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대(南逸臺)
남일대 해수욕장은
신라시대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남유 하다가
이곳의 맑고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 주변 절경을 보고
남녘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이라 감탄하며 남일대라 명명하였다.
동쪽으로는 산책로 따라 사천 팔경의 하나인 바닷물에 잠긴 듯한
코끼리 바위와 거북 모양의 암석이 절묘하게 장관을 이루고...
서쪽으로는 고래 눈동자같이 진널전망대에서
꿈같은 삼천포항이 한눈에 머무나니.
은빛 철분이 섞인 모래사장인 해안은 하얀 이빨 같은 파도에 부서진 조개껍질 모래라 예부터 모래찜질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 000 횡단보도 남쪽으로는 남태평양 수평선 지동설같이 푸른 꿈 밀물에 밀려오고...
북쪽으로는 사천시의 중심에 수호신처럼 우뚝 솟아있는 와룡산의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삭풍(朔風)에도 어머니 가슴같이 포근하도다.
「시인 천덕찬」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시대를
살다 간 천재 문장가,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6두품의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12세 라는 어린 나이에 당에 유학하여 874년에 당탕히 벼슬길에 오른다. 라고난 총명함에 더해 '남이 백을 하는 통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人百己不)' 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철저히 수신하는 학자었다. 최치원은 할이 아닌 첨예한 올솜씨로 많은 공을 세운다. 특히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 「토황소격문(計黃巢檄文)」은 '황소의 난'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로 입해 최치원은 중국 전역에 이릅을 별치게 된다. 28세에 귀국하여 현강왕(憲康王. 재워 875 ~886)의 지원 마래 자신의 학문과 기량을 펼쳐 보이려 했으나 현실의 벽에 가로 막혀 뜻을 펼치지 못한다. 불교의 폐단을 막기 위해 주장한 유·블·선 통합사상과 정치혼란·제정워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진성여왕(真聖女王, 재위 887 -897)에게 올린 시무책 10 조 등에는 기울어 가는 신라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잡 나타나 있다. 비복 은둔생활로 삶을 마쳤지만 그의 울곧은 사상이 담긴 뛰어난 문필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 당시 지은 유명한 請「제자야산독서당(題伽倻 山讀 書堂)」은 지식인으로서 내면적 고뇌가 잘 녹아 있는 최치원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이다. 집 슈퍼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첩첩한 톨 사이에 미친 듯이 내뿜어 점겹 봉우리에 올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항상 시비하는 소리 귀에 틀림이 두려워 故放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집짓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물 둘러싸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동문선(東文選)」
범 해 (泛海)
최 치 원 (崔致遠)
돛 걸어둔 망망한 바다에 배 띄 우니
긴 바람은 만리로 나아간다
뗏목을 중국에 보내어 놓고
약초 캐 는 진 시 황의 아이를 추억하네
해 와 달빛에 어찌 밖이 있고
태극 속에 하늘과 땅 있으랴
지척간에 봉래의 신선이 있어
나 , 이차에 신선옹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