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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줄리안 노리치의 영성
줄리안은 신비가이다. 신비가란 하느님에 대한 높은 지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메시지를 직접 받은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신비가들을 보통 사람과 분리시켜서 특수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상한 사람, 초월적인 인간들이 아니다. 신비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해 있어서 이를 민감하게 지각하고 주의 깊게 의식한다면 누구나 모두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에 접할 수 있는 신비체험에 불림을 받게 될 것이다.
☑ 하느님 사랑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면 신비가라 할 수 있다.
줄리안의 하느님 체험은 시간적으로 즉각적이고 공간적으로 밀착하여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줄리안은 스스로 자신의 종교 체험의 권위를 주장한다. 여기서 참된 종교체험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에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평가기준을 들어보기로 하자. 종교체험은 우선 자기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신앙전통 안에서 발생하고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종교체험은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기심이 없는 행동을 하도록 사랑스럽게 마음의 권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며,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내적인 권위로부터 흘러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 종교체험은 단순히 그 사람이 들은 것으로 그치면 종교체험이라 할 수 없다. 체험이 그 사람을 하느님께로 변화시켜야 한다. 아무리 많은 체험을 했다고 주장해도 그가 변화되지 않았다면 올바른 체험이라 볼 수 없다.
1. 줄리안의 환시 체험
줄리안이 환시를 본 것은 교회의 전통에서 신비가들이 하느님 체험을 했던 다음의 세 가지 방법에 의해서이다. 첫째, 신체의 비전을 통해서 보는 환시이다. 즉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알았다. 즉 보고 듣고 때로는 냄새로 알았다. 둘째, 영적 비전을 통해 보는 환시이다. 영적 비전이라는 것은 그녀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말 해주는 환시이다. 셋째, 지적 조명을 통해서 보는 환시이다. 그녀의 지성이 빛에 의해 조명되어 하느님을 이해하는 환시이다.
신비가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체험을 알리는 일을 절실하게 열망한다. 줄리안의 경우 자신의 체험을 알리고자 하는 강박관념이 그 체험의 본질처럼 보인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난 후, 그녀가 받은 환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줄리안은 자신의 환시를 기록하면서 계속하여 메시지의 절박성을 강하게 느낀 것 같다. 그녀의 말이 한 번에 전달되기를 열망했는데도 그 말들이 깨지고 부셔져나가면 그녀는 그 말들이 주게 되는 무게를 인내심을 가지고 이겨내야만 했다.
☑ 줄리안은 체험을 알리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체험을 묵상하고 정리하여 책으로 쓴 것이다.
환시를 받기 이전에 줄리안은 하느님께 세 가지의 은혜를 선물로서 주실 것을 청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실제로 동참하여 그 고통에 깊이 참여할 수 있는 은혜였다. 줄리안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고통을 증거하기를 원했다. 둘째로 죽기까지 신체적인 병을 앓을 수 있는 것으로, 줄리안은 신체적 병과 더불어 모든 종류의 신체적 영적 고통을 청했다. 이런 태도는 당대에 유행했던 일반적인 신심행위 중의 하나였다. 셋째로 하느님의 선물로써 세 가지의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 은혜였다. 세 가지의 상처란 줄리안이 일생동안 느끼게 될 통회의 상처, 연민의 상처, 하느님을 갈망하는 지향으로부터 느끼게 될 상처였다. 그녀는 처음 두개의 은혜는 조건적으로 청원했고 세 번째의 은혜는 조건 없이 청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신심 생활이 극도로 진지했음을 알 수 있다. 줄리안의 이러한 청원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는 은혜를 소망했다고 보여진다.
☑ 하느님으로부터 고통을 청하는 것은 그당시 독실한 사람들의 신심행위였다. 에수님의 고통에 동참한다고 본 것이다.
1373 년 5월 8일, 부활 제 3주일은 그녀가 삼십살 육 개월 되던 해로 그토록 소원하던 기도의 청이 들어졌다. 그녀는 칠일 동안 심한 병으로 죽도록 아팠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다시 소생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나 또한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줄리안은 젊은 여성으로 하느님께 더 잘 봉사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 없이, "나는 마음을 다하여 내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맡겨드렸다"고 적고 있다. 줄리안이 본당 신부님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는 순간,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그녀에게 십자가를 보도록 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당신의 창조주이며 구원자의 상징을 당신께 가져왔으니 이것을 보고 힘을 얻으십시오." 줄리안이 한 동안 죽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보였으나 그녀의 생명은 놀랍게도 회복되었다. "별안간 나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나는 전보다 좋아졌다.“
☑ 줄리안의 체험은 죽음의 문턱에서 시작된다.
