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과 박성준의 미스테리
이영민(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간사)
남편은 간첩, 아내는 이적행위자-.
이렇게 죽이 척척 맞는 찰떡궁합 부부가 바로 한명숙과 박성준이다.
박성준은 60년대 대표적 간첩단 사건인 통혁당 사건으로 체포돼 13년을 복역하고 석방됐지만 자신은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없고 다만 통혁당 구성원으로부터 책 한권을 빌려 받았을 뿐인데 억울하게 13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다고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 책 한 권 빌려 본 죄로 13년을 옥살이 시키는 나라가 어디 있나.
거짓말도 이 정도라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자가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는 나라가 바로 노무현 정권하의 대한민국이다.
필자는 얼마 전까지 김대중과 노무현을 매우 싫어하고 비난하였지만 요즘 들어서는 자꾸 우리 국민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정구 직위해제에 격분한 동국대 동문들이 졸업장을 반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더욱 한심하고 골이 비어 보인다.
60년대 대표적 간첩단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은 워낙 관련인원이 방대하여 조사후 무혐의로 풀려난 사람들만 118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죄가 없어서 풀려난 것은 아니었고 사건이 워낙 대규모이다 보니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는 조사후 무혐의로 풀려난 사람들중에 바로 주범 김배영이 포함되어 있었고 김배영은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월북, 밀봉교육을 받고나서 재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통혁당이 적발된 계기는 임자도 간첩사건 때문이었다. 전남 무안군 연안의 임자도는 6. 25 직전 좌익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인민군이 남하하기도 전에 라디오로 전황을 파악한 좌익분자들이 섬을 장악, 우익인사들을 잡아 생매장을 감행할 정도였다.
그런 만큼 북한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임자도에 무장봉기를 목표로 하는 지하당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연고가 있는 지도원 김수영을 남파하였다. 김수영은 남파되자마자 아우 김수상과 그의 외숙인 최영길(전직 임자도 면장)을 포섭, 이들을 대동하고 월북하였다. 이 공작활동은 역시 임자도에 연고가 있는 북한지하당 전남도책 정태홍의 관여하에 진행되었고 최영길과 김수상은 북한에서 노동당에 입당한 후 6개월간 공작원이 되기 위한 밀봉교육을 받고 1천8백45만원의 당시로서는 거금인 공작금과 무전기, 권총등을 수령하고 재남파되었다.
이들은 그 무전기로 총 1백67회의 지령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돈(공작금) 때문에 비롯되었다.
최영길에게는 아편중독자인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친형이 북한에 가서 거액의 공작금을 받아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생인 최모는 친형 최영길이 자기에게 생각보다 충분한 돈을 주지 않자 화가 났고 돈이 없어 아편을 구입할 수 없게 되자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욱하는 심정으로 당국에 이 사실을 모두 일러바친 것이었다.
임자도 간첩단이 적발되자 그들의 공작내용이 모두 드러났는데 그들은 공작금을 이용하여 서울시내 무교동의 깡패두목 김종태를 포섭하여 중고자동차매매상인 ‘삼창산업사’를 차리게 하여 운영하게 하고 재정난에 허덕이던 월간지 ‘청맥’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서울 문리대 출신이며 청맥의 운영자들인 이문규, 김질락 등을 포섭하였다.
이 청맥을 통하여 그들은 대대적인 반미친북적 글들을 발표하여 선전공작활동을 폈고 또 이문규로 하여금 명동에 ‘학사주점’을 차리게 하여 공짜술로 인심을 쓰면서 대학생들을 포섭하였다.
김종태와 이문규는 독자적으로 4차례에 걸쳐 북한을 내왕하면서 미화 7만달러, 일화 50만엔, 우리 돈 2천3백50만원과 지령을 받고 내려와 주로 서울 문리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별도의 간첩단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임자도 간첩단 사건에서 발단하여 별도로 조직된 통일혁명당 간첩단의 시작이다.
