥寺. 대개 유명 사찰의 창건설화에는 당대 고승의 이름이나 왕이나 공주의 이름이 나오게 마련인데 진향이라는 기생 출신의 요정 주인이라니 대체 어떤 사연이 담겨있는 것일까? 길상사 안내도 길상사 안내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길상사는 1987년 공덕주 길상화吉祥華 김영한 님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접하시고 감동받아 당시 유명 음식점이던 대원각 대지 7000여 평과 지상건물 40여동 등 부동산 전체를 청정한 불교도량으로 기증하고자 법정 스님께 오랫동안 청하시어 1995년 5월 스님께서 그뜻을 받아들이시고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하였습니다. 1997년 5월 대원각 부동산 일체의 등기를 완료하고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하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서울 분원으로 탄생되어 1997녀 12월 14일 많은사람들의 관심 속에 역사적인 개원 법회를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평일이어서 주차장도 널직하니 좋고 경내도 한산한 것이 가만히 살펴보니 사찰 입구를 지키는 험악한 사천왕상도 탱화도 보이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범종각을 제외하고는 단청도 기둥에 써붙여 놓은 어려운 부처님 말씀도 없다. 한때 세속적인 영화와 욕망을 가린 짙은 갈색 톤의 전각들뿐.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 상 거대한 금빛 불상을 경쟁적으로 조성해 놓고 불심을 자랑하는 게 요즘 불교계 대세인데 금방 울음 울것 같은 핼쓱한 미소와 가녀린 어깨. 법정 스님이 천주교 신자인 한국 조각계의 거장 최종태 님께 부탁해서 모셨다고 한다. 침묵 . 향기 . 강물. 달 길상사가 부처님을 찾아가는 법인가? 법정스님의 상좌로 유지를 받들어 길상사 주지와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을 맡으셨던 덕현 스님의 글이다. 오른쪽으로 돌면 만나게 되는 길상사 7층 보탑. 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전쟁고아에서 글로벌 경영인으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진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두 분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길상사에서는 드물게 단청을 한 범종각. “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 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실린 김영한 님의 고백이다.
극락전 앞 능수매 아래 가부좌를 튼 아기 부처님 모습도 재밋다. 실눈을 뜨고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근엄한 부처님과는 느낌부터 다르다. 길상사 본전인 극락전. 길상사는 석가여래불을 모시는 대웅전大雄殿 이 없고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極樂殿을 두고있는데 기존 건물을 활용하느라 전통가옥의 'ㄷ' 자 모양을 하고있다. 좌우로 손님 접대를 위한 금실 은실이 있었다고 한다. 범종각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나오는 길상헌吉祥軒. 김영한 님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머문 곳이다. 뒷편에 보이는 전각이 김영한 님의 사당. 사당 앞에는 공덕비와 약력과 시인 백석이 직접 써줬다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최초 원문이 담긴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백석 백기행과 자야 김영한 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 시절의 백석과 자야
그러나 운명은 가여운 연인 자야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백석은 집안의 반대로 강제결혼을 하게되고 자야는 백석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백석도 함흥을 떠나 서울로 와 전에 다녔던 신문사에 재입사를 하게 되고, 다시 드넓은 벌판으로 가서 시 100편을 가지고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한다. 그후 신징新京으로, 안둥安東으로 전전하던 그는 해방 후 신의주를 거쳐 귀향하여 북한에 남게 되는데, 해방과 전쟁과 휴전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백석의 이같은 선택은 두 연인에게는 영원한 이별로, 백석에게는 월북작가라는 상처로 남게된다. 북한에서는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내며 러시아 문학작품을 번역하기도 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고 하는데, 본시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백석은 1962년 이후 부르주아로 비판을 받고 집필금지를 당한 채 압록강 인근 양강도 삼수군에서 노동자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노년의 백석과 자야
1955년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60~70년대 요정정치의 꽃이었던 대원각을 운영하게 되는데, 1995년 당시 천억 원대에 이르는 대원각, 현 시가로는 수조 원에 이른다는 엄청난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한다. 여인들의 웃음을 팔아 번 돈을 사찰에 내놓고 무소유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평생 사랑했던 연인 백석을 기리고자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기증하여 1997년에 '백석문학상'도 제정한다. 누군가 절에 내놓은 재산을 두고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그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다던가. 고관대작과 세도가들이 드나들던 문 언뜻 보기에도 장안 최고 요정으로써 멋과 풍류를 지녔다. 법정 스님이 머물던 진영각으로 오르는 풍경. 신도 비신도를 구별하지 않고 누구나 명상을 할 수 있는 '침묵의 집'과 지친 도시인들이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가기 좋은 자리와 이름처럼 적막한 적묵당寂默堂, 사찰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아담한 템플스테이 촌, 육바라밀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님들의 환생인가, 돌틈 사이로 흰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노란 복수초 꽃도 볼 수 있다. 계곡 끝자락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진영각眞影閣. 말년에 법정 스님이 머룰던 곳이다. 스님은 불교승려이자 수필가로 욕망에 집착해서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무소유를 통한 깨달음을 설파하신 스님은 사후에도 무소유를 실천하시고자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1987년 국내 최대 요정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은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대원각을 시주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스님, 제발 저의 뜻을 받아주십시오" "뜻은 고맙지만 저는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님과 받을 수 없다는 법정 스님과의 실랑이는 이후로 10년 간에 걸쳐 벌어지게 되는데 결국 1995년 5월 스님께서 그뜻을 받아들이시고 1997년 5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서울 분원 길상사로 탄생되어 1997녀 12월 14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축복 속에 역사적인 개원 법회를 봉행하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한 개원식에서 법정 스님은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는 개원사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기도 하셨다. 또 스님의 철학인 무소유를 직접 실천하신 김영한 님께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고 백팔 염주 한 벌을 손수 목에 걸어주셨다고 한다.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불교에 귀의한 길상화 김영한 님은 1년 뒤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83세를 일기로 길상헌에서 돌아가시게 되는데 1999년 12월 14일 길상사에 눈이 내리던 날 길상화 김영한 님은 스님들에 의해 길상사에 한 줌의 재로 뿌려진다. 애욕과 무소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르내렸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또 울렸을까 묵직한 화두가 지천으로 널려진 오솔길에도 꽃들은 피어나고.... 심지어 ‘자신의 몸에서 사리를 찾지 말라’고 유언했던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법정 스님과 무소유의 삶을 몸소 실천했던 길상화 김영한 님을 찾아뵙고 길상사를 떠나며 법정 스님의 글 한 자락을 떠올려본다. 오늘따라 해묵은 느티나무 가지에 갓 피어난 연등이 여간 곱지 않다. "욕심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사람들은 가질 줄만 알지 비울줄은 모른다. 사람이 욕심에 집착하면 불명예 외에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 2018.4.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