새벽 4시, 새벽의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올 때, 첫 번째 환시를 체험했다. 죽어가던 줄리안은 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뜻밖에 예수의 가시관에서 흘러나오는 성혈을 보았다. 같은 환시에서, 갑자기 성삼위께서 내 마음을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가면 거기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끝없는 기쁨을 체험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이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삼위일체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며, 우리의 끝없는 축복이자 기쁨이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줄리안은 성삼위께서 주시는 위안과 기쁨을 체험한 것이다. 그렇게 환시 체험은 시작된다.
그 이후 새벽 4시부터 오후 3시까지 15차례의 환시를 보았으며 낮에는 정지되었다. 그 날 밤에 1차례의 환시를 또 보았다. 이 환시는 그녀가 주님께 요청한 대로 선물로서 받았고, 그녀가 기도한 대로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것같이, 즉 그녀가 꼭 받아야 하는 하느님의 뜻인 것같이 주어졌다.
☑ 줄리안에게 환시 체험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줄리안의 글에서 기록하기를 그녀가 고통을 당할 때 그녀의 어머니가 침대 곁에 있었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거기에 있었고, 그녀의 손을 들어 나의 눈을 감겨 주었다. 사람들은 그 순간 마치 내가 이미 죽었거나 또는 죽어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슬픔을 더 크게 하였다. 이러한 나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위한 나의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 줄리안이 환시를 받는 순간 의식이 깨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어둠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앞에 있는 십자가상이 보였고 희미한 불빛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5시간 동안이나 탈혼 상태에서 15차례의 환시를 보았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다가오심과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환시였다. 그 때 그녀의 의식은 깨어 있었고 자신이 병고에서 벗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 밤, 그녀가 본 다른 환시 속에서 이미 본 환시들에 대한 의미가 상세히 설명되어 명확하게 해주었다. 이 16차례의 환시를 기록한 것이 오늘 날 우리에게 알려진 『짧은 텍스트』이다. 이 환시는 주로 성 삼위와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줄리안이 은수자로서 기도하며 고독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 언제였나 하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줄리안이 환시를 본 후에 주님이 보여주신 엄청난 신비를 묵상하면서, 일생동안 주님과 친밀한 영적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 같다.
☑ 줄리안의 환시 체험은 그녀의 삶을 은수자의 삶으로 이끌었다.
2. 줄리안의 하느님 표상
줄리안의 작품을 해설하는 학자들은, 신학자로서의 줄리안의 특성은 뛰어난 상상력에 있음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줄리안은 그녀의 영성에서 이와 같은 특징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줄리안은 삼위일체에 관한 상징에서 어머니이신 하느님, 예수의 모성을 현저히 드러내는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현대 신학의 쟁점이기도하다. 또한 그녀의 창조신학의 감성은 교회 안에서 소홀하게 다루어 온 생태신학의 감수성을 일깨워 주고 있어 환경이 날로 피폐해 가고 있는 지구의 보존을 염려하는 현대인들에게 생명을 낳고 보존하며 양육하는 모성적인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다.
1) 어머니이신 하느님과 어머니이신 예수님의 표상
남녀평등의 움직임이 활발해져가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줄리안은 하느님의 아버지 표상에 대한 패러다임을 재고해 보도록 하는 초대를 하고 있다. 줄리안 작품의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놀랍게도 하느님의 여성성에 대한 강조로서,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하느님의 모성 통찰에서 선구적이었던 줄리안은, 모성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개념으로 규정한다. 그녀에게 있어 하느님의 모성은 감싸고, 안고, 반기고, 포용하고, 우주적이고, 확장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중세 문화 전통에서 가정 안에서의 아버지는 권위, 벌, 두려움의 상징이며, 어머니는 친절, 온순, 자비, 보호의 상징으로서, 먹이고, 옷을 입혀주는 자의 대명사와 직결되었다. 줄리안은 전통적인 가르침의 폭을 넓혀서 하느님의 모성적인 표상을 당당하게 표현하였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모성적 표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줄리안은 창조 영성의 신비가 중에서 모성적 개념을 가장 풍요롭게 개발한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다정한 가슴으로 우리를 먹이고 기르신다. 이러한 비유는 구약과 신약 성서에도 가끔 나오는 표현이다. 예수 자신도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누룩을 넣어 빵을 만드는 여자라든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의 이야기로 여성을 비유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아서 품고 있는 암탉으로까지 표현하였다. 가부장적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은유들이 계속하여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줄리안은 이런 표상들을 통해 우리의 영적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 줄리안은 하느님의 모성상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기에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삼위 일체적 속성에 대한 줄리안의 신학은 현대의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에게 새롭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줄리안은 하느님의 모성을 삼위일체의 속성의 일부로 보고 있다. 