이문규는 공군 정훈장교로도 복무한 인물인데 그는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구성, 1967년 5월 월북, 북한 노동당에 입당함과 동시에 조국해방전선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이문규는 재일 조총련 산하 국내지하조직이던 가칭 남조선 해방전략당과도 접선, 그들로부터도 막대한 공작금을 지원받아 조총련계인 동해상사와 비슷한 유사기업체도 만들고 있었다. 북한에서 봤을 때는 이문규는 참으로 천군만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김종태의 체포후 그의 난수표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의 집을 수색한지 3일만에 장독대 받침돌 밑에서 발견되었다. 밤을 새워 난수표를 해독한 결과 이문규가 부두목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간첩단 사건이 적발된 후 재빨리 피신한 이문규는 대구를 거쳐 포항으로 가서 그의 처제와 함께 해수욕을 즐긴 후 다시 서울로 출발하기 직전 체포되었다.
이문규가 체포된 후 중앙정보부는 일단 그의 체포사실을 비밀에 부친 후 북한을 상대로 역공작을 폈다. 당시 북한은 ‘마이크로 웨이브’로 발신되는 한국의 모든 전보를 체크하여 그중에서 공작원들이 북한으로 보내는 비밀암호를 따로 포착하고 있었다.
1968년 8월 어느 날 한 사람의 민간인이 서울시내 한 우체국에 나타나 제주도의 서귀포로 보내는 전보 한 통을 쳤다. 받는 사람은 제주도 서귀포시 금성여관 이승호였고 전보내용은 ‘상철 16일 입원 52,300원 명동2가 139 본인 앞으로 급송바람. 윤상길’이었다.
전보내용중 한글은 모두 의미없는 위장용이었고 진짜 메시지는 ‘16523002139’였다. 이 뜻은 ‘사태 위급 구조요청. 서귀포에서 접선일시 지시바람. 이문규’였다.
전보를 친 사람은 이문규를 가장한 중앙정보부 요원이었고 전보내용은 모두 북한으로 넘어갔다. 곧 북한에서 무전으로 다음과 같은 답신이 날아왔다.
“1968년 8월 20일 밤10시 서귀포에서 만나자.”
그러나 당일 밤 북한은 다시 무전으로 접선날짜를 하루 늦춘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 다음날인 8월 21일 밤 서귀포 해안에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물샐 틈없는 매복과 정찰을 하고 있었으며 멀리 포구밖에서는 해군 함정이 대기하고 있었고 공군 폭격기가 출동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아무 것도 모르는 간첩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첩선은 그 날로 바로 바다 속으로 수장이 되었으며 그 안에 타고 있던 무장공비 12명은 물귀신이 되었다.
바다에 뛰어든 공비 이승탁과 김일용은 체포되었다.
그들의 진술을 의하면 김종태는 바로 그 간첩선을 타고 월북, 북한 정권 20주년 기념일인 1968년 9월 9일에 ‘박두일’이라는 가명으로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69년 1월 22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그 해 7월 10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집행되자 북한 당국은 그들에게 ‘영웅’칭호를 하사하고 평양대극장에서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고 김종태 동지의 추도회’를 거행했다.
단상 중앙에는 김종태의 초상화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수십개의 대형화환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시 이틀 후인 7월 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는 고 김종태 추도결의문을 채택하고 7월 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 김종태 추모기간을 설정, 각 도, 직할시, 시구역, 도당 위원회, 구분대(區分隊), 구분대 당위원회, 공업기업소, 협동농장, 교육문화 및 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이도 모자랐던지 김종태에게 북한 최고 훈장인 금성(金星)메달과 국기훈장 1급을 추서하였다. 그러자 북한 내각도 덩달아 평양기관차전기공장을 ‘김종태 전기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개명하기까지 하였다. 평양시내에도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만약에 북한에서 이런 사실이 없었더라면
한명숙과 박성준, 그리고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는 이 또한 과거 정권에 의해서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뻔한 답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이 남한과 짜고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고 궤변을 늘어놔야 하지 않을까
[출처] 팍스넷 나코스 님의 글
첫댓글 한여인은 국무총리인데도 불구하고 남편은 미군기지 조성 반대 폭력성데모를 주도한 사람들이니까 빨리 둘다 북으로 보내야할 사람들이지요.
남편이 도둑이면 부인도 도둑질을 해야만 평생해로 한다고 하지요.천생연분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