여성성은 하느님의 부성을 조화롭게 보완해주며 모성은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하느님의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표상은 성서만이 아니라 오랜 유대교 전통의 일부였다. 또한 가부장적인 중세 신학자들도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을 가끔 언급했지만 줄리안은 특별히 성체를 통하여 성자의 모성적(母性的)인 측면을 그 어떤 신학자들보다도 더욱 풍요롭게 발전시켰다. 성체는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고 새로 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모성과 결부된다. 긴 책의 52장에서 62장까지 11 개의 장에서 그녀는 하느님 안에 있는 부성, 모성, 주권이 하나로 합일되어 이루는 삼위일체의 일치에 관해 다루고 있다. 긴 책 58장과 59장에서 하느님의 모성성과 예수의 모성성의 표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 하느님의 모성성은 우리에게 성체를 주시어 먹이시고 기르시는 데에 나타난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 넘치는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지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스런 어머니가 되시며, 성령의 사랑과 전선하심이 융합하여 이 모두가 어우러져 한 분이신 하느님,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더욱이 나는 우리의 두 번째 위격에서 우리의 어머니이신 사랑스런 어머니의 실체를 보았고 이제 그 위격은 감각적으로도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실체로서, 또 감각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우리의 실체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이 실체를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위격은 본성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우리의 실체를 창조하는데 기초와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우리의 감각을 취하게 해주신 자비로운 어머니이시다. 그러므로 이 어머니는 우리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시며, 그 분 안에서 우리가 부분들로 나누이지 않고 온전하게 존재한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큰 덕을 입고 성장한다. 그 분은 자비로 우리를 변혁시키고 회복시키며, 그 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우리의 실체와 하나 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이 자비로운 어머니는 우리의 실체 안에 머물며, 그의 사랑을 받으며 순종하는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악과 대치하는 선하신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원형을 지니고 있으며, 영원히 지속될 모든 감미로운 사랑과 더불어 그곳에서 모든 모성성의 기반이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 하느님의 모성성은 그리스도에게서 특히 나타난다.
로즈매리 류터는 하느님의 모성에 대한 줄리안의 탐구가 그녀의 신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다. 특히 삼위일체의 위격적 하느님은 상호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인간과 더불어서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인간은 창조되었고 구원되었으며,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신 주 하느님과의 상호관계 안에서 온전하게 인간성을 회복했다. 이 두 번째 위격과 줄리안이 지혜로써 동일화되는 순간을 성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여성적 상징과 결부시키고 있다, 줄리안은 그리스도를 우리가 다시 낳음을 받아 새롭게 탄생하고 양육될 표본으로 본다. 그녀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자궁으로부터 출산한 아이를 자신의 몸으로 키워내는 어머니로 바라보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세례와 성체 성사를 인용한다.
☑ 세례는 출산이고, 성체는 양육이다.
줄리안이 하느님을 아버지이며 어머니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에 대해 깊이 있고 폭 넓은 이해를 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게 한다"(에페 3,18). 노리치의 줄리안이 모성을 통해 얻게 된 결론은 '섬김'에 있다. "어머니의 섬김은 가장 가깝고 가장 즐거우며 가장 확실하다. 모성적 섬김이 자연스럽기에 가장 가깝고, 사랑스럽기에 가장 즐거우며, 진실하기에 가장 확실하다." 그것은 여성의 출산에서 오는 고통과 모험과 용기를 내포하고 있다. 줄리안이 말하는 섬김은 자비의 섬김으로 모성의 '자비와 은총'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의 모성적 측면으로 돌아감은 바로 삶의 길인 자비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그러기에 어머니이신 하느님은‘모든 지혜의 원천'이므로 현대인의 영적 목마름과 메마름을 풀어주고 살릴 수 있는 길은 모성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어머니의 섬김을 맛보는 것은 나를 살리는 길이요, 이웃을 살리고 더 나아가 지구를 살리고 우주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이 드러난 것이 자비다.
2) 창조의 전일적인 영성: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의 표현
줄리안은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만물이야말로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임을 이해했다."하늘과 땅과 만물이 위대하고 넉넉하며 아름답고 선하다.... 하느님의 선하심이 만물과 모든 복된 일을 가득 채우며 끝없이 흘러 넘친다... 하느님은 모든 선이고 모든 것 안에 있는 선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실체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도 보지 못한다. 이를테면 모두가 하느님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실체는 하느님 안의 피조물이다."
☑ 피조물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줄리안은 인류와 창조계, 몸과 영혼, 하느님과 감성의 경이로운 결합을 '직조'라는 말로 표현한다. 땅스러운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 몸과 혼의 '영광스러운 결합'에 대해 말하며, 우리의 거룩한 감성이 바로 창조의 순간에 시작된다고 밝힌다.
"우리의 감성은 자연과 자비와 은총에 바탕하고 있고 우리의 감성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실체와 감성이 결코 분리되지 않도록 결합되어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 차단되기는커녕 '우리의 감각 안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과 땅스러움을 온정 깊게 대하고 조화시키며, 하느님은 실제로 피조물인 우리의 온전함을 회복하도록 구원해주고 지켜주는 힘이다. 줄리안은 우리의 땅스러움이 곧 거룩함이라고 명명하면서 거룩함을 추상화하지 않는다. 목욕과 같은 '우리 몸의 극히 단순한 자연적 움직임'이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게 되는 온전함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이 당신을 닮도록 창조해주신 우리 넋을 사랑하시므로 우리 몸의 어떤 단순한 자연적 기능 안에서나마 우리를 섬기기를 천시하시지 않는다." 중세의 이원론적인 사고에 젖어 살면서도 영과 몸을 분리시키지 않는 전일적(全一的)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줄리안에게서 현대인은 통합된 세계관을 배우게 되고 그녀의 진취적인 의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줄리안은 "우리는 땅에 속해 있기보다 더욱 하늘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이 지상에서는 우리가 그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대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는 그녀의 기록에서 하늘과 땅을 가르는 중세의 이원론적 영성을 드러내는 일면이 없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의 종말론적 기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보다는 하늘에 있기를 원하신다고 보았고 이 세상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다. 관상가들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본다고도 쓰고 있다.
☑ 세상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더 큰 가치를 하늘에 둔 것이다. 세상에 있을 때는 세상에 충실하게 살고 그 충실함으로 하늘을 차지하는 것이다.
줄리안의 저서는 작은 호도(hazelnet)의 비전을 담고 있다. 줄리안은 그녀의 환시에서 하느님의 표상으로 '친밀함', '집과 같은 느낌', '공손함'을 들었고, 강렬한 개인적인 사랑을 체험하였다. 동시에 줄리안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보존하시는 호도의 은유에서 창조물의 선함을 관상했다. 즉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 하느님은 창조된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나의 손바닥에 공같이 둥글고 호도보다 크지 않은 작은 것을 놓아 주셨다. 나는 그것을 쳐다보며, '이것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다. 하느님께로부터 '그것은 피조물이다'라고 대답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 너무 작아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호도가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같은 방법으로 존재한다... 이 작은 호도는 세 개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첫째 하느님이 그것을 만드셨으며, 둘째 하느님이 그것을 사랑하고 계시고, 셋째, 하느님께서 그것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드신 분, 돌보시는 분, 사랑하는 분은 내게 참으로 어떤 분인가? 내가 그분과 하나의 실체로 합일될 때까지, 내가 완전한 안식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는 내가 하느님과 너무도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어서 하느님과 나 사이에 어떤 피조물도 끼어 들 수 없을 것이다.
이 비전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신비가들이 이미 체험했던 내용을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은 창조된 피조물의 아주 작은 알갱이까지도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무한한 갈망에 의해서만 만족해하신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창조된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무시할 수 없다
☑ 하느님은 창조된 모든 것을 비록 그것이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고 어느 것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아주 작은 것 안에서도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모든 것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다고 확신해야만 한다. 줄리안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은혜로운 비전에 의해 압도당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줄리안은 만물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관상했다."하느님은 자연의 참 아버지요 어머니이시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요 전지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이시다".
☑ 하느님은 현존하는 모든 것안에 계신다.
이러한 이유에서 줄리안의 창조 영성이 제시하고 있는, 우리 자신 안에 잠재해 있는 하느님을 닮은 보석과 같은 모성을 발전시킬 중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영성 신학자들은 역설하고 있다.
IV . 오늘을 위한 줄리안의 영성적 지혜
1.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에로의 초대
극도로 물질적이고 회의적이며 무신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줄리안과 같은 신비가에게 끌리는 매력은 무엇일까? 그녀 안에 내재하고 있던 깊은 갈망으로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모성으로써 이웃에게 봉사하려는 강렬하고도 무한히 확산되는 열망이 우리에게 전수되기 때문이 아닐까? 줄리안에게 있어 예수의 수난에 동참한다 함은 단지 수난사의 구절을 읽으며 회상하는 차디차고 추상적인 묵상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 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갈망하는 사랑이다. 창검에 찔린 예수의 마음과 그 분이 선호하는 관심에 애정을 가지고 일치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삶의 증거를 통해서, 순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소원했듯이, 줄리안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기를 청했다.
☑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고통을 없애는 약들이 범람하는 시대, 아픔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약물을 남용하는 약물중독의 시대에, 줄리안이 죽을 때까지 신체적 병을 간절히 소망했던 태도는 현대인을 아연케 하며 혼란스럽게 하는 논지이다.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는 상반된 어리석음의 지혜일지 모른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어리석음의 지혜와 같은 논리이다. 그녀는 몸소 어리석음의 지혜를 체험함으로써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려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 예수님의 지혜는 어리석음의 지혜요, 예수님을 따르며 사는 삶 역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
여기서 줄리안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의 일상성 안에서 우리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감으로써 일상의 지평을 넘어서려는 용기,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깊이 느끼고 더 풍성하게 나누고 사랑하려는 용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는 용기에 도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을 닮는 용기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줄리안은 환시를 본 후 20년 동안이나 그 신비에 대하여 묵상하였고 은수자의 삶을 살아냄으로써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사는 용기를 보여주며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 우리는 현실 안에서 하느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풍요의 영성 :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줄리안이 살던 중세는 죄, 저주,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주제에 강박 되어 묶여 있었다. 줄리안은 이 비관론에 대해 하느님의 선하심, 사랑, 자비로 대응했다. 줄리안은 수년간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 심판이나 영원한 벌이라는 두려움이 야기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괴로워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용맹스럽게도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전적인 신앙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갈등을 서서히 풀어나갔다.
☑ 줄리안은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했다.
하느님에 대한 줄리안의 신뢰는 절대적 믿음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녀의 영성의 핵심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 메시지로 집약 될 수 있다. 그녀는 삶의 태도와 신앙의 전망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자유로운 자세를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이 모든 악들 위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라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집약되고 있다.
☑ 어지러운 현실에서도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란 낙관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반드시 악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죄에 대한 줄리안의 태도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너무 강박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죄가 은총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강박관념은 은총보다 오히려 죄에 큰 비중을 두는 경향 마저 있다.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줄리안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이다. 우리가 우리의 결핍이나 죄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에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하여, 특히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큰 신뢰와 희망을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하느님의 사랑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는다.
풍요의 영성이라고 해서 세계 공동체와 개인의 삶이 직면하고 있는 어두운 측면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삶을 충만하게 살려면 우선 내가 서 있는 현장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난무하는 사회악에 나도 몸을 담그고 있고 내 안의 상처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시인해야만 한다. 현실 속의 초라한 나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에 하느님께서 부족한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가득히 채워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다.
V. 결 론
역사는 중세를 암흑의 시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중세는 우리가 빛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만 했던 어둠의 과정이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풍성한 영성적 가치들을 발굴해 내었던 많은 위대한 신비가들이 바로 이 어둠의 세기에 살았다는 사실이 그 좋은 증거이다. 특히 노리치의 줄리안이 체험했던 환시를 담고 있는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오늘 날의 현대인에게 밝고 따뜻한 빛을 선사하고 있다.
☑ 빛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둠을 통과해야 한다. 중세 시대는 그 어둠의 시기다.
중세의 영성의 특성 중의 하나는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된 이원론의 대립으로 몸과 마음을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이성과 감성, 정신과 물질, 남성과 여성을 분리시키며 상하의 체계를 구별하는 구조적인 폐단이 당대의 모든 가치체계를 지배했다. 이런 가부장적 가치관의 전통 속에서 줄리안은 어머니이신 하느님과 어머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거론했다.
'신은 죽었다'고 체념하며 스스로 신이 되기를 자처하는 현대인들, '감싸줄 사람'이 없이 혼자 자립하고자 발버둥치는 오만하고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줄리안은 하느님의 모성을 명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모성을 일깨워 하느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임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 줄리안은 우리를 하느님의 모성으로 초대하고 있다.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삶의 의미를 찾는데 목말라한다. 또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갈구하고 있다. 그런데 줄리안은 하느님 사랑의 『계시』를 통해 현대 인류에게 삶의 의미는 사랑에 있다고 가르친다. 줄리안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되돌아감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온전성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온전성을 회복하는 길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잘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믿음과 희망, 기도와 관상, 회심과 연민을 생활화하는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있다.
☑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잘 되게 하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뢰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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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치의 줄리언 여사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하며,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다 선하리라는 사실도 굳게 믿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당신도 모든 일이 선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노리치의 줄리언, 「하느님 사랑의 계시」)
- 가톨릭 교회 교리서 [313]